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친애하는 나의 불량배에게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
키사키의 말에 금방 꼬리를 내리고 조용해진 소라는 그의 말이라면 곧잘 들으면서 한마에게는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제 주인에게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단지 제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하다는 어필을 하는 모습으로도 보였지만, 한마가 그런 데에 신경이나 쓸 양반은 아니었고 오히려 즐기는 쪽에 가까웠으니 소라만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이쪽이 아까 전화로 말했던 아리스가와 소라, 네가 감시해야 하는 쪽이고… 여기는 한마 슈지.”
“소개는 그게 끝이야?”
“보통 감시라는 것은 몰래 하는 게 아닌가요? ”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도 포함이니까. 일전에도 말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아서 말이지.”
“에~ 그, 그랬었나요. 기억이 잘…….”
한마는 지루하다는 얼굴로 키사키와 소라를 훑어보았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히고 인상을 쓴 표정의 키사키를 보면 화가 났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인지 좁혀진 미간이 다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의 시선을 받아내는 소라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손은 조물조물하고 시선을 피하며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끝으로 갈수록 얼버무리다가 딴청을 피우기는 했지만, 틀리지는 않았다는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것은 한마에게 못 할 짓이었지만, 두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대강 파악이 되었다.
“어쨌든 저는 단호히 반대하는 바, 입니다….”
한참을 딴청 피우며 키사키를 시선까지 피하던 소라가 갑자기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기세 좋게 외쳤다. 기세만큼은 좋았다. 갈수록 처음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말의 내용과는 반대로 점점 질질 끌다가 내려가는 말꼬리는 자신감과 비례해 보였다. 소라도 제 말이 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이미 파악한 듯했다.
“하아, 네가 멋대로 행동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나올 일도 없었을 거다. 알고는 있겠지, 아리스가와?”
“그… 러니까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키사키 군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되는….”
“한마, 아리스가와는 너한테 맡기지.”
그는 다시 한번 한마에게 감시역을 맡긴다고 통보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소라의 의견조차 물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소라와 한마가 번호를 교환하도록 종용했다. 거부하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었고, 소라의 핸드폰은 한마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핸드폰이 생기자마자 키사키에게 번호를 교환하자고 했을 때는 한껏 들떠 있었던 소라가 한마의 앞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다 한들 교환된 번호를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많이 늦었다.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라의 핸드폰에는 마찬가지로 새것으로 보이는 인형이 같이 달려 있었다. 달랑거리는 인형이 낯이 익은 한마가 작은 소리로 감탄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소라의 핸드폰은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적외선 통신으로 한꺼번에 주고받고 나서도 한마가 이리저리 구경한 뒤에야 소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면 됐지. 이제 나한테 더 볼 일은 없는 건가?”
“가버려요. 가버리란 말이에요.”
“응, 데이트 방해하면 된다는 거네.”
”데이트 같은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우울한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던 소라가 테이블 위에 고개를 파묻고 속상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모습을 보고 한마는 자리에 남기를 선택했다.
그러고는 소라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를 반복했다. 그만두라고 손을 쳐낼 의욕도 없어 가만히 있자 보다 못한 키사키가 나서서 제지했다. 그제야 그만두기는 했지만, 자리를 뜰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볼일은 끝났으니 이대로 제 갈 길을 가면 그만이건만 두 사람, 아니 적어도 한 사람은 다시 일어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터였다.
키사키 텟타는 늘 뒤에서 움직여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제 패를 드러내지 않고,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무대 뒤에서 배역들이 움직이게끔 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었다. 물론 끝까지 뒤에서 움직일 수는 없을 테고 무대 위로 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은 오겠지만, 아직은 준비단계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계획에 소라가 있을 자리는 없었고 골치 아픈 변수에 불과했다. 그러니 고작 여자애에 불과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소라가 늘 앞뒤 재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대로 부딪쳐 오기도 했고, 아무리 밀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탓도 있지만, 속으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 보아도 결국 따지고 보면 키사키가 받아주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를 그에게 붙이게 된 것도 불량배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과 엮이지 않게끔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폭주족을 자처하는 불량배들, 그들은 도쿄 내에서 팀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게 보편적인 불량배들의 방식이고, 뫼비우스라는 팀도 그중에 하나였다. 제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패기만 해서는 결국 싸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불량배 위치에서 그치겠지만, 키사키의 의도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그 끝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될 터였다. 그러니 1년 남짓 되는 시간 안에 뫼비우스를 신주쿠의 정점에 세우지 않았는가. 그마저도 키사키에게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히 폭력배 짓이나 하면서 패싸움만 한다고 해 봤자 올라갈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더 높은 곳을 노리고 싶다면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남들 위에 설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마음대로 쥐고 주무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그게 힘이 되었든 지능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는 것이었다. 키사키는 후자 쪽에 속한다고 봐야 했다. 싸움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머리가 좋았다. 비상한 두뇌로 한다는 게 폭주족 팀을 키워내는 것 정도라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고작 애들 장난 수준의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뫼비우스는 머릿돌이었고, 그 위에 세울 것은 그리 가볍게 볼만한 게 아니었다.
한마는 키사키가 한 번 제지했다고 해서 그만둘 성정은 못 되었는지 또다시 소라의 머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소라가 벌떡 일어나서는 하지 말라고요, 하고 냅다 소리치자 놀란 눈치였으나 그것도 잠시 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소라를 내려다봤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키사키는 아주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고, 곧 있으면 저녁이니 이만 해산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밖은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붉은빛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진짜로 애 보기 같은 거나 하는 거냐고, 시시해~.”
“싫으면 안 하면 된다니까요. 저도 바란 적 없거든요.”
하품까지 해가며 귀찮아하는 한마와 그런 그의 반응에 바라던 바라며 소라 역시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이런 입씨름을 언제까지 하고 있을 작정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키사키의 결정이 변할 일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한마를 붙여놓을 작정이었으므로, 소라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따위 없는 게 당연했다. 그것은 한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키사키에게 있어서 꽤 유용한 편이었고, 장기 말이라고 했으니, 저한테 필요한 일에 쓰이는 게 그의 역할이기도 했다. 다만 한마로서는 이런 일을 기대한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영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장기 말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 덕분에 졸지에 여자애나 따라다니는 처지가 될 터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키사키의 명령이라고 해도 꼴사납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애 보기라…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찮을 거다.”
“에~ 그렇게 귀찮은 거 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힐끔 곁눈질로 소라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쉰 한마는 시선을 천장으로 옮겼다. 키사키의 계획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게 한마였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일은 그 계획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 자문해 봐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미묘하다는 느낌은 들었다. 게다가 별일도 아닌데 불려 나온 기분에 덩달아 기운도 빠졌다. 이만하면 이야기는 다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키사키가 해산하자는 말을 꺼내자, 소라가 물었다.
“키사키 군은 제가 귀찮은가요? 어째서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게 아니지.”
가슴에 손을 얹고, 라는 말에 제 가슴이 아닌 키사키의 가슴에 손을 얹으려고 소라가 마주 보고 앉은 그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맞았고 결국 손을 뒤로 빼고 물러났다.
만담 콤비도 아니고,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한마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없는 소라의 말과 행동에 키사키가 질려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까지 다 해서 조금은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너 되게 웃기네.”
“저는… 한마 씨를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요.”
“그 말은 키사키를 웃기려고 한다는 거야?”
“음… 그거랑은 좀 다른데요.”
“에~ 그럼 어느 쪽?”
한마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높이를 소라에게 맞춰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라는 뭔가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약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대답했다. 그 나름대로 고민해 보고 내린 대답인가보다 했다. 싫어하는 티를 감추지도 않았으면서 한마의 물음에는 꼬박꼬박 대답하는 소라가 우습기도 했을 터였으나 한마는 웃는 얼굴이기는 했어도 대놓고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키사키 군이 저를 좋아해 줬으면… 아니, 그게 한마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소라 쨩은 사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아무렇지 않게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아차 싶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소라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이나 쓸 양반이 아니었으니 한마는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하니, 소라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며, 키사키 군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데, 라는 할 필요도 없었던 말을 덧붙여 가면서 말이다.
“그러면 키사키한테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던가.”
“그, 그걸 부탁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소라가 큰 소리로 그렇게 외치는 바람에 점원에게 주의를 들어야만 했다. 가게가 떠나가라 외친 것도 아니고 원인 제공은 한마에게 있으니, 주의를 들어야 하는 쪽은 제가 아니라고 무죄를 주장하고 싶었으나 속으로만 삼키고 말았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본인 잘못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온갖 민폐를 끼친 세 사람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그곳에서 나와서 헤어졌다.
* * *
불평불만을 토로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마는 꼬박꼬박 소라의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한마가 마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굴어서 불편하기도 했고, 손에 문신이 있는 거구의 남자가 기다리면 퍽 눈에 띄었기 때문에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바로 다음 날, 학교 앞에서 한마와 마주쳤을 때는 강제로 등을 떠밀어서라도 내보내려고 애썼다. 아무리 밀어봐도 미동도 하지 않는 데다가 오히려 역으로 소라에게 기대기까지 해서 역효과였다. 게다가 한마는 날이 바뀌면 또 어김없이 찾아와서 소라의 고생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한마를 따돌리겠다고 냅다 달리기도 해봤지만, 다리 길이부터 훨씬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으니 소라는 순식간에 한마에게 따라 잡혔다.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는 꼴일 테니 훨씬 수월하면 수월했지, 어렵지는 않은 일일 터이니 어련한 일이었다.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한마의 손에 잡혀 와서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야만 했다. 학교 교문이 아닌 후문이나 담을 넘어서 나간다고 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꼭 제 눈앞에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신출귀몰한 게 어찌 보면 그쪽이 귀신일 지도 몰랐다.
거절할래요, 찾아오지 마세요!
한마에게 그렇게 따져봐도 소용없었고, 도망치려는 소라를 붙잡아 끌고 가는 게 그의 몫이었다.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서는 딴 길로 새지 말라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요!’라며 소리쳐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은커녕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뻔뻔한 모습에 소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아예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가보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와서는 기다리고 있던 한마에게 가슴을 펴고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꺼냈다.
“사실 여태까지 우리 집이라고 했던 곳은 친척 집이거든요. 이번에는 진짜 우리 집까지 가주시면 돼요.”
“헤─, 그렇구나.”
“네, 그러니까 오늘은 이쪽으로 가요.”
지금까지 바래다주던 곳보다 더 먼 곳에 자기 집이 있다는 말로 둘러대면서 원래 가던 곳과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는 길로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했고, 골목으로 들어가서 샛길로 빠져나간다거나 아슬아슬하게 옆 동네 쪽으로 가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원래 집이 있던 동네에서 멀어지려고 한 소라였으나, 한마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바람에 다시 소라가 살던 동네로 돌아와야 했다. 동네가 어디인지는 키사키에게 들었을 수도 있었으니, 그 부분까지 속일 수는 없을 터였다.
“이쪽 맞아?”
“네, 맞아요. 바로 여기예요.”
그렇게 한마를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눈치를 채고 말았는지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라는 앞도 보지 않고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여기는 아니지 않아?”
그 말에 돌아서서 보니 소라가 보지도 않고 가리킨 곳은 라멘집이었다. 뒤늦게 깨닫고는 아뿔싸 했다.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상가 쪽으로 들어와 버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라멘집 앞에서 멈췄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고 대뜸 제집이라고 소개해 버렸다는 사실에 아찔해졌다.
“아하하, 라멘이나 먹고 갈까요?”
바로 눈앞에 라멘집을 두고 변명할 거리도 사라진 소라가 둘러댄다는 말로 꺼낸 게 라멘이나 먹고 가자는 말이라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완전히 망했다는 사실만큼 확실했다.
“흠, 소라 쨩이 사준다면 먹고.”
“두 살이나 어린애한테 삥뜯고 싶어요?”
“나 불량배니까 상관없지 않아? 그게 내가 하는 일인데.”
멋쩍게 웃으며 라멘이나 먹고 가겠냐는 물음에 사준다면 먹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마의 태도에 소라는 투덜대면서도 최악은 면했다고 생각하며 라멘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명이냐는 직원의 물음에 두 명이라고 대답하고 안내해 주는 곳에 가서 앉았다.
일부러 맛집을 찾아서 온 것도 아니니 맛은 기대하지 않으며 각자 먹을 라멘을 골라 주문했다.
“계산은 소라 쨩이 하는 거지?”
“사라진 한마 씨의 양심을 찾아주세요.”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계산.”
결국 계산까지 제 몫이 되어버린 소라는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 라멘 2인분 값을 꺼내 직원에게 건네야만 했다. 잘 먹었다고 하는 기분 좋아 보이는 한마의 목소리를 뒤로하면서 소라는 두 번 다시 헛된 수고는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한마에게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뒤, 하굣길에 그가 따라오면 따라오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더불어 그날 이후로는 집 근처가 아닌 맨션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바래다준 한마에게 소라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까지 하고 맨션 안으로 들어갔다.
키사키가 등교하는 날에는 한마가 오지 않았다. 드물게 오는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없는 날이 많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키사키가 소라를 바래다주는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드는 소라였다.
“오랜만이에요, 키사키 군!”
키사키는 소라의 말에 대답이 없었지만,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소라였기에 옆에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한마 씨가 어쨌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라멘 값을 뜯어낸 거 있죠.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어떻게 고등학생이나 되는 사람이 중학생한테 얻어먹을 수가 있어요?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그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신랄하게 설파하던 소라였으나 그가 뭐라 하든지 말든지 키사키는 아무 말도 없이 옆에서 걷기만 했다. 한마와 하교할 때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순순히 키사키의 발에 맞춰 걷던 소라가 이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안 그래도 요새 좀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키사키 군도 조심해야 해요.”
“무슨 소문?”
반응이 없던 키사키가 소문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자 무슨 소문이냐고 되물었다. 소라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의 물음에 대답했으나, 그다지 중요한 얘기는 아닌 듯한 투였다. 끝에 가서는 결국 그에 대한 걱정이 따라붙었고 그게 요지인 모양이었다.
“불량배들 사이에서 싸움 도박이라는 게 유행하나 보더라고요. 뼈밖에 없는 우리 키사키 군을 보면 너무 걱정되니까 늦지 않게 집으로 들어가야 해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렇지 않아요. 저는 키사키 군이 어디 가서 맞고 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바람에 8시간밖에 못 자는걸요.”
“충분히 자고 있군.”
“아무튼 싸움 도박 같은 것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해달라는 말이에요.”
단호한 소라의 모습에 키사키도 조금은 숙이고 들어가 주려는 듯이 그의 말에 알겠다고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 말에 뿌듯해하는 소라가 의기양양해진 탓에 바로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키사키 군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뭐?”
“위험하니까 곧장 집으로 가는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요.”
“무슨?”
한마를 소라에게 붙인 이유는 감시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제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떼어놓으려던 이유도 있었던 키사키는 바래다준다는 그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당황한 데에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졸지에 인도 안쪽으로 옮겨지고 자연스럽게 소라가 에스코트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저지할 타이밍도 놓치는 바람에 그대로 집까지 함께 걸어가게 되었다. 정신을 차린 키사키가 다시 소라를 제집까지 바래다주기는 했으나 꽤 타격이 큰 모양이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키사키 텟타는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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