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형에밀

Please reject me

시형에밀 고록

  • 볼드체는 영어로 말하는 겁니다...

브금입니다. 들으면서 읽어주세요...

“에밀리 씨는 나중에 어떤 역을 해보고 싶으세요?”

네? 살짝 입을 벌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행동을 리포터는 번역의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문장에 영어 단어를 섞어 물었다. 아아- 에밀리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니 옆의 동료가 눈빛으로 상태를 물었다.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림에도 자신을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녀는 일부러 힘차게 리포터에게 대답했다.

“기, 기회가 된다면 조금 파격적인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오, 파격적이라고 하면 어떤?”

“음, 매력적인 악역... 샬로메라던가.. 레이디 멕베스나... 그런 역할이요.”

“확실히 두 역할은 주인공보다 존재감이 강력한 악역이죠. 생각보다 큰 도전이 되실 것 같은데요?”

“아, 아직은 당연히 제 능력이 부족하니까... 무리겠지만, 언젠가 꼭...해보고 싶은 역이에요.”

에밀리는 어딘가 자신의 심장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린다고 느꼈다. 불안한 걸까? 확실히 지금은 자신에게 있어 그런 시기이기는 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와서 공연을 했지만 그녀가 속한 극단은 아직 작은 곳이었고, 배우로서의 자신의 경력도 이번 연극이 겨우 세 번째였다. 이런 자신이 샬로메니 레이디 맥베스니 거물급의 배우도 힘들어하는 역할을 하겠다며 말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걸지도 모르는데...

‘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거지?’

마지막 공연 전날, 한국의 공연예술 전문 잡지의 인터뷰를 끝낸 에밀리는 동료들과 대기실을 나오면서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주변 동료들은 벌써부터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이번 작품으로 미국의 브로드웨이는 물론 이렇게 아시아 순회공연까지 돌게 되었으니, 다음엔 아예 뉴욕을 점령하자는 둥, 라스베이거스에 이어 글로벌하게 해외 순회까지 돌자는 둥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말이라는 시간적 분위기도 합세해 동료들은 어느새 들뜬 목소리로 회식을 가자고 에밀리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평소 연습에는 열심히 임해도 이러한 친목회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동료들은 오늘따라 더 끈질겼다.

아니요... 저는, 그... 평소처럼 에둘러 거절하려는 듯 난감한 미소가 에밀리의 얼굴에 떠오르자, 어디선가 ‘이거 애인이 집에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디 살겠어?’라는 장난 섞인 야유가 들려왔다.

“아...그, 저...”

어딘가 싸해지는 분위기의 중점이 자신의 곤란한 표정이라는 걸 깨닫자 에밀리는 상황을 무마해 보려 슬쩍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보았다. ‘인터뷰는 잘 끝났나요?’ 새로 온 메시지를 보는 그녀의 파란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나, 기다리는 걸까. 오늘의 인터뷰가 끝나면 서로에게 무엇이 다가올지 알면서도 화면 속 활자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상냥함은 여전히 담담했다.

당신의 그런 점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답장을 치는 에밀리의 손가락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오늘 회식이 있어 늦을 거예요. 기다리지 말아요.’ 띠링. 답장은 정확히 2분 후에 왔다.

‘알겠어요.’

또 거짓말이네요. 안자고 기다릴 거면서. 에밀리는 목 끝까지 어떤 감정이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러움? 원망? 아니면... 그보다 더 진한...

‘그래. 당신은 평생 거기서 기다리기만 해요...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쫒아오지도, 잡지도 않은 채...’

“저! 그.. 가, 갈 수 있어요!”

에밀리는 헤어진 애인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그렇게 미뤄두고 있었다.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던 밤이면, 에밀리는 그날의 모든 것을 몇 번이고 계속 곱씹어 보곤 했다. 자신은 곤란한 여행객이였고 시형은 친절한 현지인이었다. 자신은 미국에 돌아가야만 했고, 시형은 한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모든 첫 연애가 그렇듯, 에밀리는 큰 바다를 가로지르는 원거리 연애에 불안해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했다. 시형은 탁한 스노우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자체로도 반짝이고 아름다웠지만, 안에는 자신이 상상도 못할 깊은 날카로운 잿빛 눈발이 날리고 있는, 안정적인 무표정 안에 아슬아슬한 면을 숨기고 있는 사람. 그래서 에밀리는 자신이 이 관계에 있어 불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형이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그 불안정한 사람이 또 다시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쓸쓸한 평화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아마 그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에밀리는 답을 내렸다.

자신이 감히 시형의 눈보라를 그칠 수 있을 거라 자만했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시형 씨, 왜 당신은 제게 그 속을 조금이라도 비쳐주지 않으셨나요?

결국 또 같은 질문에 갇혀서, 에밀리는 떠오르는 그때의 향기와 풍경을 지우기 위해 다시 대본을 펼쳐 들어야만 했다.

“뭐야? 그럼 너는 헤어진 애인 집에서 얹혀 살고 있는 거야?”

“지, 지금은 그냥 친구에요...

“오우, 그럼 내가 아까 큰 말실수를 한 거네? 미안해.”

“괜찮아요. 시, 신경 안 써요...”

조용히 맥주잔만 만지작거리는 에밀리의 모습에 동료들은 각자 품고 있었던 궁금증들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왜 매번 공연이 끝날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녹발의 여성을 에밀리가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지, 어째서 회식이 있을 때마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며 웃는 얼굴로 거절하는지... 하지만 동시에 해결된 궁금증도 있었다. 공연장에 찾아온 그 사람과 다정히 얘기할 때 ‘혹시 둘이 연인인거냐?’라고 묻자 서로 얼굴을 붉히며 곤란하게 부정하던 그 모습... 문제는 동료들이 그 모습을 연인이 되기 전 ‘무언가’가 있는 둘로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엄... 그래도 다행이네. 다음 공연 후면 이제 우리도 미국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너도 이제 그 친구와 어색할 일은 없잖아?”

어색한, 일이라.

에밀리는 시형과 재회했을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우리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울면서 그렇게 말한 거리에서 에밀리는 다시 헤매고 있었다. 서울은 그녀에게 있어 반짝거리는 추억으로 가득 찬 장소였지만 도무지 자신 같은 외국인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도시였다.

아니지. 그때엔 시형이 날 발견해 줬구나.

“에밀리?”

그녀는 그 순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 이 거리의 향수와 그리움이 섞여서 만들어낸 환청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에밀리는 아직 이 거리의 추억을 소중히 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같이 손을 잡았던 촉감, 서로의 팔목에서 잘그랑 거렸던 팔찌, 낯선 이름의 길거리 음식을 직접 먹여주었던 낯 간지러운 손길... 웃음소리와, 그녀의 발그레진 뺨과, 한없이 다정하던 눈빛 같은 것들을, 에밀리는 낯선 사람들의 발걸음들로 텅 비워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시형과 자신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왜,

“왜.. 이런 곳에서 헤매고 있어요?”

왜 시형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온 걸까.

“어색한, 사이였던 걸까요?”

에밀리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자신과 시형의 동거는 기묘했다. 서로 몸이 닿을 때의 떨림은 여전했으나 감정은 그때와 같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서 서로를 기다렸던 시간과, 같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밥을 먹었던 그 순간들을 에밀리는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에밀리는 알 수 있었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 애매함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것은 같을 수가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 을지도... 모르겠네요...”

에밀리와 시형은 다시 연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둘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균열이 있었다. 가끔 그것은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땐 그것은 앨리스의 토끼 굴보다 더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밀리는 시형이 꾸는 악몽의 원인을 들을 수 없었고, 시형은 자신의 악몽이 에밀리가 자신을 떠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지 그거뿐이었을까? 자신과 시형이 다시 연결될 수 없는 이유엔 뭔가 더 근본적인 게 있지 않았을까? 에밀리는 되돌릴 수 없는 영상을 자꾸만 되돌려 보았고, 그때마다 그녀를 루프에서 구해주었던 건 항상,

“어쨌든 말이지, 에밀리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내일이 마지막 공연인데 그런 걸 묻는 거야?”

“누가 보면 당신이 연출가인줄 알겠어요, 크리스.”

“뭐 어때? 우리끼리 이런 대화는 한 적 없잖아? 마침 작가님이 특별이 눈을 두는 배우님도 계시고.”

“그, 그건... 그냥 정말 벼, 별거 아닌 거라서...”

“그 작가님 유별한 괴짜인거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어 에밀리. 별거 아닐 리가 없잖아?”

“그냥... 지, 지금 하고 있는 주제랑 비슷했어요. 지, 지금의 역할을 어, 어떻게 생각 하냐고...”

“오~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는데?”

에밀리는 잠시 눈을 감고는 천천히 뜬 후 말을 이었다.

“성경의 베드로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인간이죠. 영웅인 에스테반을 사랑했지만 그가 세상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느끼자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그를 부인함으로써 그를 배신했어요.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를 배신하고 죄책감에 휘둘렀지만, 마리나는 오히려 희열에 가득 차있었죠. 에스테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또 세상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녀를 시형과의 기억에서 꺼내 주었던 건 언제나,

“하지만... 어쩌면 그 희열은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과장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고... 그, 그렇게 대답했었어요.”

그녀의 꿈, 한국에 올 수 있었던 원동력.

라고, 그녀가 자각한 찰나. 아, 그 1초의 순간에, 에밀리는 깨달았다.

시형과 자신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에밀리 엔더슨이 처음으로 본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평생 잊히지 않을 첫 번째의 기억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에밀리는 고민 없이 그때의 하루를 말하리라. 유명한 극단이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을의 조그만 소극장에서, 에밀리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를 위해 부모님이 데려다 주신 작은 여흥이었다. 그러나 에밀리가 그때 경험했던 ‘자신이 아닌 인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일’은 평소 소심하고 목소리도 작던 자신을 싫어하던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한번 연기에 대한 꿈을 접었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에이미 엔더슨에게 자신의 첫 주연인 ‘줄리엣’과 함께 첫사랑을 빼앗기면서, 에밀리의 연기에 대한 꿈은 한번 무너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다시 연기를 하게 된 원인도 에이미가 제공했다. 그녀가 사랑의 도피를 이유로 정해진 역할을 내던지자 쌍둥이인 에밀리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아주 작은 배역을 따서 연기 지망생의 신분이 될 수 있었을 때, 에밀리는 한국으로 기념 여행을 와서 시형을 만났다.

맹시형은 에밀리 엔더슨이 만난 생의 두 번째의 두근거림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가득 차올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시형이 처음이었다. 에밀리는 자신의 첫 사랑이 혹시 그냥 동경에서 나온 희미한 연정은 아니었을까 하고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시형과 함께한 시간을 ‘사랑’으로 재정의 하고 난 뒤엔, 옛날의 자신의 감정은 너무나도 약하고 풋내 나는 어릴 적의 추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밀리는 시형과의 기억은 ‘추억’으로 만들 수 없었다. 시형과 연인이었을 적의 기억은 에밀리에게 있어 반짝거리는 수정과도 같았다. 가장 순수하게 자신의 행복을 비춰내지만, 꺼내서 손에 쥘 때마다 날카롭게 벼린 마지막의 순간이 자신의 살갗을 찌르고 종래는 베어냈다.

그것이 아직도 에밀리는 아파서, 괴로워서

그때의 기억을 상자에 넣고 잠굴 수밖에 없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불은 꺼져 있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서울의 야경만이 소파에 기대 잠들고 있는 시형을 소란스레 비추었다. 그러게 기다리지 말라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에밀리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선 시형에게 덮어 주었다. 옆에는 읽다 만 책이 있었지만 저번에 봤던 것과 그다지 페이지 수가 나아가질 않아 보였다. 불도 안 켜고 기다린 걸까... 그런 거라면 오늘 일찍 끝났다는 건데...

에밀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방 안에서 공연 티켓을 꺼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8시 반. 이 날이 끝나면 에밀리는 더 이상 시형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된다.

“아, 아마... 그 이유는...”

안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숨을 겨우 삼켜 내곤 에밀리는 시형의 앞에 앉았다. 시형은 잘 때조차도 숨소리를 거의 내지 않아 이렇게만 보면 그녀는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깎여진 동상 같았다. 문득 그녀의 촉감을 느끼고 싶어 에밀리는 손을 뻗었다가, 공중에서 멈춰선 다시 거두었다. 둘이서 함께 지낸, 작은 텔레비전과 장식장, 그리고 소파가 있는 거실은 마치 모형같이 고요했다. 그랬기에, 에밀리는 자신의 감정이 새어나오지 않게 눈을 감고는 몇 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시형... 저는 항상 제가 당신을 기다렸다고 생각했어요.”

이럴 때 조차도 자신은 이리도 이기적인가. 혹시나 시형이 깨여 있을까봐 영어로 말하는 점이 그랬다.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를 혹시나 들을까봐 암호를 걸어두곤 전한다. 치사하고, 조악한 방법이네요. 에밀리는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그건 제 오만이었어요.”

당신이 내게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 이유 말이에요, 난 그게 내 노력 부족이라 생각했지 뭐예요? 에밀리는 자신의 말끝이 점차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깊이 숨겨 놓았던 죄를 꺼내드는 것처럼.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전 그게 늘 불만이었고, 걱정이었고, 슬픔이었어요. 전 마치 당신의 신처럼, 당신의 모든 걸을 알고자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제가 뭐라고... 전, 그냥 한낱 인간인걸요. 그것도 당신과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니죠. 고작 몇 년, 그 사이에 당신을 가장 많이 사랑한 자가 나라고 자신하며, 당신이 모든 걸 털어놓지 않자 배신감을 느꼈어요. 저는... 제 자신은 그저,

“하나의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에밀리는 눈가가 빨갛게 물들여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들이키자 젖은 호흡이 목 뒤로 넘어갔다.

“시형 씨... 저는요, 다.. 다 알고 있었어요.”

애써 숨기려고 노력했다.

“다, 알고 있었다구요...”

이토록 사랑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냐며 자신을 다그쳤었다.

“당신을 사랑했던 지난 시간 동안”

그 황홀하고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던 나날들 동안에도 지우지 못했다.

“저는, 당신이 첫 번째가 아니었어요.”

오, 나의 시형. 에밀리는 비극의 한 장면처럼 탄식했다. 지나간 장면들 속에서 세어 나오는 자기혐오를 참아내며, 그녀는 대사를 이었다.

“저는, 제 꿈이 우선이었어요.”

무려 당신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저는 연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요.

어째서 에밀리는 시형과 헤어졌을 때 미국으로 돌아갔을까. 그리고 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언제나 답은 정해진 운명처럼 그곳에 있었다. 단지, 에밀리 자신이 그걸 자각하기를 거부했을 뿐.

“시형 씨... 저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아,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저를 완전히 믿고 의지해 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미국에 돌아가서 제 꿈을 이루는 것을 선택했죠.”

잔인하게도, 이것 또한 진실이었다.

“시형 씨...저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에밀리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단어는 계절을 착각해 겨울에 핀 들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꽃에게 있어 시련이 아닌 불행의 예언이었듯, 에밀리는 이것이 시형과의 마지막 파멸임을 알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에게 있어 행복이 저밖에 없다는 것이 두려웠어요.”

당신은 나와 당신의 다른 행복을 저울질 했을 때 나를 택해 버리겠죠. 오! 시형... 저는,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당신과 함께하는 나날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나를 충만케 해주었지만....

“아, 시형... 나는 그럴 수 없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인 고백일까. 에밀리는 눈을 감았다. 눈가에서 겨우 버텨내고 있던 뜨거운 이슬이 그녀의 볼을 타고 천천히 굴러 떨어졌다.

“시형 씨, 나는요... 우리가 헤어진 그 날부터 몇 번이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당신을 따라 한국에 남았다면. 만약 당신이 나를 따라 미국으로 가줬다면.

그렇다면, 그렇게만 되었다면 우리가 계속 함께, 행복하게 있을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그건 결국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당신도. 그래서 날 잡지 않았던 거잖아요. 그래서 당신을 데려가지 못했던 거예요.

“나는... 나는 내가 당신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함으로서 당신이 받을 상처가 무서웠어요.”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길 원했던 거예요. 그래야 자신이 죄책감을 덜 수 있으니까. 내가 당신의 유일한 구원이길 원했던 거예요. 그러면서 시형이 자신 이외의 행복을 찾길 빌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에밀리의 젖은 숨소리만 간간히 흘러나왔다. 진한 색으로 점점이 물들여가는 청바지를 보다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시형의 잠든 얼굴을 마주했다. 사실, 깜깜해서 그녀가 정말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깨었는데 눈만 감은 채 잠든 척을 하고 있는지 에밀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남은 대사를 읊어야 했다.

“시형 씨... 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사실요, 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요. 당신이 없다면 단 하루도 제대로 보낼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마지막 공연, 꼭... 와주세요.”

저는 거기서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할 거예요. 괜찮아요. 전 이미 각오를 다 마쳤거든요. 아마 전 잘 넘길 수 있을 거예요. 미국에 돌아가면 바로 다른 작품을 할 거구요. 그리고, 시형 씨, 당신도 분명 잘 해낼 수 있어요.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은 그대로도 너무 예쁘고, 사랑받기 충분하다고요. 분명... 당신에게도 나 아닌 다른 소중한 이가 생길 거예요.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당신이 좋아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생길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그날...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같이 미국으로 와달라고 빈다면...”

부디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우선시 해주길.

“My dear, please reject me.”

나의 사랑, 기다릴게요.

우리의 마지막 날

부디 당신이 나를 거부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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