Staying Sober
2018. 04.
누구를 부르는 것에도, 더 나아가서 입밖으로 몇 마디 내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한 때가 있는데 그게 나에게는 3집을 낸 직후였다. 발매 바로 다음 날 내 전담 프로듀서인 피어스 루크 베넷의 불륜 폭로가 터졌고 곧이어 내가 피어스 형에게 내연녀를 소개해 주었다는 추문이 일었다. 피어스 베넷은 가수로서는 그때로부터 6년 반쯤 전에 앨범 하나 낸 게 전부이지만 그 전후로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파문이 작지 않았고, 더군다나 내가 2집과 3집 사이에 한창 궤도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루머의 화마에 정말 좋은 장작이 되었으며 가족애, 순정, 사회적 통념과 사람됨 그런 걸 좋아하는 컨트리 리스너들에게—물론 그 외 범주의 사람들에게는 괜찮았냐 하면 당연히 아니고—아주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럼에도 당장 눈앞에 있는 공연 몇 개는 참석할 수밖에 없었어서 애써 여유로운 무드를 장착한 채 신보에 수록된 몇 곡과 1집과 2집에 수록된 몇 곡을 섞어 열심히도 불렀고, 조금 일정 여유가 있던 공연들은 여론을 의식한 레이블이 먼저 손을 써서 취소되었다. 그러다 하루는 같은 레이블에서 먼저 컨트리를 부르고 있던 윌리 벤튼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진짜 아니냐고 닦달하듯 묻거나 성급하게 피어스 형을 욕하는 대신 그래도 너는 네 할 거를 해야 한다고 묵직하게 한 마디를 건넸고, 그 전쟁터에서 돋은 한 떨기 위로를 네잎클로버처럼 주워 들려는 찰나에 아니나 다를까 “근데 진짜 아니지?”라고 물어서 아주 조언의 무게를 박살 냈다. 아니 형님 시발 저도 그때 여자친구가 없었는데 그 여자가 제 마음에 들었으면 제가 꼬셨겠죠. 뭐 한다고 유부남한테 소개를 시켜 줘 가지고 사회적 자살을 하겠어요. 제가 미쳤다고 무슨 인간 틴더도 아니고. 만약에 진짜 제가 소개시켜 준 거였으면 피어스 형이 저렇게 자숙 들어가기 전에 저를 패 죽이려고 들었겠죠. 윌리 형님은 그래그래 알겠는데 딴 데 가서는 깔끔하게 딱 아니라고만 해,라고 갈무리를 했다. 괜히 더 살 붙이다가 이도저도 아닌 의사 표명이 돼 버릴 수도 있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소문을 만드는 게 21세기 인터넷의 만연한 트렌드인 것도 알고 여러 가십 사이트나 레딧발 소문에 쓸려 나가는 연예인들도 건너건너로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는데 그 외풍이 내 살갗에 그대로 들이치는 건 그 통각 자체가 달랐다. 인터넷에는 피어스 형이 내연녀와 함께 있는 사진이 익명 처리 없이 공공연하게—적어도 개인 SNS에서 공유되는 게 아닌 가십 사이트 같은 곳에 올라온 사진에서는 여자에게는 눈높이에 일직선으로 블러가 되어 있었지만—올라와 있는 한편 내 사진도 있었다. 작년 가을 볼티모어의 한 대형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끝내고 무대 아래 테이블에 잠깐 자리 잡았을 때의 장면을 담고 있는 그 사진 안에서 나는 백인 남녀들 사이에서 함께 즐거운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내 옆옆옆에는 최근 피어스 형과 함께 있는 것이 찍힌 그 여자도 있었다. 인터넷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는 말도 물론 있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진짜로 연기가 나는 당사자가 되고 보니까 정말이지 온 세상이 ‘갓댐’이었다. 아니 시발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그때 그냥 공연 끝나고 그냥 가기 아쉬워서 한두 잔 마시다가 분위기 즐거우니까 주위 테이블 한두 개 합쳐서 얘기 잠깐 하고 같이 ‘치얼스’ 하고 깔끔하게 해산한 그 자리 아니었냐고. 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끼리 눈이 맞아서 다른 마음을 품었든 지들끼리 섹스를 했든 뭘 했든 나는 건배 한두 번 하고 뭐 사적인 연락처 공유 그런 거 아예 없이 매니저 차 타고 집 갔다고. 낚싯줄처럼 얇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손을 누가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이거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는 말까지 보고 나니까 활동 자체를 할 의욕까지 아주 도축업자가 정성스럽게 발골한 듯 깔끔하게 도려내어져서 마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허공이 되었다. 아무런 의욕도 분노도 억울함도 없는. 그냥 마더퍼커만 입에서 주문처럼 새어 나오는. 이 병신 새끼들 인터넷에서 루머 댓글 쓰는 건 쉽지.
원래 같았으면 미주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공연을 하고 쇼 출연도 하고 그 사이사이 뒤늦게 디럭스로 발매할 곡을 부랴부랴 작업하거나 어디어디 형식적인 자리들에 정장과 카우보이모자를 갖추고 참석하며 내가 어디서 잠을 자고 있는 건지도 헷갈려야 했을 시기에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짜증이 나서 생각 하나를 쳐내야 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그 고초의 원천이었던 피어스 형은 못내 미안한지 전화를 할 때마다 그냥 집 가서 잠깐 쉬라고, 내 일인데 너까지 휘말리게 놔둘 수는 없지 않으냐고 종용에 가까운 권유를 해 왔다. 그 뒤로도 비슷한 맥락의 전화가 여러 날에 걸쳐 몇 통 더 왔고 우리는 마치 일방적인 사과에 지친 오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밋밋한 정적을 나누다가 내가 먼저 끊기를 반복했다.
와이오밍은 이 커다란 미국에서 가장 한적하고 사람 안 사는 주였고 그래서 이런 큰 도시로 왔을 때 동향 사람 찾는 것이 아주 힘들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와 피어스 형은 가수와 프로듀서 사이 이상으로 친밀하게 지냈다. 같이 낚시를 갔고 여행도 갔고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갔고 로데오 얘기를 했고 서로 밥을 샀다. 피어스 형은 나를 자신이 챙기는 가수보다는 정말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쯤으로 여기는 듯했고 나도 그것이 편했다. 정말로 프로듀싱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피어스 형은 나에게 있어서 비슷한 고향 출신의 먼저 성공한 예술가였고 우상이었으니까 기쁨이기까지 했다. 안타까운 점은 그게 몇 년쯤 되다 보니 우리가 개인 대 개인이라는, 명확한 관계적 개념에 대한 감각이 다소 무뎌진 듯했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래서 자기 일 때문에 네가 가수 활동 길이 막히면 어떡하냐고 폭력적인 미안함을 휘두르는 피어스 형에게 신경질적으로 쏘았다.
“저를 가수로 만드는 건 저지 형이 아니에요. 정신 좀 차리세요.”
피어스 형은 잠깐 말이 없더니 알았다고, 이해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고한 피해자의 입장이 그렇게 나쁜 것은 또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데에서 오는 어떤 허탈함과 찝찝한 이물감이었다. 그 불쾌함이 정점을 찍은 건 레이블에서도 비슷하게 쉬고 오라는, 억제의 성격이 다분한 손길을 뻗었을 때였다. 이참에 진짜 확 쉬어 버릴까 생각을 않은 것은 아닌데 정말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어 버리면 회피와 잠적의 형태로 어떤 무력한 순응과 탈진이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나는 조용하게 반기를 들고 그냥 얌전히 4집 준비나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몇 주가 지난 뒤 시인이자 작사가인 딘 휘슬러 선생님은 나를 노퍽에 있는 한 한식집으로 불러냈다. 작년 윌리 형과 같이 불렀던 〈Unnamed Horses〉로 처음 같이 작업해 본 작사가였는데, 그 몇 년 전부터 피어스 형이 내가 작사까지 하는 계기가 된 아주 존경하는 송라이터가 있어, 너도 만나 보면 좋을 텐데—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몇 번 피어스 형을 끼고 만나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둘만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만나자는 연락을 먼저 받게 될 줄은 더 몰랐고. 피어스 형은 딘 선생님을 대할 때 항상 예 예, 이건 어떠세요, 그럼 그때 뵙죠 선생님,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 하는 좀 굴종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존경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나는 그 호칭을 학습해서 다소 가벼운 투로 네 선생님, 하곤 했다. 딘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장난스럽게 난처한 사양을 내비쳤지만 아주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고 내가 갖추는 공손함에 응답하듯이 자신의 자세라든가 표정이라든가 의논에서의 태도라든가 하는 것들을 더 단정하고 올바르게 고치고 가꿨다. 칭찬과 존중을 거절하기보다 즉석에서 그것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듭 변하는 것. 그를 처음 봤던 이십 대 중반의 나에게는 배울 점이었다.
일 얘기 할 때는 보통 카페라든가 좀 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을 고르지 않나 싶어 의아하기는 했지만 자네는 그러면 저녁 여섯 시 반에 저녁 안 먹고 카페에서 커피 먹냐는 말에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반팔 위에 셔츠 한 장을 덜렁 걸치고 나서서 노퍽까지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채로 내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옆 칸에 흰색 말리부가 후진해 들어왔다. 딘 선생님 차인가 생각하기 무섭게 시동이 꺼지더니 무슨 대학생 같은 야구 재킷을 입은 그가 차에서 내렸고 지체 없이 식당을 향해 걸었다. 저돌적이고 빠른 몸짓에 나는 짐짓 당황해서 허둥거리며 따라 내렸다.
“선생님!”
“깜짝이야!”
딘 선생님은 내가 부르는 소리에 놀란 듯했는데 정작 나도 갑작스럽게 낸 큰 소리에 스스로 놀라 헉, 하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입을 가리고 잠깐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딘 선생님은 차 문 잠그는 삑 소리에 한 번 더 놀란 듯했다. 아잇. 깜짝 놀랬네. 젊은 애라서 그런가 목청이 좋네. 그 모습은 녹음실 같은 일터에서는 본 적이 없는 무방비의 결정체였다. 악수를 나누고 나서 딘 선생님은 건물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가리키며 저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는 빨간 네모 안에 마름모꼴로 각진 문자가 쓰여 있었다. 꺾쇠 세 개랑 작대기 몇 개랑 동그라미 하나랑.
“모르겠는데요.”
“어디 말인지는 알겠어?”
“한국어겠죠, 한국 식당 데려오셨잖아요.”
딘 선생님은 맞네, 하며 멋쩍게 웃었고 그 한국어는 고기구이라고 읽고 코리안 스타일 바비큐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기계적인 끄덕임과 으흠, 하는 추임새를 냈고 아무튼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긴 하던데 우리가 오늘 먹을 것이 고기가 맞다는 확신을 얻는 것으로 짧은 강의의 효용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아내 분이 한국 분이시랬죠?”
“응, 맞아.”
앞서 걷던 딘 선생님이 문을 열었고, 나는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들릴 듯 말 듯하게 맞장구나 치며 따라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구석 쪽으로 향하려는데 이리 와,라는 캐나다 억양의 다정한 안내가 들려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홀 중앙에서 멀지 않은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편한 복장의 서버가 와서 한국어로 인사를 한 뒤 ‘준’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메뉴를 건네자 딘 선생님은 메뉴를 받아들며 안녕하십니까라고, 영어 쓰는 백인 남자가 애써 따라 해보려고 내는 발음이 아니라 정말 네이티브처럼 입에 붙은 한국어로 서버에게 인사를 했다. 서버는 화색인지 당황인지 모를 미소와 함께 잠깐 머뭇거리더니 인사를 따뜻하게 받으며 자기는 사실 일본계라서 인사 말고는 한국어를 못한다고 했다. 아 뭐야, 그렇구나. 만면에 실망감을 띤 딘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했고 준은 괜찮다고, 메뉴 고르면 불러 달라고 하며 선선한 걸음으로 떠났다. 우리는 마주 보고 바보같이 웃었는데, 그러다가 딘 선생님이 “어차피 미국 애들 동양인 얼굴 다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 거 이 사람들도 알고 그냥 국적 상관 없이 다 데려왔나 봐”라고 수군거렸다. 그 직후에 둘 다 만화처럼 웃음을 터뜨렸는데 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 이런 말 해도 되는 건가 싶어 놀라서 반사적으로 웃은 것에 가까웠다. 근데 그러면 왜 콜 네임은 준이야. 일본에서도 준이라는 이름이 많던가? 저야 모르죠.
영어와 한국어가 병기된 메뉴판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 멀미가 날 것 같아서 나는 선생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등을 기댔다. 뒤쪽 테이블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의자를 타고 넘어왔고 그것과 비슷한 강도와 점도로 마늘 냄새가 강렬하게 코를 들쑤셨다. 콩 삭은 냄새 비슷한 것 사이로 뭔가 매콤한 것도 있었는데 왠지 뒤쪽 테이블로 고개를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나는 꼿꼿이 앉아 그냥 메뉴가 나올 때까지 호기심을 참기로 했다.
“애피타이저 김밥 먹을래, 콘치즈 먹을래?”
“뭐가 뭔지 저는 모르니까 그냥 아무거나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거 시켜 주세요.”
“아주 수동적인 게 루이지랑 똑같네.”
그 말에 나는 딘 선생님이 같은 회사의 가수 루이지 랜디 선생님과 절친이라던 것을 다시 상기했다. 수동적이어서 편하다는 건지 불편하다는 건지 그 한마디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거기에는 내재된 친구 취급이 느껴져서 묘하게 안심되는 구석이 있었다. 뭐랑 뭐 주세요 하는 주문은 한 귀로 흘리면서 나에게 음식의 형태로 다가올 운명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휴대폰을 잠깐 뒤집어 보던 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나 그래도 자네 3집 다 들어 봤어.”
그러자 난데없이 그것이 의례적인 인사인지 진짜인지 알아보고 싶은 갈구의 마음이 들었다. 뭘 시험해 보고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주위에 빈말 안 하는 사람 한 명쯤 더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날 둘러싼 풍경들에 금이 간 날들을 보내고 있자니 그런 신뢰를 주고받는 형태의 인간관계적 애정이 좀 절실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아 그러셨어요, 하며 어떠셨냐고, 궁금함이 드러나지는 않을 만큼 건조하게 물었다. 딘 선생님은 뭘 굳이 묻냐는 투로 어우 당연히 좋았지, 나 자네가 가사 쓰는 스타일도 좋아하거든, 하면서 물꼬를 텄다. 그리고 3집 얘기에 곧바로 돌입하는 대신 1집과 2집 얘기를 하며 피어스 형 이야기를 꺼냈다. 1집 수록곡 〈Moonstruck〉을 작업할 때 그 노래를 피어스가 보내 줘서 미리 좀 들어 봤었는데, 안 그래도 그 당시에 어떤 향수고 사랑이고 아쉬움이고 고양감이고 하는 음악적 표출을 갈망하긴 하는데 그에 대해 마땅한 스피커가 없었던 피어스가 이제야 제대로 된 해방구를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그런 동시에 이 어린 가수가 피어스라는 프로듀서의 음악적 대변인 위치에 머물러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일었는데 〈Douglas〉 싱글 나오고 나서 그런 걱정은 씻은 듯이 없어졌다고. 그래서 자기는 지금 내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했다. 감사하긴 한데 나는 거기에 대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피어스 형이랑 작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만류의 말을 캐나다 사람 특유의 다정다감한 칭찬으로 돌려 말하는 건가. 내가 어물거리며 헤매자 딘 선생님은 “너 잘한다고”라는 간단한 말로 시원하게 요약했는데 그 강압에 가까운 일목요연함에 나는 곤란한 웃음과 함께 감사해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버 준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콘치즈 나왔습니다, 하고 접시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타원형의 나무판에 둘러싸인 돌 접시 안쪽으로, 굉장한 오븐 찜질을 하고 나와 치즈 이불을 덮은 채로 버터 땀을 흘리고 있는 옥수수 알갱이들이 들어가 있었고 바질인지 파슬리인지 자잘한 허브 가루가 고르게 뿌려져 있었다. 마요네즈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무튼 고소한 냄새가 순식간에 테이블을 감싸자 그래 뭐 찝찝한 이물감이고 허탈함이고 다 상관없고 이제부터는 나온 음식이나 맛있게 먹고 힘내서 작업 생각이나 하자 하는 뻔뻔한 용기가 돋아났다. 시발 그래. 그냥 먹기나 하자 인생아. 딘 선생님은 자기는 먹어본 적 있으니까 나더러 먼저 한 번 먹어 보기를 권했다. “나만 온 거면 김밥 시키려고 했는데 너는 한식 초짜일 게 분명하니까 좀 더 미국 놈 입맛에 맞을 것 같아서 시킨 거”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가장자리를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거의 접시 테두리를 긁다시피 했는데, 딘 선생님은 토끼눈이 되어서는 “야 이노무시키 먹어 본 적 없는 것 같더니 고수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첫입부터 제일 크리스피한 부분을 골라서 뜨다니 아주 상도덕이 없다고. 아, 그런 거군. 맛은 거의 보이는 그대로였다. 달큰한 옥수수와 짜고 고소한 치즈의 얼기설기 만들어진 그물 사이로 마요네즈와 설탕의 맛이 밀고 들어오는데 이게 정말 정석적으로 맛이 있다기보다는 야 이래도 맛없어? 하는 감상이어서 기가 찼다. 진짜 웃기네 이거. 어쨌든 맛있는 거 때려 박았으니 맛있다 이건가. 맞긴 맞지. 확실한 건 맥앤치즈보다는 맛있었다. 콘치즈를 절반쯤 먹었을 때 이번에는 진짜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자 직원이 와서 테이블 가운데를 열고 이글거리는 숯불을 집어넣었다. 명찰에 ‘지민’이라는 이름을 단 직원은 조금 이따 아까 그 서버가 고기 가져와서 세팅해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고, 딘 선생님은 “야 여기 진짜다” 하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머지않아 다시 준이 서빙용 카트를 끌고 등장해서는 혹시 알러지가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둘 다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까 그 콤콤하고 매운 냄새의 소스와 생마늘 몇 알, 동그랗고 얇게 썰린 흰 무 같은 것과 색이 어두운 상추, 누런 기름에 잠긴 소금, 머스타드 같은 소스, 김치와 마카로니, 약간 발갛게 조리된 주키니, 매시드 포테이토, 마지막으로 큰 접시에 담긴 여러 종류의 생고기를 테이블 위로 내렸고 예쁘게 배치했다. 이 나이 먹고 코리안 레스토랑을 아예 안 가 본 것은 아니어서 아주 낯이 설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전에 가 본 캐주얼한 한식집—아마 냉면집이었던 것 같다—에서는 못 느꼈던 본토 바이브랄까, 그런 것에 압도가 되어서 나는 눈만 껌뻑거렸다. 고기는 여러 종류였는데 몇인분인지 얘기하면 총합 무게만 맞춰서 다양한 부위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조금 전 선생님이 주문할 때 손가락으로 삼인가 사인가 얘기하던 게 보였는데 그게 삼사 인분 얘기였구나. 딘 선생님은 너도 뭐 먹기 전에 사진 찍고 그러니, 물었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아뇨, 됐어요, 했다. 평소 같았으면 찍었겠는데 남기고만 싶은 설렘이나 주위에 퍼뜨리고 싶은 기쁨보다는 업계 사람과 식사를 한다는 직무적인 경직이 있었고 욕먹고 있는 사람의 입장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어떤 짓누름이 있었다. 죄의식도 아니고 피해망상도 아닌데 어느 방향에서나 중력처럼 작용하는 그 힘 때문에 마음이 연신 뭔가 움츠러들었다. 준은 손바닥을 펴서 그릴 위의 열기를 재 보더니 어떤 것부터 드시겠냐고 물으며 나와 딘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무슨 아빠라도 보듯이 얼른 적절한 대답을 꺼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으로 딘 선생님을 바라봤고 그는 신중하게 고기 접시를 분석하다가 “항정살이 좋겠네요” 했다. 준은 몸을 숙여 테이블 아래위를 살피더니 화구 근처에 있던 레버를 몇 번 만지고는 연한 분홍색 살점을 그릴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구워 드릴까요, 라고 물었는데 딘 선생님은 이십오 년 가까운 한국인 가족 일원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건지 자신감이 넘쳐서는 저희가 구울게요, 했다.
“잘 구우세요?”
“집에 마당 있고 그릴 있는 남자가 고기 하나 못 구우면 안 되는 거야. 망신이야 망신.”
“저 못 굽는다고 안 했는데요.”
“안 하기는. 조금 전에 구워 드리냐고 묻는데 눈동자가 뭐 사방팔방으로 튀더만. 자네가 구워야 되는 줄 알고 긴장했지?”
그러면서 딘 선생님은 하얗게 익어가고 있는 항정살을 스테인리스 집게로 천천히 뒤적거렸다. 돼지고기는 많이 괴롭혀야 맛있어.
명예 한국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세하고 친절한 딘 선생님의 안내를 등에 업은 채 항정살과 목살과 삼겹살을 천천히 소진하고 있던 그때, 나는 배가 불러오면서 서서히 마음이 좀 풀어지는, 어떤 경계의 단계가 낮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작업 때 빼고는 얼굴 본 적도 없던 그가 갑자기 나를 여기로 불러내서 밥을 먹이고 있는 게 새삼 조금 이상한 일임을 깨달았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불쌍한 스물아홉 청년이 어떤 화남과 억울함의 단계를 넘어서서 정신병 같은 거라도 걸리지 않게 돌봐 주려는 건가. 근데 이 정도로 신경을 써 주나 원래. 그런 의문점들 사이에는 비약과 간극이라는 구멍들이 낡은 옷감처럼 숭숭 뚫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들을 메우기 위해서 기대감 같은 것들로 코를 떴다. 뭐라도 얘기하려고 불렀겠지. 어쩌면 도와주겠다는 것일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기로 했어?”
딘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불판에 올렸던 갈매기살을 뒤집다가 문득 그렇게 물어 왔다. 뭐지, 내 생각을 들었나, 싶어서 나는 모르는 척 뭐를요, 라고 되물었다. 그건 명백한 유예였다. 내심 정해 둔 대답이 이미 있는데도 그걸 꺼내는 게 맞는지 불명확하게 만드는 어떤 마음의 수축이 있었고 뭐 어떠냐 하는 팽창도 그에 못지않게 있었는데 그 맞물림으로 발생하는 잠깐의 평형. 그러자 마음이 아주 최소의 크기로 우그러들고 고정되어서 어떠한 순환도 하지 않는 공 같은 모양의 것으로 무겁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어느 우주의 어디로 유영하든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기운 없게 굴면 내가 못 도와줘.”
“도와주시게요?”
그래서 다 구워진 살점을 내 쪽과 자기 쪽으로 하나하나 집중해 분류하는 딘 선생님의 모습과 그 말은 한 장면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정확히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것인지도 가늠이 잘 안 갔고—당연히 선생님은 작사가니까 가사를 쓰는 데에 도움을 주시겠지만 그건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약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당장 몇 주 전의 나는 나를 가수로 만드는 건 나지 당신이 아니라는 말을 피어스 형에게 분명히 했고 그러니까 그 모난 주체감, 그 정도는 굳이 다듬지 않고 뾰족한 원형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을 내비쳤기 때문에 그 손길을 잡아야 되는지 쳐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친동생 라일리가 트위터에서 트윗 하나를 캡처해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근데 피어스 베넷이 이렇게 하고도 프로듀서 계속한다고 하면 확실히 케이시 번즈랑 체급 역전돼서 한 5집 낼 때쯤 되면 피어스 베넷이 케이시 번즈 보고 제발 나랑 같이 계속 작업해달라고 비는 관계 될 듯.
나는 그냥 웃으면서 이런 걸 왜 보냈냐고 물었고 몇 분이 지나 자기는 그냥 응원하는 의미로 보낸 거라는 답장을 받을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건 양가감정이었다. 나에게 이 정도의 악영향을 미치고 피어스 형의 어떤 인간성까지 의심하게 된 이 사건을 ‘이런 일’ 정도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닌데 이런 일로 곧바로 홱 돌아서서 어떤 공세를 펼치고 싶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엄호해 주고 싶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으로 관계를 끊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완전히 동업자라는, 아주 차갑게 정의된 단어 정도의 관계성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이 일을 이어 나갈 수 있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는데 차라리 이런 고민 하지 말고 아예 싹 정리하고 다른 프로듀서랑 한솥밥을 먹을까 하면 지금 나는 그 형과 하는 작업이 너무 즐겁고 좋고 몸에 딱 맞는 옷 같아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조금 전에 본 트윗을 생각했다. 내가 피어스 형을 딱 저런 밀도의, 같이 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해 먹고 떼어낼 수 있는 전략적 자원 정도로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초에 시작이 그랬다면. 존경이고 우상이고 동질감이고 향수병이고 다 없이. 그냥 시작부터 아예 비즈니스였다면 아주 좋았을 것 같은데.
몇 마디를 덧붙이던 딘 선생님은 자신의 제안은 그냥 내 2집을 들었을 때부터 혼자 생각해 왔던 것이라고 했다. 4집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오롯이 자네의 의견이라고, 피어스의 사정은 피어스의 사정으로 내버려 두고 내외부의 요소들을 적절히 고려하면서 자네 할 것을 밀고 나가려고 하면 꼿꼿이 서 있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마지막 남은 갈매기살을 내 쪽으로 밀었다.
“안 드세요?”
“디저트로 티라미수가 있던데 그거 먹을 공간은 있어야 되니까 자네한테 짬 때리는 거야.”
그리곤 한 손을 들며 “헤이 준”하고 서버를 불렀고, 서버가 오는 동선을 눈으로 따라 그리더니 내 3집 제목을 그대로 읊으며 “맨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안 그래” 했다. 내가 무슨 말이에요, 라고 되묻자 그는 “차 끌고 왔잖아” 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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