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건전한 건현동화 ~왕자님 귀는 강아지 귀~
옛날 옛날에 월야 왕국에 릴리쓰 여왕님과 그녀의 두 아들 서현 왕자, 서린 왕자가 있었습니다. 릴리쓰 여왕님은 아름답고 긴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왕국 최고의 미녀였고, 어머니의 미모를 빼닮은 두 왕자들도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들로 자라났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현 왕자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서현 왕자의 귀가 길어지고 뾰족해지더니, 날이 가면 갈수록 귓바퀴가 커지고 귀의 바깥쪽과 안쪽에 복실복실 털이 돋아나는 것이었어요. 꼭 강아지의 귀처럼요.
서현 왕자는 이 사실을 꼭 감추고 싶었어요. 그래서 귀족들이 보는 곳에서는 항상 터번을 둘둘 둘러 귀를 감추고 있었어요. 심지어 어머니 릴리쓰 여왕의 앞에서도 터번을 풀지 않았답니다. 서현 왕자가 터번을 풀고 귀를 드러낼 때는 서린 왕자와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어요.
하지만 서현 왕자의 강아지 귀는 점점 커지고 쫑긋해져 갔고, 나중에는 터번을 아무리 둘둘 감아도 삐져나올 만큼 자라고 말았답니다.
서현 왕자는 서린 왕자에게 이 고민을 상담했어요.
“하나뿐인 내 동생아. 내 귀를 어떻게 하지? 대체 이 귀를 어떻게 숨겨야 한단 말이냐?”
하지만 서린 왕자는 전혀 진지하지 않게 대답했어요.
“왜, 귀엽잖아. 그냥 지금이라도 드러내고 다니는 게 어떨까? 의외로 다들 좋아해줄 지도 몰라.”
“안 돼! 실베스테르 대 주교가 내 머리에 왕관을 얹었을 때 그 위로 툭 강아지 귀가 튀어나오는 광경을 생각해 봐!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어!”
서린 왕자는 서현 왕자가 말한 내용을 상상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한편으로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어요.
“아니, 왜 당연히 형이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형이 10분 먼저 태어난 걸로 형이 되긴 했지만 엄연히 우리는 나이 차이 없는 쌍둥이고... 어마마마께서는 우리 둘의 실력을 따져 더 나은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셨거든?”
“야. 마법, 검술, 학문, 군사 지휘 능력... 모든 면에서 니가 나한테 쨉이나 될 거라 생각해? 닥치고 내 귀를 감출 방법이나 찾아와 봐.”
서현 왕자는 부탁하는 입장인 주제에 서린 왕자를 윽박질렀어요. 착한 서린 왕자는 그래도 귀 때문에 고민하는 형을 진심으로 걱정했기에 열심히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섰답니다.
그렇게 비밀리에 서현 왕자의 강아지 귀를 숨겨줄 방법을 찾던 중, 서린 왕자는 ‘그랑 메이가스’ 김성희라는 마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왕자님, 제가 아무도 왕자님의 강아지 귀를 보지 못하게 인식 장애술을 걸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귀중한 마법의 대가는 매우 비싸답니다.”
그녀는 서현 왕자의 귀를 감춰주는 마법을 걸어주는 대가로 막대한 황금을 요구했어요. 서현 왕자는 여왕 몰래 수년간 모아온 비자금을 탈탈 털고 또 털어서 겨우 김성희가 만족할 만큼의 황금을 건네줄 수 있었답니다.
마법사 김성희는 서현 왕자의 머리카락에 신비한 약을 바르고 커다란 대롱에 둘둘 만 다음 몇 시간 동안 열을 가했어요. 그리고 다시 마법의 물로 머리카락을 씻어 내고 말렸어요. 그러자 서현 왕자의 머리카락은 사자 갈기털처럼 사방으로 길고 북슬북슬하게 뻗쳐서 강아지 귀를 쏙 감춰 줄 수 있게 되었어요.
“잠깐, 이거 뭔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서현 왕자가 거울을 보고 당황해서 말했지만 김성희는 마법의 바구니에 이제 그녀의 것이 된 황금들을 모두 집어넣고 호호 웃으며 사라져 버렸습니다.
“왕자님들, 명심하세요. 지금부터 서현 왕자님의 강아지 귀에 대해 입 밖으로 한 마디라도 꺼내면 그때부터 마법은 서서히 풀려버린답니다! 그리고 마법이 완전히 해제되고 나면 아주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어요. 서현 왕자는 서린 왕자에게 말했어요.
“너... 내 비밀을 지켜줄 거지?”
“공짜로는 안 돼.”
“아, 동생님아 좀!”
“그동안 나는 계속 형의 비밀을 지켜주고, 마법사도 구해줬잖아. 이만하면 형제로서의 의리는 다한 것 같은데? 근데 형은 나한테 뭐 하나라도 해준 게 있어?”
“큭...”
비자금도 김성희에게 다 털리고, 미래가 모두 동생의 입단속 하나에 달리게 되어서야 서현 왕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생겼어요. 그래서 서현 왕자는 열심히 고민한 끝에, 자기가 먼저 결혼 상대를 찾게 되면 왕위는 서린 왕자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답니다.
“아니 형 그걸 지금 딜이라고 하는 거야?”
서린 왕자가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말했어요. 원래 월야 왕국에서는 결혼을 일찍 해서 자식을 낳은 쪽이 왕위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결혼하면 오히려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소린 분명 서현 왕자가 한 수 접어주는 게 맞긴 했지만... 서현 왕자는 눈이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는 걸로 유명했거든요.
하지만 욕심쟁이 서현 왕자는 더 이상은 양보 못한다고 배를 쨌고 마음 약한 서린 왕자는 그런 형을 더 몰아붙이지는 못했답니다.
한편 귀족들은 서현 왕자의 머리를 보고 무척이나 놀랐어요. 강아지 귀는 잘 숨겨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사자 갈기처럼 부풀린 그 스타일은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답니다.
“왕자님, 왜 그러세요? 머리가 커졌는데.”
“저 멀리 바다 너머 사교계에서 유행한다는 최신 헤어스타일이니라!”
민망해진 서현 왕자가 우겼어요. 하지만 다들 서현 왕자의 끔찍한 패션 감각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넘어가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서현 왕자는 강아지 귀를 감추기 위해 꿋꿋이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다녔어요.
한편 서린 왕자는 너무나도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형과의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 약속을 열심히 지켜 봤자 별로 서린 왕자한테 득이 되는 것도 없고.
그래도 서린 왕자는 착했기 때문에 한밤중에 몰래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깊은 숲 속을 찾아가서 혼자 외쳤답니다.
“우리 형 귀는 강아지 귀! 성질머리는 더 강아지! 우리 형 귀는 강아지 귀! 성질머리는 더 강아지!”
그날따라 거세게 바람이 부는 숲 속에서 그렇게 쩌렁쩌렁 외치고 나니 겨우 서린 왕자는 속이 시원해졌어요. 그 후로도 서린 왕자는 매일 밤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서현 왕자의 귀에 대해서 혼자 소리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답니다.
서린 왕자가 몰래 금기를 어겼기 때문인지 서현 왕자의 머리에 걸린 마법은 점점 풀려갔어요. 북슬북슬 부풀어 올라 귀를 가려주던 머리카락이 점점 차분하던 원래 형태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당황한 서현 왕자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서린 왕자를 불러다가 추궁했답니다. 결국 서린 왕자는 밤마다 숲으로 가서 서현 왕자의 귀가 강아지 귀라고 외쳐댄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어요. 서현 왕자는 궁전에 처박혀서 사교 모임에도 안 나가고 매일같이 서린 왕자만 원망하기 시작했어요.
“흑흑... 이렇게 된 이상... 내 강아지 귀도 들통나고 말 테고, 귀족들은 모두 나를 비웃으며 강아지 귀를 단 왕자를 왕위에 올릴 수는 없다고 어마마마께 말하겠지...
할 수 없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탈취하고, 북쪽 탑에 봉인된 고대병기 ICBM으로 이 왕국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수밖에...!”
서현 왕자가 마구 폭주하기 시작했어요. 서린 왕자는 열심히 서현 왕자를 말려보았지만...
“잠깐, 형 그렇다고 패륜을 저지르겠다니 말이 돼? 그리고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거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제발 엉뚱한 남 탓 좀 하지 마!”
그때 형제가 있는 방 밖에서 시종이 말했어요.
“두 분 왕자님들, 여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갑작스럽게 릴리쓰 여왕이 행차했어요. 형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어머니를 맞이했답니다.
“어마마마,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서현아, 갑작스럽지만 이웃 나라의 세건 왕자가 너에게 청혼을 하고 싶다며 찾아왔단다.”
“네?”
서현 왕자는 어리둥절했어요. 세건 왕자는 이웃 왕국의 둘째 왕자지만 왕위에는 관심 없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괴물이나 사냥하고 다니는 괴짜였거든요. 그것 말고는 괴상한 초록머리를 하고 다닌다 정도가 세건 왕자에 대해 알려진 전부였답니다.
“흥, 왕자인 제게 청혼을 하려면 먼저 사신에게 산더미 같은 황금과 보석, 그리고 초상화를 들려 보내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덥석 찾아오는 놈들 제가 왜 만나요. 제 눈과 정신 건강에 해로울 지도 모르는데.”
대놓고 콧방귀를 뀌는 서현 왕자에게 릴리쓰 여왕이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그래도 이왕 찾아온 거 만나주기라도 하렴.”
“쳇... 알았어요. 대신 변변찮은 놈이라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어요.”
서현 왕자는 어차피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대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이를 트집 잡아 쿠데타의 구실로 쓸 생각으로 세건 왕자를 만나러 갔어요. 그리고 서린 왕자는 혹시나 형이 정말 사고를 친다면 막을 생각으로 자기 편인 귀족들을 만나러 갔구요.
그런데 뜻밖에도, 세건 왕자는 서현 왕자의 까다로운 심미안마저도 만족시킬 만큼의 미남자였답니다. 초록머리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오히려 신비하고 멋지게 보였어요.
세건 왕자가 헤롱헤롱 하고 있는 서현 왕자에게 대뜸 말했어요.
“네가 강아지 귀 왕자인가?”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지?”
“사실 괴물을 잡다 보니 너네 왕국의 숲에 들어갔는데... 누가 ‘우리 형 귀는 강아지 귀!’하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게 들리더군.”
“큭, 서린 이 자식...”
서현 왕자는 기어이 소문이 바깥으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세건 왕자가 냅다 다가와서 머리카락 속 강아지 귀를 만지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 정신이 나가고 말았답니다.
“자, 잠깐 난 만져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
“너 귀엽구나. 나랑 결혼해서 우리 왕국으로 가서 살자.”
세건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청혼을 했고, 서현 왕자는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승낙해 버렸어요.
“...콜!”
릴리쓰 여왕과 서린 왕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둘은 정말로 서로에게 푹 빠져버렸어요. 서현 왕자는 쿠데타 따위는 일으키지 않고 세건 왕자를 따라 바로 이웃 나라로 떠나 행복하게 살았고, 월야 왕국도 오래오래 평화롭게 지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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