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가트

Aporia by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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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리즈는 검고 곧은 지팡이를 겨눈 채 눈을 깜빡였다. 옷장이 열리는 음산한 소리, 어둠 속에서 그가 나타나자 저마다 재잘재잘 떠들거나, 훌쩍이거나 하고 있던 학생들은 저마다 아킬리즈의 어깨 너머를 빼꼼 바라보았다. 쟤는 뭘 겁내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보가트가 어떤 모습이 될까? 의외로 평범한 걸 무서워하면 웃기겠다! 글쎄, 사실은 쟤도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어서 수수께끼 같은 게 나오는 것 아니야? 어디, 어디 봐. 뭐가 나왔을까? 아킬리즈! 뭘 보고 있는 거야?

직후 모두는 보가트가 선 위치로부터 느릿하게 발 아래로 흘러오는 냉기를 감각한다. 거기에 서 있는 보가트를 본 누군가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을 테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했을 테고, 누군가는 의아한 고개를 갸웃거렸을 테다. 왜냐하면 아킬리즈 앞에는 슬리데린의 기숙사 유령―무서워하는 학생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야? 싶기도 할―‘피투성이 남작’이 여느 때처럼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선명한 튜닉을 입고 몸에는 쇠사슬을 감은 채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숙사 유령?”
“응. 다른 기숙사 유령들은 재미있거나 친절하던데 슬리데린 유령은 말도 별로 안 하고 무섭게 생겼어요.”
“오, 남작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단다. 이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선배들의 선배들에게서 내려오던 이야기인데……”
“그 정도면 지어낸 얘기 아니야?”
“여보는 조용히 해! 이건 슬리데린끼리의 대화라고!”
“알았으니까 뭔지 말해줘요, 엄마.”

남작은 사랑하는 여인을 쫓아 먼 길을 여행했네. 고풍스런 벨벳 튜닉과 가죽 신발, 비단 망토와 은검을 차고 그것들이 모두 먼지와 흙이 묻어 빛을 잃을 때까지. 그러나 여행길의 끝에 만난 여인은 남작을 거절하였지. 함께 돌아가기를 원했던 남작은 여인을 설득하려다 그만 은검으로 그녀를 찔러 죽여버렸네. 그녀의 피가 남작의 옷에 묻고, 남작은 그녀를 죽인 은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네. 유령이 된 그는 지금도 쇠사슬로 자신을 묶어 속죄한다네…….

“남작이 거절당했을 때 인정하고 물러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아마 여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거겠지.”
“누군가를 해치는 게 잘못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사람은 이해를 거부하고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언어는 왜 존재하고, 우리는 왜 소통하는 거야?

뭐가 옳은지 알면서, 왜 옳은 일을 행할 수 없는 거야?

왜 이해할 수 없는 거야.

왜, 닿을 수 없는 거야?

쟤 말이야. ‘새벽의 아이’라고 콧대가 하늘 끝까지 높아져서는…글쎄, 선배를 주먹으로 때렸대!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

아킬리즈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리디큘러스. 남작에 몸에 묶인 사슬은 풀리고 그는 말쑥한 옛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딘가의 초상화 속에 살 법한 생생한 청년의 얼굴이 된 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확인하고는 허리에 찬 은검을 버린다.

“하… 하하.”

웃는 것까지가 주문의 완성이랬지. 그러면 이제 젊은 남작은 여인을 쫓아 먼길을 떠나는 대신 옷장으로 도망쳐 숨어버린다. 잘 했어요, 헤르모드 군. 떨떠름한 분위기를 환기하는 교수님의 한마디에 이어 다른 학생들이 의례적으로 작게 박수친다. 다음 순서인 학생이 앞으로 나서는 걸 보며 아킬리즈는 다소 힘빠진 심정으로 돌아선다. 서로 반목하거나, 등지고 도망치거나. 분명히 더 나은 선택지가 항상 존재함을 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이상 세계는 불완전하고 사람들은 비틀린 신념 앞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종이 쓰레기처럼 버린다.

세상이란 정말로 이런 거야?

…개선점 기술: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서 이해와 대처에 시간이 다소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좀더 빠르게 주문을 욀 수 있도록 집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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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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