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박스/건현] Keep
즁더님 리퀘스트 : 세건이를 따라간 서현이의 고급 미용실 체험 *광월 엔딩 후 시점
아인소프 오올에 의해 다시 한 번 쓰여진 세계에서, 플렉스 메디컬을 테러했던 세건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폴에까지 수배당해 이 세상 어디에도 맨 얼굴로 편히 다닐 수 없었던 세건은 한 순간에 자유로워졌다. 더구나 어떻게 된 것인지 그가 획득했던 진마 사냥꾼이라는 타이틀까지 사라지고 애송이 헌터로만 알려져 있어서, 하급 뱀파이어들도 세건을 경계하지 않고 덤벼들고는 했다. 덕분에 세건은 쉽게 사냥을 할 수 있었고, 확 줄어버린 명성과 재산을 다시 차근차근 쌓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찾을 방법이 없었다. 테러리스트가 되기 전, 정말로 월야에 갓 들어온 애송이 헌터 한세건을 지켜봐 주었던 아르쥬나의 주인 김성희. 완전히 뱀파이어가 되어버릴 위기에서 그를 구해 주었던 마녀 김성희. 더없이 불친절했던 세례자 대신에, 보다 상냥하게 세건에게 월야를 걷는 법을 알려주었던 그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르쥬나에 가면 여전히 낮에는 카페 주인이고 밤에는 헌터들에게 마도구를 판매하는 마녀인 김성희를 만날 수 있지만, 그녀는 세건이 어쩌다 월야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또 한 사람, 그 아이는... 스스로 사라지기를 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곳에 남아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단 두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세건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건은 이 세계에서도 계속 헌터로 살아나가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월야에 막 발을 들였을 때, 뱀파이어의 피에서 만들어진 마약을 흡입하고 불법 총기와 스테인리스 일본도를 휘두르며 뱀파이어를 무자비하게 살육하는데 익숙해질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하지만 곧 누구보다도 능수능란한 헌터가 되었듯이, 그는 다시 쓰여진 이 세계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 중 한 가지는 한낮의 서울 거리를 엑토플라즘 마스크 없이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엑토플라즘 마스크 특유의 음산한 이질감 대신 밝고 따스한 햇빛이 맨 얼굴에 와 닿는다는 게 그렇게 반가운 일일 줄 몰랐다. 그래서 세건은 이 익숙하고도 낯선 세계를 탐색할 겸 열심히 낮의 서울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전의 세계에서부터 계속 함께 해왔으며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놈, 서현은 그런 세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 테러범. 경찰한테 잡히면 어쩌려고 맨 얼굴로 막 돌아다니냐?"
막 현관문을 나선 세건을 보자마자 그는 시비를 걸었다. 애초에 시비를 걸 생각으로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 테러범 아니라서 잡힐 일 없는데."
"이 자식..."
세건의 무심한 대꾸에 서현은 뭐라고 더 말을 못하고 어금니만 까득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헌터로서의 일상으로 돌아간 세건을 보니까 속에서 화가 치미는데, 그걸 말로 어떻게 정리할 만큼 침착해지지는 못하는 거겠지. 병신... 세건은 속으로만 그렇게 내뱉으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세건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계속 걸어갔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이 시각.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오가는 이 거리에서는 등 뒤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건의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는 발소리에 신경이 쓰이고 마는 것은...
마침 빨간 불이 켜진 횡단보도가 그의 길을 가로막자, 세건은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밑단이 다 해진 낡은 청바지에 짝퉁 티가 풀풀 나는 스니커즈, '나 미국인 아님'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구가 프린트된 티셔츠.
아무리 예전만큼의 명성과 인맥이 없어도 한국에 적응해서 살았던 기억이 있는 이상, 멀쩡한 옷을 살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행색이다. 그나마 옷과 얼굴이 깨끗해서 노숙자가 아니라 그저 패션 센스가 좀 괴랄한 사람 정도로 보이는 게 다행인가.
"어디 가?"
놈의 말에 네가 알아서 뭐하게,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유난히 길게 자라 제멋대로 뻗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현의 머리카락은 전체적으로 옅은 회색이면서 드문드문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 털이 섞여 있어 마치 늑대의 모피 같은데, 길게 자란 것을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고 있으니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그래서 세건은 말했다.
"헤어샵."
그리고 신호등이 녹색으로 변했다. 세건은 커다랗게 뜬 서현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놈의 목소리가 다시 뒤를 쫓아오며 묻는다.
"뭐, 이젠 녹색이 아니라 빨간색으로 염색하러 갈 거냐?"
"글쎄."
세건은 한번 어깨를 으쓱해주고는 계속 걸어갔다. 따라오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서현은 세건의 뒤를 계속 밟더니 결국 헤어샵까지 따라들어왔다.
* * * * *
"안녕하세요. 예약하고 오셨나요?"
"예. 2시 예약한 한세건입니다."
그것은 원래 플렉스 메디컬 한국 지사를 시작으로 한국 국회의사당과 일본 가쿠슈인 등지에 테러를 일으켜 전 세계에 그 악명을 널리 떨친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의 이름이었다. 그 때문에 세건은 타인의 명의를 사서 재산을 운용하고 통신망을 이용하고, 늘 가짜 신분증을 휴대하고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만난 헤어샵 직원은 그런 세건의 본명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미소로 반기며 자리를 안내해줄 뿐이다. 뻔뻔한 자식, 하고 뒤에서 서현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것을 들었지만 세건은 모른 척하고 가운을 받아 입고서는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푹신한 헤어샵 의자에 앉아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세건은 잠시 눈을 감고 의자의 안락함을 만끽하다가 문득 눈을 뜨고, 앞에 있는 거울을 통해 입구 근처에서 어물어물하고 있는 서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문 바깥에 있기는 하지만 들어올 것도 같고 안 들어올 것도 같은 꼬라지로.
아무리 야만인으로 산 세월이 길다고 해도 그렇지, 헤어샵 처음 와 보나? 진짜 꼴사납다...
게다가 그는 미리 폰에 저장해 온 모델 사진을 내밀며 이것보다 옆머리는 2mm 길게, 뒷머리는 3mm 짧게 어쩌구 하면서 거침없이 주문을 하고 있는 세건을 보고 더더욱 당황한 것 같았다. 카트를 밀고 온 미용사가 슬슬 문 밖 서현의 눈치를 보면서 세건에게 물었다.
"뒤에 저 분은 같이... 오신 친구분인가요?"
"친구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세건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사각 사각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이런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니 역시 기분이 좋다. 그동안은 이런 예약제 미용실을 찾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하지만 역시 문 밖의 서현이 신경쓰인다. 험악하게 쏘아보던 주제에 계속 따라오던 꼬라지가 꼭 떠돌이 개 같아서... 그리고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보았던 서현의 덥수룩한 머리도 생각났다.
결국 세건은 컷이 끝난 후 염색 전 샴푸를 시켜 주겠다며 다가온 직원에게 서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서 있는 놈은 예약 없이 그냥 따라온 건데, 쟤 머리도 좀 손 봐주실 수 있지요?"
세건이 한가한 미용실 안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말고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 아까는 친구분 아니라고 하셨지 않나요?"
"친구는 아니고 아는 동생입니다."
그리고 세건은 얼척없어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서현을 향해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서현은 쭈볏쭈볏하며 들어왔다가 다른 미용사가 다가와서 머리를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더니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나 돈 없... 아니 지갑을 안 가져왔는데."
"내가 내 줄테니 그 지저분한 머리 좀 어떻게 해라."
"필요 없거든?"
서현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세건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세건은 흥 하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샴푸 받으러 가 버렸다. 대신 다른 미용사가 다가와서 왠지 어색한 미소로 서현에게 말을 건다.
"원하시는 스타일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스타일 북을 한 번 보여드릴까요."
"...스타일 북을."
세건을 쫒아온 것뿐이니 머리 스타일이라던가 생각해둔 것이 있을 리 없다. 예전에는 좀 길었다 싶으면 빼또쥬나 루스킨이 나이프로 슥슥 대충 적당한 길이로 잘라주곤 했으니까... 이런 곳에서는 또 무슨 말로 주문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싶어서 서현은 그 스타일 북이라는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용사가 가져온 아X패드의 사진들을 볼수록 서현은 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그를 살피더니 미용사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요즘 많이들 하시는 건 이런... 가르마 펌이라는 건데요, 무난하게 어느 사람들한테나 잘 어울리면서 손질도 편한 머리라서 남성분들이 많이들 하세요.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펌을 해도 괜찮겠지만 저는 전체적으로 살짝 기장을 다듬은 다음에 하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그럼 앞머리를 내리시는 거랑 왁스 살짝 발라서 뒤로 넘기는 거랑 완전히 느낌이 다르게 연출할 수가 있거든요."
그는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서현으로서는 이런 건 해 본 적이 없으니 자기 머리에 했을 때 모양이 어떻게 나올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패드의 사진들... 나름 모델이나 연예인들일 텐데 얼굴이 다들 왜 이 모양인지. 자꾸 머리보다는 얼굴에 눈이 가면서 신경질이 났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요."
"그럼 쉐도우펌은 어떠세요? 이것도 요즘 많이들 하시는 스타일이에요. 여기 두 사진이 쉐도우펌한 사진인데... 고객님 지금 머리색에 잘 어울릴 것 같거든요. 거기에 다운펌이 같이 들어가면 지저분하게 뻗치는 머리도 잘 잡아주고요. 이쪽은 그냥 쉐도우펌이고, 이쪽은 투블럭 쉐도우펌인데 제가 보기에 고객님은 와일드한 느낌이 있으셔서 투블럭 쉐도우펌 쪽이 더 깔끔하고 시원해 보일 것 같으세요."
서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분명 미용사가 하는 말에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설명이 왜 이렇게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미용사는 서현의 표정을 보고는 역시 탐탁지 않아 한다고 느꼈는지 급하게 다른 사진을 넘겨서 보여주었다.
"아니면 아예 이렇게 귀여운 느낌의 베이비펌으로 확 인상을 바꿔보시는 건..."
베이비펌 사진을 보면서 서현은 괜히 빼또쥬를 떠올렸다. 빼또쥬 녀석 머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하고 또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건 절대 반대."
옆에서 머리에 치덕치덕 염색약을 바른 채 우아한 자세로 녹차를 마시던 세건이 툭 내던졌다. 그리고는 서현과 상담하고 있던 미용사를 향해 손짓했다.
"이러고 있다간 오늘 다들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으니까 그냥 제가 고를게요. 쟤가 러시아 촌구석에서 온 놈이라서 이런 거 전혀 모르거든요."
"아니 설명 들어가면서 열심히 고르고 있는 중이잖아."
서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용사는 세건과 그의 사이에서 슬슬 눈치를 살피더니, 세건에게로 아X패드를 넘겨버렸다. 세건은 대충 몇 번 사진들을 휙휙 넘겨보더니 손가락으로 한 사진을 콕 집어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로 해주세요."
"예, 이건 블레이드펌입니다. 이 펌도 잘 나가는..."
미용사의 말을 잘라먹으며 세건은 속사포처럼 주문을 했다.
"펌 하기 전에 기장 전체적으로 이만큼... 귀 살짝 덮는 정도로 잘라 주시고, 숱도 좀 많이 쳐주세요. 안 그러면 머리만 너무 부풀어 보이겠지요?"
"아, 예예, 그렇지요."
미용사는 말이 일방적으로 잘라먹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 답답한 러시아 촌놈(?) 손님과 끝까지 상담을 해서 스타일을 결정하느니 잘 아는 쪽이 지시해주는 대로 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게다가 돈도 어차피 이쪽에서 같이 지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뒷머리는 옆보다 좀 길게 냅두시고요, 펌 하면서 클리닉도 같이 해주실 수 있지요? 쟤 머리가 개털이라서요."
"아니 나 린스 꼬박꼬박 챙기는데..."
서현도 그렇게 말했고 미용사도 서현의 머리를 한번 슥 헤집어 보더니 "손상은 별로 없으신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건이 다 마신 녹차 잔을 탁 내려놓으며 분명 웃음기를 띠고 있는데 왠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해주세요. 그리고 저 녹차 한 잔 더 주시고."
그리고 세건은 볼 일 끝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 답답한 손님을 드디어 해치울 수 있겠구나 하는 의욕으로 불타는 미용사들이, 팔뚝을 걷어붙인 뒤 서현을 거의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 * * * *
세건이 시킨 시술을 다 받고 난 서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터덜터덜 1층으로 가는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그는 죽상이 된 얼굴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인위적 컬을 넣어본 머리 모양 때문인지 자기 자신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 옆에 여느 때처럼 녹색 머리를 한 세건이 내려와 섰다. 전체적으로 머리를 녹색으로 물들이는 건 원래는 굉장히 괴상한 것일 테지만 오랫동안 세건을 보아온 서현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나는 게, 전에는 의도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룩덜룩한 부분이 제법 있었다면 지금은 고르게 어두운 녹색으로 통일되어 훨씬 깔끔해 보였다.
그런 세건과 나란히 서 있자니... 서현은 자신이 비정상처럼 보여서, 음, 한마디로... 쪽팔렸다.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미용실에서 비싼 돈 들여 좋은 거 했는데 왜 그러고 있냐. 얼굴 펴라 전범."
"재밌냐? 사람 머리를 이 따위로 만들어 놓고?"
서현이 세건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세건은 팔짱을 끼고 픽 웃으며 받아쳤다.
"네가 아직 문명을 잘 몰라서 한 수 가르쳐 준 거다. 네놈이 무지해서 그렇지 제대로 멋을 낸 스타일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한 무리의 여자들이 수다를 떨며 거울 앞을 지나치려다, 그 앞에 서 있는 서현을 보고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현이 의아한 눈길로 그녀들을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면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도 이거... 너무 어색해. 꼭 내 머리 아닌 것 같고."
서현은 그래도 역시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거울을 보고 계속해서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게 누가 졸졸 따라오래. 하도 쫒아오길래 너도 머리 하고 싶은가 생각했지. 아, 네놈은 동물 미용하는 데 데려갈 걸 그랬나?"
세건이 계속해서 비웃듯이 말하자 서현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야, 내가 널 무슨 심정으로 쫒아왔는지 알아? 젠장! 서린이가... 내 동생이 죽었는데, 당신은... 잘도 뻔뻔스럽게 맨얼굴로 돌아다니고... 신나서 미용실도 가고..."
세건에게 속사포처럼 쏘아 붙이던 서현의 말이 얼마 못 가 흐려졌다. 대신 꼭 말아쥔 주먹이 파르르 흔들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세건은 입을 겨우 열었다.
"네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지. 생명이 소중해서... 살 자격이 있어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죽일 권리가 없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라고."
"..."
항상 서현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트집잡기 바쁘던 세건의 입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나오자 서현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하지만 세건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난 그때 솔직히 네놈이 입만 살아서 개소리하는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한참 후에야... 네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서현의 놀란 눈과 세건의 꿋꿋한 검은 눈이 마주쳤다.
"..."
"나는 두 번이나 네 동생 덕분에 살아난 몸이다. 그것도 그 애가, 내가 증오하는 뱀파이어가 된 뒤에.
그 애가 막 테트라 아낙스를 계승했을 때, 나는 자폭할 기세로 달려들었었어. 죽이는 게 맞았어. 그 애는 원래부터 라이칸스로프였고, 릴리쓰의 아들이고, 새롭게 테트라 아낙스가 되었고... 무엇보다 내가 죽여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
하지만 마음속 한 켠으로는 그 애가 나를 살려줄 것을 믿고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되었지."
"한세건..."
"그 애가 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야. 그냥... 알았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세상을 지킬 사람은 그 애밖에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도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어."
세건이 뇌까렸다. 서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녹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
"살아서 그 죄를 갚다 보면 언젠가는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서현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와 이마를 마주 대고, 앞으로도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거라고 무언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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