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비일상의 일상
진하게 내린 커피 향과 달콤한 코코아 향이 함께 감도는 쾌적한 사무실 안. 검은 것은 글씨며 흰 것은 종이인 것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참 깃 펜과 연필을 사각거리다 불쑥 고개를 내미는 희고 검은 머리통이 둘 있다.
그러니까 말이다, 성질 머리를 주체하지 못해 기어코 사고를 친 흰 것과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죄로 연대 책임을 받고 있는 검은 것 말이다. -하지만 나레이션, 이 사건은 루스의 정당한 발화였단 말이죠?- 에헤이, 활자 바깥으로 고개 디밀지 말고.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요.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지만 너희가 잘못을 했다니 시정은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장황하게 적어 내려간 것이 시말서의 근본이며 두 사람은 그것을 꽤나 능숙하게 작성하는 법을 알았다. 언제나 흰 것이 먼저 잉크가 다 마르지 않은 깃 펜을 내려두고, 한참 뒤에 검은 것이 연필을 사각거리다 멈추고 나면 구구절절한 사연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미사여구가 갖추어 진 서류가 네 장 완성된다.
- 루스으으으, ‘아무튼 제 탓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같은 문장을 적었다가는 시말서가 반송 될 확률이 92,824501% 정도 되는 것 같아.
- 알고 있어.
- 언제쯤 본부에서 이 시말서가 네 반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 궁금한 걸.
- 아마 내가 은퇴하기 전 까지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해.
느긋하게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진하게 우러난 커피를 마시던 흰 머리카락을 가진 요원이 붕대가 감긴 한쪽 팔을 문지른다. 그 옆에서 마침 달콤한 코코아를 한 입에 해치운 채로 입맛을 다시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요원이 익숙한 루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구급상자를 가지러 가고, 두 잔의 머그컵이 텅 비워 진 뒤의 사무실에는 익숙한 적막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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