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

옹수의 상뱅 by 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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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꿈을 꿨다. 알람이 울리기 겨우 오 분 전에 먼저 눈이 뜨였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창밖은 어슴푸레 했다. 기상호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슨 꿈을 꿨더라, 떠올리려 했는데 잘 되진 않았다. 다만 포근한 감각과 유쾌한 감정의 잔여는 확실했다. 누군가의 작은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코를 고는 건 기상호 옆에 누워 아직 자고 있는 이현성이었다. 그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가 신음하며 입고 있는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몇 번 긁었다. 기상호는 혹여나 누군가 잠에서 깰까, 조심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숙소에 남아있는 건 기상호와 김다은, 그리고 이현성 뿐이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 되었다. 공태성은 숙소에 있던 자신의 적은 짐을 빼고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 방학에도 훈련은 여전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공태성은 방학 동안만큼은 통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상호, 니는? 보스턴 백 하나면 충분한 적은 짐을 모두 챙긴 공태성이 기상호에게 물었다. 전 뭐, 일단 숙소에 남아있으려고요. 다은 햄도 숙소에 있을 거라 하고. 그러냐. 공태성은 현관을 나가기 전 좁은 숙소를 한 번 돌아보았다. 겨우 두 명 나갔을 뿐인데 엄청 넉넉해 보이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성준수와 진재유는 각자 고향 집으로 돌아간 지 꽤 되었다. 둘은 같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올해 낸 성적으로 지망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수시 발표가 있던 날, 성준수와 진재유는 각자 자신의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곧바로 숙소를 나갔다. 정말, 겨우 두 명이 빠졌을 뿐인데 숙소는 허전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감상을 입 밖으로 냈을 때, 김다은은 여전히 태평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로 그야 반올림해서 180cm와 190cm가 빠졌는데 티가 안 나는 게 오히려 이상함.건조한 대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재유햄, 후하게 반올림 해줬네요. 기상호도 감상에 젖는 일이 쑥스럽게 느껴져 농담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거실로 나와 기상호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리고 나올 때 손에 쥐고 나온 핸드폰의 잠금 화면을 열었다.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알림이 떠있었다. 하나는 정희찬에게서 온 것이었고, 또 하나는.

[ 종일 자취방 알아보다가 이제 집에 들어왔다. 피곤해 죽겠네. PM23:07 ]

기상호는 선 채로 화면을 눌렀다.

그래서 좋은 방은 찾으셨…. 문장이 지워진다.

서울 방값은 장난 아니라던데….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은 푹 쉬세요. 저는 오늘 일정이 없어서 아마 희찬이랑 다은햄이랑 떡볶이 먹으러 갈 것 같아요. 저희 학교 앞에 떡볶이 집이 있는데, 정말 맛있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채팅 화면에 기상호가 잔뜩 긴장해 만들어낸 문장이 떠오른다. 가끔은 이 재빠른 속도가 기상호는 야속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빠른 건 우스우리만큼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 또 받침 하나, 결코 가볍게 여긴 적 없었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변명을 해본다. 아침이다. 상대가 메시지를 확인하면 사라지는 1은 아직 그대로였다.

기상호는 냉장고에 넣어둔 식빵을 꺼내 기름을 얕게 두른 프라이팬 위에 올려 구웠다. 잠깐 딴 생각을 했는데, 식빵 겉면이 가무잡잡해졌다. 약간 쓴 맛이 나는 빵을 씹고 우유를 따라 마셨다. 한 잔 더 마시려고 우유를 집었는데, 방금 다 먹은 모양이었다. 쪼르륵, 겨우 한 모금정도의 분량을 뱉어 낸 통은 텅텅 비었다. 냉장고를 열자 우유는 없었다. 이현성이 잠에서 깨면 분명 이 추운 날씨에 기상호 엉덩이를 발로 꾹꾹 밀어 우유를 사오게 시킬 것이 분명했다. 아아, 하필이면. 그냥 간장계란밥이나 해먹을 걸. 빵을 먹는다고 괜히 우유를 먹어서. 핸드폰이 작게 진동했다.

 

[일찍 일어났네? AM.7:59]

 

기상호는 서둘러 빵부스러기 묻은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화면을 눌렀다. 액정 위는 손가락에 묻어 있던 기름 때문에 미끌미끌 거렸다.

오전 아홉시가 넘어서야 이현성과 김다은이 기상했다. 기상호의 예상대로 이현성은 냉장고 안을 확인하자마자 기상호 이름을 불렀다. 거실에 앉아 TV에 집중한 척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이, 기상호. 우유 네가 다 먹었지? 사온나. 다은햄, 같이 가실래요? 기상호가 묻자 김다은은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뒤 고개를 절레 저었다. 추워서 싫음. 혼자 다녀오셈. 기상호는 걸어두었던 롱 패딩을 꺼내 입었다. 정말 날이 추웠다. 패딩 주머니 안에 쑤셔 넣은 핸드폰의 진동에 꺼내들면 정희찬으로부터 온 메시지 알림이 보였다. 내용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귀여운 것으로 유명한 고양이의 사진 세 장이었다. 기상호는 그것을 저장했다. 손가락이 금세 얼어붙어 둔하게 움직였다. 정희찬과의 채팅방을 나가 그 아래 박병찬과의 채팅방으로 들어가 방금 저장한 사진을 보냈다. 귀엽죠?

점심이 되었을 때, 이현성은 약속이 있다며 숙소를 나갔다. 김다은과 기상호도 외투를 걸치고 숙소를 나왔다. 그러자 건물 1층에 서있던 정희찬이 두툼한 겨울옷을 입었음에도 여실한 가는 팔을 높게 들고 휘휘 흔들었다. 김다은과 기상호가 정희찬 곁으로 가면, 정희찬은 입고 있는 패딩 주머니에 양 손을 깊숙이 넣었다.

“으, 춥다.”

“날씨 미친 것 같음.”

“얼른 떡볶이로 따뜻하게 몸 데우러 가자고.”

“순대 필수임.”

정희찬은 늘 그렇듯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에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추위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도 마치 추위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처럼 웃어댔다. 기상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앞서 걷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학교 앞의 분식집은 한산했다. 올해 3학년이 되어 자율학습을 나온 학생들 몇 명이 방학이라 스산하게만 느껴지는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김다은과 정희찬은 어제 저녁 방송한 예능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가만히 들어보면 예능에 출연한 아이돌에 관련한 주제인 것 같았다. 기상호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한 그대로 자신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입김이나 응시했다. 가게 안 역시 한산했다. 손님은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학생 두 명 외엔 없었다. 정희찬은 익숙하게 사장님과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떡볶이 4인분이랑 순대 2인분, 그리고 모둠 튀김도 주세요. 오뎅도 좀 먹을까, 기상호가 말하면 정희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배부르다고 다 남기는 거 아이가.”

“정희찬 같은 말라깽이는 이해 못함.”

 

어우, 다은햄. 정희찬이 부루퉁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데 정희찬, 진짜 이제 슬슬 벌크 업 해야 하는 거 아님?”

“안 그래도 요즘 식사량 늘리고 있다.”

“보충제라도 먹어 보셈.”

“근데 내 체질이 원래가 마른 체질이라. 유전이다, 유전.”

 

곧 사장님이 넓은 접시 위에 떡볶이를 한 가득 퍼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김다은은 포크를 손에 쥐고 오예, 외쳤다.

 

“신유고의 강인석,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데. 금마 몸 진짜 단단하데. 서교대 붙었다는 거 진짜가.”

“강인석을 목표로 하는 건 양심 없는 거라고 생각함. 멸치가 바로 고래가 되긴 좀 어렵잖음.”

“은근히 다은햄 말하는 거 들어보면 비관적이라니까. 맞지, 상호.”

“비관적이라니. 팩트를 잘 찌르는 날카로운 성격이라 해주셈.”

“상호?”

 

 

어, 내 불렀나. 기상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한다고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데? 연락 올 데라도 있나?”

“아, 아이다. 그런 거. 그냥 멍 때렸다.”

 

정희찬은 기상호 쪽으로 몸을 가까이 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한참이나 기상호 얼굴을 바라보았다. 와이라노, 밥이나 무라. 기상호가 더듬 포크를 들고 떡볶이의 떡을 찔렀을 때, 정희찬이 입을 열었다.

 

“이거 여자라도 생긴 거 아이…지. 그럴 리가 없지.”

“정희찬, 유머감각이 꽤 상승한 듯.”

 

아, 왜요. 둘의 반응에 기상호가 억울한 것처럼 눈썹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이랬는데 알고 보니 내가 카사노바고? 연애 고수고? 덧붙여진 말에 정희찬이 푸하, 웃음소리를 냈다. 와 웃는데. 기상호는 짜고 달짝지근한 떡을 씹었다.

 

“내가 봤을 때 둘은 연애 쪽으론 가망이 없음.”

“뭔 소리고! 내는 괜찮아도 상호랑 다은햄이 문제지!”

“아님. 나는 대학가면 여자가 줄을 설 거라고 그랬음.”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쌌는데?”

“우리 엄마가.”

“아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자애로우심! 개 멋있는 소리를 줄여 개 소리라 해봤다.”

“어색한 탈룰라. 0.3점 드림.”

 

연애라…. 정희찬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기상호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뭔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기가?”

“아, 아니! 무슨!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차갑고 칠흑 같은 심장을 가진 남자로 사랑이란 감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고…크윽, 어이, 사랑? 후후. 우습군. 우스워.”

“이 모양이니 연애를 하겠냐고.”

 

가게 문이 열렸다. 지상고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밖이 꽤 추웠는지 여학생의 코끝이 빨갛다. 미친, 날씨 단디 도랐네. 얼어 뒤지는 줄 알았다.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하는 여학생의 옆에서 남학생은 발을 동동 구른다. 괘안나? 내 핫팩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다. 마이 춥지. 어카노. 정희찬과 김다은, 그리고 기상호는 빈 테이블에 착석한 두 사람을 응시했다. 뺨이 얼음장이네. 봐라. 남학생은 여학생의 뺨을 양 손으로 부드럽게 쥐었다. 남사시럽게 이런 거 좀 하지 말라고. 그보다 니 수족냉증이라 더 차갑다! 여학생은 투덜거렸지만 영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학생들, 주접은 이따 마저 하고 뭐 먹을긴데. 사장님의 등장에서야 둘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헤, 소리 내 웃으며 주문을 했다.

 

“갑자기 나 심장이 차가워짐. 가게 안 에어컨이 돌아가는 것 같음.”

“연애가 인생의 전부는 아이다, 다은 햄. 힘내라!”

“왜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날 보는 거임? 너나 힘내셈.”

 

태성햄도 연애하는 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겠나. 정희찬의 말이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직 공태성이 숙소를 나가기 전, 그는 저녁쯤에 잠시 외출을 했다 상기 된 얼굴로 돌아오더니 대뜸 내, 연애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했었다. 요즘은 상상연애도 연애로 쳐주나. 이현성의 말에 공태성은 매서운 눈을 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아, 쫌! 진짜라고요! 이미 수시로 서울권 대학에 붙은 서은재와 잠깐 만나 충동적으로 고백을 했고, 은재가 그것을 수락했다고 아직 꿈을 꾸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공태성은 말했다. 꿈을 꾸는 사람 같은 얼굴, 기상호는 공태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코 자신의 뺨을 만졌다. 이현성은 그 이야기에 가장 신나보였는데, 짓궂은 표정만큼은 지우지 않은 채로 멋대가리 너무 없는 고백 아이가, 킬킬 웃었다. 아, 감독님이 뭘 아시겠냐고요. 그냥, 얼굴 보자마자 마음대로 입이…. 에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 사람들한테 하고 있는 거야. 성질 낸 공태성은 씻는다며 화장실로 들어가 자리를 피했다.

 

“솔직히….”

“응.”

“은재님이 아까움.”

“에이, 태성햄이 어때서. 물론 은재누님이 아깝긴 하지만.”

“역시? 은재님은 대학 가는데 곧 차이지 않을까 싶음. 대학 가면 멋진 남자가 얼마나 많겠음.”

“태성햄 차이면 체육관 분위기 겁나 살벌하겠네.”

“대학가면 세상이 훨씬 넓어질 텐데 고등학교 다니는 코 찔찔이가 보이기나 하겠음?”

“에이, 햄은 사랑을 너무 모른다.”

 

공태성이 만약 이 대화를 들었다면 왜 차이는 걸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 되냐며, 의자를 한 번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에 예민하고 거친 반응을 보인 건, 당연하게도 자리에 없는 공태성이 아니었다. 서비스로 나온 오뎅 국물을 마시던 기상호였다. 어흑, 하는 소리와 함께 마른기침을 시작한 기상호의 턱으로 오뎅 국물이 흘렀다.

 

“더럽.”

 

김다은이 질색했고, 정희찬이 부산스럽게 휴지를 뽑아 기상호의 턱을 닦아주었다. 정희찬이 건네준 휴지를 받아들고 기상호는 연신 기침과 함께 턱을 적신 국물을 닦아내었다. 그 시끄러운 소란에 막 계산하고 나가려던 학생들과 이제 막 떡볶이를 먹으려 포크를 든 커플이 기상호 쪽 테이블을 눈짓했다.

 

“괘안나?”

“어, 어. 사례가 들려가.”

 

기상호는 목을 가다듬으며 스텐 컵에 가득 채운 물을 마셨다.

 

“상호, 아까부터 영 이상한데. 진짜 뭔 일 없는 거지?”

“뭐. 딱히 별 일 있는 건 진짜 아이다. 그냥…. 그냥….”

테이블에 올려 둔 기상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 오, 떡볶이 맛있겠다. 조형고 앞에 떡볶이도 진짜 맛있는 데 있거든. 오늘 나도 초원이랑 같이 가자고 해봐야겠다. pm.13:23 ]

 

아, 진짜요? 햄, 그럼 나중에 저 인천 놀러 가면 데려가 주세요.

 

[ 엥? 부산에서 올만한 맛 집은 아닌데;; 너 떡볶이 겁나 좋아하나보다. pm. 13:25 ]

 

아니었다. 떡볶이를 좋아하지만, 열광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기상호가 좋아하는 건.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이 계산하기, 시작!”
“아, 다은햄! 반칙이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느라 후다닥 가게를 뛰어 나가는 두 사람을 어리둥절 바라보던 기상호가 계산을 해야 했다.

 

 

 

추웠기 때문에 거리를 걷기도 잠시, 곧 숙소로 가기로 했다. 집 가면 할 거 없다는 정희찬 역시 동행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김다은은 고향 집으로 갈 것이라 말했다. 상호, 니는. 정희찬이 물었다. 나도, 뭐 다은 햄 갈 때 같이 나가야지. 크리스마스 날은? 정희찬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김다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메이플 2배 이벤트.’ 라고 대답해 정희찬은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상호, 니도 엔젤릭 버스터랑 함께 하나.”

“아, 글쎄. 잘 모르겠다.”

“태성햄은 은재누님이랑 보내겠지? 부럽다, 여자 친구랑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어차피 정희찬 니 여자 친구랑 크리스마스 보내 본 적 없지 않음?”

“햄, 경험이 중요한 게 아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특별한 날을 보내는 그게 중요한 기다!”

 

그런가, 김다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크리스마스? 아마 낮엔 조형고 애들이랑 놀다가 저녁엔 가족이랑 보낼 것 같아. PM.14:34 ]

 

 

정희찬은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희찬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마신 이현성이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 다은이 다음 주에 집으로 간다고? 가족들이랑 잘 지내고 와라. 너무 많이 먹어가 탈나지 말고. 알겠지? 가장 마지막으로 씻은 기상호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이현성과 김다은은 곤히 잠든 상태였다. 기상호는 로션을 대충 얼굴에 펴바른 뒤에 자신의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덮고 눈을 감았지만 바로 잠에 들 수 없어 밝기를 가장 어둡게 한 뒤 핸드폰을 켰다. 내 집 도착했다, 라는 말과 정희찬을 꼭 닮아 정신 사나운 이모티콘이 붙어 메시지가 와있었다. 박병찬으로부터 온 답장은 없었다. 저녁 아홉시쯤부터 기상호가 보낸 메시지는 읽지 않은 채였다. 바쁘신 건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아니면 딱히 답장을 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일수도 있겠지. 오히려 후자가 그럴 듯하다. 박병찬은 기상호의 학교 선배가 아니고, 사이가 돈독하다 할 만큼 얼굴을 자주 보거나 유대가 깊은 사이 역시 아니었다. 한 번의 경기를 했고, 조형고와의 합동 훈련에서 한 번의 대화를 했고, 원중고와 경기가 있던 전 날 한 번의 인사를 했다. 그 후 우연찮게 한 번의 식사를 같이 했을 뿐이다. 마주치는 순간들은 짧았고 그 빈도마저 잦을 수가 없었다. 박병찬을 보기 위해선 KTX를 타고도 네 시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마주치길 기도할 수밖에. 그럼 기도 중에 기상호는 의아했던 것이다. 나는 왜 병찬 햄을 마주치길 기도하고 있는 거지. 의문의 답은 허탈할 만큼 단순하고 또 그만큼 명료한 것이었다. 처음 형, 오늘 경기 힘내세요. 응원 메시지를 보냈을 때 박병찬은 고맙다고 답장을 해주었다.

 

고마워.

지상고는 내일 경기 있던가?

 

물음표가 붙은 답장 하나에 기상호는 발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원래 한 순간도 쉼 없이 뛰어댔을 심장이 유독 소리를 크게 내었다. 그렇게 이어진 메시지들, 8kb 무게의 메시지들이 반 년 동안 쌓여 갔다. 과연 박병찬에게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들이 쌓여가고 있을까? 그에겐 대수롭지 않아 공중에서 소실된다 한들 소실을 감지하지도 못할 만큼의 가치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기상호는 몸을 뒤척였다. 박병찬의 매끈한 콧대가 떠올랐다. 가는 입술은 호쾌한 느낌이었다. 쌍꺼풀이 없이 옆으로 잘 찢어진 눈, 정갈한 눈썹, 목덜미를 살짝 덮는 뒷머리, 한 평생 농구를 해왔다고 증명하는 단단한 몸, 짧게 깎인 손톱, 긴 팔과 다리, 기상호, 불러주는 목소리. 목소리.

 

“윽.”

 

기상호는 몸을 웅크렸다. 밤이 되면 불쑥 토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비죽 토해진 건 눈물이었다. 서러울 일이 없는데 서럽고 애달플 일이 없는데 애달팠다. 쓰린 속에 작게 신음하다 잠이 들었는데, 좋은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부드럽게 기상호 손을 감싸 쥐고 자신 쪽으로 당겼는데, 상대의 얼굴을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기상호는 그저 확신하고 싶었다. 아마 그건.

 

 

[ 너도 메리크리스마스. 이모티콘 엄청 귀여운 거 쓰네. 약간 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PM.13:06 ]

 

기상호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정희찬은 동네 친구와 밥이나 한 끼 먹기로 했다고 알려 주었다. 김다은은 정말 메이플 스토리에 전념하고 있는 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조용한 농구부 단체 채팅 방에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라는 간단한 인사들이 올라 왔다. 가장 처음 시작한 건 당연히 정희찬이었다. 그는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그러나 정희찬처럼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은 진재유가 메신저에 기본으로 다운 받을 수 있는 이모티콘과 응, 모두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 답장했다. 김다은이 다음에 빛이 나는 솔로, 라는 말 한마디를 보냈고 진재유의 어리둥절한 물음표가 이어졌다. 기상호 역시 올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그리고 준수햄, 재유햄 다시 한 번 대학 합격 축하드립니다. 메시지를 썼다. 성준수로부턴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니들도, 라는 짧은 말 한 마디가 왔다. 정희찬은 그 화면을 캡쳐 해 준수 햄으로부터 첫 사담 답장! 채팅방에 박제했다. 씨발놈이 뒤지기 싫으면 삭제해라. 성준수의 그 말 뒤로 이현성이 ‘니들도엔 내도 포함 하는기가.’ 말해 단체 채팅방은 아주 조용해 졌다.

 

공태성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단정하게 입은 서은재의 뒷모습이었다. 아마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하다 사진을 찍은 모양이었다. 기상호는 언젠가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키우고 있는 강아지의 사진을 찍었고, 그것이 기상호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었다. 기상호는 가만히 눈을 동그랗게 뜬 강아지 사진을 응시했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즐겁게 웃고 있는 박병찬을 그 위에 덧대 상상해 보았다.

 

“엄마, 기상호 저 새끼 점심으로 상한 거 쳐 먹은 거 아이가. 갑자기 소파에서 발 둥둥 구르고 지랄 육갑하는데?”

 

마침 거실로 나온 기상호의 누나가 웩, 역겹구로, 소리와 함께 기상호를 흘깃 보고 부엌으로 향했다.

 

 

가족들과 거실에 모여 영화를 한 편 봤다. 크리스마스에 관련 된 가족 드라마였는데, 기상호는 누나의 놀림이 있을까 꾹 참아내다 결국 펑펑 울어 버렸다. 악, 미친. 엄마 얘 울어, 상호 감수성 미쳤네, 우야노,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기 다 글렀다, 야. 경제가 어려워져서 하품하다 눈물 흘리는 애들한테도 요즘은 선물 안 준다 카더라.

 

“쫌 하지 말라고. 나 산타 안 믿는다고!”

“오오~ 어른 다 됐네, 기상호~!”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해봤으나 기상호의 누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땐 초밥 뷔페를 가 외식을 했다. 뷔페 안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의 마지막을 어쨌든 기념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기상호, 연어 좀 긁어 와봐라. 이럴 때 아니면 니 멀대같은 키 쓸 데가 없잖아. 누나의 말에 기상호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접시를 들었다. 내 농구한다고. 왜 쓸 데가 없다 하는데. 투덜거리지만 기상호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연어 초밥을 잔뜩 접시에 담았다. 기상호는 우악스럽게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리고 그 사진을 찍어 박병찬에게 보냈다.

 

[ 오, 엄청 맛있겠다. 나는 그냥 갈비 먹으러 왔어. 근데 누나 분 정말 잘 드신다. PM.20:12 ]

 

누나? 기상호가 사진을 자세히 보니 접시 뒤로 우악스럽게 연어 초밥을 입에 넣어대는 누나가 덩달아 찍혀 있었다. 아뿔싸, 혹시나 누나한테 들킬까 기상호는 괜히 핸드폰 화면의 밝기를 내렸다.

 

[ 누나 분이랑 상호 너랑 진짜 닮았다. PM.20:15 ]

 

형,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형이라고 해도 저 화낼지 몰라요.

 

집에 도착하자 누나와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잔뜩 늘어놓았다. 누나는 크리스마스인데 애인도 안 만나나. 말했다가 흠씬 얻어맞을 뻔 했다. 부모님을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으나 소용없었다. 이번엔 상호 니가 잘못했다. 얘, 남자친구가 바람 펴가 일주일 전에 헤어졌다 카더라.

아, 엄마! 그걸 왜 말 하냐고! 기상호는 외투를 입고 소화 시킬 겸 산책을 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이미 마트에서 사온 와인을 따서 신난 성인 세 명은 신났는지 깔깔 웃으며 그래, 미성년자는 건전하게 산책이나 하고 온나, 말했다.

 

아, 저 잠깐 산책하러 나왔어요. 부모님이랑 누나가 술 판 벌려서.

 

전화가 왔다. 박병찬이었다.

 

“여, 여, 여여여여여여, 여보세요.”

“어? 나 박병찬인데. 전화 어려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좀 놀라서. 전화 완전 가능해요.”

 

전화기 너머 박병찬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햄도 밖이에요?”

“응, 가족들이랑 술 한 잔 했거든. 바람 쐬러 나왔다가 너도 산책 중이라고 해서.”

“그렇구나. 근데 햄, 아직 해 안 바뀌었는데 술 마셔도 돼요? 고등학생이면서….”

“엥, 나 놀리는 거야? 스물 하나잖아, 나.”

 

그래도 신분은 고등학생 아닌가. 생각하지만 기상호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걷다보니 동네 근처에 벤치가 보여 그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겨울밤은 당연하게도 추웠다. 뺨이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는 잘 보냈어?”

“네, 초밥도 엄청 많이 먹고. 햄은요?”

“나도. 일단 대학이 정해지니까 기억 중에 가장 편안하게 보냈던 거 같아.”

“낮에는 농구부 사람들이랑 보내셨다면서요.”

“응, 초원이랑 성훈이. 다른 애들은 뭐, 애인 만나러 가거나.”

“초원 햄이 햄 진짜 좋아하나 봐요.”

“그런가? 잘 따르긴 하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상호는 언 입을 살짝 벌렸다가 초라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초원을 질투하는 말을 숨기는 대신 지금 당장 보고 싶어요, 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상호는 아직 애인 없나?”

대답을 고르는 기상호보다 먼저 박병찬이 물었다. 기상호는 어깨를 넓게 폈다.

 

“아, 네. 네. 없어요.”

 

긴장한 까닭이다.

 

“그렇구나. 하긴, 농구만으로도 바쁘니까.”

“뱅, 아니 병찬 햄은요?”

“나? 있었으면 내가 오늘 초원이네랑 놀았겠냐.”

 

장난스럽게 박병찬은 웃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대학 가면 애인 생긴대요.”

“그런 말은 정말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릴 정도다.”

“그래요?”

“응, 감독님도 그렇고 다들 그랬거든.”

“그래서 형은 어때요? 연애 하고 싶어요?”

 

정말 집 밖을 걷는 도중인지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추운 걸까, 박병찬의 얕은 호흡 소리가 선명하다.

 

“음. 그러려나. 너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해.”

“네?”

“어어, 그냥. 자기 일 열심히 하고, 귀엽고, 또…. 미안, 내가 좀 취했나.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했네.”

 

아우, 춥다. 얼른 들어가, 기상호. 나도 집 들어가야겠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기상호는 화끈거리는 낯을 양 손으로 감쌌다. 그러니 집으로 들어가는 건 한참 뒤여야만 했다.

 

 

1월 1일 신정을 집에서 보내고 다음 날, 기상호는 숙소로 향했다. 기상호보다 먼저 도착한 김다은이 거실에 누워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온 기상호를 반겼다.

 

“떡국은 많이 먹었음?”

“네 그릇 먹었어요.”

“왜 네 그릇?”

“제 맘이죠.”

“사춘기임?”

 

김다은은 몸을 한 번 굴렸다. 기상호는 어깨에 둘러 멘 보스턴백을 벗어 방으로 갔다. 거실에서 김다은이 목소리를 키웠다.

 

“곧 님 생일 아님?”

 

기상호는 옷가지를 꺼내다 잠깐 멈칫했다. 생일이 별 건 가요. 옷을 정리하다 문득 생각나 거실 쪽으로 기상호는 목을 뺐다.

 

“선물 줄 거 에요?!”

대답은 없었다.

 

 

“오, 이것 봐라.”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점심 시간이었다. 체육관에 앉아 배달로 시킨 짬뽕을 먹던 정희찬이 핸드폰을 기상호 쪽으로 기울였다. 뭔데, 화면을 바라보니 SNS 에 누군가 올린 사진이었다.

 

“중학교 때 금마가 조형고 이초원이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더라고. 추천으로 계정이 뜨길래 한 번 봤다. 조형고는 사이 겁나 좋은가 봐.”

 

총 세 장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놀 때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기상호는 뚫어지게 사진을 응시했다. 검지와 엄지로 사진을 확대하면 이초원 옆에 이를 드러내 웃고 있는 박병찬의 얼굴이 커졌다.

 

“나도 할까.”

“인스타?”

“응.”

 

계정 만드는 법 알려줄까. 정희찬이 신나게 기상호와 가까이 몸을 붙였다. 계정을 만들었다. 박병찬의 계정을 찾았다. 팔로우를 했다. 이초원의 계정과 다르게 박병찬의 계정엔 사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농구 선수의 사진 한 장과, 얼굴이 나오지 않은 뒷모습의 사진, 그리고 고양이 사진이 한 장 있었다. 낯이 익은 고양이었다. 고양이 사진의 댓글란엔 이초원이 댓글을 남겨 놓았다. 귀여워요, 형네 고양이? 아니, 친한 동생이 보내 준 사진이야. 박병찬의 답 댓글을 한참 응시하다 기상호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기상호는 다시 SNS 에 들어가 아직 아무 사진도 올라가지 않은 자신의 계정에 사진을 올렸다. 연어 초밥 사진이었다.

 

기상호 개새끼야, 이거 인스타 네 계정이지. 사진 내려라, 뒤지기 싫으면. 지금 너 죽여 버리려고 지상고 가기 3초 전.

 

누나한테 연락이 왔다.

 

 

기상호의 생일날,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비가 내렸다. 기상호는 숙소 창가에 서서 창을 때리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꿉꿉하고 싸늘하고 침침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전기장판 위에 누워 종일 빈둥대고 싶은 날이었다. 오, 기상호 탄생일에 하늘도 울고 있음.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기상호를 눈치 챈 김다은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게요, 기상호는 기운 없이 대답하고 뒤돌아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갔다. 님, 이제 곧 나가야 하는 거 앎? 김다은의 재촉에 기상호는 울상을 지었다. 오늘 저 몸이 안 좋아요. 작게 토라진 것처럼 말하자 누군가 이불을 확 걷었다. 이현성이었다.

 

“이게 아주 준수 없다고 감독님은 무시하려고 하지.”

“아, 그게 아이라. 진짠데요.”
“얼른 일어나라. 전화 온다, 받고 나와.”

“힝.”

 

다 큰 놈이 힝은 무슨, 이현성의 말에 심술이 난 기상호가 힝이올세, 대답했다가 꿀밤을 쥐어 박혔다. 그리고 울리는 핸드폰을 보니 전화를 건 상대는 박병찬이었다. 어흑, 벌떡 일어나다 발이 꼬여 다시 넘어진 기상호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지켜보던 김다은은 자신의 관자놀이 옆에 검지를 빙글 돌려가며 한숨과 함께 방을 나갔다.

 

“혀엉!”

“어, 어. 이제 곧 연습 가야 하는 시간인가?”

“아뇨, 아뇨. 전화 완전히 가능해요.”

“그래? 또 완전히 가능해?”

 

박병찬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상호는 방금 넘어지면서 부딪혀 아리는 무릎을 꿇고 주먹을 말았다. 누군가 본다면 군기가 잡힌 군인으로 볼지도 모를 만큼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게 별 건 아니고, 보니까 오늘 생일이지?”

“마, 맞아요. 생일.”

“생일 축하해. 뭐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너무 비싼 건 말고.”

 

기상호는 숨을 헉, 삼켰다. 그럼요, 형. 저 오늘 만나줄 수 있으세요? 그 말에 놀란 건 박병찬이다. 부산까지 가기엔 좀 갑작스러운데. 아뇨, 제가 갈게요. 네가? 여기까지? 네. 엥, 진짜? 오늘? 네. 저 어차피 오늘 일찍 끝나거든요. 그러니까 갈게요. 대, 대신 시간이 좀 걸려서 밤 열시나 열한시 쯤 도착하는데 재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너무 뻔뻔한가. 더듬더듬 쏟아내는 기상호의 말들에 박병찬은 잠깐 조용했다.

 

“그러면 기상호, 나 대학 때문에 학교 근처에 방 얻었거든. 전부는 아니지만 짐도 얼추 옮겨놔서…. 자취방 주소를 알려줄게. 그 쪽으로 올래?”

 

너무 무리다 싶으면 안 와도 되니까. 박병찬의 말에 기상호는 박병찬이 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갈게요, 무조건 갈게요. 정말 상관 없어요. 폭설이 내린다고 해도 갈게요. 그 말에 박병찬이 크게 웃었다.

 

“폭설이면 올 수 없지. 하여간. 알았어, 그럼 연습 끝나고 연락해.”

 

체육관을 나와 기상호는 뛰었다. 이현성한테는 가족 행사가 있어 하루만 연습이 어려울 것 같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현성은 얼추 그 거짓말을 눈치 챈 것 같은데 별 말 하지 않았다. 하루정도는 콧구멍에 바람 좀 넣고 와도 되겠지, 그런 마음인 것 같았다. 상호, 돌아와선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알지? 넌 이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벤치 선수가 아니야. 탑급 수비 선수라고. 이현성의 말에 기상호는 밝게 웃었다. 숙소로 가 땀에 젖은 옷을 빨래바구니에 던지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대충 말린 다음 사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숙소를 빠져나왔다. 패딩 주머니에 지갑과 핸드폰이 잘 있는지 확인한 다음 버스를 타고 기차역을 향했다. 긴 시간이었다. 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핸드폰 어플로 확인하니 다행히 열차는 매진이 아니었다.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 어플로 예매를 했고, 기상호는 무사히 열차를 탔다. 자리에 앉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늘 기상호는 지금, 박병찬을 만난다. 형, 저 기차 탔어요. 기상호는 메시지를 보냈다. 곧 박병찬은 서울권 어느 대학 근처의 원룸 주소를 보내주었다. 서울역에서 내린 기상호는 역을 빠져나가기 전, 꽃을 파는 가게로 가 장미꽃을 두 송이를 샀다. 꽃다발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왕복 차비만으로 10만원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남은 용돈이 아슬아슬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기상호는 번잡한 그 넓은 역에서 마치 홀로 이방인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장미꽃 두 송이를 포장한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애를 쓰며 역으로 가 지하철을 탔고, 지도 어플에 의지해 박병찬의 집으로 향했다.

 

“어, 간만이다. 지상고.”

 

지도가 가리키는 원룸 건물 앞에 도착한 기상호가 박병찬에게 이제 도착했다고 전화를 걸 때였다. 시간은 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상고, 기상호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니 이초원이 서있었다.

 

“너 오늘 생일이라며? 병찬 형이 말해줬어.”

“엥, 그쪽이 왜.”

“뭐야, 서운하게 구네. 병찬 형이 너 멀리서 온다고 같이 축하해주자고 해서 왔거든. 우리 집 여기서 사십 분 거리라고.”

 

감사를 해, 감사를. 이초원은 툴툴 대면서 현관문 앞에 섰다. 기상호가 허망하게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신호음이 끊기고 박병찬이 전화를 받았다. 상호야, 도착했어? 다정한 음성이었다.

 

“네, 네.”

“초원이는 만났어? 걔도 도착했다던데.”

“여기 앞에서 만났어요.”

“그래? 같이 올라 와. 초원이 우리 집 비밀번호 알아.”

 

이초원은 현관 비밀번호를 능숙하게 눌렀다. 문이 열렸다. 뭐해, 들어 와. 이초원의 말에 기상호는 발을 움직였다. 발은 물에 젖은 솜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비가 왔지, 그래서 젖었나봐. 기상호는 생각했다. 이초원은 느린 기상호를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장미꽃은 뭐냐? 들고 있는 꽃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선물 받았어요. 생일 선물.”

 

박병찬의 집은 3층이었다. 집은 넓지 않았지만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박병찬은 품이 넓은 티셔츠와 체육복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문을 열어준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웃어보였다. 간만이야, 기상호. 그 웃음에 기상호는 울고 싶어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시켜줄게. 여기까지 차비 많이 나왔지?”

 

기상호는 어색하게 앉아 손가락만 만졌다.

 

“아, 네. 저 그럼 치킨?”

“잠깐만, 초원아 그 때 우리 시켜 먹은 데 맛있었지?”

“네, 형. 제가 그럼 시킬게요.”

 

박병찬은 부엌에서 무언가 꺼내고 있었다. 기상호 옆에 앉은 이초원은 배달 어플을 열고 메뉴를 살폈다. 기상호, 이거 괜찮냐? 이초원의 물음에 기상호는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형, 여기 XX번길 맞죠?”

“응,응.”

“시켰어요. 60분 정도 걸린데요.”

“거기 그래놓고 늘 40분 안에 오더라.”

“그러니까요.”

 

상호야, 드디어 부엌에서 박병찬이 나왔다. 기상호는 허리를 폈다. 박병찬의 양 손 위엔 초가 열여덟 개 꽂힌 케이크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오느라 고생 많았어.”

“어? 병찬햄.”

“급하게 사느라…. 네가 좋아하는 맛 일진 모르겠네.”

 

박병찬은 이초원이 편 좌식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은 뒤,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성냥을 꺼내 들었다. 케이크를 살 때 가게에서 준 것이다.

 

“어우, 조형고 후배한테도 이렇게 후하게 안 해주거든.”

 

이초원은 연신 불만 어린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방 불을 껐고, 박병찬은 몇 번 헛손질을 하다 초에 불을 옮겨 붙였다. 노래까진 좀 어색하니까 생략하자. 뺨을 붉힌 채로 작게 속삭이는 박병찬의 목소리. 기상호는 그대로 크게 숨을 뱉었다.

 

“생일 축하한다, 기상호.”

“고맙습니다, 병찬 햄.”

 

저 새끼, 또 나는 쏙 빼지. 이초원이 기상호를 한 번 노려보았다. 기상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러울 일이 없는데 서러웠다. 애달플 일이 없는데 애달팠다. 그러니 자꾸 토해지는 건 눈물이었다. 누군가 눈물샘을 깊게 찌른 것처럼 주륵, 눈물을 쏟아내는 기상호의 얼굴에 당황한 건 이초원 뿐만은 아니었다. 박병찬은 휴지를 기상호 뺨에 가져다 대며 그 정도로 감동이었어? 물었는데 기상호는 고개만 절레 저을 뿐이었다.

 

기상호는 눈물을 그쳤고, 치킨은 박병찬의 말대로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셋은 TV로 드라마 하나를 켜놓은 채 농구나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병찬은 즐거워 보였다. 커다란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웃곤 했는데, 기상호는 자신의 패딩 위에 올려둔 장미꽃을 떠올렸다. 원룸이었기에 거실에 매트리스가 있었다. 박병찬은 멀리서 와 피곤할 기상호에게 매트리스를 양보했다. 초원이랑 나는 바닥에서 잘게. 그 말에 이초원이 헐, 형. 도대체 누가 후배에요, 대꾸했다. 그럼 초원이가 상호랑 잘래? 박병찬의 말에 이초원은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누웠다. 마지막으로 씻고 나온 건 기상호였다. 기상호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을 보니 핸드폰 하나를 같이 보며 키득 거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병찬 햄, 자요?”

 

이초원은 확실히 잠든 것 같았다. 기상호는 도통 오지 않는 잠을 청할 노력도 없이 몸을 뒤척이다 아주 작게 속삭였다. 으응, 하는 잠투정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병찬 햄.”

“어어, 왜? 잠이 안 와?”

 

낯설어서 그런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다.

 

“좋아해요.”

 

그리고 기상호는 아침 일찍, 아직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둔 채 박병찬의 집을 나왔다. 나올 때 기상호는 빈 손이었다. 장미꽃은 벌써 반쯤 시들어 있었다. 기상호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다 결국 박병찬의 집 휴지통에 장미꽃을 쳐 넣었다. 그리고 기상호는 더 이상 박병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연락이 끊기는 건 기상호가 아침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했던 결심에 비하자면 너무 쉬운 일이어서 맥이 풀릴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뜬 박병찬은 기상호가 없음을 깨닫고 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언제 갔어? 같이 점심이라도 먹고 가지. 아니에요, 형. 어제 너무 감사했어요. 최고의 생일이었습니다. 아니야, 잘 들어가. 상호야. 그 메시지에 더 이상 기상호는 이전처럼 물음표를 붙인 질문으로 말을 잇거나 자신의 일상을 보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연락은 끊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기상호가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연락은 박병찬에겐 연락이 끊긴 지금이 훨씬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것이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직면하게 되었다. 기상호는 더 이상 핸드폰을 붙들고 있느라 분식집에서 계산을 하게 되는 일도, 김다은과 정희찬의 농담에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굴지 않았다.

 

“내일 당장 내가 완벽하고 멋진 남자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기상호의 말에 정희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실연했지.”

“엑.”

“핸드폰에 영혼이라도 팔린 사람처럼 붙잡고 있더니 요즘은 통 그러지 않고. 이렇게 때때로 알 수 없는 말을 하잖아.”

“비슷한 거 했어.”

“차였네.”

“그건 실연이잖아. 비슷한 거라니까.”

“그렇다면…. 고백도 안 한기가?”

“할 필요가 없어졌지.”

왁마, 누구냐. 그 인선인가 하는 친구가? 고백하기도 전에 그 쪽한테 애인이라도 생긴 모양이네. 안 되겠다. 모처럼의 휴일, 우울한 친구를 가만둘 순 없지. 노래방 가자! 붐바야라도 한 번 갈기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겠나. 붐바야 뿐만 아니라 온갖 아이돌 노래를 불렀는데 기분이 썩 나아지는 것 같진 않았다.

 

 

3월이 되어 개학을 했다. 기상호와 정희찬에게도 드디어 후배가 생겼다. 세 명이 들어왔는데, 두 명은 기상호보다 키가 컸고 한 명은 정희찬과 비슷했다. 원중고 때 경기,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정희찬과 비슷한 키의 학생은 수줍어하며 정희찬에게 말했다. 진짜가? 마, 그럼 그 때 경기 뛴 선수 중에 누가 제일 좋았는데. 다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며 귀를 크게 세웠는데, 세 명의 후배 중 두 명은 진재유를 한 명은 성준수를 꼽았다. 니들은 사회생활은 젬병이구나. 공태성이 구시렁거렸다. 또 농구, 농구, 그리고 경기, 그리고 농구.

 

“상호 형, 인스타 해요?”

 

숙소에 누워 뒹굴 거리던 후배A가 물었다. 기상호는 빨래 당번이라 막 베란다에 세탁한 빨래를 널고 거실로 넘어 온 참이었다. 인스타? 기상호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며시 기울였다.

 

“아, 계정은 만들어놨는데 하진 않아.”

“맞팔 하실래요?”

“음, 잠깐만.”

 

기상호는 몇 개월 동안 알림도 꺼놓은 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자신의 계정에 들어가 보았다. 팔로잉 1 팔로워 1. 내가 팔로워가 있었던가, 기상호는 팔로워 란을 확인해 보았다. 박병찬의 계정이었다. 덜컹, 묵직하게 심장이 하강하는 느낌이 들었다. 기상호는 이번에 자신의 알림창을 확인했다. 계정 추천의 알림들 사이에 익숙한 아이디가 보였다. 박병찬이 연어 초밥의 사진에 댓글을 단 것이다.

 

내가 부산 가면 데려가 줘. 20xx. 3주

 

기상호는 박병찬의 계정 아이디를 눌렀다. 작년 조형고 3학년들과 박병찬의 집에서 홈 파티라도 한 모양이었다. 기상호가 보지 못한 최신 사진은 그거 한 장이었다. 김성훈이 높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바닥에 앉아 맥주를 놓고 브이 하는 이초원과 박병찬,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기상호는 정희찬이 이초원 계정을 보여줬을 때처럼 검지와 엄지로 화면을 문질렀다. 확대 된 박병찬의 자취방 벽, 다 비쩍 말라, 보기 흉한 장미 두 송이가 붙어 있었다.

 

“아, 미안타. 내 인스타 안 할 거라 굳이 팔로우 하지 않아도 된다.”

“엥, 그래요? 희찬이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기상호는 잠깐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신발을 신고 숙소를 나왔다. 날이 더웠다. 입고 있는 건 늘어난 흰 티셔츠 위에 체크무늬 남방, 그리고 편하다는 이유로 오래 입어 온 청바지였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박병찬이 전화를 받았다. 기상호는 골목 구석에 서서 신고 있는 스니커즈로 땅 끝을 몇 번 찼다.

 

“…기상호?”

“아, 저…. 그러니까 오늘 성년의 날이잖아요. 그래서 축하드리려고…. 아, 햄은 올해 안 챙기는 건가? 잘 몰라서. 아, 전화는 괜찮으세요?”

“응, 완전 가능해.”

 

기상호는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한 번 문질렀다.

 

“성년의 날 축하드려요.”

“응, 내가 축하 받을 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고마워.”

“그, 선물이라도 좀. 그.”

“으음.”

 

그럼 나 만날래? 무심코 부산을 와버렸거든.

 

 

버스에서 내려 급하게 뛰느라 머리카락이 마음껏 뻗쳤다. 땀에 젖은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기상호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역 앞은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 키가 유독 큰 남자를 찾아 기상호는 하염없이 눈알을 굴리는 것이다.

 

“기상호.”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 박병찬이 서있었다. 기상호는 소매를 늘려 눈가를 문질렀다.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매일 밤 혹시나 이런 날이 온다면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로맨틱한 단어들로 토해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르고 고른 단어와 고르고 고른 문장들이 많았는데. 상상 속의 기상호는 여유롭게 박병찬의 양 손을 잡았고, 이 날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진심을 쏟아냈다. 그런데 정작 나오는 건 눈물뿐이었다. 박병찬을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한지 4개월이 지났는데, 세 명의 후배도 들어왔는데 기상호는 이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떡해요. 나 병찬햄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겨우 이거였다. 울먹거리면서 뱉은 말이었다. 박병찬은 부드럽게 기상호 손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당겼는데, 상냥한 정도의 힘이었다. 기상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러고 보니 형, 저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거의 매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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