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로그

독잔

언제나의 오후


언제나의 업무를 끝내고 마지막 서류의 싸인을 마친 오후였다. 탁. 펜을 내려놓은 애머디는 어깨를 한번씩 돌려주었다. 여느때와 같이 센터는 서류와 문젯거리 들로 한가득이었고 이는 에너미가 없음에도 마찬가지 였다. 10년이나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며 한탄할 시간이 있을 만큼 센터장의 직책은 여유로운 자리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몇 주에서 몇 달은 조율해야 하는게 기본이었으니.

그렇게 해서 짬을 내면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내에 돌아와서 그동안 밀린 서류를 해치워야만 할만큼 에스퍼를 둘러싼 사고들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애머디는 그 삶에 빠르게  적응한 편이었다. 이미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살았기도 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부류인 터라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것 정도로 서러워하진 않았다. 그 나름대로 얼굴을 비추는 편이기도 했고. 

반복되는 싸움과 사건과 중재. 끝없는 서류와 안건과 의제. 민간인과 에스퍼 사이의 마찰은 아직도 한창일 때였다. 에너미가 있던 때라면 그걸 빌미로 생색이라도 냈지만 지금은 그런 명분도 사라져 애매해진 탓에 올바른 일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태클이 들어왔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에 실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일의 중요성과 어깨에 짊어진 기대의 무게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자신을 단단히 하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진작에 끝낸 덕분이었다.

애머디는 예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 사람을 더욱 냉정히 판단하게 되었고 간단히 믿지 않았으나 믿을만한 사람이다 싶다면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적당한 때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어중간해질 뿐이고 이는 절대 좋은 결과를 내주지 않았으니. 믿은 뒤에 일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고 받아들일 일이었다. 이젠 무엇이 돌아오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똑똑

" 들어오도록. "

" 업무 수고하셨습니다. 예정된 업무시간은 지났으니 슬슬 휴식을 취하실 시간입니다. "

" 1분도 일할 틈을 주지 않는 비서는 너뿐일거다. "

들어온 금발의 이는 익숙하게 서류더미를 정리하는 애머디를 마주보고 기다렸다. 이미 다 처리된 서류뭉치들을 한 귀퉁이에 잘 모아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이의 곁을 지나갔다. 그 움직임에 일라이저도 같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이 또한 예정된 것이었다. 업무가 끝나면 반드시 휴식을 취할것. 지정된 시간에 티타임을 갖는 것은 일상이자 의무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과로할 것이란 것은 서로가 잘 알았다. 일이 많으니 오래는 못 쉬어도 짬짬히 쉬는 틈을 만들어 두는것은 확실히 효율이 좋았다.

" 오늘 준비된 차는 캐모마일 입니다. "

" 아.. 한 이주 전에 마셨던 것이로군. 향은 어떤걸로 골랐지? "

이전에 마셨던 것이 깔끔해서 좋았다는 말을 했던것이 생각났다. 여전히 꼼꼼한 부분을 신경쓴단 말이지. 예전부터 그랬지만 변하길 싫어하는 건지 변할의지가 없는것인지 허용한 부분이 아니면 다가서지 않으면서 신경써주는 것은 많았다. 한 둘이 아닌 사람에게 그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닐텐데 가끔은 챙기는 일에 힘을 빼라고 해도 별로 듣는것 같진 않았다.


간간히 가지는 티타임에서 둘은 룰을 정해놨다. 애머디는 직책상 차를 사거나 들여오는 번거로운 일을 하기엔 보는눈이 있기 때문에 이런류의 준비는 일라이저가 전담했다. 딱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지 않지만 직책상의 무게라 해야할까.

그렇지만 매번 모든 준비를 일라이저에게 맡겨선 일방적인 접대가 되고 만다. 이는 쉬는 시간이어야 했으니 일라이저도 편해야 한다는 것이 애머디의 의견이었다. 여기서 일주일의 교대 타임이 생기게 된다. 밑준비는 일라이저가 하되 차를 우리고 준비된 다과를 트레이에 담아 정돈하는 것은 일주일을 주기로 서로 번갈아서 한다.

큰 의미가 없는것 같았지만 마지막 세팅을 하고 차를 우려주는 것만으로도 준비를 함께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내어주는 차를 마시는 것보단 나았으니 애머디는 만족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만히 받기만 하는 것을 탐탁찮아 했다. 이번주 티타임을 준비해야 할 사람은 애머디였다.

이 시간엔 항상 비워두는 회의실이 하나 있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아 소규모 회의를 하는데에 적당한 곳이었다. 단 둘이서 티타임을 가지기에도 알맞은 곳. 이미 세팅된 차세트와 포트 다과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애머디는 느긋하게 물을 올렸다. 익숙해서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준비된 다과의 종류나 차종류가 매번 달라지는 것은 일라이저의 배려였다. 이를 들여다보고 이번엔 어떤식으로 변화를 줬을지 맞춰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된 찻잔이 두 잔. 따끈하게 뎁혀진 주전자가 하나. 고소한 마들렌 서넛이 가지런히 놓여졌다. 텁. 그것을 가볍게 집어든 애머디는 트레이에 담겨져 있던 것들을 탁상 위에 올려둔다. 달그락. 하는 일말의 소리도 나지 않은 것은 능력의 영향이었다. 일라이저는 그 모습에 평소처럼 잘 마시겠습니다 선배. 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애머디는 힐끔 변함없는 그 표정을 살펴봤다. 이 여유시간을 만들고 제안한 것은 일라이저였다. 그 전에도 종종 휴게실에서 차를 함께 마시곤 했지만 직급이 변한 뒤로는 점점 휴식할 시간도 장소도 마땅찮아져서 대부분의 일을 사무실에서 해치우고 휴식을 취한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어차피 회사 내를 나가기 힘들다면 회사 내에 편안히 쉬어둘 곳을 마련해두는게 낫다는 생각은 저도 하고 있었기에 간단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각자의 자리에 잔을 내려두고서 그의 맞은편에 앉은 다음 애머디는 테이블에 가볍게 턱을 괴었다. 갓 우러난 차 향이 작은 회의실을 가득 채우는건 금방이었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던 애머디는 찻잔을 아무런 의심없이 집어드는 일라이저를 보고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 네 차에 독을 탔다. "

탁. 한박자 늦게 손가락을 튕기고는 일라이저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아직 잔을 들고 있었다. 분명히 의미를 알았을 테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그리 말해도 너는 마실건가? "

평소와 다를바 없는 온화한 어조였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늘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점이었다. 애머디의 붉은 눈동자는 반듯했고 조금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방금까지 서류를 처리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그렇다고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말을 할 만큼 상태가 안좋은것은 아니었다. 곤란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제와서 무언갈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건.. 만약의 이야기였다.


" 마셔야죠. "

" 네 의지로? "

" 선배는 이런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

" 혹시 모를 일이지. "

10년도 지났는데. 뒷말은 낮게 읊조렸으나 반대편에 안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애머디는 의연한 표정을 유지하곤 시선을 조용히 내렸다. 그 끝에 찻잔이 닿았다. 모락모락 여전히 짙은 김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차갑게 식어버려 분명 본연의 맛을 느낄수 없을테지. 두드리던 손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쓸다가 달그락 들어올리더니 한모금 들이켰다. 차의 향은 고소했고 뒷맛이 살짝 씁쓸해 그의 취향에 딱 맞았다.

이를 본 일라이저는 따라하듯 찻잔을 입에 물고 망설임 없이 목으로 넘겨냈다. 순식간에 적막으로 들어찬 회의실은 따듯한 공기가 감도는 것과 다르게 고요한 긴장감이 흘렀다. 애머디는 마시고도 변화가 없는 일라이저를 보지 않은채 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독 같은건 탈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몇년이 지나도 그는 불확실하고 찝찝한 방법보다는 확실한 두 손으로 마무리를 지을 것이다.

탄다고 한다면 매번 차를 준비해주는 일라이저인 쪽이 앞뒤가 맞는 일이었다. 그걸 군말없이 캐묻지도 않고 마시고 있다는 것은 입으로 담지 않은 신뢰의 증명이었다. 하지만 일라이저의 경우는? 그의 신뢰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처럼 보이나 아직도 그 근원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알 수 없기에 깊이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이 자신 보다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는 건 눈치 챘지만.

정확히 무엇을 어떤식으로 바라보는지는 정의하기 힘들었다. 신념이라 하기에는 그와 시작점 부터 차이가 있었고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매번 대비되는 방식을 썼다. 같은 세상을 바란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라 할 만한건 없는 편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정도야 애머디 말고도 넘치도록 존재했다.  단순히 따르던 선배라서. 그가 센터장이 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이유로 갖다붙여도 명쾌하거나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그로선 곤란한 일이었다.

나름대로 일라이저를 믿고 있으며 그의 신념과 신뢰의 깊이 또한 제법 깊었음에도 이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건 답답한 일이었다. 상대가 불안할만한 행동을 취했다면 모르겠지만 근 몇년간 자신을 불안하게 할만한 낌새도 수상한 움직임도 보인적은 없었다. 솔직하게 물어서 바로 들을 수 있는 답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돌려 확인하는 짓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저를 신뢰하는지 애머디는 매번 자신의 방식으로 들여다 봐야 했다.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같은 선택을 했다. 애머디는 변하지 않는 무게추를 바라보며 나도 참 번거로운 사람이군. 이란 생각을 했다.

" 다음번엔 떫은 맛이 더 강한 놈으로 부탁하지. 맹독을 넣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것으로. "

" 그게 취향이라면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

정말이지 재미없는 농담이었으나 일라이저는 언제나처럼 흘려들을 뿐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질 나쁜 농담은 서로를 믿고 있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가능한 문답이었다. 같이 차를 마실정도의 사이가 되고 그 차를 우려내 건네주는 이가 무엇을 해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완벽한 독살은 없을 터.

언제든지 독잔을 들이밀 수 있는 관계이나 이 티타임이 끝나는 날은 쉽게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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