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글리프

기회의 갈림길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는 괴상한 모습을 한 남성의 동상이 세워져있다고 한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채 벌거벗은 남성은 특이하게도 남성은 앞머리를 길게, 아주 길게 기르고 있지만 정수리를 기점으로 뒷통수는 털 한 올 찾을 수 없을 정도 반질반질했다.

'역사의 기초' 수업시간에 보여준 우스꽝스러운 동상과 그림을 본 학생들은 너나할것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변발을 반대로 했네! 중국계인 빅토리아가 미셸의 옆자리에서 킥킥댔다. 미셸은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라 어색하게 웃으며 교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교수가 가볍게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눈치 빠르게 웃음을 거두었다. 교실에 다시 정적이 감돌고서야 인내심 강한 교수는 입을 열었다.

"이미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동상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신화 속에서 카이로스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데다, 옷도 입고있지 않아서 바지자락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죠. 심지어 뒷통수에는 머리카락도 없어서 허망히 기회를 보낼 수밖에 없죠. 카이로스를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앞머리요, 맨 앞자리의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기회', 그러니까 카이로스가 올 것을 믿고 그의 앞머리를 움켜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 이 신을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습니다."

교수는 말을 멈추고,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카이로스와는 다르게 앞머리가 벗겨져가는 교수는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저는 20년 동안 이 과목을 담당해왔는데 첫 시간에는 꼭 카이로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지죠. 여러분에게도 물어볼까요? 여러분 중에 카이로스를 붙잡을 준비가 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스스로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전히 학생들의 얼굴을 살피던 교수의 눈이 미셸과 마주쳤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가죽이라도 잡아벗길듯한 그의 눈을 보며 교수는 옅게 미소지었다.

"이 이야기를 왜 여러분에게 하는지는 잘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곳에서, 지난 18년동안 상상만 했던, 혹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회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기회는 여러분을 차분히 기다릴 것이고, 또 어떤 기회는 그것이 기회인줄도 모르고 스쳐지나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기회를 얻기 위해, 항상 준비를 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기초 수업도 그 준비 중 하나가 되겠죠? 교수의 농담에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미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매년 7월 어느 날이면 늘 그 날의 꿈을 꾼다. 정작 그 날의 수업은 9월이었으니 ‘그 일'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커튼을 걷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막 동이 터오고 있었다. 창문에는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이 비춰보였다. 꿈 속의 ‘미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기괴한 문양이 자리한 눈동자를 제외하고.

3년 전이었다. 잘 나가는 중개업자이자 로비스트였던 미셸은 하루아침에 마천루에서 추착하는 신세가 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거꾸로 솟구쳤다. 무섭게 느껴지는 중력과 반대로 시간은 턱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바람에, 저절로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떴다. 짙은 먹물같은 밤하늘에 간간히 박혀있는 하얀 점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자, 그리고 머리카락. 유난히 희고 긴 머리카락. 자신의 것도, 남자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인가. 왜 하필 지금,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걸까.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제나 준비는 되어있었다. 어떤 기회가 오건, 그것이 무엇을 불러오건, 최선을 다해 붙잡아왔다. 기민함의 대가로 기회의 신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었다. 신의 인도를 따라온 결과가 죽음이라면 기꺼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허무한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누군지도 모르는(아마도 경쟁업체에서 보낸 사람일 것이다.) 사람에게 자살로 위장당하는 죽음 따위는.

그래서 그는 손을 뻗었다. 중력을 거슬러 힘겹게 손을 들어올리자 손가락 사이로 가늘고 흰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손을 휘젓고 또 휘저어도 바람에 휘날리는 실타래같은 것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양 손을 모두 뻗고서야 간신히 그것을 손에 움켜쥘 수 있었다. 신이시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십니까. 있는 힘껏 잡아당긴 그 순간.

적막을 깨고 벨소리가 울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미셸은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요델. 모닝콜이 필요하다고 했죠?”

“… 고마워요. 덕분에 일어났어요. 10분 후에 보죠.”

어떤 이유에선지 ‘미셸’'은 죽었다. 그리고 ‘아요델’이 태어났다. 새로운 삶과 함께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대가로 비밀 요원이 되었다.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냐고 하면 전혀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만, 오늘같은 날, 작은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미셸 카넬의 인생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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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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