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병찬

청춘이란 거 별 거 아니던데요

옹수의 상뱅 by 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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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짜리 수업이었다. 한 시간 반을 수업하다 목이 아팠는지, 교수는 쉬는 시간 15분을 주었다. 박병찬은 꾸벅 졸다가 강의실이 어수선해지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검지로 눌렀다가, 갈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 자판기에서 캔으로 된 포카리스웨트를 하나 뽑았다. 음료를 마시며 무의식적으로 확인한 핸드폰엔 130개가량의 메시지 알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과에서 친하게 어울리는 무리의 단체 채팅방이었다. 수업 언제 끝나, 배고파 등 일상적인 푸념이 가득한 채팅창에 누군가 사진 하나를 올렸다. 대학 익명 커뮤니티의 글을 캡쳐한 것이었다. 박병찬은 엄지로 사진을 눌렀다. 화면을 채운 사진의 글을 읽기 전에, 진짜 애절하지? 라는 채팅의 알림이 핸드폰 상단에 떠올랐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목을 가다듬은 교수는 수업을 재개했다. 박병찬은 중간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수업에 집중하다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화면을 검지로 문질렀다. 잠금 화면을 밀어내자 보이는 것은 아까 동기 한 명이 캡쳐해 보낸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청춘이란 거 별 거 아니던데요, 이다.

청춘이란 거 별 거 아니던데요. 고등학생 때,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는 곧잘 자신만의 청춘 예찬론을 펼쳐댔고 녀석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선생님도 별로 친하지 않던 학급 친구들도 대학에 입학해 마주할 청춘이란 막막한 시기에 대한 낭만을 말해서 정말인줄로만 알았어요. 그들 말대로 대학에 입학하기만 한다면야 그저 반짝거리고 한낮 디저트 카페에서 파는 마카롱 같은 달콤함이 여실한 무언가의 시기가 있겠구나. 뭐, 완전히 믿은 건 아니지만.

그런데, 형. 청춘이란 거 별 거 아니더라고요. 만약 별 거라면 이런 식으로 익명의 힘을 빌려 푸념 따위 할 필요 없었겠죠. 그래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사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 일이 어색한 것 외엔 별 다를 거 없던 입학식이었어요. 내가 이제 법적 성인으로서 할 만한 일들이 가능하단 사실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죠. 어차피 떠오르는 건 술이나 담배뿐이었는데 전 둘 다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이게 뭐야, 정말 이게 뭐야. 혼자 무심코 생각했을 때 형을 알게 됐어요. 형이야말로 청춘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러니까, 항상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고, 약속이나 수업 따위의 일들로 바빠 보였고, 때론 잠을 잘 못 잤는지 초췌한 인상과 단출한 차림새로 저와 마주치면 부끄럽게 인사했잖아요. 마땅하고 이상적인 대학 생활을 몸소 체험 중인 것 같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거야 뭐, 형의 생활인데 저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제가 그런 것들로 형을 좋아한 것 같진 않아요. 그럼 왜일까. 저랑 과가 다른데도 체육 대회 때,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제게 다가와 환하게 웃더니 반갑게 인사해줘서일까. 교양 수업에서 가끔 턱을 괴고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꾸벅 조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아서 일까. 아무도 한 번에 외워주는 일이 없던 내 이름을 한순간에 외워줬던 까닭일까. 오늘 바람이 참 기분 좋다더니 교정에 서서 기지개를 펴는 형의 감은 두 눈이, 하늘을 향해 곧게 펴진 팔의 곡선이, 끄응 하고 내는 칭얼거림 같은 목소리가, 살랑 거리는 바람에 잘도 흔들리던 남들보다 길었던 뒷머리가. 그 이유가 될까요? 몰라요, 근데 형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전 아, 고 3 때 담임 선생님이 말하던 캠퍼스의 낭만이란 게 형을 말하는 거구나. 그런데요, 형. 청춘이라면 응당 맞서고 싸우고 쟁취해야 하는 거 에요? 그렇다면 전 한심하지만, 그럴 수 없거든요. 제가 얻고 싶은 건, 일상 속에서 형이 즐겁게 웃는 지금보다 더 한 건 없었고, 잃기 싫은 것도 일상 속에서 형이 즐겁게 웃는 지금이라서.

결과적으로 똑같거든요. 전 형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나도 사람인지라, 그야 형이 내 손을 잡아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희가 같이 축구를 하다 제가 골을 성공 시키지 않더라도 그 팔로 허리를 끌어안아주면 좋았을 것 같아요. 형이 집에 도착해 잘 준비를 마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제게 전화 한 통을 해 인사를 하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제 욕심이잖아요. 사람들은 지금 내 나이라면 정말 열성적으로 사랑하고, 고백하고, 또 차이기도 하고 이별해보기도 해야 한 대요. 그런데 전 형에게 고백의 거절을 듣는 것도 이별하는 것도 싫어요. 그게 가장 싫어서 사랑은 하되 고백은 하고 싶지 않은 거 에요.

형은 절 아끼기 때문에 안타까운 눈으로 미안하다, 사과하겠죠. 전 형이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게 싫어요. 형은 아무 잘못 없거든요. 그런데 형, 어제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형의 얼굴은 이제껏 보지 못한 거였는데요. 어차피 고백할 생각 없다고, 형은 후련하게 웃었잖아요. 근데 나 한번만 안아주면 안 될까? 형의 부탁에 전 처음으로 형을 안았어요. 같이 농구를 하다 우리 팀이 이긴 것도, 축구를 하다 슛을 성공시킨 것도, 형이 싫어하는 수업이 휴강된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안을 수 있으니까 좋더라고요. 형, 정말 청춘이란 거 별 거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형도 제가 안았던 그 날에 울었던 거겠죠? 겨우 형이 우는 거에 마음이 무너지듯 아프다가 결국 형이 좋아하는 사람과 잘 될 수 없는가보구나 기뻐하는 저처럼 초라한 것 같아요. 사실 정말 초라한 건, 형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가 이내 이것이 사람들이 말한 청춘의 한 페이지인가 싶어 쓸쓸한 마음을 위로했다가, 결국 형을 잊지 못해 이런 글이나 익명으로 쓰고 있는 저겠죠. 형은 찬란한 사람이니까 저처럼 구질구질한 글 따위 쓰지 않을 거 에요. 그런 형을 좋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박병찬은 글을 전부 읽었다. 고민하다 친구가 보낸 그 글의 사진을 저장했을 때, 수업이 끝났다. 가방을 챙겨 들고 강의실을 나와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익숙한 갈색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병찬과 친한 동기 한 명이 학식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래, 답장을 하고 박병찬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승훈이가 보낸 거 봤어?”

“어, 그 에타에 올라 온 글?”

“응. 완전 아련하지 않냐. 하필 또 형이란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만큼 가슴을 저미는 게 없다.”

“그런가.”

이뤄지지 않는 사랑인 건가? 박병찬은 앞에 놓인 제육볶음을 숟가락으로 한참 비볐다. 안 먹어? 동기의 재촉에 번쩍 정신을 차려 고개를 살짝 흔든다. 먹어야지, 제육볶음은 매웠다.

 

박병찬은 5년 동안 핸드폰을 세 번이나 바꿨다. 한 번은 술을 먹다 바닥에 떨어뜨려 액정이 나갔기 때문이고, 한 번은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틀어놓다가 실수로 변기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핸드폰을 바꾼 건 좋아하는 회사의 새로운 시리즈가 나왔기 때문이다. 박병찬은 스스로의 취업을 축하하는 선물로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꿨다. 초기화 된 새로운 기기에 전 핸드폰에 저장 된 전화번호부를 옮기고 사진 한 장을 옮겼다. 5년 간 핸드폰을 세 번이나 바꾸면서 늘 해 온 일이었다. 텅 빈 앨범에 딱 하나 저장 된 사진, 박병찬은 쉽사리 즐거운 여행을 했던 추억이나 친구들과 뺨을 맞대고 웃으며 찍은 사진들을 까먹기도 하고 지운 적도 있으나 그것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취업 축하한다!” 

시끄러운 누군가의 목소리로 시작 된 술자리였다. 주인공인 박병찬의 앞에 놓인 잔은 비워지는 일 없이 자꾸만 술이 채워졌다. 야, 내 축하주는 안 마시냐? 친구들의 우스개에 박병찬은 연거푸 잔을 집어 술을 목 안으로 털어내야만 했다. 한 잔, 두 잔, 세 잔, 점차 눈이 풀리고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흔들거리는 박병찬의 어깨에 누군가 팔을 둘렀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면 평소 친하던 동기 녀석의 웃는 낯이 있다. 뭐냐, 박병찬의 늘어진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병찬이, 취했어? 자꾸 흔들거려.”

“조금 어지러워.”

 

잠깐 쉬고 있어, 더 이상 마시지 말고. 동기의 말에 박병찬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취한 건 박병찬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다섯 명쯤 모인 친구들 중, 한 명은 자리를 비웠고 두 명은 무언가 진지한 대화를 취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발음으로 나누고 있었다. 박병찬의 옆에 앉아 어깨에 팔을 두른 녀석도, 아예 멀쩡하진 않은 모양으로 뺨을 박병찬의 정수리에 부비거나 헤픈 웃음을 이유 없이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너 걔 기억나?”

“걔?”

“기…. 기호식?”

 

아아, 박병찬은 무거운 고개를 꾸벅이며 살짝 웃었다.

 

“기상호, 기상호야. 바보야. 그것도 기억 못 하냐?”

“나 걔 봤거든. 여기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래.”

“그래?”

“대학 다닐 때, 엄청 친하지 않았어? 무슨 시골 똥개처럼 널 따랐잖아.”

 

그랬다. 박병찬도 훤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연락 안하는 것 같더라?”

 

박병찬은 흔들리던 고개를 왼쪽으로 눕혔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는 동기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몸이 기대진다. 박병찬의 어깨에 두르고 있는 녀석의 팔 무게만이 취한 와중에 역력했다.

 

“그게.”

 

처음으로 해보는 이야기인데. 나 기상호 좋아했어. 당연하잖아. 기상호는 귀여웠고, 나를 잘 따르고, 이상한 말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하니 같이 있으면 웃음이 멈추질 않았거든. 그런데 겨우 그거 때문일까? 확신할 수는 없는데, 난 그냥 기상호가 좋았어. 부슬한 머리카락 밑에서 나는 산뜻한 냄새도 좋았고. 깔끔하게 깎여진 손톱이나 자연스럽게 날 잡아당기는 악력도 좋았고, 무슨 말을 했을 때 금방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뺨도 좋았던 것 같아. 기상호가 나한테 해준 말이 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기상호를 처음 보게 된 건 우리 과 교수님의 교양수업을 들을 때거든. 고학년들이 듣는 수업인데 신입생이던 기상호가 멋모르고 강의를 신청한 거야. 정정 기간 때 바꾸려고 해도 그 시간대 괜찮은 수업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들었대. 그런데 바보같이 교재를 잘못 사왔어. 옆에 앉은 사람한테 쉽게 '혹시 교재가 이게 아닌가요?' 묻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어.좀 안쓰러운 마음에 교재 그거 아니라고, 알려줬거든.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꿈뻑이는데 정말 네 말처럼 할머니 댁에서 본 시골 똥개가 생각나더라.

나중에 가서 기상호가 하는 말이, 자기는 항상 존재감이 썩 큰 편이 아니라서 남들에게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는데 자길 단번에 알아봐준 사람이 나뿐이었대. 그 어렵지도 않은 이름 하나를 단번에 외워준 사람이 나뿐이었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불러주는 사람이 나 뿐이었대. 그러면서 쑥스럽게 뺨을 긁더라. 그 솔직함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고, 또 기상호에게 유일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는 우연들이 행복했어. 그런데 우리 같이 술 먹은 적이 있거든. 근데 누가 기상호한테 소개팅 주선을 해주려고 했단 말이야? 기상호가 머뭇거리더니 자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소개 같은 건 받기 좀 그렇다고 거절하더라. 누굴까, 나는 무심코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상상은 점점 걷잡을 수 없어졌어. 기상호랑 중학생 때부터 친했다던 그 오대오 머리를 한 동갑내기 남자일까, 아니면 저 누나 예쁘지 않아요? 라고 내게 떠보듯 물어봤던 총학생회 소속의 그 여자일까. 확실한 건 나는 아니었을 거야. 나는 남자잖아. 얼굴…. 이 못났다는 소리를 들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상호의 취향에서 거리가 먼 얼굴이란 확신 정도는 있었다고. 기상호가 나를 존경하고 잘 따르고는 있지만, 정말 손을 깍지 껴서 잡아보고 어깨를 맞대고 단 둘이서만 시시덕거리며 둘 만의 비밀이라도 만드는 건 상상도 안 했을 거야. 왜 나는 스무 살의 기상호가 앞으로 맞이할 연애에 완전히 배제 되었을까? 이뤄지지 않는 사랑은 가슴을 저미게 한대. 나는 부정하다가도 결국 공감했어. 어쨌든, 기상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한동안 엄청 우울했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기상호가 너무 좋아서, 그 교양 수업 이후로 내 생활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어울리던 기상호를 잃기가 무서워서, 그래서 버리기로 결심했어. 어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너. 그거 아냐.

 

박병찬의 몸이 한 번 흔들렸다. 자세가 불편한 건지, 동기가 박병찬을 한 번 떼어낸 후 다시 기대게 한 모양이었다.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내가 널 좋아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너를 보기 어려워. 라고 말하느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가장 좋은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그 날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자고 불러냈고 이야기를 꺼냈어. 나 사실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기상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어. 그야 기상호 표정은 좀 읽기 어렵잖아? 불쌍하게 축 쳐지는 건 알아보기 쉬워도 대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이잖아. 그냥 그래요? 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라고. 그래서 한 번 용기를 냈어.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라고. 기상호의 팔 무게는 순간이었는데 도무지 잊히지 않아. 아까 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처럼 비슷한 상황이면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아아, 이건 기상호의 팔이 아니야. 라고. 어라, 그런데 왜 지금은….

 

“병찬 햄.”

 

수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박병찬은 부스스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가느다랗게 뜬 시야 사이로 동기가 입고 있던 회색 맨투맨이 아니라 검정색 후드 집업이 보였다. 박병찬의 손이 저절로 그 후드의 옷자락을 쥔다.

 

“어라.”

“병찬이 형.”

 

박병찬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사실, 고개를 들기 무서웠으나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줘요. 아까 했던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기상호였다.

 

“네가 쓴 글이지.”

“햄.”

“네가 쓴 거 맞지.”

 

이걸 묻기가 어려워 도망쳐야만 했다. 무언가 토론하던 두 사람의 대화가 싸움으로 번지는 탓에 나머지 일행은 전부 술집을 나갔다고 한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기상호는, 동기 녀석이 우연히 마주친 날 번호를 땄고 오늘 취기에 여기 네가 그토록 따르던 박병찬이 있으니 시간 되면 놀러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박병찬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라는 말에 자신을 강하게 안아주었던 기상호를 떠올렸다.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었다. 박병찬은 그 날 이후로 기상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박병찬의 연락이 끊기자, 기상호 역시 먼저 연락을 주지 않았다. 박병찬은 친구가 보내 준 캡쳐 화면 하나를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글을 닳도록 읽었다. 박병찬은 이 글을 쓴 것이 기상호일 거라 확신을 했다가도,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정말로 기상호가 박병찬을 좋아했을까? 박병찬은 어린 시절, 긍정하고 낙관하던 미래가 부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 경험의 위로 기상호의 부정까지 쌓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도망쳤다. 병찬 햄은,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언젠가 기상호가 중얼거리듯 박병찬을 치켜 세운 말들이 박병찬을 더욱 괴롭혔다. 박병찬의 청춘은, 정말 빛나고 찬란했던가? 아니다. 박병찬은 자신의 청춘이 지리멸렬하고 비겁해 참을 수 없던 밤들이 있다. 분명 존재한 시간들이다. 박병찬은 아직도 취기에 어지러운 머리로, 본인이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지 수 번 의심을 했다. 기상호는 박병찬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상호야. 나는.”

 

말할 것이 많았다. 아마 그건 기상호가 청춘이라 뜻했던 모든 것에 가까워 이야기는 무척 길어질 것이 분명했다. 기상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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