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情人

동양풍 다자츄

창고 by 해백

2019년 10월에 작성한 글 백업입니다. 캐붕에 주의해주세요.

달이 휘영청 밝은 날이었다. 제 정인情人을 기다리던 다자이 오사무는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달았다. 정인의 앞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현재 금주라는 혹독한 벌을 받고 있었으며, 제 앞에서 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조차 꺼려하고 있었다. 오늘 자정이 지남으로써 금주는 풀리겠지만, 저보다 주량이 많은 다자이 오사무를 견뎌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자이 오사무는 먼저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다자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끝나고 바로 돌아왔는지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옆구리엔 검을 차고 있었다. 검에는 오탁污濁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 검의 이름인 듯 했다.

"돌아온 건가, 츄야."

다자이 오사무는 다정히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조용히 제 연인의 곁으로 가 손깍지를 끼었다. 바닥에 몇 병이고 널브러져 있는 술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술이나 처마시고 있었냐."
"츄야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
"나 금주 풀린 건 알지?"
"섭섭하네, 츄야. 그래서 먼저 마시고 있었는데."

오면 같이 마시려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다자이는 말했다. 나카하라는 옆에서 덜그럭거리는 다자이의 검을 바로 매 주었다. 사양斜陽 이라고 적혀있는 그의 검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검을 슬쩍 본 나카하라는 바로 매 주던 검을 다시 풀어 자신의 검과 함께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자이는 미소를 지으며 츄야를 안아 들었다. 목적지는 침실이었다. 나카하라는 그가 침실에도 술을 두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벌써부터 술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달콤한 냄새. 그것이 다자이의 체향인지, 술의 냄새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벚꽃의 냄새 같기도, 꿀의 냄새 같기도 한 매우 달콤한 냄새였다. 무심코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다자이, 손 놔.'

그때의 나카하라는 혼자였다. 오히려 그래야만 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자이가 있었다. 언제나 싸우기만 했던 사람은 나락으로 내몰렸을 때 도움을 준다고 했던가. 딱 그 꼴이었다. 다자이가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싫었지만 유일한 자신의 편이었기 때문에 내칠 수 없었다. 평생을 약속한 게 언제더라.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한 건 언제더라.

'츄야, 같이 죽자고 했잖아. 한 명이 죽으면 자결하기로. 살다가 죽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같이 죽자고. 분명 말하지 않았나. 난 손을 놓고싶지 않네.'
'다자이, ....이러다간 다 죽어. 나도, 너도,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츄야가 죽지 않으면 되잖나, 왜 죽으려고 하는 건가. 제발 살아줘. 내일의 나에게, 살아갈 의미를 부여해 줘.'

손의 힘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서로의 몸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고, 눈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슬슬 한계였다.

'다음 번, ...다음 생에는, 꼭 다시 만나자고, 다자이. 지금까지. ...고마웠고, 사랑해.'

츄야는 스스로 손을 놓았다. 아무리 힘이 빠졌더라도 다자이의 손을 뿌리칠 정도의 힘은 있었다. 힘겹게 잡고있던 손이 놓아지자, 츄야는 새가 된 느낌이었다. 죽기 직전에야 이런 느낌을 알다니 아쉬울 정도였다. 위에서는 츄야를 부르짖는 소리와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암전이었다.

"야, 다자이."
조용히 술을 들이키던 나카하라가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취기가 도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조금 더워진 것 같기도 했다. 다자이는 그런 나카하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 내가 왜 좋은 거냐."

"츄야는 바보야?"

멍한 눈빛으로 술만 마시던 다자이는 입술을 비쭉이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꼭 어린애 같았다. 다자이는 전생에서의 나카하라가 죽기 전 나누었던,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사소한 대화를 생각해냈다.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날이 좋았고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산에 올라가 경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날이 참 좋군. 자살하고 싶어라.'
'놀러 와서도 자살 타령이냐.'
'츄야, 츄야는 전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평소에도 다자이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꼭 나카하라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이런 류의 어정쩡한 질문이 들어오면 나카하라는 우물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다자이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다. 

'난 말이지,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연이 닿는 한 다시 만나지 않을까. 라는 말을 했었다. 그 뒤에도 무언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 했다. 공기가 조금 뜨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 생각났다. 다자이는 중요한 걸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츄야, 우리 암호를 정할까.'
'어디에 쓰려고.'
'언젠가 우리가 죽고, 그 다음 생에서도 만날 수 있게.'
'그럼, 조금 긴 문장이지만. 이건 어떠냐.'

그 때의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어렸고, 슬슬 무예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시기였다. 나카하라는 얼마 전 다자이가 쓴 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 참 그 답게도, 사랑 이야기를 담은 짧은 시였다.

22리 밖에서도 그대의 향 풍겨오니,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으랴.

지금의 생에서 그 문장이 아예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혹은 깃털처럼 가볍게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안갯길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다. 다자이를 만난 후 선명해진 문장은 손 가는 대로 시를 쓰게 했으며 그 시를 다자이가 알아봤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맺어져 있는 것일 터이다. 그 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암호를 정한 것을 새삼 다행으로 느꼈다. 보통 사내들은 하지 않는 손가락의 가락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최근 들어 조금 빠진 살에 가락지가 조금 헐렁했다.

"술 맛은 괜찮은가? 이 곳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 세 단지 정도 들여왔네만."
"잘 했네, 맛이 예술이야."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칭찬에 어깨가 올라갔는지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츄우야, 자네가 일 간 사이에 나는 집안일도 다 끝내고, 수련도 했네만. 다자이는 나카하라가 늦게 돌아온 것에 대해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육체적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있었지만, 비범한 두뇌와 얼굴만큼은 이길 수 없었던 나카하라는 특히 다자이의 얼굴에 약했다. 얼굴을 무기로 쓰다니, 나쁜 새끼. 나카하라는 욕을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입술에서 나온 거친 말에, 다자이는 무심코 츄야를 바라보았다. 불만 있냐고 묻는 나카하라의 입술을 한순간에 빼앗았다.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입을 떼자 나카하라가 떽떽거렸다. 웃으며 그 말들을 흘린 다자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다자이,"

"응,"

"사랑해."

나도, 라고 대답한 다자이는 츄야를 안아 들었다. 그대로 이부자리로 향한 둘은 달아오르는 몸에 거치적거리는 옷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자이의 눈에는 오늘 밤은 재우지 않을 것이라는 욕망이 가득했다. 밤바람이 시원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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