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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mblage (1)

프랑스어로 집합·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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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시도 끝에 소방서와 연락이 닿은 영우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태풍의 갑작스러운 진로변경으로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던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수해가 잇따랐다는 것이다. 그 탓에 소방서는 이미 거의 모든 인력을 수해 복구 및 피해 후속 처리에 가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한 지금도 피해 신고는 끝없이 접수되어, 소방 행정 마비에 가까운 상황에서 최선의 대처를 위해 영우 및 갤러리 내 고립자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설명했다.

갤러리에 고립된 사람은 열한 명. 하지만 단순히 고립되었을 뿐이지 신체나 기타 재산에 중대한 위협이 생긴 것은 아니다. 산사태가 난 언덕과 갤러리 건물은 넓은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어 2차 산사태에 휩쓸릴 염려도 적다. 게다가 갤러리 3층 레스토랑에 열한 명의 인원이 하루를 넘기기에는 충분한 여분의 식음료가 있었고, 갤러리 부속 숙박시설 안채에는 총 열두 개의 방이 있었다.

소방서 측은 고립자 열한 명이 하루만, 아니 하룻밤만 갤러리에 묵는다면 이쪽에서 인원을 조달하여 내일 아침 일찍 토사 처리에 나서겠다는 제안을 조심스럽게 내세웠다. 고립자 열한 명은 모두 개인의 사정이 있는 사회인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연휴에 바쁜 이들은 아니었다. 모두 소방서의 제안에 찬성했고 (유선의 경우 불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찬성하긴 하였지만) 선혜의 주도 하에 하룻밤을 지낼 안채의 객실을 배정받았다.

각 객실에는 싱글 베드가 하나씩 있었기에 객실 하나에 사람 한 명씩을 배정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근처 객실에 배정받고 싶은 분들은 이야기하라는 선혜의 말에 대뜸 승현과 동현이 손을 들었다. 각각 지민과 유선의 객실 근처에 배정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작 지민과 유선은 미묘한 표정으로 각자의 짝을 바라보았지만, 선혜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저희는 객실 하나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은수가 말했다. 그녀가 말한 저희, 에 속하는 인물이 은수와 서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했다. 모두의 시선이 은수에게 쏠린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결정자인 선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서진 씨도 동의하는가요?"

선혜가 까다로워 보이는 얼굴을 서진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은수의 선언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던 서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은수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갤러리의 부속 숙박 시설 안채에는 2층과 3층에 각각 여섯 개의 객실이 있다. 열한 명의 숙박객 중 은수와 서진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니 총 열 개의 객실이 점유되게 된다. 2층의 객실에는 영우, 선혜, 아영, 승현, 지민, 그리고 두 명의 도슨트가 묵게 되었다. 남은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3층의 객실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선 각자의 방 상태를 확인하자는 제안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열한 명은 큰 반기를 들지 않고 각자의 객실로 향했다. 유선과 동현이 3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기에 태블릿과 옷가지가 든 작은 백팩을 든 나무는 계단을 올랐다. 캐리어를 든 유신은 물론 동생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 도달하자 나머지 세 명은 이미 제 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길지 않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객실이 세 개 씩 늘어섰다. 복도의 끝에는 작은 창이 났다. 토사를 토해낸 두 개의 둔덕 중 왼쪽의 것이 창 너머로 보였다. 완전히 해가 져 봉긋한 실루엣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나무의 인기척을 느끼고 유신이 열린 문 너머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옆 방이네."

"변호사님 앞 방이기도 하지."

유신은 계단과 엘리베이터 바로 앞 방을 배정받았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방이 그녀의 방이고, 그 맞은편 방이 동현의 방이다. 나무는 오른편의 두 번째 방을 배정받았다.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먼 세 번째 방에는 아무도 없다.

우연찮게도 가까운 사람들끼리 한 층을 쓰게 된 것이다. 나무는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제 객실 문의 열쇠 구멍에 303이라 쓰인 팻말이 달린 열쇠를 꽂아넣었다.

원룸에 가까운 작달막한 방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장 커다란 창문이 보인다. 낮에는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커튼은 연한 비취색을 띠었다. 지금은 어두컴컴한 창문 아래에 소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였고, 그것들과 거리를 좀 두고 일인용 침대가 방의 가운데 즈음에 위치했다. 그 외 스탠딩형 옷걸이와 작은 냉장고가 침대의 맞은편에 적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의 오른편에는 개인용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나무는 허리까지 오는 크기의 냉장고 위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두고 화장실의 문을 열어보았다. 사용된 흔적이 없는 새하얀 변기와 세면대의 옆에 샤워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설비가 나쁘지는 않은 방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냉장고 위에 두었던 가방을 도로 들어 창가의 테이블에 던져두었다. 낮이 된다면 분명 새파란 바다가 보일 창문은 평범하게 밀어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창은 위아래로 크게 나 있어서, 추락 방지를 위한 것인지 나무의 명치까지 오는 높이의 창살형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방을 대충 돌아보고 나무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이 부드럽게 튀었다. 탄성이 좋은 매트리스였다.

스마트폰을 꺼내 이런저런 알림을 확인했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그렸던 웹소설 표지의 건은 어떻게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탓에 나무에게 일을 떠넘겼던 일러스트레이터 A씨에게서 감사의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나무로서는 일감은 늘면 늘수록 좋았으므로 오히려 감사 인사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sns에 업로드했던 개인 그림의 공유 수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화풍으로 그린 오리지널 작품보다는 최근 화제를 모았던 애니메이션의 팬아트 쪽이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한 선생님은 왜 아직도 나의 그림을 보고 계신 걸까.

그녀는 내 그림에서 뭘 보고 있는 걸까.

연기처럼 피어오른 의문이 서로 엉겨붙어 천천히 형태를 만들어간다. sns의 스크롤을 내리고는 있지만, 수많은 인간들의 의미 없는 재잘거림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관성적으로 sns를 둘러보던 나무는 어떤 게시글을 보고 손가락을 멈췄다.

[우리형 개웃기네 진심]

짧은 문장 아래에 유튜브 커뮤니티 스크린샷으로 추정되는 이미지가 세 장 실려있었다.

백도화가 운영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의 스크린샷이었다. 십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방송 일정을 업로드하곤 한다. 첫 번째 스크린샷의 내용이 실은 그러했다. 5월 연휴를 맞아 방송을 쉽니다. 오랜만에 여행을 갑니다. 인기 댓글, 형 여친 생겼어? 추천 수 982.

두 번째 스크린샷 역시 커뮤니티였다. 백도화가 찍어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호텔의 창문 사진이 즐거운 연휴 되라는 글과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그의 특이적인 단발머리가 반사된 창문 밖으로 어딘가의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인기 댓글, 부산에서 마주치면 회 사주시나요? 추천수 737. 아하, 부산이었나.

세 번째 스크린샷은 두 번째와 구도가 비슷했다. 찍어 올린 호텔 창밖의 광경이 완전히 다르긴 했지만. 먹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태풍이 왜 이쪽으로 오냐, 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게시된, 흔들리고 초점 나간 사진이 그의 당황을 연상케 했다. 인기 댓글, 태풍마저 쫓아오게 만드는 셀럽ㄷㄷ 추천수 1천.

종합 게임 스트리머인 도화는 몇 년 전부터 나무에게 정기적으로 유튜브 영상의 섬네일을 의뢰했다. 정기적인 의뢰가 제대로 된 연간 계약으로 발전한 건 겨우 이 년 전의 일이다. 이메일로만 의뢰를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이 년 전 계약서를 작성하며 처음으로 대면했다.

당시 나무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화는 부산 최대의 게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가용을 끌고 내려올 예정이었다. 이렇게 된 거 부산에서 얼굴을 보고 계약을 진행할까요, 하는 도화의 제안을 나무는 별 생각 없이 수락했었다.

날카로운 인상을 테가 두꺼운 뿔테안경과 적당히 기른 단발로 가리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라고 카페 테이블에 앉은 도화를 쳐다보며 나무는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저 방송을 위한 치장으로 여겼다. 격 없는 인터넷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시청자들의 니즈는 그만큼 기묘한 데가 있어서, 사납게 생긴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가는 무섭다거나 부담스럽다거나 왜 이렇게 화가 났냐 하며 떨어져나가는 이들이 어쩌면 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장의 이유를 알고 있다.

부러 얼굴의 윤곽을 가려 인상을 흐리게 하는 이유를, 나무는 어떠한 계기로 알아채고야 말았다.

백도화는 김민석이라는 이름으로 흥신소 조사원 일을 겸업 중이다.

김민석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이 백도화를 보고 동일 인물임을 눈치채면 아주 곤란해진다. 반대로, 백도화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이 김민석을 보고 동일 인물임을 눈치채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깨끗하지 못한 일을 도맡아 해내는 조사원이라는 직업의 특성 상 신상이 밝혀지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나무는 그가 그런 심각한 리스크를 지면서도 스트리머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고민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댄다.

나무는 자신이 그런 심각한 리스크를 지면서도 끔찍한 일에서 손을 빼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자신은 그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무는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각자의 방을 둘러본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썩 괜찮은 객실에서 마음 놓고 쉬거나, 할 일도 없는데 다시 갤러리로 돌아가 시간을 죽이거나. 동현과 유선은 후자에 속했다. 갤러리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로비의 소파 세트에 승현과 지민이 앉아있었다.

"갤러리로 가세요?"

지민이 물었다. 승현은 말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예."

유선이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무뚝뚝한 대답에 지민은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도슨트 분이 그러셨는데요, 혹시 수건 같은 게 떨어지면 저기 데스크 안쪽 스태프룸에서 챙겨가시면 된다고......"

"아, 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민이 데스크를 가리키는 수고까지 들였는데도 유선은 그저 사무적인 어조를 유지하며 몸을 돌리고 말았다. 갤러리 연결 통로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유선의 뒤를 따르며, 동현은 말없이 지민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얼떨떨한 표정의 지민은 끊임없이 사죄를 표하는 동현에게 고개나 겨우 끄덕여보였다.

갤러리 1층과 2층을 잇는 긴 경사로 밑에는 통창을 바로 곁에 두고 관람할 수 있는 소파 세트가 있다. 비록 지금 창 너머로 보이는 거라곤 갤러리 내부 조명의 덕으로 한 치 앞만 보이는 음울한 어둠과 지면에 퍼져 나가는 동심원 뿐이었지만, 나무와 유신은 그곳에 앉아있었다.

"언니."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유신은 습기로 헝클어진 기색이 있는 머리칼을 한쪽 귀로 넘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무도 동작을 같이 했다.

"유선아."

"여기서 뭐 해?"

"바다 구경하지."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바다는 무슨 바다."

"그래도 바람이 좀 가신 거 같은걸."

유신이 눈웃음치며 말했다.

"우산이 있었으면 나가봤을 텐데."

"날아갈 일 있어?"

나무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뗐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런 그의 의지를 동현이 이어받는다.

"차에 여분 우산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져올까요?"

"역시 오 탐정밖에 없네~"

칭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자면 작은 칭찬 하나로도 괜시리 힘이 나는 게 인간이라는 생물이다. 동현은 그 길로 유선에게 차 키를 받아 폭우 속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토사가 쏟아진 저녁보다는 빗줄기가 가늘어진게 다행이었다.

"뭐, 오 탐정? 둘이 친해 보인다?"

비서를 보내버린 유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언니를 쳐다본다.

"귀엽게 생겼잖아, 오 탐정."

유신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나무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자매를 흘기다가 이내 뻥 뚫린 어둠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추락 방지 난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 너머로 일렁이고 있을 새카만 바닷물은 인식조차 되질 않았다.

안채의 연결통로 쪽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도슨트 두 명이 통로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이 비슷한 둘은 위층에 일이 있는지 경사로 쪽으로 향하다가, 소파 세트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보곤 발길을 돌려 다가왔다.

"한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은수가 대뜸 많은 걸 생략한 질문을 던졌다. 서진은 그녀의 뒤에서 몸을 조금 움츠리고 있었다.

"차에 뭘 좀 가지러 갔어요. 두 분은 어디 가세요?"

소파에 앉은 유신이 대답했다. 줄곧 앉지 않고 서 있던 유선은 그제야 천천히 언니의 곁에 가 앉았다.

"간단하게 저녁 준비라도 할까 싶어서. 레스토랑에 가 보려고 했습니다."

식재료가 없어 제대로 된 음식은 만들기 어렵겠지만 아까 리셉션에서 사용했던 가공식품들의 여분이 남아있을 거라고 도슨트는 말했다. 어쩌면 냉동식품도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그녀가 덧붙이던 때, 갑자기 어두컴컴하던 통창의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장우산을 든 오동현이었다. 다른 손에 접이식 우산도 두 개나 들고 있다.

다섯 명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된다. 그들의 시선에 동현이 웃으며 반응하려고 했지만, 돌연 불어온 강풍에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우와악!"

우산 째로 날아갈 뻔한 동현은 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기 직전 우산을 놓았다. 거센 바람을 타고 한순간 상승한 검은색 장우산은 팽이마냥 몇 바퀴를 빠르게 돌다가 절벽을 부서뜨릴 기세로 몰아치는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조심해, 오 탐정!"

유신이 외쳤다. 태풍 속의 허수아비처럼 흔들리고 있는 동현에게는 결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꼭 나가 봐야 날씨를 알겠냐고."

유선이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통창 밖의 동현은 이제 다소 불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유선은 딱 한 번 혀를 차고는 동현을 턱짓으로 귀환시켰다. 이미 머리카락이 빗물에 푹 젖어버린 탐정은 잽싸게 갤러리의 정문을 향해 달렸다.

"날이 여전히 안 좋네."

나무가 나직하게 말했다. 딱히 누구 하나를 특정해서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태풍이 몰고 온 습기로 헤어 세팅이 조금 어그러진 유신이 그의 말에 반응하려고 했을 때, 갤러리의 문이 열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의 동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온다.

통창에서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은수와 서진은 별 말 없이 창 너머의 폭풍을 관망하기나 한다. 우산을 제물로 바치고 귀환한 동현에게는 시선을 한 번 주었으나,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아니, 은수가 서진을 슬쩍 쳐다보긴 했다. 그에게 수건이라도 가져다주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다. 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데스크 안쪽의 스태프 룸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가, 금세 깨끗한 수건을 하나 꺼내 동현에게 건넸다.

"왜, 왜...... 나갔다 오신, 겁니까?"

서진이 작게 물었다. 동현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다가 사람이 좋아 보이다 못해 바보 같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날이 좀 풀렸나 싶었거든요."

젖은 동현에게서 접이식 우산을 건네받은 유신이 별안간 도슨트를 향해 물었다.

"은수 씨, 일일 도슨트라고 하지 않았어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어떡해."

"아뇨, 어차피 밤늦게까지 정리를 도와드릴 계획이었습니다. 하루를 묵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어머, 정말요? 안채에서요?"

"그렇습니다."

"그럼 서진 씨는요?"

"저, 저도...... 같습니다......"

고개를 30도 정도 아래로 기울인 서진이 대답했다. 작고 어물대는 특유의 말투는 이전과 같았다.

"역시 오픈 직전이라 그런가 할 일이 많으신가보다. 정리라고 하면 막, 작품 재배치하고 그러는 건가?"

"으음, 예...... 보존 상태를, 점검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작품의 재배열도......"

"그럼, 저흰 이만."

은수가 말이 끝나지 않은 서진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는 어딘가 비굴한 표정으로 소파에 모인 네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은수의 뒤를 따라 경사로로 향했다. 도슨트들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리다가, 2층에 도달한 시점에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몸이 젖어 쉽사리 소파에 앉지 못하고 있던 동현은 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일곱 시 반을 지나고 있다. 열두 시간만 있으면 소방관들이 와서 토사를 치워주는 걸까.

네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과 가까운 쪽에 앉은 나무와 유신은 그저 텅 빈 어둠을 노려보고만 있다. 언니 옆에 앉은 유선은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스크롤을 내리는 그녀의 표정에 진중함은 없어서, 업무 관련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니겠다는 예상을 하는 동현이다.

"평생의 친구라는 거, 무슨 뜻인 거 같아?"

적막을 깬 사람은 유신이었다. 창에서 시선을 떼고 좌중을 훑는다. 나무는 보기 드물게 눈썹을 팔자로 하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그림 얘기하는 건가?"

나무가 물었다. 대각선 방향에 앉은 유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으로 언니를 흘긴다.

"무슨 그림?"

"1층 구석에 걸려있던 달팽이 그림 못 봤어?"

"달팽이?"

유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파 곁에 선 채 몸을 말리고 있던 동현도 생각해 보았지만, 달팽이를 그린 그림 같은 건 본 기억이 없다. 전시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유선과 함께 돌아다니며 전시 작품은 전부 보았던 것 같은데.

"아뇨, 달팽이를 왜곡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달팽이를 모델로 하긴 했지만 그 정도의 왜곡이 들어갔다면 더 이상 달팽이라고 보긴 힘들죠. 관람객들 대부분이 소용돌이 정도로 인식하지 않았을까요."

나무가 해설을 덧붙였다. 그제야 유선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라면 봤어. 빨간 토네이도처럼 생긴 그거 말이지."

"그게 실은 토네이도가 아니라 달팽이라는 거야. 설명문에 적혀있더라고."

"그런데 그 빨간 달팽이에 평생의 친구라는 제목이 달려있고?"

"그래."

이해가 빠른 동생을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유신의 맞은편에서 또다시 나무가 입을 열었다.

"오지민 작가는 원래 추상화에 가까운 정물화를 그리는 작가라고 하더군요. 특유의 독특하고 원시적인 색감이 그녀 식대로 왜곡된 정물과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나름 인기가 있답니다."

"그 붉은 소용돌이가 달팽이라는 건 설명문을 읽고 알았다니깐. 내가 궁금한 건, 왜 달팽이가 평생의 친구냐는 거야."

유신이 가슴께까지 내려온 풍성한 머릿결을 손으로 몇 번 꼬며 말했다. 나무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오지민 작가는 안승현 작가랑 친하지."

"안승현?"

"머리를 짧게 깎은 분 말이야."

"아아, 그 분. 분명히......"

"인공 와우를 착용하고 계셨잖아."

나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현은 그녀가 꼈다 뺐다를 반복하던 새빨간 이어커프를 떠올려냈다. 그게 인공 와우였던 건가?

"와우는 달팽이관이라고도 하지."

불퉁한 얼굴로 유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선이 중얼거렸다. 소파에 둘러앉은 두 사람과 소파 근처에 선 한 사람이 듣기에는 충분한 음량이었다. 나무는 그에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주억댔다.

"단순히 달팽이를 닮아서 달팽이관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저도 사람의 몸에는 무지해서 달팽이관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소리를 듣는 데에 필요하다는 건 압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네 귀 안에는 달팽이관이 있다. 왼쪽 오른쪽에 하나씩, 도합 두 개의 달팽이관이 올바른 장소에 달라붙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승현은 타고난 달팽이관에 이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든 달팽이관을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리라.

인공 와우를 착용하고 다니는 승현과, 달팽이를 모델로 한 『평생의 친구 2』를 그린 지민이 친밀한 사이라면 지민이 그녀에게서 소재를 따 왔을 가능성이 커진다. 승현의 인공 와우는 새빨간데다가 반삭의 머리로는 그런 독특한 와우가 가려지지도 않는다. 상당히 눈에 띄는 것이다.

뜸을 들이던 나무가, 그러니까, 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몸 속에 달팽이를 두 마리씩 기르고 있는 셈입니다. 평생 말이죠."

동현은 별안간 귀가 간지러웠다. 청각이 의식된다. 귓속의 달팽이가 소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평생의 친구?"

유신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전히 불퉁한 표정인 유선은 이런 대화 주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을 스마트폰으로 떨궜다.

"그럴 것 같은데. 내 해석으로는."

"제법 평론가 같잖아, 송 군."

나무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그 평론가 선생님은 기관지가 안 좋아 보이시던데."

유선이 스마트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자연스럽게 동현이 동조하게 된다.

"아, 맞아요. 작가의 방 전시에서 마스크를 끼고 계시더라고요."

"그 전시, 분진이 엄청났으니까. 멀쩡한 나도 목이 다 아프려고 하더라. 청소는 어떻게 하려나 몰라."

"요즘 청소기들 성능이 얼마나 좋은데."

유신이 싱글싱글 웃었다.

"바닥 청소만 문제야? 공중에 떠 다니는 먼지도 문제지. 그 넓은 갤러리가, 환기가 잘 될 것 같진 않던데."

"어머, 얘. 그림이나 작품 같은 거 전시할 때 통풍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이후 십여 분 간 크게 의미는 없는 대화가 자매 사이에 오갔다. 편안한 곳에 앉아 시간을 때우기 위한 대화가 으레 그러하듯 주제의 변동이 심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언니 집은 환기를 잘 시키고 있느냐,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주변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컴퓨터로 일한다고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꾸준히 나가서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 한다. 실은 대화라기보단 유선의 일방적인 잔소리에 가까웠지만 듣는 유신은 정작 기관총처럼 말을 쏘아대는 동생을 귀엽다는 눈으로나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채와 이어지는 통로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자매의 대화를 멍하니 흘려듣고 있던 동현이 기민하게 통로를 바라보았다. 선혜와 아영이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왼손으로 스틱을 조종하던 선혜가 소파의 인물들을 보고 휠체어의 속력을 낮추어 방향을 전환했다. 뒤따르던 아영도 그에 발맞춘다.

"안녕하세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까다로운 인상의 얼굴을 연하게 찡그리며 선혜가 고개를 숙였다. 유선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응했다. 그녀와 늘 함께하는 동현마저 흠칫 놀랄 정도의 속도였다.

"아닙니다. 천재지변인데 별 수 있겠습니까. 어디 가십니까?"

"아영이가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요."

선혜는 턱을 당겨 위층을 가리켰다. 아영은 멍한 눈으로 그저 휠체어 뒤에 서 있었다. 네 사람과 시선이 맞으면 작게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반응은 보였다.

"아, 지금도 작업을 하시는 겁니까?"

"예. 주제 작품을 하루빨리 완성해야 전시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선혜는 작게 웃어보이더니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줘요. 저한테 이야기해도 좋고, 도슨트 분들께 하셔도 좋고요."

그리 말하고 그녀는 휠체어의 왼쪽 팔걸이에 설치된 스틱을 붕 돌려 네 사람을 떠났다. 아영은 잠시 유신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흐린 눈웃음을 짓다가 선헤의 뒤를 따라 경사로를 올랐다.

휠체어가 경사로를 따라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은 둘인데 발소리는 하나뿐이 들리지 않는다.

네 사람은 두 사제의 인기척이 2층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애시당초 이곳에서 나눌 대화 주제 같은 건 떨어지기도 했다. 어색한 적막을 견디다 못한 동현이 방으로 돌아갈까 말까 눈치만 보고 있으니, 돌연 나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하얀 셔츠를 입은 그에게 집중된다. 나무는 자신에게 집중된 눈동자 여섯 개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훑는다.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음, 그러면 일단 파할까?"

눈썹을 팔자모양으로 만든 유신이 제안했다.

"그래도 되고."

유선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 그럴까요."

여태 소파에 엉덩이를 대지 못한 동현이 격하게 동의했다.

"그럼 난 화장실에 갔다가 가지."

"꼭 갤러리에서 화장실을 가야겠어? 어디 있는지는 알고?"

"도슨트 분이 3층에 있다고 하셨는데."

"3층까지 가는 것보단 그냥 객실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여긴 경사로도 올라야 되잖아."

"실은, 화장실도 갈 겸 갤러리 구경도 하고 싶어서."

"그럼 나도 갈래."

"화장실에?"

"아닌 거 알면서."

나무와 유신이 무의미한 말씨름을 하는 사이, 유선과 동현은 이미 안채로 통하는 통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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