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현] melt
20180609 세건서현 교류회 / 광월야 엔딩 이후 시점
“서울의 겨울이라고 해서 러시아보다 항상 나은 건 아니구나…”
서현은 발목을 덮을 정도로 수북이 쌓인 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한국은 그가 살던 러시아보다 남쪽에 있으니 겨울에도 무조건 따뜻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 본 한국의 겨울은 러시아 못지않게 기온이 떨어지는 날도 많았고, 건조한 칼바람이 불어와 체감 기온을 훨씬 더 떨어뜨렸다.
하나뿐인 동생을 한국에 보내놓긴 했지만 진정한 미래를 알지 못하던 ‘이사카’에게는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 테트라 아낙스의 다음 수, 리림의 육체를 노리는 마법사들, 아직 한참 더 성장시킬 필요가 있는 부하들…
헐벗고 굶주린 채 모래 폭풍이 부는 황야와 얼음으로 덮인 벌판을 헤매던 이사카는 아주 가끔씩만 동생을 떠올렸다.
사실은 하나뿐인 혈육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매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서린이 따뜻하고 쾌적한 집에서 친아버지의 보호 아래 편안하게 자라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는 의식적으로 그 빈도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분명 자기 손으로, 동생만큼은 그렇게 살라고 보낸 건데도 시기심과 질투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세건에게 듣고 나서야 알았다. 서린이라고 해서 마냥 편히 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에도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뛰면서,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자격증 공부까지 했다 그랬지.
그의 친부는 사업 실패 후 홀로 간이 노점을 하면서 간신히 아들을 키웠다고 했다. 심지어 그 간이 노점이 불에 타고 크게 다쳐 입원해 있는 와중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있었다고…
뭐 고정적으로 몸을 뉠 수 있는 지붕은 있었다니 밥 먹듯 노숙을 해야 했던 그보다 조금은 편하게 지냈겠지만. 이사카의 삶에 비해서도 서린은 결코 호의호식한 게 아니었다.
아니, 주변에 번지르르한 건물이 가득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면서 더욱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린은 구김살 없이 밝고 선량한 아이로 자라나, 스스로 이 세계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이제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린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서현은 더 많이 부끄러웠고, 더 많이 괴로웠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따뜻한 숨이 잠시 희게 얼었다가 곧 녹아서 없어졌다. 그 찬 공기를 서슴지 않고 깊이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속에 쌓인 것에 살얼음이 덮여 잠시나마 그 존재를 잊게 해주었다. 물론 금방 다시 녹아버리곤 하지만.
“어차피 오늘은 딱히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현은 그 기분에 취해 무작정 걷기로 했다. 딱히 걸음을 빨리 한 것도 아닌데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서울 외곽으로 나왔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던 서현은 문득 시간을 짐작하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도 없이 조그만 눈발들이 흐리고 어두운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보지 못하겠지만, 서현의 눈은 휘날리는 흰 눈과 하늘을 두껍게 덮은 구름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는 달을 포착해냈다.
“롯시니… 너는 이 달을…”
황야를 헤매고 다니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던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으려다 서현은 흠칫했다. 어쩐지 혀가 멈칫했다. 하려던 말이 자연스럽게 굴러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왜 오랜만인가? 아, 롯시니가 이젠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어서 그렇구나.
그 애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감히 죽었다는 표현은 쓸 수가 없었다. 릴리쓰의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나 늙고 광기에 찌든 고든 대신 테트라 아낙스를 계승했던 서린. 그 아이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그렇게 지워졌다.
그와 함께 서현의 과거 역시 영향을 받았다. 함께 릴리쓰의 아들로 태어났던 과거도 사라졌고, 서현이 네 살 때 릴리쓰를 죽여 봉인하고 서린을 한국의 친부에게 보내버렸던 일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월야에 속해있던 릴리쓰와 그의 관계가 아인 소프 오올 이후 끊어진 것은 그렇다고 쳐도, 서현의 몸을 구성하는 유전 정보의 절반은 여전히 인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형제의 생물학적 아버지 서영수는 서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있었다. ‘서현’이라는 이름도 그가 지어준 것이 아니었던가.
서영수가 이 세계에도 존재한다면, 과거 세계에서 그와 서현 사이에 존재했던 연결 역시 형태는 바뀔 수 있어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찾아 따라가면 어쩌면… 서린 역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 * * * *
그러니까 ‘아버지’를 찾아가 봐야겠어.
서현의 계획을 들은 세건은 어처구니없어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가 원래 알고 있었던 서린의 친아버지와, 이 세계에서의 ‘서영수’에 대해 조사해서 알려 주었다.
원래 세계에서 서영수는 유부남이었지만 러시아로 출장을 갔다가 릴리쓰의 마법에 사로잡혀 그녀와 관계를 맺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현과 서린 형제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서현이 4살 때 릴리쓰를 살해하고 봉인한 후 서린을 그에게 보내버렸을 때. 어린 딸이 하루하루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로 한창 행복에 젖어 있던 서영수의 가정은 단번에 파탄이 나고 말았다.
성격이 불같은 친정 식구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내와 딸을 데려가며 다시는 만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감히 아내를 배신하고 혼외자를 만든 몹쓸 사위를 응징했다.
그래서 원래 번듯한 사업가였던 서영수는 졸지에 길거리 포장마차를 하며 단칸방에서 서린과 함께 힘겨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서린이 있던 원래 세계의 서영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서린이 없어진 이 세계에서의 서영수는 서린을 떠맡기 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실함만큼 안정적으로 잘 되어가는 사업, 미모와 교양을 갖춘 아내, 발랄하고 예쁘고 똑 부러지는 딸.
남자라면 모두가 부러워 할 만 한 삶이다. 하지만 그 속에 서현이 찾는 서린의 자취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세건이 가져다준 영상 속의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서린을 알지 못할 거다.”
“…”
“찾아가 보아도 소용없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그는 만류하는 세건을 뿌리치고 욱 해서 뛰쳐나왔다. 그리곤 당장 염색약과 갈색 컬러렌즈를 구입하러 갔다. 서린과 흡사한 외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갈색 머리에 한쪽은 붉은색, 한쪽은 밝은 갈색을 띠는 헤테로크로미아. 붉은 눈 위치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서영수의 주변에 서린이 있다면… 그는 서린을 닮게 꾸민 서현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었다. 분명 뭐라도 단서를 흘리고 말겠지.
* * * * *
하지만 계획대로 완벽하게 서영수의 앞에 정면으로, 얼굴을 볼 수밖에 없도록 떡 하니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대하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특이한 외모의 외국인이다. 붉은 눈이 신기하지만 빤히 쳐다보면 실례니까 그만 지나쳐야지. 굳이 능력을 써서 마음을 읽어보지 않아도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서현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
“…이보세요. 왜 이러세요?”
서현이 그에게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고 만 건 당황한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곳곳에 서린에게 물려준 유전 정보가 돌출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서현 역시 갖고 있는 것인데.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나를 보고 그 애에 대해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서글픔에 서현은 몸을 일으켜 후다닥 도망쳤다. 정신 지배 마법을 건 다음 질문과 답변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거나 텔레파시 능력을 응용하여 기억을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다사다난했던 서현의 삶 중에서도 이렇게 비참한 실패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 * * * *
어느덧 정처 없이 걷던 서현은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앞을 보니 누구 하나 발을 댄 적 없는 새하얀 도화지처럼 쌓인 눈이 보인다.
그는 냅다 판초우의를 벗어던지고 얇은 티셔츠를 입은 몸을 차가운 눈밭을 향해 던졌다. 맨얼굴이 보송보송하게 깊이 쌓인 눈 속으로 푹 파묻히고, 싱그러운 겨울의 냄새가 콧속을 찌르며 스며든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은 계속해서 내려 그의 몸 위에 덮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눈이 계속 내리고 내려 쌓여서… 꽁꽁 얼어 냉동인간, 아니 냉동 라이칸스로프나 되었으면 딱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 동안 얕은 숨을 쉬고 있던 무렵. 누군가 그의 머리칼을 난폭하게 잡아 끌어올리는 바람에 서현은 강제로 현실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아야! 아프잖아!”
“눈 속에 자빠져서 뭐하냐 전범?”
서현은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뒤돌아보았다. 아인 소프 오올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초록머리에 시커먼 바이크 수트를 입은 남자. 한세건이 거기에 서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하, 연하의 스토커에게 애인을 빼앗길까봐 당신도 스토커로 전직하기로 했나?”
그 순간 세건은 대놓고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내 아지트 앞마당이고, 감시 카메라에 네놈이 찍혀서 나온 거거든?”
서현은 믿기지 않아 세건의 손을 밀어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짜증나게도 낯익은 세건의 아지트가 맞았다. 아, 빌어먹을. 정신없이 걸었더니 또 여기로 와버렸어.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서현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거 지금 나한테 물은 거냐?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 예전에 아지트로 오는 도로에다가도 감시카메라 깔아놓고 그랬잖아. 이번에는 그런 거 안 해뒀어?”
“이 세계에선 흡혈귀가 줄었기도 하고… 난 이제 진마사냥꾼 같은 요주의 인물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거든. 아직도 왕자병이 안 나은 네놈과 나는 다르단 말이다.”
세건이 팔짱을 끼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비웃고 이죽대는 말싸움으로 세건이 서현을 이기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아하, 당신 관심을 못 받아서 눈 오는 오늘 밤도 혼자서 외롭게 아지트에 처박혀 몇 개 안 되는 감시 카메라나 돌려보고 있다가… 내가 오니 신이 나서 뛰어나온 거구나?”
“닥쳐!”
세건이 얼굴이 벌개져서 결국 꽥 소리를 치고 말자 서현은 배를 잡고 눈바닥에 나뒹굴며 웃어댔다. 한참 동안 몸에 다시 눈을 뒤집어쓰며 웃어대던 서현은 가까스로 진정을 한 다음, 눈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세건의 얼굴을 한 번 곁눈질한 뒤 아지트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뭐, 아무튼… 기왕 온 김에 좀 쉬다 갈까보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세건의 아지트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고, 뒤에서 다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세건은 흘겨보기만 할 뿐 문을 열어줄 생각조차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을 부수려고 하면 못 부술 것도 없고, 염력으로 안쪽에서 문을 따려고 하면 얼마든지 딸 수 있다. 하지만 세건이 스스로 서현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게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야, 왜 문 안 열어줘? 손님 대접이 너무 박하다?”
“손님 대접을 받고 싶으면 손님답게 하고 와야지. 깨끗한 내 집에 너같이 유기견 꼬라지로 온 놈을 왜 들여놔야 하냐? 애초에 초대한 적도 없다만?”
세건이 온 몸에 눈가루를 잔뜩 묻힌 서현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어쨌든 좀 재워주라, 멍멍.”
서현이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건은 매정하게 그를 밀어낸 후 혼자만 쏙 아지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현은 쾅 닫힌 아지트 문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눈 위에 벗어던졌던 판초우의를 주섬주섬 주워 끌어안고 그 차디찬 문에 기대어 앉았다.
처음에는 등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지만 계속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더니 판초우의 안에 열이 모이면서 슬슬 편해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잠이나 잘까? 일반인이라면 얼어 죽을 걱정을 해야 하지만 서현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래, 자자. 이제 피곤해서 더는 아무 것도 못 해.
서현이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잠이 들려던 순간이었다. 닫힌 문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 뒤에서 한세건이 말했다.
“좀 꺼져라 개자식아.”
쉽게 가지 않을 걸 세건도 뻔히 알고 있었나 보다. 버팅기고 있으면 결국 들여놓을 거면서 왜 이러나 몰라. 서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들여놔줘. 혹시 아냐? 갈 곳 없는 라이칸스로프에게 선행을 베풀면 은혜 갚은 제비처럼 로또라도 물어다 줄 지.”
“내일 아침까지 안 뒤지고 있으면 마당에 두는 개집 사다줄 테니 거기에나 들어가.”
철문 너머로 중지를 세우고 있는 세건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시 짜증이 슬슬 치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눈 속에 엎드릴까. 서현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결국 철옹성 문이 열리고 세건이 나왔다.
“고마워요 멍멍. 보답으로 갖고 싶은 게 뭐에요? 심으면 보물이 든 박이 열리는 박씨? 하늘까지 닿는 콩나무 씨앗?”
그는 서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무시하고 어깨와 무릎 밑에 팔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 속칭 공주님 안기라고 불리는 자세다.
“나 다리 아직 안 얼었는데.”
서현이 자기 발로 걸어들어갈 수 있음을 어필했으나 세건은 그를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대꾸할 뿐.
“바닥에 흙 묻은 개발자국 남기기 싫어서 그런다.”
“아니 몇 번 장단 맞춰 줬다고 진짜 개 취급하네.”
서현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세건의 팔에 안겨 있었다. 어디로 가나 했는데 더러운 판초 우의를 벗겨서 욕실에 내팽개치고 도착한 곳은 침실이었다.
“어, 이게 다 뭐야…”
늘 세탁하고 관리하기 귀찮다며 매트리스 위에 방수포를 깔고 자던 세건답지 않은 물건이 떡하니 침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건과 서현이 나란히 누워도 공간이 한참 남을 정도의 너른 침대 말이다.
“들어가.”
서현은 세건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푹신해 보이는 극세사 이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 침대에 장치된 것은 이불만이 아니었다. 얇은 시트 밑에 깔려 있는 뜨끈한 장판이 느껴지자 차가운 곳에 한참 있었던 서현의 몸은 순식간에 노곤노곤하게 녹아내렸다.
“아, 좋다…”
서현의 눈이 스르르 감기려다 말고 다가오는 세건을 보고 번쩍 떠졌다. 정확하게는 세건이 아니라 세건의 손에 든 것을 보고지만.
“야, 이 시간에 그걸 왜…”
“지금 씻기는 건 나도 귀찮지만 적어도 머리는 말리고 자야 하지 않겠냐?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드라이 받아라.”
“아 그게 불만이면 내 능력으로 말릴…”
“얌전히 드라이나 받으라고 했지.”
하여간 한세건 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다니까. 서현은 빠르게 포기하고 엎드린 채 머리를 세건의 손에 맡겼다. 숱은 많지만 가늘고 물을 잘 흡수하지 않는 회색 머리카락은 금세 물기를 빼앗기고 보송보송하게 바뀌어 갔다.
그렇게 헤어 드라이를 받던 서현은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여과 없이 세건에게 말했다.
“…내가 서린이와 평범한 형제처럼 자랐다면, 같이 목욕하고 서로 머리를 말려주기도 했을까?”
“미쳤냐. 징그럽게 남자 형제끼리 그런 걸 왜 해.”
세건이 그렇게 말하곤 드라이기를 끄고 서현의 따끈하게 잘 마른 뒤통수를 툭 쳤다. 서현은 즉시 반발했다.
“아 씨. 기분 나쁘게 왜 때려!”
“잘 말랐는지 확인했을 뿐인데?”
세건은 시치미를 뚝 뗐다. 서현은 엎드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하긴 생각해 보니까 안 어울린다. 치고받고 하는 거면 몰라도.”
당장이라도 세건을 바닥에 내다꽂을 것처럼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서현을 보며 세건도 충격이 덜하게 착지한 후 어떤 반격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별안간 서현은 얼굴에 빙긋 웃음을 띠우며 세건을 이불 속 자기 옆으로 쑥 끌어들였다. 세건은 누우려고 했으나 서현이 억지로 그를 뒤집어 자신처럼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현은 이불을 세건과 함께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전범.”
머리에는 푹신한 극세사 이불을, 배 밑에는 따끈한 전기장판을, 옆에는 서현을 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건은 괜히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게 향한 서현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꼭 해보고 싶어. 이불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거.”
세건은 그 눈을 거역할 수 없었다. 서현의 얼굴 위에 같이 살던 시절 척추가 뒤로 접히면서도 계속 먼저 말을 걸어오던 서린과 요즘 대화가 줄었다며 섭섭해 하던 생전의 형의 얼굴이 겹치고, 그 위에 다시 단 둘만이 공유하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아져버린 친구이자 동료이자 연인의 얼굴이 한 번 떠오른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눈이 몰아치는 긴 긴 밤 동안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눈발이 멎고, 새벽이 밝아오고, 밤사이 쌓인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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