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들

나의 어깨에 얹힌 것들

Aporia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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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30일, 아킬리즈 헤르모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문 스크랩이라는 것을 했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 지난 일자의 신문을 한켠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굳이 하나의 글을 오려내서 따로 보관하는 것.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영웅이에요.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간지러웠다.

권능, 둥근 방패들이 대열을 갖추고 일제히 돌격해 징조를 지워나간다. 선두에 서서 징조를 밀어낸 아킬리즈는 급히 넘어진 어린아이에게 달려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니 손을 내밀기도 전에 아직 다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꼬마가 엉엉 울며 와락 안겨든다. 그 뒤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쓰러져 있다. 숨이 가빠진다. 괜찮아. 우리가 낫게 해줄게. 품에 안긴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울지 마…….

가게 문을 누군가 노크한다. 손님이건 반갑지 않은 사람이건 열려있는 문을 그저 열기 마련인데 노크라니, 누군가 싶어 약간 긴장한 채 문을 열면 낯선 사람들이 서 있다. 아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지난달에 운 좋게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몇몇이다. 저……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머뭇거리다가 아킬리즈의 손을 꼭 잡아온다. 그 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해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올라 가슴팍을 꽉 메웠다. 아닙니다, 저… ―슬펐다.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킬리즈, 어떻게 됐어? 아직이야? 동료가 묻는다. 징조를 밀어내려던 방패가 산산이 부서진다. 아……. 아킬리즈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젓는다. …젠장! 금방이라도 사람을 병원으로 나를 준비를 하고 있던 동료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친다. 옆에서 친구를 잃은 이가 멸망이 덮친 곳을 보며 울부짖었다. 고개를 들면 코앞에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이 있었다. 구할 수 없는 손이.

어떤 때는 징조를 해제함으로써 비극을 앞당길 때도 있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찰나의 타이밍으로 어긋나는 때. 가령 교통사고 충돌의 순간이 반복되고 있다면 징조를 해제한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심해! 끼이이이익. 유리가 깨지고 차체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난다. 기름 냄새와 불 냄새. 비명과 우는 소리. 아킬리즈는 깨진 창문에 팔을 비집어 넣고 낑낑대는 강아지를 한 마리 꺼냈다. 빛이 사라진 운전자의 죽은 눈을 바라보면서. 길게 베인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카운터 앞에 앉은 동료가 말한다. 옆에 펼쳐놓은 지방 신문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현상으로 또다시 세 자릿수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다른 동료가 대답한다. 의미가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해? 우린― 아킬리즈를 보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하는거야. 그래, 그 말이 맞아.

한번은 아주 추운 날씨에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다 같이 콧물을 흘리며 줄담배를 피웠다. 눈물이 얼어붙은 눈가가 뻑뻑하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한 명이 담배를 피우면서 줄창 중얼거렸다. 그 애가 나보고 고맙다더라.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 옆에 걔 엄마가 죽어서 누워 있는데도 우리한테 고맙다고……. 아킬리즈는 빨갛게 언 손으로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겹겹이 슬픔이 쌓인다.

그러나 겹겹이 마음도 함께 쌓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야, 우리가 해냈어! 이걸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울지 마, 내가 도와줄게. 헤르모드 씨, 요즘 힘든 일 한다고 들었는데 이거라도…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형, 진짜 멋지다! 미안해, 나 더는 못 견디겠어. 그래도 제가 다른 사람들 몫까지 살아가려고요. ……

아직 살아 있다고, 살 수 있다고, 하고 싶은 게 많다고,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마음 속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아.

그래서 난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거대한 슬픔이 내 등을 떠밀어.

수많은 마음들이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등을 받쳐줘.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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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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