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오브히어로즈

[발터+나인] 교과서를 읽는 빈티지 찻잔

나인의 교과서를 읽는 발터.

글바구니 by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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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발론에서의 생활은 퍽 즐거웠다. 모두가 입을 모아 최고라고 하는 식사는 맛있었고, 가끔은 다른 기사들이 요청한 타 지역 음식도 나오곤 했다. 향수병을 앓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어느샌가 문화교류의 장이 된 특식이었다-발터는 여기 와서 헬베티아의 전통 꼬치구이를 먹을 줄 상상도 못 했다-. 만족스러운 이유는 그 밖에도 있었다. 각지에서 온 젊은이들과 대련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신선했다. 파도 기사단을 길러내며 짊어졌던 중압감과 걱정을 조금 밀어놓자,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가 파도처럼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편안한 자리에서 나오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그 고저와 감정이 물살과도 같았다. 자신의 시대에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당연한 세대,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떠들고 즐기는 세대, 가끔은 걱정되지만 그만큼 빛나는 세대. 기쁘고 대견스럽고 서글픈, 복잡다단한 감정이 발터의 가슴을 적시고 물러났다.

 "자, 여기 내 교과서! 보고 싶댔지? 이거는 도덕이고, 이거는 역사고, 이거는 수학! 후후, 프람은 수학을 보더니 도망갔지!"

 오늘 발터의 티타임 상대는 나인이었다. 나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책 몇 권을 내보였다. 발터는 사람 좋은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로드에게 이 나라의 기초적인 교과서를 읽고 싶다 했더니 적임자가 있다며 추천받은 상대였다. 확실히 나인은 가장 최신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프람이나 요한도 젊은이였지만 엄연한 성인이기에, 그들이 사용했던 교과서는 지금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온화한 색감의 표지에 단정한 글씨로 적힌 '도덕'. 이미 여러 번 펼쳐봤는지 책 오른쪽 아래가 살짝 들린 채였다. 책을 넘기자 간결하고 기초적인 문장이 보였다. 내용은 쉽고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막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한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과서이니 그렇겠지만.

 '나를 소중히 하는 법을 배워요'

 '친구와 어떻게 함께 할까요.'

 '사랑이 가득한 가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요'

 목차를 보던 발터는 새삼 요새 교과서는 옛날과 다르다 생각했다. 비단 외형뿐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확실히 옛날의 책과 비교하면 알록달록한 외형이긴 했다. 도덕은 변치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시대의 변화를 꽤 많이 타는 영역이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같은 권리를 누린다. 이 간단한 문장마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당장 아발론의 옆나라인 플로렌스만 보아도 최근까지 이 명제를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조금 책을 눈에서 떨어뜨리며, 발터가 책을 마저 읽었다. 과거에는 미처 짚지 못한 것이 들어있기도 했고, 과거에는 있었으나 현재는 없는 것도 있었다. 아이들은 이런 교과서를 보고 이런 것들을 '당연하다'라고 생각하겠지. 발터는 다양한 종족의 아이들이 함께 노는 삽화를 잠시 매만졌다.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가치를 당연하게 누리는 세상이라니, 꽤 좋았다.

 "있잖아.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이 있대. 결혼하지 않아도, 유전자적으로-솔피 때문인지 나인은 '생물학적'이라는 말보다 이쪽을 더 자주 말했다-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대. 로드가 했던 말이긴 한데 여기도 나와 있다? 그거 말고도 말야……"

 발터가 가족 부분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나인이 재잘거렸다. 제가 아는 걸 남에게 말하는 게 퍽 뿌듯한 얼굴이었다. 발터는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옆에서 보면 덩달아 뿌듯한 얼굴이라고 묘사했을지도 모른다.

 "아, 안 돼! 그거 보지 마! 무, 물론 옛날에 친 거니까 지금 치면 그거보다 훨씬 더 잘 치겠지만!"

 다음 장엔 붉은 비가 내리고 있는 도덕 시험지가 자리잡았는고로, 발터는 반강제적으로 다른 교과서를 보아야 했다.

 다음 교과서는 역사였다. 아발론의 교과서이기에 책에는 아발론의 지난 세월 위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세계사도 보여 줄까? 도덕 교과서(와 거기 끼어 있는 시험지)를 사수한 나인이 말했다. 그리고 멜론 크림 소다의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숟가락을 문 채 세계사 교과서를 보여줬다. 로드가 그것도 보여주면 좋아할 거랬어. 생각보다 여러 준비를 한 로드의 모습이 떠올라 발터는 괜히 멋쩍게 수염을 만졌다. 책을 펼치자 아주 오래 전 시작된 이 세상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쉽고 간결한 단어로 이어진 문장이었다. 수천 년의 시간이 짧게 요약된 채 활자로 박혔다. 기묘한 씁쓸함이 입 안에 맴돌았다.

 "발터는 여기 있는 일 겪어봤어?"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기, 한 50년 전의 일은 겪어봤다네."

 "50년? 옛날이네!"

 10살도 안 된 아이는 당장 갓 성인도 멀게 느껴졌다.

 "50년 전의 일을 기억해?"

 "인상깊은 일은 기억하지. 마도대전은 젊은 나에게 큰 사건이었으니 말일세. 동료들과 등을 맞대고 싸운 기억,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가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던 기억…… 그런 것들은 지금도 생생하지."

 "나도 성공작으로 처음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을 기억해. 그거도 옛날이었는데, 같은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처음 야시장에 갔던 건 기억하는가?"

 "응. 샬롯이랑 꼬치구이 먹었어. 미하일이 향신료 냄새를 맡게 해줬는데 재채기가 엄청 나왔지. 그런 게 맛있는 요리가 된다니 이상해."

 "그런 걸세."

 발터는 마도대전 부분을 한참 보았다. 슈나이더가 읽던 책과는 다른 문체였다. 전기는 영웅들의 이야기 위주로 서술되어 있었다면 교과서는 일어난 사실 위주였다. 동료들과 웃고 떠든 일화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절규는 없었다.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 끝. 전쟁은 얄팍한 종이 위에 압축되어 삽화와 합께 실렸다. 웃음과 눈물을 짜내 버린 뒤 건조한 글씨도 새겨졌다. 누구의 귀에 내려앉아도 당사자들보다 바스락거리는 모래로 들릴 터였다. 아픔을 그대로 싣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도 발터는 조금 서글퍼졌다.

 이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대의 이야기처럼 활자로만 존재할 터였다. 젊은이들은 옛날 이야기라며 자신의 '당연했던 것'을 공부한다. 추억이, 감정이, 기억이, 삶이 활자로 압축된다. 한때 존재했던 것들은 모래처럼 변해 종이 위에 새겨진다. 살아 날뛰던 것들이 숨을 죽이어 과거에 몸을 뉘인다. 새로운 세대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나갈 것임은 진작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옛날을 살았고 그것은 이미 시간의 저 너머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을 늙은이가 앞으로 한참을 살아갈 어린이를 보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선, 주름 없이 부드러운 피부, 내일이 오늘 같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눈동자. 생명력이 넘쳐 빛나는 시간이었다.

 "…발터는 지금 슬퍼하는 거야?"

 나인이 물었다. 발터는 어이구, 싶었다. 서글픔을 꿰뚫린 것보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본 게 더 마음 쓰였다. 어설픈 거짓말보다 솔직한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눈 앞의 어린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조금 그렇다네. 하지만 그게 나인 자네 때문은 아니야."

 "그렇구나. 그럼 세계사 책을 읽어서 그래?"

 약간 안심한 눈치로 나인이 다시 물었다. 발터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네. 내가 살아온 시간이 이렇게 교과서에 실려서 말일세."

 "마도대전에서 이긴 건데 기쁘지 않아? 나쁜 내용은 여기 없는데."

 "그것과는 다르달까…… 흠. 나는 아직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네. 마치 얼마 전 일같지. 그런데 자네에게 50년 전은 아주 오래된 일이지. 당연하다네. 아마 샬롯 경과 미하일 경도 오래된 일이라 할 걸세."

 "응."

 "내가 아주 낡고 오래된 사람처럼 느껴져서 슬펐다네. 늙은 게 실감나기도 하고. 열심히 살다 문득 거울을 보니 늙은 내가 있더군. 이제 물러날 때인 것도 같은데, 아직 무언가를 놓는 게 벅차구만, 허허."

 "……"

 분위기를 너무 어둡게 만들지 않으려 웃었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주제였는지 나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늙은이의 푸념이니 신경 쓰지 말라 덧붙여도 아이의 미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른들의 티타임에 끼어 앉아 온갖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적은 탓이었다. 발터는 괜히 나인에게 짐을 지운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나인은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떠오르지 않아서 끙끙대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발터는 커피 한 모금과 함께 기다렸다. 눈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시선은 다시 교과서로 향했다. 소다를 쭉 들이킨 나인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몇 분쯤 뒤였다.

 "…그럼 발터는 빈티지 하자."

 "빈티지?"

 "응. 옛날 건데 멋있어서 지금도 쓰는 거. 빈티지는 오래된 거라서 좋아하잖아. 나도 본 적 있어. 조슈아가 빈티지 찻잔을 보여줬는데 멋있었거든."

 "허허."

 "발터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지만… 나이가 많으면 그만큼 많이 알잖아. 발터와 이야기하고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어. 빈티지도 낡고 오래됐지만 다들 좋아하니까. 발터도 그런 빈티지 같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낡고 오래되어서 슬퍼지면 발터는 빈티지니까 괜찮다고 하자."

 작은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아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말 같았다. 발터는 조용히 말을 곰씹다가 미소지었다. 빈티지라.

 "위로해주어서 고맙다네."

 어물쩡 넘기고 싶지 않아 또박또박 인사했다. 나인도 미소지었다. 발터는 교과서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나인이 책을 정리하고 옆 의자에 쌓아놓느라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터의 가슴 속에 다시금 이런저런 감정이 밀려았다. 착잡하기보단 달곰쌉쌀한 쪽에 가까웠다. 한 번에 괜찮아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괜찮아질 것이다.

 "……발터도 지금 로드만큼 어른일 때가 있었지?"

 "그럼. 자네만큼 어렸을 때도 있었다네."

 "그럼 그때 세상은 어땠어? 발터가 나만했을 때. 교과서에 적힌 것과 똑같았어?"

 나인의 질문에 발터는 잠시 과거를 추억했다. 현재의 눈으로 볼 땐 빛바랜 추억이겠지만 과거의 자신에겐 찬란히 빛나는 기억이었다. 그래, 찬란히 빛날 아이에게 찬란했던 기억을 이야기하자. 당연한 것이 지금과 달랐던 때의 이야기를, 활자가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던 때의 이야기를.

 빈티지 찻잔이 새 것이었던 때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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