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9와 4분의 3 승강장

Aporia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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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비극적인 멸망의 징조는 기회다. 마법사 사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는 기회. 혈통을, 종족을 넘어 평등하게 들이닥친 재앙 앞에서, 타인과 손을 잡고 함께 맞서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기를. 그 새로운 페이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그리 하고자 한다.

참으로 치기 어린, 순진한 문장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킬리즈 헤르모드는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과제를 떠올린다. 제 순진한 소망과 달리 이러한 운명이란 구원자로서의 사명도, 고대의 전쟁 영웅을 대신하여 하늘에 오를 기회도 아니었다. 새벽 하늘은 스물여덟 명의 등장인물을 골라 자신들을 위한 무대 위에 안치할 준비를 마쳤으며, 세상은 이 새끼양들의 목에 밧줄을 매어 초월자들의 제단으로 향하는 언덕길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사시라는 단어로 포장된, 잘 재현된 헤카톰베*다. 불합리하며 비극적이다. 우리는 지상에 탄식과 슬픔을 안긴 별들을 품은 죄로 천상의 식탁에 오를 것이다. 우리가 고통과 비참함으로 무르익으면 그들은 술과 하프 연주를 곁들여 제물을 취하리라.

“아킬리즈.”
“…아빠. 엄마는…?”
“괜찮을 거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어…”
“…….”

*헤카톰베: 신에게 바치는 제물 중 ‘소 백 마리의 제물’이라는 뜻이지만 ‘성대한 제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먼 고대의 영웅은 검은 바위 위에 앉아 잿빛 바다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전장에 나가 죽거든 영광과 명예를 얻되 전장을 피한다면 그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 범부로 남으리라. 어머니의 다정함도 아버지의 영리함도 친우의 사랑도 이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묻자. 이 세계의 영광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삶이, 문명이, 산과 들을 개미떼처럼 부지런히 오가는 저 작은 사람들이, 그리고 너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함하여,

산다는 것은 그토록 가치있는 것이냐?

아킬리즈는 앉은자리에서 보이는 병실의 풍경에 시선을 던진 채, 어머니의 소식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부상은 그의 어머니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병원 복도 바깥쪽의 다인실을 배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하루종일 무슨 병이나 사고로 실려오는 사람들이며 분주히 오가는 치료사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간절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학교에는 갈 수 있는 거죠?”
“아, 그래. 그거 말인데…”

지금이야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정도의 지위밖에 없는 소리지만 어둠의 마왕을 따르는 마법사들은 일반 마법사들과는 달리 강력한 저주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그날 결투에서 ‘용서받지 못할 저주'가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 용했지. 하지만 그 유명한 저주들이 아닐 뿐 얼굴에 칼날처럼 선뜩한 상처를 남긴 것 또한 일종의 저주라(고 치료사는 해석해 주었다), 상처는 아물만하면 벌어지기를 반복하며 통증과 함께 퇴원 시기를 계속 늦추고 있었다. 치료사가 “이 따위 주문을 애한테 쓰다니!” 잔뜩 화를 내며 디터니 원액에 푹 적신 천으로 아킬리즈의 얼굴 반쪽을 둘둘 감아놓은지도 열흘이 지났고 9월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해서, 완벽히 아물게 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구나.”
“완벽하지 않으면요? 붕대를 감고도 학교는 다닐 수 있어요. 관리하는 법을 배우면 돼요.”
“아킬리즈.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아뇨, 저는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요.”

온화한 갈색 머리를 가진 마법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괜히 협탁에 놓인 라일락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보라색 꽃송이가 알알이 움튼 그것은 피 냄새며 약 냄새를 가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누가 보낸 거니? 몰라요. 내 아들은 참 무던하기도 하지. 독초나 베네무스 텐타큘라가 아니란 건 저도 알아볼 수 있거든요. 알아, 농담이다.

바닷가에 앉은 영웅은 황금 갑옷이며 커다란 은검을 모두 내려놓은 채 자신의 운명을 생각한다. 땅에 피가 뿌려지고 전차 바퀴가 시신을 짓밟는 저곳으로 가서 백만 명의 병사를 구한다 한들 그 삶이란 것은 진정 좋은 것이더냐? 내 이 슬픈 운명을 받들어 목숨을 바칠 만큼 행복한 것이더냐. 너희는 살아가는 이유를 백 개는 댈 수 있겠지만 살아가는 이유란 동시에 훌륭한 죽음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 않느냐. 전쟁 뒤에는 또다른 전쟁이 있고 신의 피를 이은 우리 영웅조차도 한갓 장난감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병실에 누운 아킬리즈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그리 영광되지 않고 때때로 기쁨보다 고통이 크다는 것을.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어떤 절망은 희망보다도 클 수 있다는 것을.

나.

어쩌면 지금까지 너무…

“헤르모드 군, 상처 좀 봅시다.”
“아, 네.”
“치료사님, 좀전에 해주신 이야기 아들이랑 의논해봤습니다.”
“그러셨군요. 헤르모드 군은 어떻게 하기로…?”
“학교에 가려고요.”
“…그래요. 그러면 그럴 수 있게 해줄게요. 흉터는 남을 겁니다.”
“괜찮아요. 흉터는 흔적일 뿐이니까.”
“의젓한 학생이군요. 하긴…”

―그래서 새벽인 건지도 모르죠. 치료사는 뒷말을 삼키고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어린 아이야. 아직 어린아이인데, 참. 우리 모두가 이 애들에게 의지해야 한다니! 탄식할 노릇이지만, 그는 전문 치료사로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이 소년을 때맞춰 학교로 보내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소년의 친구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엇 다녀갔고, 소년은 점잖게도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신은 괜찮다 일러 돌려보냈다. 그의 어머니가 여지껏 깨어나지 않고 있는데도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치료사는 언뜻 안타깝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는 전문 치료사로서 그런 마음 역시도 금방 눌러버렸다.

“정말 역까지 안 데려다줘도 괜찮겠어?”
“아빠. 저 이제 생일만 지나면 성인이에요. 기차역 정도는 스스로 갈 수 있어요.”
“섭섭한 소리 하긴. 알았다. 조심해서 가고, 편지해라.”
“엄마는…”
“엄마는 아빠가 잘 돌보고 있을게. 걱정하지 말고.”
“…응.”
“어깨 펴고! 마지막 학년이잖니. 즐기고 오거라. 무슨 일이 있든 너는 우리 자랑이다.”

아킬리즈는 가방을 챙겨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쪽 얼굴이 아릿했지만 상처는 다 나았다고 했으니 분명 기분 탓일 테다. 그는 씩씩하게 자기 발로 병원을 나서서 킹스 크로스까지 갔다. 그러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포기하면 안 돼. 아무도 죽지 않았어. 살아 있으면,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어. 아주 조금씩이라도, 우린 나아져 왔잖아.

아직 열차가 도착하기엔 이른 시각이라 플랫폼은 비어 있었다. 아킬리즈처럼 일찍 온 사람은 시간을 착각한 신입생이거나, 곧 몰려올 학생들 중 ‘새벽’을 낚아챌 심산으로 대기 중인 기자들, 그리고 예상되는 혼란을 대비하기 위한 현장 통제 요원들, 뭐 그런 사람들 뿐이었다. 아킬리즈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잘 보이는 벤치에 보란듯이 앉는 대신, 입구 근처의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늘이 드리운 그 아래에서야 아킬리즈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킬리즈.

시간이 없어.

네 선택은 잘못됐어.

햇빛이 드디어 새벽 하늘을 물러가게 하고, 멀리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아킬리즈는 눈물을 문질러 닦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가방을 들고 천천히 학생들이 모이는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Achilles, come down
아킬레우스, 거기서 내려와
Achilles, jump now
아킬레우스, 그냥 뛰어내려
Soldier on, Achilles
포기하지 마, 아킬레우스
It is empty, Achilles
다 쓸데없는 짓이야, 아킬레우스

https://youtu.be/YsfTJAfFNvs?si=WnjK_5isLZJLFU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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