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루시] 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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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쉬에게 인간 관계는 손해와 이익뿐이었다. 경제적인 거래, 제로섬 게임, 상호 경쟁적인 관계, 부모와의 관계에는 답지 않게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긴 했지만 고타쉬는 그것마저도 저울에 올린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먼저 그를 배신했으니 그는 그들에게 마땅한 처우를 내렸을 뿐이다. 뭐, 저울이 자기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을지도 모르겠다만, 불평등한 세상에 평등한 저울이 어울리기나 할까. 어쩄든 그는 베인과 바알이 손을 잡았을 때 자신이 바알의 초즌과 있는 걸 사적으로도 즐기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바알의 초즌은 촌놈이었다. 쭉 언더다크에서 살았고, 그 언더다크에서마저도 이름 한번 떨친 적 없는 팔푼이, 그가 할 줄 아는 건 오로지 살인뿐이었다.
“나의 아끼는 암살자여.”
고타쉬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손을 잡아 술상이 차려진 테이블로 이끌었다. 대중들의 심장에 공포를 꽂아넣는 그는 순순히 고타쉬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아주었다. “오늘도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고 들었어. 우리의 계획을 위해 건배, 그리고 자네의 완벽한 암살을 위해서도 건배.” 고타쉬가 먼저 잔을 들었고 루시안은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무표정이었던 그는 이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타쉬가 들고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그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 인간관계에 대해 운운했다면 고타쉬는 역겨운 농담으로 여기고 넘겼을 것이다. 지금까지 결합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와 함께라면 어쩌면… 고타쉬는 그에게 이 계획이 성공했을 때 넌 뭘 하고 싶느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눈을 깜박였다.
“계속 사람들의 위에서 공포의 군주로 군림할 생각인가? 그것도 좋지.”
정복의 군주와 공포의… 고타쉬는 말을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루시안이 그에게 왜 웃냐고 묻자 그는 공포의 여왕도 어감이 나쁘지 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고 말했다. 남자치고 가느다란 선이 고타쉬의 눈에 잡힌다. 왕 의복도 잘 어울리겠지만 여왕 의복을 입고 있는 그도 꽤 볼만할 거 같다고 생각하며 고타쉬는 와인을 홀짝였다. 루시안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럼 정복의 왕과 공포의 여왕인가.”
지금 나와 끝까지 함께하자고 말하는 건가? 자신의 말에 즐겁다는 듯이 웃는 고타쉬를 바라보며 루시안은 미소를 흘렸다. 아버지는 베인과 영광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면 마지막은 고타쉬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맺어야 할 것이다. 쿵, 쿵, 쿵, 길게 늘어진 그의 시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기대감에 어려 춤을 춰댔다. 그의 시체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그의 창백한 손목이라면 책상 위에 장식해두고 평생을 예뻐해줄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 춤의 뒤로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씁쓸함이 그의 여흥을 망쳤다. 루시안은 그가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다. 똑같은 돌멩이들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고타쉬는 고타쉬였다. 루시안에게 그는 천재였고 매력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와 같이 있을 때 그는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겠지만 한번 말만 해볼까. 지금까지 난 아버지께 착한 아들이었으니까.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도련님을 죽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도련님도 마찬가지지만요.
“술이 마음에 드나, 암살자?”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루시안은 그의 야망을 보았다. 루시안이 봐온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와 같이 즐기면서도 언젠가 그가 자신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상상을 했다, 물론 자신이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상상도 같이.
“풍미가 진해서 마음에 들어.”
아마 그도 루시안과 똑같은 상상을 몇 번이고 했을 것이다. 서로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적인 교류도 즐기는 이유는 서로를 만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겠지. 루시안은 와인을 마셨다. 그가 와인을 홀짝이자 고타쉬는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치즈를 놓았다. 치즈를 포크로 콕콕 찍어 먹으며 루시안은 오늘 밤 시간이 좀 있냐고 물었다. 거절해도 상관없고 수락해도 상관없는 가벼운 제안, 고타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와의 여흥을 즐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눈동자를 하고 그는 루시안의 턱을 검지로 쓸었다. 루시안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가 저번에 봤던 귀부인과 교류했을 때도 저런 눈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턱에서부터 올라온 그의 뭉툭한 손가락이 그의 가는 입술을 눌렀다.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 너무 할 게 많아서.” 그는 ‘우리’를 은근슬쩍 강요하며 우리는 어차피 시간이 많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그의 입술에서 검지를 뗀 후 입꼬리를 올렸다. “우린 서로의 옆에 앉을 테니 말이야.”
언젠가 고타쉬는 루시안에게 자신은 왕좌를 나눠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뀐 걸까? 아니면 여전히 그 생각은 바뀌지 않은 건가? 자신을 ‘나의’ 아끼는 암살자라고 부르던 그를 떠올리며 루시안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뭐, 그의 생각이 바뀌었든 아니면 바뀌지 않았든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는 이상 루시안에게는 다를 게 없었다. 침대 위에 고이 접어둔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루시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망토를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가락이 스스로의 입술에 닿기 직전에 그의 집사가 그를 불렀다. 루시안은 자신의 집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또 다른 일이라도 맡길 생각인 걸까? 집사가 대답하기 전에 그의 방에 불쑥 고개를 내밀어 말을 가로챈 사람은 오린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답지 않게 밝았다, 희번득거리는 눈깔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루시안을 나의 멍청한 혈족이라고 부르며 서두를 뗐다.
“아버지께서 부르신단다.”
아버지께서 직접 방자한 탕아를 꾸짖을 생각인 거야. 오린은 날카롭게 웃으며 자신의 단도를 정신사납게 돌려댔다. 그러니 잘 혼나고 오려… ‘ㅁ’으로 끝났어야 했던 음절이 뭉개졌다. 순식간에 그에게 머리카락을 휘어잡힌 채 오린은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 이마를 박았다. 그에게 반격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고 해도 언제 냉기 마법을 쓴 건지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몇 번을 내리친 오린의 이마는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 물들었다. 벽에 묻은 혈흔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며 그는 그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붉은색을 그리도 좋아한다는 그의 누이는 그가 직접 그 이마를 붉게 물들여줬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해하지 않았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냉기 마법에 오린의 손가락은 푸르댕댕한 채로 단검을 쥐고 있었다. 루시안의 입가에 시린 초승달이 걸렸다. 그는 네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사레복은 너보다 자신을 더 아낄 거라고 말했다. 사레복을 운운하는 루시안에 오린의 눈깔이 발칵 뒤집혔다. 고통도 잊고 제게 덤비는 그 모습이 그의 살인보다 아름답다. 한 발자국만으로 그에게서 거리를 벌린 루시안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네 살인이 아름답다고? 아니, 네 살인은 난잡하고 지저분해.”
그러더니 그는 쿡쿡 웃었다. 그의 형체는 금방 바람처럼 사라진다, 오린의 단검이 그를 찌르기 전에, 그의 붉은 단검은 허공만을 가르고 끝났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넌 내 자리를 빼앗지 못할 거야, 오린. 넌 나보다 나은 게 없으니까.”
아버지께 간 루시안이 어떤 벌을 받는지 바알의 신도들은 알지 못한다. 보안이 철저한 것도 있지만 그가 받는 벌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돌든 그가 자신의 손으로 소문의 근원지를 박살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뽑힌 혀가 5개도 채 넘지 않았을 때 그의 벌에 대해 말하는 건 자연스럽게 금기가 되었다. 물론 금기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받는 벌에 관심을 보이는 자가 없다는 건 아니었지만. 오린은 그가 받는 벌을 보았다. 방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웃고 있었고 그는 용서를 빌며 애원하고 있었다. 공포의 붉은 기운이 넘실넘실 오린의 심장까지 침범한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오린은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자신은 절대로 그놈처럼 벌받을 짓을 하지 않겠다고,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아버지께 착한 딸이 되겠다고 그는 맹세했다. 오린의 대답에 바알은 흡족했다. 몸부림을 치느라 오린을 보지 못한 제 남동생을 뒤로 하며 오린은 두 가지 다짐을 마음에 품는다. 첫째는 맹세대로 아버지의 명령에는 거스르지 않을 것, 둘째는 언젠가는 루시안이 제게도 애원하는 걸 보고야 말겠다는 것, 등뒤로 벌어져 있던 문 틈이 틈새 하나 없이 사라졌다. 바알이 자신만을 선택해줬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오린은 루시안의 암살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가 틀렸다. 그만 없다면 바알의 초즌은 자신이 될 것이다… 오린의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가 벽과 바닥을 치며 흩어졌다.
오린의 적의가 전보다 짙어졌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루시안이 아니라 고타쉬였다. 고타쉬는 의자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루시안에게 오린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루시안은 망설임없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린이 조금 달라진 거 같지 않냐는 물음에도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평소의 오린도 저러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오린이 당신을 죽이려고 들면 어쩌겠냐는 물음에 루시안은 벙찌더니 크게 웃으며 오린이 자신을 죽일 리가 없다고 말했다.
“물론 오린이 날 싫어하긴 하지. 하지만 날 죽일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아.”
“왜 그렇게 단정짓는 거지?”
“그야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식들이니까.”
고타쉬는 그의 근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로 교단의 문제에는 신경끄기로 약속했었으니까, 그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무슨 책을 그리 재밌게 읽고 있냐는 물음에 루시안은 책 이름을 말하더니 감정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감정? 당연히 마법서일 거라고 생각했던 고타쉬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의외로 재밌더라고.” 그는 읽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더니 사랑이란 스스로를 희생해 그 대상을 신경쓰게 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사랑인가?”
“…무슨 소리지?”
“나는 널 신경쓰고 있으니까, 아마도.”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긴 한 건가?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표정이라고 하기엔 그의 얼굴은 흔들림 하나 없이 평온했다.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하는 거지? 고타쉬는 정답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남자의 표정, 남자의 행동, 그리고 남자의 말, 무엇 하나 고타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널 생각할 때가 있거든. 내 시간을 희생해서 말이야.” 오랜만에 보는 대답없는 고타쉬에 루시안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픽 웃으며 책을 덮었다.
“이런, 내가 대공을 곤란하게 만든 모양이네.”
“…꽤.”
놓친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루시안은 무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생긋 웃었다.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았나 보지?” 불쾌감? “그래. 확실히 불쾌하지는 않았지.” 그래, 확실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와 장난치는 걸 즐기는 거면 모를까. 고타쉬는 암살자 집단의 최고인 것치고는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냐며 농을 던졌다. 루시안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목 뒤로 바로 느껴지는 스산한 감각에 고타쉬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도 루시안은 단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에게 키스를 한다. 타액으로 더 축축해진 혀가 서로의 입안을 탐하며 서로의 살덩이를 뱀처럼 엮는다. 그는 그의 피부 위에 남아있는 낯선 흔적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탐닉하고, 탐닉하고, 탐닉하고, 그는 귀부인을 상대할 때처럼 신사적으로 그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그는 그와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언더다크에서 쭉 살았다는 그의 피부는 살아있는 것의 피부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고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탁자 위에 핏기가 가시지 않은 두개골을 올려놓으며 죽음을 응미하던 그의 모습은 광신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두개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루시안은 동맹은 하되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조건은 서로의 교단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베인도 베인이지만 고타쉬도 그 조건을 원했었기 때문에 첫 번째 약속은 바로 성사됐다. 두 번째 조건은 루시안은 발더스게이트에 익숙하지 않으니 고타쉬가 직접 발더스게이트를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건의 내용에 고타쉬의 표정이 애매해지자 루시안은 이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비밀 길은 암살자가 알아서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고타쉬의 물음에 그는 처음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 작업은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냥 날 관광객이라고 생각하면 돼.” 백치인 줄 알았는데 백지였다. 그가 정말로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한 궁금증만으로 관광 조건을 내세웠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고타쉬는 그가 우스우면서도 그에게 흥미가 갔다. 백지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는 건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바알은 도대체 뭘 두려워했던 건지, 그의 아들은 살육을 제외하면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고타쉬는 그 빈 공간을 자신의 취향들로 채웠다. 고타쉬에게는 자신의 계획을 들을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동조하는 그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와 고타쉬는 계속 놀이를 했다. 언젠가는 질릴 줄 알았다. 고타쉬에게 인간관계는 허무하고도 허망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함꼐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그는 질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놀이에 빠져들었다.
짧게 절정을 토해낸 고타쉬는 여전히 단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피식 웃으며 그건 비밀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다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놀이. 고타쉬는 옷을 추스리는 걸로 놀이의 끝을 알린다. 그의 제스처에 루시안도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고타쉬는 지도를 펼치더니 몇몇 구역을 가리키며 이쪽은 아직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거슬리는 놈들이 있다고 운운하며 그들을 죽인다면 바알의 이름이 더 세상에 퍼져나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나에게 기대는 사람들도 많아지겠고.”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익숙한 불꽃이 인다. 루시안은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루시안은, 고타쉬의 적의가 가득한 눈동자를 상상했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의 증오를 상상하자마자 그와 섹스를 할 때보다도 더 큰 카타르시즘이 그의 몸을 장악했다. 배신감, 악의, 절망, 그보다 더 아름다운 감정이 존재하긴 할까? 하지만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과 함께 그와의 놀이는 끝나버리겠지. 사랑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련님은 못합니다. 사랑의 끝을 자신의 죽음으로 상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루시안은 고타쉬의 손에 죽는 자신의 최후를 생각해보았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아름다운 죽음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고타쉬가 아름다운 살인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은 기쁘게 자진하여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고 장담했다. “살인에 대해 배워볼 생각은 없어?” 그가 표시한 부분을 단검으로 푹 찌르며 루시안은 그에게 물었다. 그의 말에 고타쉬는 군림하는 자와 암살하는 자는 따로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언제나 나의 곁에 돌아오도록, 암살자. 이 세상을 같이 지배할 파트너라면 너만큼 좋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앞에 나타나줄 테니.”
설령 내 단도가 너의 목을 찌르게 된다고 해도.
그리고 루시안은 기억하고 있지도 않은 그 약속을 지켰다. 루시안을 봤을 때 고타쉬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가, 돌아왔다. 협조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는 오린 대신, 그가 아끼던 암살자가 드디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다니고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타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납득했다.
하지만
그는 아스타리온과 시선을 교환하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 녹안은 고타쉬가 알고 있던 눈동자와는 달랐다. 반가울 줄만 알았는데 마주하는 그에게서 낯선 감정을 느낀다. 고타쉬는 그를 그날처럼 ‘나의 아끼는 암살자’라고 불렀고 기억이 없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백지였다, 하지만 이미 고타쉬의 색깔은 지워버리고 다른 사람의 색깔에 물들어버린 백지. 고타쉬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둘 사이에 와인잔이 오갔다거나, 두 사람이 침대 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거나, 발더스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곧 정복될 곳을 같이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거나… 그런 얘기들은 모두 생략했다. 그가 그에게 말해준 건 ‘이 모든 건 우리의 계획이었고 나는 너를 암살자로써 아꼈다’ 정도였다. 그의 뒤에 있는 동료들과 다르게 루시안은 자신의 과거를 들으면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내가 너와 특별한 사이였나?”
고타쉬의 말이 끝났을 때 그는 그저 그 한 마디만을 던졌다. 특별한 사이였냐고? 고타쉬는 어쩌면 그가 기억이 있는데도 자신을 농락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타쉬는 대답을 피했다. 그는 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계획은 성공했을 거라고만 대답했다. “우리는 모든 걸 할 수 있었지. 네가 오린에게 뒤통수만 맞지 않았다면 말이야.”
…네가 내 말만 들었다면.
“그래?”
그의 반응은 싱거웠다. 고타쉬는 계속 그의 반응을 살폈다. 공공의 적인 오린이 죽을 때까지 손을 잡자는 고타쉬의 말에 루시안은 팔짱을 끼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고타쉬는 그도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의심 속에서도 그와 재회한 걸 기뻐하고 있다는 걸 그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고타쉬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잡은 그의 손은 여전히 창백하고 차가웠다. 고타쉬는 충동- 아니, 계획적으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바로 쳐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은 순순히 그의 품에 들어와주었다. 아, 내가 아는 암살자가 조금은 남아있긴 하구나. 심장이 기대심으로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백지같은 존재다. 시간만 들이면 우리들의 관계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타쉬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지?”
“불쾌했나, 나의 암살자?”
“…아니,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어.”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고타쉬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었나. 네가 사라져버리고 오린의 일방적인 통보를 들은 후 내가 널 찾아보긴 했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오린과 손을 잡고 계획을 진행시켰다고? 고타쉬의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쳤다. 순수한 미소 대신 가식적인 미소로 대체된 그의 입술은 네가 혹시 기억을 찾았는데 날 모른 척하는 건가 싶어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루시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조금은 기대했던 거야? 귀엽네.” 고타쉬는 잡고 있던 그의 허리를 놓았고 그는 순식간에 고타쉬의 품에서 헤어져 나왔다. 그는 그럼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며 손을 가볍게 젓더니 자신의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동료들, 에게로, 고타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딱 한 명, 붉은 피부의 티플링 하나가 그의 옆에 있어줬을 수도 있었겠지만 고타쉬는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 의미는 없다. 그는 루시안의 뒷모습에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문득 생각한다.
…누가 백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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