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로그

고해

거짓없는 본심을 그대에게

변함없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다가오는 결말이 어떨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뀌지 않을 생각이었건만


사각사각사각

끊기는 일 없는 부드러운 울림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엇을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할지는 이미 몸에 스며들었기에 시선이 똑바르지 않아도 정갈한 글씨체로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허나 간간히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을만큼 그의 집중력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힘껏 써야만 했다.

자신의 이름을 수백번은 적어내려갔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의 무게를 체감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람이었던 본질은 여전했다. 대신 누구에게 불려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부름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똑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순간이 생겨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장은 답을 기대하지 않았을 물음이었겠지만 과연 시간이 있었다고 한들 바로 답할 수 있었을까? 그리 쉽게 단언 할 수는 없다. 수천번은 고민했으나 끝없는 자문자답이 이어져 결론짓기를 미뤄둔 대답이었기에 결국 입밖에 내놓지는 못했겠지.

무엇이 가장 좋은 일인가. 애머디의 신념은 보호에 가까웠다. 주변을 지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가진 이는 최선을 다해 지켜내지 않으면 안된다. 때문에 취약한 곳에 노출되어 있는 에스퍼들에게 다가서며 삶의 선택지를 조금이라도 늘려주려 안간힘을 써댔다.

A.N.P는 에스퍼가 기대도 괜찮은 곳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관심의 주체가 본인이 되면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어리숙한 면모가 그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나 자신이 포커스에 맞춰지는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재미난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딱히 추앙 받을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회장직을 맡은 뒤로도 그가 개인적 욕심을 부릴만한 상황은 쉽게 오지 않았으니, 대체로 중대한 선택권을 손에 쥐고 있음에도 그가 권력에 취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늘 다수를 위한 보편적인 결정만을 내려왔기에 온전히 자신을 위한 선택을 택할 일은 적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려해야 될 요소가 많은 것은 여전했으나 그 모든 고민의 주체가 단 두 사람에 한정 되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두 사람의 인생에 관한 일이었다. 비합리적이고 별다른 명분이 있지 않아도 함께 있어달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관계. 필요한건 순순히 감정에 따르는것 뿐인 이 관계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애머디는 뒤늦게 인상을 폈지만 눈치가 빠른 새 비서는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일라이저가 직접 인수인계하고 떠난지는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새로 온 그는 일의 수완이 좋았고 일라이저 보단 못해도 스케쥴을 융통성 있게 짜주는 사람이었다.

일에 적응하기 바쁠텐데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피곤한 낯을 숨기지 못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사과하자 비서는 별다른 반응없이 그를 눈여겨 봤다. 이내 조용히 센터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평이한 어조의 질문 뒤에 이어져 오는 말은 컨디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정에 관한 것이었다.

사전에 조율을 끝마친지 오래였기에 애머디는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서류를 팔락였다. 이를 확인하자 그는 담담히 쌓여있는 일정들을 입으로 나열하고는 재차 확인을 받은 뒤에야 조용히 방을 나섰다. 사적인 질문을 삼가는 점과 불필요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점에서 애머디는 편리함을 느꼈다.

물론 거기서 안정감이나 평온함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을텐데 그는 묘한 피로감을 느꼈다.


" 애머디 선배님~ 웬일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계시네요. 서류좀 봐주세요! "

활기찬 목소리의 직원이 하나 거칠게 문을 열고 책상 앞까지 뛰쳐들어왔다. 애머디는 놀란기색도 없이 눈으로 그를 훑다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서류나 내놓으라는 표시였다. 이에 조심히 서류뭉치를 건네준 후배직원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대답도 안하시네. 지금 기분 안좋으신거 아니죠?

" 컨디션이 나빴다면 들어가 쉬었겠지. 피곤한 잡담을 즐기지 않을 뿐이야. "

" 하하, 농담도~ 선배님이 쉬는 모습은 상상도 안가요. 그치만 선배님도 말이 많을땐 있었죠. 그~... 아! 클레멘트씨랑 있을때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두 분이서 그렇게 친할줄이야. "

손을 휘휘 젓던 발랄한 분위기의 후배는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서류를 훑는 애머디를 내려다봤다. 애머디가 어떻게 반응하던 자신만의 페이스로 조잘거리는걸 멈추지 않았다. 대체로 꼼꼼하고 얌전한 사람들이 많은 보안부서였으나 그중에서도 생기있는 사람들은 꼭 있는 법이다.

가만 냅둬도 멋대로 떠드는 성격이니 되도록 무시하고 싶었지만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자 애머디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렇게 보일 정도였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와는 친하다 할만 했지만 주변에서 이런 반응을 보인적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떨더름했다.

어라, 아닌가요?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성격으로 보건데 가만 넘어가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애머디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질문에 답했다. 오래 알고지낸 사이긴 하지. 내게 친한사람이 있는게 그리도 신기한가? 별걸 다 궁금해 한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그에 아랑곳 않고 들려온 답에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후배는 이번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친해지신 거에요? 퇴근도 늘 같이 하시던데 심심하진 않으시겠어요.

" 특별히 말해줄 일은 없었다. ...꾸준히 얼굴을 보니 친해졌을 뿐이야. "

멈췄던 손을 다시 바삐 움직이며 종이를 짚어가던 애머디는 조용히 떠올렸다.

언제부터 였더라... 그러고 보면 캠프에서 더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 전부터 일라이저는 친근하게 굴어온 편이었다. 거리를 두고자 하던건 항상 나였지. 첫 대면을 빼면 대체로 그랬다. 그 뒤로도 지켜볼 동안 쭉 그래왔기에 원래부터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힌 참이었다.

변한 것은 자신뿐.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게 없었다. 아마 일라이저는 지금도 나를 예전과 다르지 않게 바라보고 있겠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었으나 되새겨보니 어쩐지 떨더름 했다. 내 심경이 변한게 껄그러운게 아니라 일라이저의 태도가 변함 없다는 것이. 그건 마치...

선배님? 서류 다 보셨어요? 한박자 늦게 고개를 들어보인 애머디는 담담하게 답하고는 서류를 마저 돌려줬다. 고칠데는 두 곳 정도더군. 5페이지랑 7페이지는 수정해라. 아아~ 알겠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뒤에 그가 사무실을 나가자 적막이 감돌았다.

이런일로 고민을 하는 날도 오는군. 

그녀석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정도의 감상을 끝으로 애머디는 생각을 갈무리 했다. 이제와서 갑자기 친밀함을 확인하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지금껏 일라이저가 먼저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테고 앞으로도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한다면 좋을일이지. 서운해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내가 그녀석과 가장 친할 필요는 없지. 이정도 관계면 충분해. 

이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택시를 불러 집앞에 도착한 애머디는 제 손으로 열쇠를 찾아 꺼내들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찰칵. 부드럽게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가볍게 밀린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없이 닫아내고는 다시 잠금을 걸었다. 그러곤 툭툭 신발을 벗어내어 가지런히 신발장에 넣고 슬리퍼를 꺼내들었다.

" 다녀왔다. "

두 발을 집안에 들인 뒤에 늘상 입에 담던 말을 뱉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예견된 일이었기에 그 침묵을 몸에 감은채 걸음을 나아갔다. 저벅저벅. 아주 가벼운 소음일 뿐인데도 온 집안에 울리는듯 했다. 복도를 조금 나아가면 바로 근처에 있는 방문 앞에 찾아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차분히 옷을 갈아입었다.

손에 바로 잡힌 가디건 하날 걸치고선 어젯밤 흐트려 놓은 책상을 대충 정리해두었다. 어차피 오늘밤도 제때 자기엔 글렀지만...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는 서류뭉치를 한탄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선 그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허공에 울리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그 울림이 좀처럼 귀에 익질 않았다. 때문에 애머디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걸을수밖에 없었다. 거슬리는 쪽이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부엌과 인접한 거실을 지나가면서 흘끔 레코드판들이 꽂힌 책장을 바라봤다. 정적만이 서린 거실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진 오래된 레코드에는 아무것도 꽂혀있질 않았다. 좋아하는 곡도 듣고 싶은 곡도 있었지만 레코드 판에는 왠지 손이 가질 않았기에 그대로 두었다.

그러고보니 슬슬 식물을 관리해줄 시간이 됐나. 잠시 시계에 눈을 두니 이 시간즈음 항상 거실을 지나다니던 일라이저가 떠올랐다. 저녁준비를 하기 전엔 주로 화분을 돌보거나 주변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던가. 나는 그처럼 성실하게 정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 찬장에 구비된 분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의 화분이었기에 관리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화분에 물방울이 싱그럽게 맺힌 것을 건조하게 바라보곤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달그락. 미리 물을 올려두었기에 한껏 뜨거워진 물을 바로 머그잔에 담을 수 있었다. 녹차 스프레드를 몇 스푼 떨구고는 잘 저어주니 금새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진한 녹차향이 부엌에 맴도는 것을 음미하다가 허리를 굽혀 탁상에 몸을 기댄채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호록

쌉싸름한 맛이 잠시 혀를 감싸곤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텅 빈 거실은 부엌에서도 잘 보였기에 거실너머 커다랗게 자리한 창가에 차분히 시선을 내려두었다. 저녁시간대라 노을이 지고 있었다. 빛바랜 주황을 머금은 따스한 햇빛이 칙칙한 거실바닥을 장식해주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그늘이 사라질 즈음에야 녹차가 식었단걸 깨달았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단순히 넋을 놓아도 핀잔을 줄 사람이 없었을 뿐. 차게 식은 녹차를 다시금 입에 가져다 대니 밍밍하기만 했다. 향도 온기도 잃어버린 차는 이리도 볼품없는 맛인가. 기분이 나쁠만도 하건만 애머디는 입꼬리를 올려 공허하게 웃어댔다.

전자렌지에 넣어 돌리면 그럭저럭 살아날 맛이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진 않았다. 식은지 오래된 차는 뎁혀봤자 어차피... 내가 지금 느끼는 건 미련에 가까운가. 덧없는 상념이 스쳤다. 어느쪽이던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나열하자면 심플하게 두가지 정도겠지.

그를 이대로 보내주는가. 붙잡는가.


무엇이 됐던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의사를 전할 기회를 놓치면 끝일 것이다. 일라이저가 떠나간 날부터 집안은 늘 냉기가 돌았다. 불빛을 제대로 켜놓지 않아 해가 지고나면 전체적으로 어둑했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던 클래식과 재즈소리는 끊긴지 오래였다.

고작 한 사람이 없어졌을 뿐인데.

곳곳에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두고서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선 단 한줄의 전언과 주소가 적혀진 종이가 나왔다. 뒤늦게 그때의 고백은 작별인사를 겸한 것이란걸 깨달았다. 허물을 벗고 새출발을 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남겨진 자에게는 꽤나 가혹한 방법. 애머디는 이를 원망하진 않았다.

어째서 이런 형태의 이별을 택한건지 그러면서도 인연의 끈을 한가닥 남겨둔 것인지 바로 납득 되진 않았으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이는 오래전부터 직감한 것이었다. 일라이저에게 내가 필요없는 때가 찾아올거라는걸. 그러니 따지자면 이건 이상적인 형태의 이별에 가까웠다.

일라이저는 제게 실망하지 않았고 원한을 품지도 않았으며 줄곧 표현하길 바란 욕망을 드러내줬다. 지금껏 그가 겪어왔던 이별 중에선 가장 온건하다 할 수 있었다. 저를 두고 나아가라며 활짝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내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걸로 만족했다는 듯이.

제게 바라는건 없으신가요? 일라이저는 예전에도 그런 물음을 던졌었다. 그땐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바라는걸 먼저 듣고나면 말하겠다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얼버무렸다. 내 바램이야 심플했지만 원하는 답을 듣기위한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다.

아무튼 그는 있어줄만큼 있어주었다. 10년이란 시간을 함께 해줬으니 보통의 관계였다면 슬슬 시들해져도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일라이저는 함께 할 동안 자신을 소홀히 대한적이 없었고 업무적인 일로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불안감을 느낄때 업무량을 과도하게 늘리는 내 개인적인 습관을 못마땅하게 보는 정도였을까.

어째서 그렇게 무리하려 드냐, 당신의 어깨위에 둔 책임과 위치를 자각하라고 드물게 눈을 치켜세우고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의식하고 하던 행동은 아닌지라 약간 억울한 감도 있었지만 이어지는 단호한 어투에 끝내 펜을 내려놓았던가. 떠올려봐도 일라이저의 보조는 내게 있어 모자람이 없었다.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건 순전히 내 욕심이 그 이상을 바랬기 때문이다. 내 곁에 있는 그가 항상 완벽하기 보다는 약간 허술하고 가끔은 쓸데없는 일에 화를내는 보통의 반응을 보였으면 했다. 나는 이미 그에게 초라함을 들킨지 오래였으니까.

사람다운 빈틈을 보여주길 바랬으나 일라이저는 대체로 그렇지 못했다. 어딘갈 틀어막은 것마냥.

이는 부자연스러웠다. 과거에 종종 찜찜한 반응을 보여와도 구태여 심상을 찔러본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싫다면 무엇이 싫은지 좋다면 어째서 좋은지 궁금했다. 일라이저는 바라는 것을 먼저 입에 담은적이 없고 원하는 것을 조른적도 없었지만 호불호는 분명히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을뿐. 

그렇기 때문에 일라이저가 말하지 않는 부분을 나는 파고들고 싶었다.

궁금해 한 이유야 서넛은 되지만 가장 확실한 이유는 아마 이거겠지. 그가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며 그 안에서 나의 위치는 어느정도 인지 혹은 내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따위가. 

그걸 낱낱히 밝혀내고 나면 그 다음은... 글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호기심이란 그런 것 아닌가. 다가와줬기에 얼굴을 마주했고 곁에 있어주었기에 그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걸어가는 길에 그가 따라붙은 뒤로 그는 항상 내 시야에 들었다. 눈에 보이는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내가 인식하기 전부터 그는 주변에 존재했고 나는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먼저 시선을 돌린적은 없었다는게 내가 짚어낸 요점이었다.

일라이저의 시선이 내게 향했을때 그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길 택한건 나였다. 

옆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도움을 받는 일은 차츰차츰 늘어났다. 일라이저가 간단히 내어주는 것들이 부담스럽지 않았냐 하기엔 가끔씩 부담감을 느낀적도 있었으나... 부담이 될 줄 알면서도 끝내 거부하지 않은 것도 나였다.

내 의지로 그를 옆에 두기로 결심하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이밀어진 호의의 형태가 마음에 들었기에. 너라면 왠지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 막연한 기분에 따른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그가 전력의 보탬이 될 때마다 신뢰는 두터워져 갔고 개인적으로 곤란해 할 때면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 손을 내밀었으니 붙잡지 않을수가 없었다.

동시에 가까이 다가온 녹안의 눈동자를 더 오래 들여다 봤다.

그러자 이번엔 저울의 수평이 맞질 않았다. 나는 어느새 네앞에서 나약함을 내비치고 제법 의지하게 됐지만... 너는 여전히 표면에 어떠한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다. 고민이 없는 사람 따윈 없다. 있는대로 내어주고 자신은 작은 위로조차도 받지 않을 속셈이겠지. 어지간히 아둔하지 않으면 못할 짓을 눈앞의 이가 하고 있었다.

일부러 네가 그런 길을 골라 걷겠다면 적어도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 방향이 정녕 네가 원하는 것이 맞느냐. 그렇다면 나에게도 흔들림 없는 확신을 줄 수 있겠냐고. 언젠가 네가 달래주었던 것처럼 되묻고 싶었다.

배려가 결여된 질문은 심문과 다를바 없었고 그 반동으로 터져나온 불안과 분노를 맞닥뜨리게 됐다. 내가 바라는 기준에 충족 할때까지 시험하는 꼴이었으니 불쾌함을 표할만 했다. 분명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택한 것이 역효과 였던 것이리라.

변변찮은 구실을 내세워 몰아댄 것엔 변명하지 않고 진심어린 사과를 건넸다. 충분히 다시 생각해볼 문제였다. 나는 일라이저를 이해하고 싶었던거지 넘어뜨리고 싶었던게 아니니까. 다가서는 방식이 틀렸다면 이는 마땅히 고쳐야 했다.

생각해보면 그가 불안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되려 불안해 했던 것이었다. 잠자코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어준 그에게 다시금 후회하지 않느냐 물었다.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날 똑바로 바라보고 아직도 따르는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대답을 듣고나니 더는 무언가 떠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새삼 자신이 얼마나 형식적인 틀에 매달리는 사람인지 와닿아 형편없이 입가를 당겼다. 눈에 드러나는, 확실히 정의할 수 있는 그러한 형태가 아니면 간단히 납득하질 못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은 금방 사라질것만 같아서.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뒤론 납득 가질 않는 것을 자세히 추궁하기 보단 앞으로 해주고 싶은 것들을 추리기로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지금껏 느낀 감사함을 어떻게 전달해줄까 고민하던 찰나 묘하게 거리감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심리적인게 아니라 실질적인 거리감이.

이건 기분탓으로 치부할 수 없을만큼 확실하고 뚜렷한 것이었다. 어떠한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고 눈에 거슬리지도 않았기에 그대로 곁을 내주었다. 이제와서 거부감이 들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덕분이었다.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더니... 

네가 먼저 온기를 찾고 서서히 기대오자 나는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엔 네가 해준 것처럼 내 것을 내어주면 되었기에. 스킨쉽이란 가이딩 목적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텐데 그의 온기는 거짓말같이 안락해서 가끔 가이딩과 닮았단 착각도 들었다.

언제 또 이렇게 그를 달래줄 일이 생기겠는가. 자신없는 말보단 행동으로 표하는게 편하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는 것이 익숙해지면 가끔 손을 잡아 주었다. 한 손을 내어주고 책을 읽는 습관이 생길 무렵엔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렇게 불편하게 기댈 바엔 편히 끌어안으라고 하니 머뭇거리면서도 일라이저는 주저없이 손을 뻗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딱 붙어오면서도 시선은 똑바로 하지 못하는게 제법 귀여웠던가.

하루 이틀을 넘어 몇주를 그렇게 붙어 지내자 이젠 같은 공간에 있을때면 옆자리에 혹은 뒷자리에서 붙어있는 것이 당연해질 정도로 거리감이 없어졌다. 줄곧 답답해 했던 일이 어느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일까. 나 또한 품어왔던 마지막 경계선 조차 옅어져갔다.

그러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못했다. 

이번엔 일이 너무 잘풀려서 문제였다. 이대로 응석 부리는 행위를 계속 받아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받아온 호의란 형태가 없었으니 이는 돌려줄 때도 마찬가지 였다. 보이지 않는 호의는 어디까지 이어져도 괜찮은지.

그보다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건 순수한 호의가 맞나? 그러기엔 지나치게...

아무튼 그가 기대오는 모양새가 만족스러운데다 금방 적응하기까지 했지만 이게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마냥 이 상황을 기뻐할 순 없었다. 잠시 지친 등을 받쳐주며 쉬는 시간을 가질수는 있어도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있기엔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는 나아가야할 길을 직접 골라야 했다. 그간 모자랐던 갈증을 어느정도 해소하였다면 일라이저는 전과 다른 시야를 가지게 되겠지. 일어나서 바라본 곳이 지금과는 다른 곳이더라도 괜찮았다.

내가 없더라도 그가 나서서 개인적 욕구를 표현하고 무언가에게 헌신하는 형태가 아닌 자신을 위한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면 나는 그걸 힘껏 응원할 셈이었다. 힘들때 울 수 있고 사람에게 기대어 위로받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면 다음 단계는 새로 나아갈 미래를 스스로 고르는것 뿐이었다.

축적된 시간과 함께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그 안에 쌓였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 정돈 찾을 수 있을 터. 처음부터 그는 지탱할 무언가를 찾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갈림길이 찾아올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이상을 따르는것 보다 더욱 중요한게 생긴다면 좋겠다고.

일라이저의 다듬어진 호의는 이미 차고 넘칠정도로 받았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더는 알 수가 없다. 떠나간 곳에 있을 그는 과연 행복한지, 앞으로 나아갈지, 그 곳에서 무엇을 할지. 더는 지켜볼 수가 없다. 

그 사실이 뇌리를 스치면 가슴이 아려왔다.


끼이익. 열차가 익숙한 굉음을 울리며 플랫폼에 멈춰섰다. 부지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물밀듯 빠져나가고 나면 다시금 비워낸만큼 사람들이 들어찼다. 그 광경이 흡사 파도같아 하염없이 보고 있노라면 열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나아갔다.

향하는 목적지는 해변이었다. 뉴욕에서는 거리가 좀 있는 곳이었지만 그걸 감안해서 이틀을 비워뒀으니 괜찮을 것이다. 고작 이틀이었으나 그만한 휴가시간을 만들기 위해 몇주는 날려먹었으니 새삼 주어진 위치의 갑갑함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느꼈다.

그러고보니 어디론가 멀리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질 않았던 것 같은데.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널려있는 와중에 거기서 눈을 돌린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 하지만... 쉬는시간을 좀 알차게 쓰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가능하면 소중한 이와 함께. 

그런 생각을 할때 먼저 떠오른건 너였던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제일 오래 지켜봐주었으니 즐기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당연히 데려갈 계획을 세웠다. 일정이 기본적으로 빡빡한 탓에 충분한 여가시간을 확보하긴 어려웠지만 기차에 몸을 싣고 당일치기로 다녀온 짧은 여행도 나쁘진 않았었지.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불현듯 네가 떠오르는것은 그만한 세월이 흘렀기에 그런것인지 아니면 네 그림자를 내가 지독하게 쫒는 중인건지... 지금 향하는 곳도 네가 없었다면 가보고자 하지 않았을 터였다. 툭툭. 괜시리 창가를 건들이며 조바심을 덜어냈다.

지인 혹은 근처에 아는 정보라곤 단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애초에 가보지도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만날 장소를 이 해안가로 정한 이유는 단순히 첫만남을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처음으로 같은 임무지에 배정된 날. 어느새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서히 그를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후 눈독 들이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에게 의문을 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어째서 흔하디 흔한 사람들 중에서 나를 따르도록 한건지. 남들만큼 상냥함을 전하는 법도 몰랐고 일하는 방식이 특별하거나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자신있다고 할만한 건 하나도 없었으나 한번 목표로 둔 것엔 끈질긴 편이었다. 남은건 고집 뿐이었으려나.

그러나 고집스럽게 놓지 못했던 미련을 놓아주어야 했을땐 누구보다 나약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쉽게 상처받고 괴로워 했다. 불편한 인간관계에서도 사회적 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게 발버둥 치는것 뿐이라서 정신없이 헤엄치다 보니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올라왔다.


남을 살필 여력같은건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너는 쫒아와 주었다.

그날의 바람은 차디 찼지만 닿았던 장갑 위의 촉감은 두텁고도 따스했다. 만약 맨손이 닿았다면 어땠을까? 가로막는 것이 없어 보다 선명한 손바닥의 감촉이 새겨졌다면 지금보다 더 그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센티넬의 예민함이란 이런데서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사실 그리움의 정도를 따지는 것부터 무의미한 것인데도. 더하건 덜하건 나는 어차피 너를 그리워할 것이다. 추억할 온기는 한 둘이 아니었고 그 갯수만큼 따스함이 조각조각 깃들어 있었다. 눈의 결정만큼 아름답고 정교하진 않지만 눈더미처럼 빼곡히 쌓인 기억들은 금방 녹진 못할것이다.

관념에 잡혀 생각을 정리하자 타고있던 열차의 속도도 빠르게 흘러갔다. 도착하기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 목적지가 어느새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다음 정거장이면 내려야겠군. 올려둔 짐을 차분하게 옆에 내려두고는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어느덧 너를 만나러 갈 시간이 되었다.



정제되지 않은 가장 깊은곳에 박혀있던 진심을

너에게 담아 보내기 위해 발을 내딛었다

부디 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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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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