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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ge (5)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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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이 시작된 건 오후 네 시 반의 일이었다. 리셉션이 시작되고 두 시간 반 동안 테이블에서 혹은 홀 어딘가에 서서 남들과 대화를 나누던 나무는 이제야 입을 좀 다물 수 있겠다는 미묘한 안도를 느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교적이고 사람을 거리끼지 않는 성정이지만, 아무래도 주변에 절친한 사람이 있으면 입 밖으로 뱉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니 평소보다 피로가 더했다.

도슨트 최은수가 앞장서서 갤러리 안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작품 앞에서 유려하게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의 작품 해설을 듣는 이들도 있었고, 그것을 듣지 않고 자유롭게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관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무는 십 분 정도 전자에 속했었지만 이후 흥미가 떨어져 후자의 집단으로 건너가고야 말았다.

아직도 작가의 방에 있을 이아영 작가를 만나고 온 유신은 나무와 행동을 같이 했다. 유선과 동현은 예술품에 크게 관심이 없는지 관내를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관람이라고 보기는 힘든 모습들이었다.

"위에서 무슨 얘기 했어?"

나무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정말로 흥미가 없는 주제였지만 몸에 밴 사교 스킬이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만다.

"음~ 사람 사는 얘기 했지."

"그래?"

"걔도 참 안 됐더라."

"왜?"

"최근에 상을 치뤘대. 마음 정리도 다 안 됐는데 하필이면 전시 일정이 잡혀 있어서...... 고생하고 있더라고."

"가족상?"

"아니, 친구라던데."

나무는 으음 하는 콧소리를 내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심각한 이야기를 들어도 가볍게 대답해도 되었다. 참으로 편한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방 안은 어땠어?"

나무가 물었다. 이건 궁금한 정보였다. 어차피 2층에 올라가면 전시를 위해 작가의 방의 폴딩 도어가 전부 열려있기야 할 테지만, 그는 전시 이전의 작업실이 궁금했다. 유신은 눈동자를 대각선 위로 올려 골똘히 생각한다. 긴 속눈썹이 오늘따라 돋보였다.

"목공소 같았어. 아니면 공장? 창고처럼도 보였고."

"어떤 면에서?"

"그냥 딱 보니 그렇던걸?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공구가 여럿 있고...... 잘린 마네킹에, 바닥엔 가루며 먼지가 잔뜩 있었지. 그런 데에 오래 있으면 기관지 안 상하나 몰라."

"상하지."

나무가 딱 잘라 말했다. 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 조소과 동기들이 졸업작품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흙을 쌓고 다듬어 작품을 만드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정말 돌을 깎아 조각을 만드는 녀석들 역시 있었다. 그 때 작업실 바닥에 산재한 돌조각과 먼지란, 눈뜨고 도저히 봐 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아영의 작품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의 방 앞에서 천을 뒤집어 쓰고 있던 거대한 주제작을 떠올린다. 도슨트 최은수는 아직 미완성인 작품이기에 선공개 자리에서도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아영은 작가의 방 안에서 줄곧 그걸 만들고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문득 작품 앞에서 물흐르듯 유창한 해설을 하고 있는 은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2층으로의 안내는 아직인 모양이다. 1층의 작품 해설을 모두 끝내고 2층의 안내를 시작하겠다며, 은수는 본격적인 관람이 시작되기 이전에 지하 홀의 단상에서 이야기했었다. 물론 큐레이션이 필요하지 않은 관람객들은 먼저 2층으로 향해도 되었다. 나무는 그저 아직 1층을 전부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경사로를 오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분은 어디 계시지?"

나무가 또다시 물었다. 언뜻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은수의 부하처럼 보이는 도슨트 박서진의 이야기였다. 유신은 넓은 갤러리를 슬슬 돌아보며 서진의 모습을 찾는다.

"저기, 그 평론가랑 같이 계시네."

유신이 갤러리 한쪽에 붙어 있는 그림을 턱짓했다. 매혹적인 색상의 정물화였다. 다만 정물의 형태가 일그러지고 상실되어 원본 모델이 대체 무엇인지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 도슨트 서진과 아이보리색 정장의 영우는 그 일그러진 정물 앞에 서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서진은 언제나와 같이 소심하게 두 손을 얽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영우는 그저 미소지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 분은 왜?"

유신이 고개를 슬쩍 꼬며 웃었다. 흘러내린 한쪽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이럴 때면 그녀는 다소 매혹적으로 보인다.

"큐레이팅을 잘 하실까 싶어서."

"안내는 잘 해주시더라."

"그래?"

나무는 관람로를 잘만 따라가던 발길을 돌려 인상적인 정물화로 향했다. 유신이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을 먼저 눈치챈 건 서진이었다. 침울해 보이는 처진 눈을 번쩍 뜨곤 이쪽을 쳐다본다. 영우의 시선 역시 그들을 향했다.

"아, 유신 씨."

영우가 눈짓으로 인사했다. 서진은 안녕하십니까, 하는 여섯 글자의 단어를 세 번으로 끊어 말했다. 놀라다 못해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신은 영우의 인사를 똑같이 눈짓으로 받곤 서진에게 묻는다.

"또 뵙네요, 서진 씨도 큐레이팅하시죠?"

"아, 저, 저...... 말입니까?"

"도슨트시잖아요."

그녀가 입꼬리를 쓱 올려 웃었다. 미려한 각도를 계산하고 지은 웃음이었다. 안색이 하얘진 서진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으니 그를 보다못한 영우가 대답을 대신했다.

"실은 저도 그걸 여쭙고 있었습니다. 저기 여성 도슨트 분께는 죄송하지만 사람이 너무 몰려 있어서, 따로 큐레이팅을 해 주실 수 있냐고 여쭈었죠."

나무는 새카만 단발의 도슨트를 돌아보았다. 갤러리 중앙에 전시된 커다란 조각을 해설하고 있다. 그 앞에 포멀한 복장의 관람객들이 어림잡아 열 댓 명은 서 있었다. 개중에는 뿔테안경을 쓴 지민의 모습도 있었다. 반삭의 승현은 보이지 않았다. 자유 관람을 하고 있는 걸까. 이미 2층으로 친구를 보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어머, 그래서요?"

유신이 서진을 보고 웃었다. 서진은 하얀 셔츠 소매로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눈을 빙글빙글 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실은...... 도슨트, 라고 멋진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서진이 면목 없다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크지는 않던 체구가 더더욱 줄어들었다. 키가 훌쩍 큰 영우의 옆에 있으니 대비 효과가 아주 선연하다. 나무는 학과 아르마딜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보리색 깃털을 몸에 두른 학이 불쌍한 아르마딜로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여성 분과는 지인 사이라고 하시더군요."

얼굴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학이 덧붙였다. 원래는 도슨트 업무에 은수만 지원했었는데, 관람객 수가 적다고는 하지만 이 큰 갤러리를 혼자서 큐레이팅 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지인인 서진을 억지로 데려왔다고 한다.

"저, 예술 작품에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작품을 해설할 정도의 심미안이, 있는 건 아니라서...... 곤란해하고 있었습니다......"

서진이 줄곧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우물대며 말했다. 얇은 금테 안경이 조명을 받아 번쩍 빛났다.

"그럼, 사전에 작품 정보 같은 건 받지 못하셨습니까?"

가만히 있던 나무가 돌연 물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들었다. 심란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 작품 리스트, 를 받긴 했습니다만...... 하아, 저는 아무래도, 뭘 표현한 작품들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서진은 한숨을 푹 쉬며 정물화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작은 캔버스 채로 걸려있던 정물화 아래쪽 벽에 작은 플레이트가 붙어 있었다. 작품의 짤막한 소개글이다. 소개글에 따르면, 이건 아무래도 달팽이라는 관념을 왜곡하여 풀어놓은 추상화에 가까운 작품인 듯했다. 작가 명, 오지민. 작품 명, 평생의 친구 2.

"달팽이가 왜 평생의 친구인 거야?"

나무의 옆에서 소개문을 들여다보던 유신이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이아영 작가의 작품만 전시하는 건 아닌 모양이죠?"

나무가 명목 상의 도슨트에게 물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서진은 나무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도, 몇 전시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작품도 그렇고요."

나무는 은수가 해설하고 있던 작품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와 그를 따르는 관람객 무리는 이미 다른 작품으로 발을 옮겼다. 지민은 아직 그 무리에 끼어있었다. 『평생의 친구 2』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나무는 구태여 해설을 들을 정도의 강렬한 호기심은 느끼지 못했다.

"연작인가 봅니다. 다른 작품도 여기에 있을까요?"

영우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굴곡이 뚜렷한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새겨진다. 인상이 흐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독특하지는 않은 서진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왼쪽 입가 아래의 점이 가려진다.

"아, 아뇨...... 없습니다. 저도 다른 연작이 있는가, 했는데, 리스트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럼 연작 중 이거 하나만 뽑아서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네요. 어떤 의미가 있으려나."

『평생의 친구 2』는 관람로 초입에 위치했다. 이에 대한 해설은 지금도 열심히 입을 움직이고 있는 은수가 애저녁에 하고 지나간 것이다. 영우는 그녀의 설명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달팽이는 장수하는 동물이라서일까요?"

서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수하는 동물은 달팽이가 아니라 거북이 아닌가요?"

나무가 가볍게 끼어들었다. 뺨이 붉어진 서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작가의 방은 그 내부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갤러리를 헤매었던 때에 보았던 양개형 폴딩 도어는 양쪽으로 전부 밀려나, 저곳에 벽이라는 게 있었나 싶었을 정도다. 왼쪽에 덩그러니 남은 가벽은 오로지 넓적한 출입문을 달기 위해 세워진 것 같았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그 출입문은 지금도 닫혀있었다.

동현은 유선의 옆에서 작가의 방을 바라보았다.

예술가의 작업실이라기보단 어딘가의 공장을 연상케 하는 설비였다. 맞은편 벽과 오른쪽 벽을 점유하고 있는 기역 자 테이블의 오른편에는 작업용으로 쓰는 듯한 컴퓨터가 하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파일철 몇 개가 정리되지 않은 채 굴러다녔다. 맞은편에는 무언가를 자르는 데 필요한 절단기가 입을 오므리고 있었다. 가위의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위아래로 겹친 두 칼날 중 위의 것을 들어올려 사이에 자를 것을 넣은 다음 들어올린 위쪽의 칼날을 내려 절단하는 방법의 절단기였다.

벽에 매달린 공구걸이에는 톱과 망치와 대패와, 하여튼 물건을 자르고 다듬는 데에 필요한 도구가 온통 걸려있었다.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철제 테이블에는 나무 재질의 마네킹 두세 개가 제멋대로 누워있다. 모든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지 사람은 할 수 없는 자세로 누워있는 모습이 동현에게는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가득한 톱밥과 먼지가 잔혹동화 같은 분위기를 가중시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의 방의 주인 이아영은, 얼굴에 보안경을 쓴 채 소형 그라인더로 마네킹의 발을 잘라내고 있었다. 본드와 페인트가 묻어 얼룩덜룩한 초록색 목장갑을 낀 손에 힘이 실린게 동현이 서 있는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보안경 너머의 검은 눈은 깎아낼 대상을 시야에서 나가게 두지 않았다. 그만큼 올곧고,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동현은 한 번 더 섬뜩함을 느낀다.

이전에, 비슷한 눈을 본 기억이 있다. 대체 어디서였을까. 분명 이 작가와는 생판 초면인데.

주변에는 인파가 제법 있었다. 이 정도면 오늘의 리셉션에 참석한 인원의 절반은 될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영은 이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당신네들이 나의 작업을 구경하든 말든 그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한, 마치 과업을 수행하는 듯한 우직함이 느껴졌다.

"대단하다......"

동현이 중얼댔다. 함께 전시를 지켜보고 있던 유선이 그의 쪽으로 슬쩍 시선을 주었다.

"뭐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참치 해체 쇼 같은 거 아닌가?"

유선이 농담하듯 말했다. 그녀가 이런 말투로 말한다는 건 기분이 좋은 편이라는 뜻이다. 동현은 덩달아 몸의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낀다.

도슨트 최은수의 원맨쇼는 방금 전 끝을 맺었다. 자유 관람 이후의 스케줄은 달리 없으므로, 관람객 몇이 갤러리 안을 돌아다니던 한선혜에게 인사를 건넨 뒤 갤러리를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보통 모임이 파하는 분위기가 한번 만들어지면 구성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먼저 떠나려고 앞다투어 떠나며 이별에 박차를 가하고는 하는 법이다. 갤러리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시간은 이제야 다섯 시 반을 좀 넘었지만 사라질 생각을 않는 비구름으로 어두컴컴해진 하늘이 폐막의 분위기에 더욱 가속을 붙였다.

우리도 갈까, 하고 동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일정에 있어서 모든 판단 권한은 유선에게 있다. 마네킹의 발이 잘린 부분을 잘 다듬고 있는 작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가볍게 콧숨을 내뿜는다.

"언니 갈 때 같이 가자."

동현은 시무룩한 얼굴로 끄덕였다. 유선은 이제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상관의 관심을 잃은 동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신은 커녕 나무의 모습도 보이질 않아서, 동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야 만다.

주변의 인파는 많이 사라졌다. 공백이 많아진 갤러리 안에서 반삭의 승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작가의 방 전시에는 관심이 없는지 2층 한구석의 벽에 등을 기대고 휴대전화를 툭툭 두드리고나 있었다. 아까의 지하 홀에서는 분명 귓바퀴에 이어커프 같은 걸 차고 있었는데, 지금은 귀에 아무 것도 달고 있지 않은 게 동현은 조금 신경쓰였다.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고 지민과 영우가 함께 서 있었다. 대화를 나누며 아영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지민은 샴페인을 마실 때와 다른 게 없었지만, 영우는 흰 마스크를 하나 끼고 있었다. 작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먼지를 막기 위함일까. 기관지가 약한지도 모르겠다.

우르릉, 하고 천둥이 우는 소리가 났다. 2층은 창이 훤하게 난 1층과 다르게 창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빗발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바깥의 상황이 그리 나아지진 않은 모양이라고 동현은 생각했다. 동현과 유선이 묵는 숙소는 이곳에서 차로 이십 분은 떨어진 곳에 있다. 사람들이 태풍에 겁을 먹고 집에 틀어박혀 교통체증이 덜하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없겠지.

사람들은 하나둘 경사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현과 유선, 지민과 영우, 그리고 동떨어진 승현과, 사람이 떠나든 말든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아영만이 2층에 남았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마침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지민과 영우가 유선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전시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린다.

"저희는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영우가 신사적인 태도로 말했다.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는 가시지를 않는다. 지민은 뿔테안경의 다리를 잡아올리며 덩달아 빙긋 웃어보였다.

"기회가 있으면 또 뵈어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지민의 보브컷이 탄성감 있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경사로를 향해 걸어가자, 전시장 한구석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승현이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그들의 뒤를 따랐다. 유선과 동현에게는 고개를 대충 한번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도 갈까?"

동현이 유선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우수수수...... 하는 소리가 났다.

구웅...... 하는 소리도 났다.

거센 태풍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그 다음의 것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일까.

드물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동현과 시선을 맞춘 유선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으니, 1층에서 무언가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계속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은 음량이 다소 크다. 이질적으로 크다.

무슨 일이지, 하고 말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빠른 걸음으로 경사로를 지난다. 오른편의 창은 어둑어둑한 저녁의 바다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리 표면에 촘촘하게 달라붙은 물방울들이 바깥의 폭우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왼쪽 난간 아래로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돌아가야 한다며 경사로를 내려간 세 명, 지민과 영우와 승현이 갤러리 정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뒤로 휠체어를 탄 선혜와, 그녀 뒤에 서 있는 도슨트가 두 명. 그리고 한 손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로는 입가를 가린 유신이 나무의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셋 셋 둘 하여 전부 여덟 명의 사람이 유리로 된 자동문 앞에 모여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동현은 거의 뛰듯이 해 문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따라오던 유선은 뛰는 걸 관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무가 먼저 동현을 돌아보았다. 보기 드문 낭패의 표정이 밋밋한 조형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동현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갇혔네요."

나무가 짤막하게 말했다.

"......네?"

"산사태가 났어요. 진입로가 토사로 완전히 막혀버렸어요."

그리 말하고 나무는 유리문 너머를 가리켰다. 어두컴컴하여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차장 너머에 있던 두 언덕 사이의 뻥 뚫린 길이 보이지 않는 건 명백했다. 꼭, 두 언덕 사이에 길 같은 것은 없고 애당초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는 듯이, 토사는 완벽하게 진입로를 봉쇄한 상태였다.

"저, 저기 말고 다른 길은 없나요?"

나무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쫓는다. 달려 내려온 경사로 뒤편의 통창이 보였다. 해안 절벽 너머의 어두침침한 광경만을 비춘다.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날은 거진 저물어서 하늘과 해안선의 구별조차 모호하게 보였다.

"없는 것 같습니다."

보안경 차림의 아영이 뒤늦게 경사로를 내려오고 있었다. 하얀 티셔츠 위에 미술용 앞치마를 걸쳐입은 그녀는 등 뒤의 검은 하늘과 대비되어 유난히 밝아보였다. 통창의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천천히 이동하던 아영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난간에 손을 대고 1층의 열 명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등의 말은 꺼내지 않는다. 경사로의 중간 즈음에 가만히 서서 아래의 인간들을 관망하기나 한다. 보안경 뒤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동현이 서 있는 거리에서는 파악되지 않았다.

"소방서에 빨리 연락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제가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우가 아이보리색의 정장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기에 남은 사람은 우리가 전부입니까?"

유선이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말투로 물었다. 걱정스럽게 문 너머를 바라보던 선혜가 고개를 돌린다.

"예. 방금 레스토랑 분들도 다들 떠나셔서, 배웅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토사 아래에 차가 깔리거나 하진 않았고요?"

"그랬다면 이미 구급차를 부르고 있었겠죠."

선혜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소방서에 전화하겠다던 영우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만 있다. 통화가 이어지지 않는지 말은 한 마디도 않는다.

유신은 이제 제가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 위에 가볍게 앉고야 말았다. 나무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괜히 갤러리 안을 훌훌 둘러보고나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어느새 귓가에 새빨간 이어커프를 착용한 승현은 멍하니 건물 밖을 바라보고 있던 지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또 왜 그러는데, 하고 지민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대답은 않고 그저 친구 예술가를 내려다보기나 했다.

선혜의 휠체어 뒤에 서 있던 두 도슨트는 의외로 침착했다. 칼같은 단발머리의 은수야 늘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했으니 이상치는 않지만, 새카만 곱슬머리의, 믿음직하지 못한 서진마저 싸늘한 시선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아영은 경사로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위로 올려 묶은 머리칼 밑의 목이 새하얗게 빛났다.

Assemblage (1) https://pencil.so/kpota/1818914736

Assemblage (2) https://pencil.so/kpota/714549043

Assemblage (3) https://pencil.so/kpota/1365046069

Assemblage (4) https://pencil.so/kpota/994268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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