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
뜻밖의 면모
가까이에 두고 함께 했을 때에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설령 감추고 싶었다 하더라도
A.N.P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고 이제는 새로운 방향성이 다시 잡혀가던 중이었다. 디아나를 이을 새로운 센터장이 임명되고 그가 세운 방침에 따라 맞춰가야 했다. 아직까지 크게 변화한 것은 일하는 방식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애머디의 생활방식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소소한 문제는 생겨났다. 기숙사 방이 남기도 했던 예전과는 달리 한번 큰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지금은 포화상태였다는 점. 대기자가 줄을 섰다는 얘기를 들은 애머디는 고민했다. 이미 오래도록 기숙사 생활을 한데다 자금도 꽤나 모였으니 슬슬 자립하기 좋은 시기였다.
그렇게 결심한 것은 좋았으나 주택에 관한 문제에 알아보는 것도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다. 워낙 한 점에 집중하고 살다 보니 그새 바뀐 경제상황이나 물가에 대해 파악하자니 끝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줄어들지도 않으니 이사계획은 미뤄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던 탓일까. 일라이저가 먼저 무슨일이 있냐 물어왔다. 딱히 숨길일은 아니었기에 애머디는 기숙사를 떠나 이사하고 싶은데 마땅한 집을 찾지 못하겠다며 짧게 푸념했다.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살 집을 대충 찾고 후회하기는 싫을테니.
특히나 애머디는 보안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보안이 뛰어나면 위치가 별로거나 혼자 살기엔 부담되는 값이 붙는게 보통이었다. 어느정도 타협안이 필요했으나 마음을 먹는게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과 불만을 여느때처럼 늘어놓던 애머디는 뭐, 그런거다. 하고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잠자코 그를 담아듣던 일라이저는 언제나처럼 기분좋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하게도 이런 반응이 나올줄 알았기에 애머디는 의연히 끄덕였다. 이럴때 그는 제법 보탬이 되곤 한다.
"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타이밍이 좋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집을 같이 구하는건 어떠신가요? 그 편이 선택지도 더 넓어질겁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조건도 충족될거구요. "
" 으음. 확실히 선택지는 넓어지겠.. 지. 하지만 그 말은 너도 같이 살겠단 소리 아닌가? "
" 네, 동거인으로서 어떤지 제안하는 겁니다. 하지만 선배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
제법 중대한 일을 담백하게 말하는 모습에 애머디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식으로 제안하면 선뜻 거절할수도 없었다. 치밀한 질문인것 같지만 녀석은 정말 아무래도 좋다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점이 더 성가신것도 여전하고.. 따지고 보면 먼저 부탁을 한것도 나였으니 무르기도 힘들겠군.
" 용케 그런걸 자연스레 내뱉는단 말이야. "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굴려보던 애머디는 살며시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일라이저의 얼굴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나가던 이가 봤다면 누가봐도 화를 내는 것이라고 착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고민하는 얼굴임을 아는 일라이저는 의젓하게 홍차를 홀짝였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생각해주세요. 부드러운 울림이었다. 그 말에 애머디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더니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만큼 이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집을 찾을 고민도 덜고 일라이저와 같이 생활한다 한들 특별한 문제가 생길것 같진 않다. 인간성 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높이 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누구나 인정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일라이저는 누구와도 깊은 마찰을 빚은적은 없었다. 사람이니 만큼 시비를 사고 걸리는 일이야 꽤 있었어도 최소한 그가 먼저 주먹을 날리는건 본적이 없다. 대규모 작전에서 갈등이 있을때에도 끝내 제 발로 사과하러 찾아갔으니 무얼 하던 그렇게 처리하겠지.
지금껏 먼저 불만을 표한적이 드문만큼 동거 중에도 그가 자연스레 이쪽을 배려하려 드는게 순리일 것이다. 각자의 영역을 확실히 정해두고 규칙대로 살아갈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그건 함께 사는 입장에선 매우 편리하고 이상적인 형태였다. 그의 가사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도 확인한 참이었으나 걸리는건 있었다.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더더욱 확실히 해야만 했다.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이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일을 자처해서 떠맡을테니까. 그것만은 피해야 할 상황이야. 눈썹을 작게 까딱였다. 딱딱하게 구는것은 특기였기에 애머디는 이내 마음을 다 잡고 입을 열었다.
" 네가 찾아준다면 그에 대한 수고비는 제대로 지불하겠다. 동거에 대한것도 수락하지. "
" ..그렇습니까? 흔쾌히 받아 주실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수고비는 따로 필요 없습니다만.. "
" 잔말 말고 그냥 받도록. "
가볍게 쏘아보던 애머디는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기서 가장 자주 얼굴을 보고지낸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달리 부탁할만한 사람은 안떠오르는군. 그 뒤로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집을 구하는 조건은 회사와 그렇게 멀지 않으며 대중교통에 지장이 없는 곳이어야 할것. 보안과 치안수준은 높아야 할것. 집을 구하면 집안일의 분담은 반드시 절반으로 나눌것. 집세에 관한것도 그렇게 할것...
" 아, 집세는 걱정하지 마세요. 집을 통째로 살거라서요. 선배님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
" 그.. 잠깐, 다시 확인해보겠다 일라이저. 집을 정말 산다고? "
" 네. 그러면 문제없잖습니까. "
" .... "
" .... "
다른후보를 꼽아보라 해도 이만한 사람은 찾기 힘들것이었다. 비록... 그 의미가 살짝 바뀌고 말았지만. 경제관념이 조금 다른것은 같이 사는데에 지장이 크지 않기만을 바랄수밖에 없나. 확실히 그렇게 하면 문제는 없겠지만 보기보다 지갑사정엔 여유가 꽤나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도 있어보이는 분위기이긴 했으나 그게 정말일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침묵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던 차에 애머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집값도 반으로 나누는 수밖에 없겠군. 아무튼 신세를 지더라도 최소한으로 해야했다. 의미없는 셈 이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나누던 기준을 갑자기 바꿀수는 없었다. 일라이저는 그 말에 고민을 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추가 조건을 나날이 붙여가며 점점 상세한 생활패턴 기준과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어찌되든 좋을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체크해두며 서로가 불쾌할 일은 없게끔 철저히 기록하는 것이 모범생들의 필기노트를 보는듯 했다.
나름대로 꼬박꼬박 저축하고 모아둔 덕분에 애머디도 여유자금은 있는 편이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조율되니 집을 고르는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골라둔 집을 계약하고 이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집에 관한건 일라이저의 안목에 맡겨두었던 탓에 예상보다 훨씬 크고 넓은곳이 되긴 했지만 그만큼 보안설비가 뛰어나단 말에 애머디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챙겨둘 짐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사준비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척되었고 관련된 행정절차를 다 밟고난 뒤에야 두 사람은 텅 빈 커다란 집을 마주하게 되었다. 짐이라기엔 제법 간소한 크기의 짐들을 가져와 거실에 늘어놓고서 잠시 집 안을 두리번 거리던 두사람은 각자의 방을 간단히 정하고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감상이라 할만한건 크게 없었다. 애머디는 집의 구조나 건축방식에 흥미가 있는편도 아니었기에. 다만 이것이 앞으로 익숙해져야할 풍경이란 사실을 되새겼을 뿐이었다. 일라이저는 흡족하는 모양새던데 그나마 잘된 일이군. 그에게 직접 고르게 하지 않았으면 분명 이보다는 더 칙칙한 곳에 살게될 것이었다.
전반적인 인테리어도 그에게 맡겨두었기에 조만간 들여올 가구들 또한 세련되질 예정이었다. 화사한데다 구석구석 고급진 느낌이 스며든 구조와 환경에 애머디는 적응하기에 시간이 걸릴것이라 예상했다. 제 방이라 정해진 곳에 익숙한 물건들을 적당히 늘어놓는 것으로 삭막한 풍경을 그나마 채워놓고 방을 나섰다.
아직은 깔끔하게 비워져있는 거실에서 찬장을 살펴보던 애머디는 마찬가지로 짐을 풀어두고 나온 일라이저와 마주쳤다. 선배님은 일찍 끝내셨군요. 애초에 정리할 것도 없었으니 말이야. 간단한 회화를 마치고는 이후의 일정에 대해 이런저런 논의를 이어간 결과 오늘은 외식으로 배를 채우고 남은 시간에 집안을 꼼꼼히 청소하기로 했다.
겉보기엔 잘 관리된 것처럼 보여도 집을 구하는 절차를 밟는동안 사람이 살지않은 기색은 역력했다. 따라서 구석진 곳에 쌓인 먼지나 거미줄 쯤은 남아있었단 소리였다. 둘 다 깔끔하게 사는 편이었기에 청소를 우선하자는 의견에 반대는 없었다.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도 청소방식에 관해 얘기를 나눌 정도였으니까.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도보를 걷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같은것 자체는 어색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출근길도 퇴근길도 아니란 사실은 어색했다. 애머디는 짧게 앞으로의 일을 이미지해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게 된다면.. 적어도 대화는 지금보다 많아질것 같군.
수도 없이 대화를 하다 보면 알 수없는 부분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아니면 되려 난해해지고 말까. 어찌되었든 함께할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분명했다. 늘어난 만큼 싫던 좋던 알게되는 부분은 조금씩 늘어가겠지. 그것이 과연 좋은결과를 가져다 줄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람과 수도 없이 부딪히면서 지금껏 배운 것이라곤 사람은 금방 변하고 만다는 사실 하나였다. 무엇을 얼마나 쏟아부어도 단 한순간에 변심하고 마는것. 반대로 가끔은 아무리 밀어내고 지겹도록 쳐내도 달라붙는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피곤해져서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된지가 벌써 몇년이었더라.
그럼에도 가까이에 두기로 한 사람들은 있었으나 여전히 쉽게 대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타인이란 애머디에게 폭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언제 어느곳에서 터져서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고 사라질지 모르는 존재. 그러니 피하고 싶어질 수 밖에 없었다. 폭탄을 손 위에 얹고도 섬세하게만 다룬다면 당장 터지지야 않겠으나 애머디는 24시간 폭탄만 들여다볼 수 있을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그것이 절대로 터지지 않을것이란 확신 또는 터져도 괜찮다는 각오를 가지려면 그에 준하는 계기 혹은 오롯이 시간만이 필요했다. 언제나 눈앞의 결과만을 보고 판단내린 그였으니까. 무슨 생각이라도 하십니까? 그가 잠자코 앞만 바라보며 걷자 일라이저는 물었다.
아니, 가벼운 잡념일 뿐이었다. 그리 답하며 애머디는 걸음을 서둘렀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 가구를 들이면서 며칠이 더 흘렀다. 할 일이 많아서 정신없이 흘러갈 줄로만 않았지만 모든 일들을 깔끔히 정리하고 계획대로 움직인 덕분에 해야할 일들은 눈녹듯 빠르게 사라졌다. 꼼꼼하게 정리한 덕분에 준비에는 약간의 시간을 더 들였지만 그런만큼 실행한 뒤에 오류가 적었다.
적당한 크기의 소파와 러그 식물들이 텅 비었던 거실을 채워나갔고 깔끔했던 부엌엔 각종 조미료와 식기들 조리도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일라이저는 요리를 취미로 두었기에 더 가짓수가 많았고 이를 둘러본 애머디는 작게 기함했다. 요리란건 이렇게 많은 도구들이 필요했던 거였나?
신기한 듯 하나하나 들고서 물어보는 모양새에 일라이저가 설핏 웃어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건 치즈를 깎을때 쓰는거고 이쪽은 채소를 잘게 다질때 좋습니다. 대체로 상황과 취향에 따라 맞춰 쓰면 됩니다. 어딘가 신이난 듯한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래저래 진중하게 설명해주는걸 듣자니 이녀석도 어지간히 이런걸 좋아하나 보군.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애머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당번제로 돌아가며 저녁을 만들기로 정해놨으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제대로 파악해둬야 했다. 그렇기에 집중해서 도구들의 위치를 외워두었다.
어느날은 뒤늦게야 찾아낸 듯 낡은 레코드판을 보며 곤란해하고 있는 일라이저에게 다가서자 흥미 있으십니까? 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이런걸 좋아하셨거든요. 정작 말하는 본인은 대수롭지 않아했으나 애머디는 은근한 무게감을 느끼며 조심히 눈을 내리뜨곤 레코드를 감상했다.
아무튼 요즘시대엔 보기 드문 물건이었으니 제법 눈길이 갔다.
그런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일라이저는 마음에 드신다면 꺼내놓고 쓰도록 할까요. 가만 두는것도 아까우니까요. 하고는 선뜻 탁상 위에 레코드를 내려두었다. 방금전까지 꽤나 고민하는 기색이지 않았던가.. 싶었지만 저로서는 흥미로운 제안이었기에 그러겠냐는 한마디를 던지곤 그가 다른 낡은LP판들을 주변 책장에 꽂아 정리하는것을 지켜봤다.
낡아 있던걸 바로 꽂지 않는것은 역시 오래 보관해둔 것이라 그런가. 비교적 새것 처럼 보이는 케이스에 담긴 LP판을 꺼내 들더니 레코드판에 꽂아넣고 그 위에 바늘을 가져다 대자 영화에서나 들릴법한 지지직.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렸다. 이에 눈을 꿈벅거리며 신기한듯 시선을 집중하자 일라이저는 낮은 웃음소릴 내었다. 그러고 조금 있자 차분한 클래식이 귓가에 은은히 흘러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음색인걸. 심플한 감상평이었으나 제대로 된 칭찬이기도 했다.
집안을 꾸미지는 않았어도 애머디 또한 평소엔 두지 않았을 물건을 가져왔다. 잠깐 본가에 들러 가져온 것으로 오랜기간 동안 쓰지않았던 천체망원경 이었다. 학생때 용돈을 모아 산 것이기 때문에 품질이 좋지는 않은 구형이었으나 취미로 밤하늘을 들여다 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다른 방에 가져다 들여놓는 것을 본 일라이저는 그건 선배 물건인가요?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애머디는 담담히 끄덕이더니 가족은 쓰지도 않는데 부피가 큰 탓에 가져오지 못하고 본가에 내버려둔게 예전부터 신경 쓰였다고 답했다. 기숙사 방의 면적 또한 넓은편은 아니었기에 필요한 물건만을 구비해둔 편이었다.
얼마간은 그렇게 살풍경했던 집안을 채워나가며 서로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하얀 덕분에 집안이 차가운 느낌이 들뻔 했지만 일라이저가 곳곳에 둔 화분이나 걸어둔 풍경화 덕분에 그럭저럭 인간적인 풍경이 되었다. 딱히 무언가를 장식해둘 생각이 없었던 애머디보단 일라이저의 감각이 더 나은듯 했다.
생활에서의 삐걱거림은 없었지만 아직은 회사에 있을때와 비슷한 기류가 흐르는 편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존재하기만 할뿐. 출근길은 일라이저의 권유로 인해 함께 차를 타고 가긴 했지만 퇴근시간이 다른날도 존재했기 때문에 그럴땐 애머디는 따로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가려 했다.
되도록이면 일라이저가 기다리겠다 했지만 애머디로선 누군갈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불편했다. 두세 번이야 그대로 먼저 돌려보냈으나 이번엔 일라이저가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턱을 짚던 애머디는 그러면 조건을 걸지. 1시간 안팎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면 먼저 돌아가라. 그전까진 기다려도 상관없다. 하며 끝맺었고
건조한 음색을 들은 일라이저는 2시간으로 하죠. 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둘 다 연차는 어느정도 쌓인 편이었기에 업무처리 능력은 높았으나 그만큼 할 일은 늘어나 있었다. 하나하나 처리하는건 어렵지 않았으나 큰사건이 터진 날에는 처리할 보안기록의 수도 늘어나기 때문에 야근을 하기 쉬웠다. 외부출입인의 수가 많을때에도 그랬고 외부파견을 나가는 이들의 수가 많을때도 조심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둘의 퇴근시간은 얼추 맞았으나 애머디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업무량이 늘어날때면 일라이저도 함께 돕는 날이 늘어났다. 자신의 일에 손대는걸 반기지 않는 애머디 였기에 간단한 잡무나 검토 정도만 맡겨두었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를 알면서도 일라이저 또한 거드는걸 멈추지 않았으나..
" 네가 내 비서인 것도 아닌데 매번 일의 뒷처리를 맡길수는 없잖나. "
" 그러면 제가 손대기 전에 일찍 마치셨어야죠. 예전에 제가 일을 떠맡을땐 제대로 검토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선배 혼자서 일하는걸 마냥 바라보며 기다리는것 보단 저도 돕는게 낫습니다. "
이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태연하게 그리 말하는 모습에 애머디는 작게 혀를찼다. 알게 모르게 일을 조금씩 늘려서 처리하는 애머디는 늘 퇴근시간이 한두 시간 늦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버릇 덕분에 제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일은 드물었다.
일라이저의 처리능력에 관해선 충분히 지켜봐왔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업무를 돕는것 또한 간단한 선에서 도왔기 때문에 딴지 걸 부분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투덜댄 이유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이 맞지 않는거야 늘상 그랬을텐데 이제와서 이러는 이유라 하면 한가지밖에 없었다.
" ... 어째서 같이 돌아가려고 하는거냐, 일라이저. 딱히 큰 의미는 없는 일일텐데. "
" 그래도 기왕이면 함께 가는게 좋잖습니까. 돌아가는 길이 같으니까요. 아니면.. 부담스러우십니까? "
" 별거 아닌 일에 고집하는게 이해가 되질 않을 뿐이다. 아무튼.. 의사를 바꾸진 않겠단 거군. "
작성하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애머디는 말했다. 이윽고 얼마안가 달칵하고 펜을 내려놓는것으로 일이 마무리됨을 알렸다. 이를 시선으로 훑던 일라이저는 자리를 정리하고는 문앞에 다가섰다. 별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것은 긍정의 의미였고 문앞에 서서 마주보는 웃음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업무를 도운지는 딱 1시간하고도 반이 걸렸다.
의미가 없는 고집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어서 꺾기가 힘들었다. 애머디는 거절할 명분을 찾는것이 구차하단 생각이 들어 조용히 꺾여주기로 했다. 사내를 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어둑어둑했고 드문드문 별이 박혀있었다. 그마저도 건물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어 풍성한 그의 앞머리가 낮게 살랑였다. 불어온 방향에 잠시 시선을 두던 것이 자연스레 차를 몰고 앞에 멈춰선 일라이저에게 흘러갔다.
돌아가는 길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낯설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권유받은 이상 선택해야 했고 합리적인 시점으로 봤을때 이는 효율적인 제안이었다. 고민할 것은 없었는데도 망설이는 것에 애머디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진다면...
잠금장치가 풀린 차문에 손을 대어 열고는 몸을 실으며 애머디는 작은 위화감을 탁 하고 닫아냈다.
일라이저와 동거를 시작한지 어느덧 몇달이 흘렀다.
그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애머디는 부지런히 일했고 일라이저는 변함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각자의 방식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이 서로의 휴식시간을 존중했고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차였다.
좀처럼 적응되질 않던 집안풍경에 대해서도 서서히 눈에 익어가던 중이었다. 단순 관상용 일줄 알았던 화분은 일라이저가 이전에도 길러왔던 것으로 꾸준히 관리해준 물건인 듯 했다. 아무튼 가꾸고 돌보는거라면 뭐든 좋아하는게 아닐까. 그렇게까지 돌보는일이 천성이라면 교사가 됐어도 괜찮았을법 한데.
꽤나 어울리는 그림이라 생각하며 화분에 물을 주던 일라이저를 곁눈질하던 애머디는 그 뒤를 스쳐지나가며 커피를 내리려는 듯 했다. 지나가는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가만 돌리고는 말했다. 그냥 부탁하셨어도 가져다 드렸을텐데요. 여긴 회사도 아닌데 그렇게 기특하게 굴 것 없다. 단칼에 거절한 뒤에 애머디는 머그컵을 찾아 들었다.
애초에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시킬생각은 없었다. 집에서까지 부리려고 동거를 한것은 아니었으니까. 이해가 일치하여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것. 그 이상에 의미는 두지 않으려 했다. 전보다 친근해진건 사실이지만 집에서도 편히 있을만큼의 것은 아니었기에.
일라이저는 예상대로 별다른 불만은 내뱉은적이 없었으나 종종 거실에 나와있을때면 지그시 바라보다 지나가곤 했다. 동거경험은 서로 처음이었기에 어떤모습을 보이며 지내면 좋을지 신중했다. 그래서 애머디는 아직도 쉽게 풀어진 모습을 보일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에게 이상적인 선배로 보여진 탓도 분명 있을것이다.
드라마에서 자주 그려지는 동거관계는 잘맞는 사이여도 언젠가 사건이 터지거나 어딘가 맞물리지 않는 구석이 생겨 곧잘 싸우곤 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일이었다. 둘은 다른부분 보다는 같은부분의 면적이 큰 편이었고 자잘하게 튀어나왔다 싶은 부분은 알아서 잘 다듬는 편이었다.
사회적으로 모나지 않을만한 성향. 그것을 어떤 사유로든 유지해왔기에 타인과 크게 다투지않고 지내왔다. 누군가는 크게 데여봤기에 조심스러웠고 또 누군가는 지나치게 남을 배려해왔기에 다른방식으로 대하는 법을 몰랐다. 삐걱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톱니바퀴는 헛돌고 있었다.
곁을 지나갈때면 일라이저는 늘 시선을 주고 말을 건네왔다. 그것에 응하지 않은것은 아니었지만 애머디는 길게 사담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언제나 간결하게 보고하고 얘기하던 습관이 몸에 벤 탓이었다. 가끔은 먼저 애머디가 말을 걸기도 했지만 잡담이 길어질까 싶으면 끝내 어색하게 자리를 뜨고 말았다.
길지 않지만 간간히 짧게 이어지는 사담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은 여럿 있었다. 나나 이녀석이나 삶의 방식이 지루하기 그지없었다는 것. 취미라 할 만한건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수 있는 것들이 전부라는 것. 서로 타인과 밀접하게 관계를 쌓아본적은 아마 근 몇년간 없었을 것이라는 것.
애머디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에 뛰어났다. 머리에 열이 올라있지도 않았으니 어려울건 없었다. 성향도 성격도 비슷한 편이었으니 이를 유추하는건 간단했다. 그간 애머디는 일라이저의 사교성을 고평가 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보이는 것 만큼 친구가 많지는 않음을 이번에 깨달았다.
주말에도 별다른 일정이 차있지 않아 자신과 같이 한가롭게 거실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친화력이 좋다는 것은 상대가 불쾌하지 않을 선에서 서슴없이 성큼 다가가는 사람을 뜻했다. 일라이저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배려하기는 했지만 무턱대고 고개를 들이미는 타입은 아니었다. 지금껏 이것저것 권유를 해오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뿐. 선을 직접 밟거나 넘으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일정량의 배려를 적당히 받아들이면 거기서 무언가를 더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 또한 내가 귀찮아할까 하는 배려에서 나온것일수도 있었으나... 무엇이 됐던 일라이저도 나름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애머디는 집에서까지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고 싶진 않았다.
소파에 앉아 내린 커피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생각을 한차례 정리한 애머디는 화분을 마저 관리하던 일라이저를 향해 말했다.
" 일라이저. 이쯤에서 추가하고 싶은 조건이 있다. "
" 아직 뭔가 더 추가할게 남아있었던가요? 불편하신 점이라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
" 약속이 없는 주말엔 한두 시간 정도는 의무적으로 얼굴을 마주보는걸로 하지. 얘기를 하고 싶다면 하면 되고 같이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걸 해도 좋겠어. "
의아한 눈빛을 띄운 일라이저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다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만 해도 특별한 용무는 없었으나 서로 거실에서 한가로이 독서를 하던 참이었다. 그걸 굳이 의무화 한다는 것은 얼굴을 보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린단 뜻이었다.
단순히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서. 라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이정도가 딱 적당했다. 마음을 먹는다면 애머디는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틀어박히고 싶었으면 애초에 동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마음을 놓고 편히 쉴 곳이 필요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그러기 위해선 일라이저와 집에서 언제 얼굴을 마주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가 되어야겠지. 사람과 있을때 느낄 수 있는 안락함에 거부감을 내비치지 않을정도가 될 것. 당장 목표로 잡은것은 그런것 이었다.
탁
" 이게 체크 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대응하지 못하면... 체크 메이트죠. "
검은말을 손에 쥔 일라이저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칸을 이동하는 시범을 보여줬다. 체스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들은 애머디에게 설명을 해주는 중이었다. 모르는 경기의 룰과 각 말들의 기능 및 역할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재미는 있었고 일라이저의 설명은 일목요연 했기에 이해가 쉬웠다.
일전에 조건이 붙은 뒤로는 의무적으로 주제를 갖고 토론을 하던가 간단한 게임을 하게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사적인 얘기나 서로의 감상을 묻는 행위보다는 사고의 본질이나 개념에 대한 탐구가 대화의 주축이 되었다. 그런 대화에서 과연 재미를 느낄수 있나 싶었지만 적어도 애머디는 만족하고 있었다.
이번시간에는 드물게 게임을 배우기로 했다. 가끔은 그런게 끌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체스는 각 기물들을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서로 잡아먹으며 마지막까지 킹을 사수해야 했다. 그러면서 종국에는 먼저 상대방의 킹을 제압해야 하는 게임. 어렵고 치밀하게 짜여진 듯 해도 막상 판을 굴려보면 흐름은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꼴이 인생을 압축한 여느 보드게임과 다를바는 없었다.
더 축약하면 먹고 먹히면서 상대의 약점을 먼저 찌르는 자가 이기는 게임.
하지만 이는 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식으로 풀어갈 수 있었다. 일라이저는 이를 전략적 구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자주 둔다고 덧붙였다. 이는 체스의 본질이기도 하며 실제로 진을 구축하거나 작전을 구상할때 영감을 주기 좋았다. 하지만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
애머디는 자잘한 설정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게임에서 패배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이상의 손해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킹을 지키려 애쓸 필요가 있나. 어떤 방식으로든 치고 들어가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희생해도 게임이 끝나면 없던 일이 될 터였다.
"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쥐여진 경우의 수를 잘 이용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게임이군. 초심자에겐 힘들겠어. 그릴수 있는 경우의 가짓수가 적으니. "
" 걱정마세요. 편하게 두고 싶은대로 두시면 제가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 하겠습니다. 선배님은 그 중 끌리시는걸 선택하세요. 몇번 하다보면 금새 익히실 겁니다. "
친절한 핸디캡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이길 자신이 있어야만 내걸 수 있는 조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라이저의 은은한 미소 속에서 애머디는 한가지를 떠올렸다. 그는 겸손하게 굴기엔 너무 잘나서 글러먹었다고. 보통이었다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거나 지금 자랑하는 것이냐고 핀잔을 주었겠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대신 애머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에 흰색말을 집어 들었다. 자신은 초보였고 따라서 핸디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은 체스에 익숙해지고 나서도 지기만 했을 때 일어나겠지. 물론 애머디는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다.
탁.. 탁.. 탁..
차갑고 둔탁한 울림이 일정하게 들렸다. 시간은 지체없이 흘러갔고 중간중간 설명하는 말소리가 이어졌다. 게임을 하는 분위기 보다는 마치 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서로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을 움직일 때의 손짓은 신중했다.
얼마안가 둔탁한 소리가 멈췄다. 체크 메이트였다. 톡 하고 자신의 말로 흰색의 킹을 가벼이 쓰러트린 일라이저는 어떠셨습니까? 하고 말끔한 목소리로 감상을 물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 즐거운 기색이 어려있었다. 역시 이녀석은 가르치는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 앞으로 세 판은 더 해보도록 하지. "
" 좋습니다. "
게임의 승패에 연연하거나 집착해본적은 없었는데.. 일라이저에겐 왠지 이겨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호승심이라 할만한 건 아니고 소소한 복수심에 가까웠을까. 더 자세히 표현하면 그와 대등한 실력이 되고 싶었다. 허무하게 지는 모습만 보이는건 아무래도 선배의 체면이 서질 않겠지.
다시금 체스말을 제자리에 돌려 놓고 판을 들여다보던 애머디는 제법 호기로운 미소를 띄웠다.
한시간이 지났을 즈음에도 두 사람은 몰입하며 체스말을 움직였다. 몇십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닫고 체스판을 정리했다. 앞으로도 종종 하시겠습니까? 기분이 내킨다면 그렇게 되겠지. 재밌으셨다면 다행이네요. 깔끔히 정리된 테이블을 쓸며 말을 끝마친 일라이저는 후련하게 자리를 떠났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일라이저가 만드는 날이었다.
대체로 휴일엔 집안에 늘러붙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집에서도 일라이저를 의식하지 않게 되는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고 가벼운 운동 및 산책을 다녀오면 일라이저는 점심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받았던 물건의 답례를 해야 한다며 이웃에게 선물을 주러 나가기도 하고 장을 보러 나가기도 했다.
허투루 시간을 쓰는 일 따위는 없이 그는 언제나 주변을 청소하거나 화분을 돌보기 바빴고 처리해야 할 일이 없다 싶을 때에만 가만 앉아서 신문과 책을 읽는듯 했다. 그렇다고 그가 시간에 쫒겨 사는것처럼 보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애머디와는 다르게 일과 일상생활에서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애머디는 쉰다고 다짐하면 제대로 쉬는 편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기가 조금 까롭지만서도.
분명 일라이저는 느긋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애머디는 자주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봤다. 정성들여 선행을 베푸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이었으나.. 그가 항상 좋은사람이고자 하려는건 납득되질 않았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서 얻는 것은 무엇인지도.
이미 충분할 정도로 좋은이 이지 않던가?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그런 생각이 들때면 가감없이 이상한 녀석. 하고 툭 그의 면전에 대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일라이저는 멍청하게 보이는 웃음을 걸친채 순진한 답문을 돌려줄 뿐이었다. 호의를 표하는 데에 큰 이유가 필요한가요.
떠올리자 묘하게 답답한 기분이 들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불만스럽게 앞머리를 매만지던 애머디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홀로 남은 조용한 거실에선 은은한 클래식이 적당한 볼륨으로 새어나왔다. 그가 나가기 전에 틀어두고 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선곡을 하고 틀어두는건 대부분 일라이저 쪽이었다.
오늘은 드물게도 애머디가 직접 곡을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일라이저는 마침 외출 중이었고 왠지 모르게 다른 곡을 들으며 집중하고 싶었다. 걸음을 옮겨 그가 수집해둔 LP판이 가득한 책장에 다가서 스르륵. 손끝으로 글자들을 쓸어대다가 문득 유난히 오래된 느낌의 클래식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낯익었다 했더니 그가 처음 레코드를 가져왔던 날 이와 비슷한걸 본 기억이 났다. 오래된 LP판도 음질이 괜찮으려나. 가벼운 의문이 호기심이 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별 기대없이 손에 집어들어 판을 꺼내보았다. 그러자 팔락. LP판 케이스에 끼워져 있던 조그만 종이 몇장이 바닥에 떨궈졌다.
이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던 애머디는 귀찮은 표정으로 종이를 조심히 주워들었다. 케이스의 상태와 엇비슷한 품질의 종이는 사진 같았다. 많이 바랬으나 형태를 못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오랫동안 꼽혀있었는지 구김 자국이 선명했다.
먼저 눈에 든 것은 모르는 성인 남녀가 다정하게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갓난아기가 두사람의 품에 감싸여 자리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족사진인 듯 했다. 그걸 인식한 시점에서 애머디는 갈등했다. 남의 물건을 훔쳐보는 취미는 없는데. 그러나 가족에 대한 언급은 지나가듯 하더라도 자세히 얘기한 적은 없던 일라이저였기에 흥미가 일었다.
그녀석에게도 평범했던 나날이 있었다는걸 새삼스레 확인하고 싶었다. 사회의 톱니바퀴 마냥 일정하게 굴러가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일상을 살던 시기가 있었음을. 이전부터 은근하게 느껴왔던 위화감을 조금은 해소시켜 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도 들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니까 너그럽게 봐주길 바라는 수밖에.
사락. 겹쳐져 있는 두번째 사진을 매만지던 애머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그대로 넘겨들고 진중한 눈빛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익숙한 금발의 어린아이가 서있었다. 다부지지도 의젓하지도 않은 표정의 아이는 시선을 의식한 듯 굳어있었다. 여느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사진기가 낯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두 눈은 똑바르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에서도 알 수 있을만한 뚜렷한 녹음이 사진에 스며들어 있었다. 언젠가 짧게 들여다본 반듯한 두 눈동자가 잠시 스쳐지나갔다. 째각. 들리지 않던 초침 소리가 머릿속에 파고 들어왔다. 내게 이런걸 볼 자격이 있던가?
조용한 물음이 피어나 번져가려 했으나 이내 다시 묻어두었다. 그에게 다가서고 관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여전했다. 다만 어디까지 관여해도 될지에 대해선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골치를 썩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의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알아버린걸 덮어둘 수는 없다. 그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선택 또한. 애머디는 심란함을 침음 속에 녹여내고는 사진을 케이스에 다시 곱게 끼워넣었다. 결국 선곡을 바꾸지 못하고 음악이 흐르는걸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방에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껏 자각한 적은 없었으나 애머디는 먼저 보내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내쳐본 적이 없었다.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성격 덕분에 매정하며 이기적이란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다. 상대를 멋대로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판단내렸다. 그 사람의 구조를 파악해둬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이런저런 사건을 겪고 지금에 와서는 어느정도 융통성이 생겨난 참이었다. 애머디는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원하는 답이 아니더라도 재촉하지 말자. 상대가 준비되지 않았을때 깊은 얘기를 꺼내진 말자. 다짐하듯 속으로 되뇌이며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한차례 껍질이 깨져본 적이 있던 만큼 파헤쳐지는 기분이 어떤지는 잘 알았다. 신중하게 또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었다. 적어도 그래야 마찰이 일어나지 않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출했던 일라이저가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지나가다 길을 찾는사람이 있길래 직접 데려다주고 오느라 꽤 늦었다고 말하며 옷매무샐 정리하는 것을 가만 지켜보던 애머디는 여느때처럼 먹고싶은 메뉴는 있냐고 질문했다. 곧 저녁시간이 다되어갔기에 애머디는 냉장고를 열며 재료를 차근차근 살폈다.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일라이저는 로스트 비프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냉장고엔 얼마전에 사다놓은 신선한 소고기가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일전에 장을 봐온게 그였으니 알고서 말한거겠지. 그는 조리과정이 복잡한 요리를 먼저 입에 담는일이 없었다. 다음번엔 스튜를 만들어 보는게 좋을까.
저녁시간에 맞춰 조리를 간단히 끝내고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려놓자 조용히 지켜보던 일라이저도 때맞춰 그 앞에 자리했다.
어렵지 않게 간하고 구워낸 고기와 샐러드를 입에 넣던 와중 애머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남들을 돕고 다니면 가끔 피곤하지 않느냐고. 그러면 고기를 잘게 썰던 일라이저는 무던하게 답했다. 제 의지로 하는건데 피곤할리가요. 정작 그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애머디는 익숙하게 고갤 기울였다.
" 널 보면 말 잘 듣는 착한아이가 그대로 어른이 된 것만 같단 말이지. 투정을 부리거나 사고를 쳤을거라곤 도저히 상상되질 않으니까 말이야. "
" ..그런가요? 정작 어릴때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법 제멋대로여서 부모님께 걱정거리 였었죠. "
" 네가.. 제멋대로 굴었다고. "
달그락. 접시를 포크로 두드리며 일라이저를 가볍게 훑던 애머디는 그다지 매치되질 않는지 미간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눈매에도 잠시 의문이 서렸으나 금새 다시 눈을 반듯하게 뜨고는 마저 고기를 쿡 찔러냈다. 각성 전과 후의 변화가 뚜렷한 것은 자신도 그랬기에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 사실이에요. 믿지 않으셔도 그닥 상관 없지만요. "
그 시선을 받아내던 일라이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썰던 고기를 눈에 담았다. 그러곤 아무렴 좋다는 듯 식사를 이어나가며 오늘 있었던 일을 담담히 나열했다. 접시를 다 비워냈을땐 잘 먹었단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마무리로 접시를 치워두고 돌아가려던 그의 뒷모습에 애머디는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 적어도 인상은 지금과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말이야. "
멈칫. 가려던 걸음을 거둔 일라이저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네? 하는 얼빠진 소리와 함께. 무슨 의미인지 곰곰히 되짚어보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픽 웃음을 머금기도 잠시, 애머디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시선을 마주했다. 어떤식으로 말해주면 좋을까. 난감해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말을 해야 한다면 기회가 있을때 바로 말하는 것이 나았다. 어영부영 넘겨두었다가 시기를 놓치면 찜찜해질 뿐이니까. 정말 사고를 쳐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구태여 거기까지 묻진 않았다. 남들만큼 걱정을 끼치고 다녔다면 소심한 편은 아니었겠지.
흐음.. 낮게 숨을 내쉬던 애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척척 가로질러가더니 LP판이 가득 꽂힌 책장을 턱짓했다. 일라이저가 이를 응시했을 즈음에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네 어릴적 사진을 봤다. 두 눈도 아주 멀쩡 하더군 가족사진도 같이 있던데. 오래된 LP판을 하나 꺼내봤더니 같이 떨어져 나왔다. 분명 오래전부터 끼워져 있던 거겠지. "
" .... "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그가 묵묵히 시선만을 보내오자 애머디는 고개를 짧게 숙여 보였다.
" 우연히 발견한 것이긴 했지만 허락없이 본 건 미안하다. 혹시 나중에 다시 보고싶거든 직접 찾아봐라. "
멍하니 자신과 책장을 번갈아 보던 일라이저는 한참을 더 뜸들이더니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결코 좋은 낯빛은 아니었으나 애머디는 그를 불러세우지 않았다. 역시 불쾌했으려나. 하지만 모르는채로 두는 것 보다는 아는 것이 나을거라 판단했다.
그건 원래부터 일라이저의 것이었으니. 언젠가는 그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일라이저의 과거가 좋았을지 나빴을지는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평범하게 사랑받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게 가족을 의지하고 그들이 항상 곁에 있을것이라 믿었던 시기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쩔수 없이 동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사람은 그것을 반드시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게 당장 찾을수 없는 것이라면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멍이 생긴 자리를 그대로 텅 비워두고 살기엔 삶이 너무 길었다. 결국 어떤식으로든 임시로 대체할 무언가를 끼워넣어야 했다.
애머디는 그 공허한 공간을 온갖 책임감으로 꽉 채워 자신을 매달아 놓았었다.
제 것이던 아니던 눈앞에 보이는 모든 책임들을 양손에 꽉 쥐고 얽히면 얽히는대로 무턱대고 끌고 나갔다. 하나 하나는 보잘것 없고 가느다란 실타래들 이었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개가 되어가자 점차 몸을 죄어왔다. 걸음을 내딛을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을 파고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죄어오는 고통에 익숙해진 애머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최후에는 숨통을 조이게 될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굳이 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되도 상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허나 그것이 전부 자기파괴적인 허상에 불과했음을 지금은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모든게 끊어지고 너절해지기 전에 일찍 알아차리게 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감정이 넘쳐 흐르는걸 주체못하고 흐트러졌을때 손을 잡아준 이들을 애머디는 기억했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떠올리면 여전히 몸이 떨려왔지만 이젠 진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제 주변에는 의지할 수 있는, 의지해도 되는 사람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애머디는 다시금 침착해질 수 있었다.
그리니 감히 다짐하건데 그들이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때 언제든 똑같은 일을 해줄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런일은 생기지 않는편이 나았지만.. 삶은 언제나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는 것이기에 애머디는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에 둘수록 신중하고 무거운 마음가짐으로 그를 마주했다. 지나치게 신중해서 문제였으나 인생의 절반을 경계하며 지내던 습관은 쉽게 지워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겹치고 겹쳐서 더는 풀어낼 긴장이 없을만큼 경계가 옅어진다면..
애머디는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발견한 파편들을 손에 쥐고서 그의 빈자리를 가늠해 어설프게 맞춰나갔다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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