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
가장 바라던 것은
항상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너도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순진하기만 한 그 믿음은 어찌나 얄팍한지
" 함부로 신뢰하고 시험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당신을... 정말로 해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
여느때의 저녁시간. 그가 당번이 되어 저녁을 만들던 때였다. 아무런 의심없이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언제나의 농담을 건넸다. 그렇게 해서는 안됐는데. 툭. 건들여진 화병은 깨졌고 가지런하게 장식돼 있던 꽃은 볼품없게 축 늘어졌다. 식칼은 거칠게 테이블에 박혔다. 상황에 대한 파악과 대처를 하기도 전에 녀석은 할 말을 마치고는 멋대로 집을 나갔다.
식칼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에도 위기감을 느끼진 못했다. 그가 손을 내미는 순간에도, 하지만 핏기어린 손바닥이 보이자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그 팔목을 뿌리치고 뭐하는 짓이냐 묻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뚝뚝 탁자 위에서 물소리가 나는것 외에는 고요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듬던 고기의 비린내가 얼굴에 남았다. 붉은 핏자국이 뺨을 타고 흘렀고 이게 네가 느꼈을 기분이라 생각하니 참담했다. 왜 피하지 않느냐. 왜 공격하지 않을거라 믿느냐. 어떤 기분으로 섞여 살고 있는지 헤아려 봤느냐..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탄식이 흘러나왔다.
" 하아... "
쿵
가볍게 팔꿈치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를 박기라도 했다면 네가 돌아와서 또 무슨 잔소리를 할지 눈에 선했다. 함부로 신뢰하고 시험한다. 그리 틀린말은 아니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신뢰를 나는 늘 시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가 없어서. 내가 정말 그 신뢰에 걸맞은 사람인건지 자신을 가질수 없어서. 은근슬쩍 그를 들여다볼 합당한 방법이라며 구실을 만들어 냈다.
당황함이 가라앉자 분노 보다는 불안함이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위협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무엇을 얼마나 참았던 것인지 생각하면 꽤나 서늘했다.
식사를 하기 전이니 허기가 질텐데. 떠난 자리를 흘끔 눈에 담았으나 그가 대체 어디에 갔을지 무엇을 할지는 예측되지 않았다.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정도로 화가 났다는 거겠지. 무턱대고 찾아봤자 같이 헤매는 꼴이 될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데서 합리적이어 봤자 냉정하단 소리나 들을텐데. 어쩌면 녀석은 찾아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이 넓고 조용하고 추운 거리속에서 혼자 돌아다닌다는건.. 역시 진작에 방식을 바꿨어야 했는데. 팍.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치며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곤 얼굴에 묻은 것을 가볍게 씻어냈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다시금 테이블을 지나가니 문득 꽂혀진 식칼이 눈에 들었다. 피가 유난히 많았고 비릿했다. 겨를이 없어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칼을 꾹 쥔것 같기도 했다. 결국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간지는 어느덧 30분을 지나 있었다.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도 시간은 매정하게 흘러갔다.
움직이면서도 생각은 할 수 있다. 더는 얌전히 있을수가 없어 옷가지를 꺼내 챙겨 입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느때처럼 코트를 건네는 이가 없으니 어색했다. 못할 짓을 하고 말았어. 상념을 가벼이 털어내고는 여분의 짐을 꾸리고 밖을 나섰다. 밖은 어둑해진 데다가 쌀쌀했고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득한 거리를 바라보면서 무턱대고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믿었던 것은, 믿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정말로 일라이저를 믿었다고 할 수 있나. 경계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켠에 의구심은 거둘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기 전까진 완벽한 타인이었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그를 이해한다는건 어려운 일이었으며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 가능한 것은 그저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뿐임을. 브레스에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 신뢰는 일방적이었다. 너는 그러지 않을테지. 하고 그저 확인을 했을 뿐이었다. 그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나 이는 생각의 깊이가 얕았던 것임을 이제와 깨닫는다.
그는 나를 언제든 죽일 수 있었고 얼마든지 틈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럴 능력도 있단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이를 불안하게 여길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폭력적인 면모도 없었고 그 누구보다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그에 대한 고민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이런 전제 자체가 착각이었을 줄이야. 날 죽일 수 있나? 하고 물으면 그럴리가요. 하고 웃어주길 바랬다. 한치의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그럴일은 없다고 못박아 두길 바랬다. 하지만 너는.. 늘 답을 내놓지 않은채 말을 돌렸다. 헛소리니까 넘겨들은줄 알았으나 이는 거부반응 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는, 에스퍼는 많은 것을 뺏겼으며 어떨땐 손쉽게 앗아가는 위치에 있었다. 과거에 잃었던 것을 찾기 위해 하염없이 헤매는 자들. 더는 일반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태도는 지금도 용서할 수 없으나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옳냐 하면 그것은 부정할 일이었다.
많은 시민들을 구했고 많은 시민들을 죽였다. 그건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에스퍼가 온전히 시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란 불가능 했고 이는 시민쪽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 그것을 잠시 잊게 해준것이 에너미의 존재였다.
에너미의 습격으로 부터 시민을 구한다. 이상적인 영웅상 이었고 실제로 그런 이미지로 일을 했었다. 그게 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었기에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너미는 임시방편. 이것이 없어지면 다시금 시민들과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도 무턱대고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도심에 존재하는 것보단 나았다. 애머디는 에너미를 사람처럼 여겼기에 그들의 목숨 값을 제 인생에 달아두었다. 죽기 전까지 그들을 기억할 것이고 그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내 손으로 여동생을 죽였을지도 모를 사실에 대해서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한 살생. 그것에 익숙해 질지언정 끝내 비정해지지는 못했다. 생명의 귀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 뿐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상실을 뜻했다. 애머디는 사람이고 싶었다.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건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라이저 너는 어떻게 생각했지? 에너미를 사람으로 보았나? 에너미가 없어진 날 무슨 생각을 하였지?
닿지 않을 의문을 품고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날은 결국 일라이저를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내일도 일이 있어 직책상 그것을 저버릴수 없었다. 단 하루라도 게을리 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센터장이 되어도 여전히 무력한 일만 잔뜩이군. 그 많은 안건들을 처리해도 정작 옆에 있어준 사람에 대한 내면은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하니 말이야.
잠은 제대로 못잤지만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쳤다. 딱 출근시간이 되자 현관문이 열렸고 그가 돌아왔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준비를 도왔고 회사까지 동행했다. 하지만 다른점이 있다면 출근길을 함께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편안하게 여겼던 정적이 이렇게 따가울수도 있었나. 불편한 마음을 안고 오전업무를 시작했다.
회사에 와서도 둘은 업무에 충실했다. 충실하기만 했다. 오늘따라 좀 지쳐보이시네요. 지나가던 직원에게 들은 말이었다. 별 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고 이내 편한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주변에 티를 내서는 안돼. 그들의 신뢰에 금이 가서는 안됐다. 사무실에 혼자 들어와서야 애머디는 굳은표정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똑똑
" 휴식 시간 입니다. "
언제나의 티타임이 찾아왔다. 차분한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일라이저를 껄끄럽게 바라보다가 끝내 차를 내민 옷자락을 붙들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보니 다친것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베인것은 제가 아님에도 속이 욱씬거렸다. 아직 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으나 죄책감에 짓눌려 다급한 말을 뱉어냈다.
" ...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나를 있는 힘껏 쳐도 좋아. "
사죄를 표할땐 어떤 말을 해야 했더라. 일도 아니니 배상금을 물수도 없었고 사과문을 쓸 수도 없었다. 업무적인게 아닌 사적인 경우엔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과 자체는 낯선 일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사람을 대하는 일엔 낯선 편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심하다는 눈초리였을까. 답을 갈구하는 시점에서 실수했단 것을 느꼈다. 역시 너무 성급했어.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날카로운 대답을 되새겼다. 너무 쉽게 떠넘기려고만 하십니다. 애초에 있는 힘껏 쳐도 좋아, 라니.. 맞으면 후련한 기분이 들것 같은게 아니고요?
그 말을 끝으로 일라이저는 자리를 떴다. 이번엔 붙잡을 명분도 없어 가는 모습만 멀뚱히 보다가 찻잔을 내려다 봤다. 소리없이 잔을 들고 이를 삼켜내면 적당한 쓴맛과 짙은 향이 느껴졌다. 여전히 취향에 맞는 차를 내오는 그였지만 나는 그의 취향을 맞출수 없었다. 한심하게 봐도 싸군.
쓴웃음을 금방 지워내고서 애머디는 오후의 일정을 소화해냈다. 마음이 흐트러졌다고 일을 적당히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혹시 몰라 서류를 몇번이고 확인하고 검토하며 직원들에게도 여느때의 미소를 건넸다. 오전에 지친기색을 보여 걱정한 이들도 이젠 안심하는 듯 했다.
퇴근시간이 되서야 나타난 일라이저는 묵묵히 코트를 걸쳐주었고 차까지 안내했다. 언제나와 다를 것이 없는 배려. 뒷자석에 앉아 질리도록 익숙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풀어준 적이 없으니 아직도 열이 올라있겠지.
이렇게까지 막막하고 답답해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따지자면 답답한 일 자체는 한가득 있었으나 어떻게든 답을 찾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주변이 눈에 덮힌것 마냥 새하얘서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려니 어디서부터 내딛으면 좋을지 고민됐다.
달칵
차에서 내리고 그가 씌워주는 우산에 기대 집에 들어왔다. 정신이 없어 칼은 치워뒀으나 깨진 꽃병은 치우지 못한걸 뒤늦게 떠올렸고 이를 치우러 갈아입고 거실에 나갔을 즈음엔 이미 일라이저가 손을 댄 후였다. 깔끔한 그 성격에 이를 그냥 두고볼리는 없겠지.. 이것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걸 보면 나도 상태가 영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숨이 나오는걸 삼키고는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일라이저를 보내주었다. 여기서 붙든다 한들 의미는 없었다. 무조건 얼굴을 보고 사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툭. 벽에 기대어 그가 한 말들을 정리해본다.
수백번의 살생. 내키지 않아 하는 애머디도 필요하다면 사람을 찌르고 베는 일 정도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익숙해진단 뜻이었고 그만큼 망설임이 적었다. 몸에 익은 일을 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운 이를 해칠수 있다는 발상은 해본적도 없었다.
아마 능력의 파괴력을 최대치로 끌어써본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애머디는 신뢰를 표하기엔 목숨만한게 없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맡길 수 있다는 것. 전장에서 이만큼 든든한 것은 없었다.
나 또한 감각이 조금 뒤틀려 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어느샌가 함부로 목숨을 저울에 두고 재고 있던 것이었다. 그도 나와 비슷하다면 이 비틀린 감각 때문에 고민했던 걸까? 생명의 무게를 서서히 잊어버려서 마치 에너미를 죽이듯 사람을 해칠 수 있다면 그건 더는...
이제서야 섞여 산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일반인이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난제를 에스퍼들은 안고 살아간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돌아오는 자책과 따라오는 책임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엇이 옳았는지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키기 위해 힘을 길렀다. 구하기 위해 살생을 저질렀다. 그러나 구제할 대상이 없어지자 더는 살생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고 다치며 정신을 깎는 일을 이젠 할 필요 없다. 하지만 그 감각을 잊는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까.
그 후유증으로 애머디는 제 목숨을 내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한순간의 방심은 죽음과 연관됐고 잘못된 판단은 동료의 목숨과 직결됐다. 그런 상황에 연속되서 노출되니 더는 쉽게 방심할 수 없었고 어떤 선택도 간단히 내릴수 없었다. 아까도 모든것을 내려놓고 미안하다. 한마디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면 그는 생각보다 쉽게 용서해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머디는 그렇겐 못했다. 간단히 용서받는 일 또한 꺼리는 탓이었다. 잘못을 했다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앞으로도 정말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 용서를 구할 자격은 있는지. 꼼꼼히 따져야 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급하게 용서를 구했던 것은 정말로 초조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갈등은 언제나 최악을 떠올리게 했다.
고지식한 성격은 여전해서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이었다. 가치관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워 했고 그럴수록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성격을 억지로 뜯어고쳐 이 자리에 왔다. 그 과정에서 하나 둘 놓친것이 있다면 평범하게 위로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예전엔 분명 잘 했었는데.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없이 부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사람에게 믿음을 똑바로 전하는것 조차 실패했다. 툭툭. 제 팔뚝을 두드리던 애머디는 걸음을 돌렸다.
터벅터벅 나아가던 걸음은 그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무심코 손잡이에 손을 얹으려다 다시 거두곤 대신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예상한대로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인기척은 제대로 났으니 아마 안에 있을 것이다.
얇은 방문을 눈앞에 두고 애머디는 입을 열었다.
" 네게.. 미안한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한다. 내 무지함을 핑계로 네게 일방적으로 굴었어.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너에 대해서는 네 입으로 듣고 싶었는데. "
예전부터 솔직한 것만이 장점이었다. 그에게 느끼는 미안함도 죄책감도 전부 사실이었다. 제가 기대한 것이 또 바라던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네게 얼마나 큰 부담을 줬을지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담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얼만큼 의지 되는지 평소에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어느쪽이든 부담이 된다면 그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 그게 너를 괴롭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명백한 내 실책이다. "
언제나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냐고 물으면 애매모호한 답이 돌아왔다. 지금에 만족하냐 물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선배가 행복하다면 저도 그럴겁니다. 흔들림 없는 그 말은 안심이 될법도 했는데 애머디는 그 미소와 대답이 불안했다.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말.
" 내게 의지가 되준 만큼 의지해줬으면 했는데... 욕심 부려서 미안하다. "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도 내가 충족시켜줄 자신이 없기에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돌려주는 것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일라이저는 내가 행복하길 바랬다. 마찬가지로 나는 일라이저를 축복한다. 하지만 일라이저가 바라는 행복에는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것 같았다. 또한 내가 바라는 그의 축복받은 삶엔 내가 없어도 괜찮았다.
상대를 위한 행복은 있었으나 자신을 위한 행복을 쫒지는 않았다. 기이한 행복론이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겪는 괴로움과 불행까지는 되도록 전염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너는 너대로 꼿꼿이 서있길 바랬다.
가능하면 손댄 일은 끝까지 책임지려 했지만 동시에 사람에겐 책임질 수 있는 한도가 있음을 알았다. 역량에 맞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것은 무책임한 것과 다르지 않았고 애머디는 상대가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언제든 거둘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외롭더라도.
" 그러니 내가 싫어졌다면 언제든... "
달칵
방문이 열렸고 동시에 튀어나온 얼굴에 흠칫 물러났다. 그러나 놀란 틈에 붙들린 손목덕에 거리는 벌려지지 않았다. 여기서 나올줄은 몰랐는데. 이정도로 화가 풀렸을리가..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굴리자 목소리가 들려왔고 가슴에 묵직한 무게가 실린것을 느꼈다.
" 선배는 정말 최악이에요. 매번 그렇게 일방적으로.. 치사해요. "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그 머리에 시선을 고정하며 고민하던 애머디는 결국 생각을 멈췄다. 그리곤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등을 감싸고는 토닥거렸다. 말재주가 나쁜 사람에겐 행동만큼 표현하기 편한것이 없었다. 최악인 사람에게 도닥받는 것은 별로일 것 같기도 하지만.. 내쳐질때 얌전히 물러나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해도 이대로 서있는건 슬슬 곤란하겠지. 생각보다 얌전히 있었기에 조금만 더 토닥여 주다가 어깨를 조심히 밀고 고개를 마주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인게 화가 풀린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풀어진 분위기에 안도했다. 얘기를 할만큼 진정된 것 같아서 그의 손을 이끌고 거실에 들어섰다.
앞에 늘어선 소파에 나란히 앉고는 그를 마주봤다. 애머디는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네가 상처입은 것에 대해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 딱히 변명을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네가 말한 것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너는 그걸 듣고싶나? "
어디까지나 의견에 불과한 것이었다. 변명도 사과도 아닌 대화로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해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받거나 받지 않거나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헤아릴 시간이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이 모든것도 상대가 이를 수락해줄만한 상태여야 가능했다.
" ... 들려주세요. "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는 애머디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무언갈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에게 가볍게 손짓한다. 그의 손짓에 일라이저는 익숙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에게 기운 상체를 그대로 잡아 끌더니 무릎에 고개를 눕히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긴 얘기가 될거라서 말이야. 속삭이듯 내뱉은 애머디는 다시금 고개를 들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채 마저 얘기할 준비를 했다.
아까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기대고 싶어 한다면 품을 빌려주는건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의젓한 사람이어도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때 정돈 있겠지. 이걸로 조금이라도 마음이 누그러들길 바라기도 했다. 언젠간 나도 네 무릎을 빌릴 날이 올려나.. 시덥잖은 생각을 내려두고는 찬찬히 하고싶었던 말을 풀어냈다.
" 우린 많은 생명을 지켰고 또 해쳐왔지.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러나 아직도 에스퍼는 사회에서 이물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엄연한 사람이야. 나는 네가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은적은 없어. "
무릎에 기대어 멀뚱멀뚱 저를 올려다보는 그를 흘긋 마주했다. 어디서 어떻게 봐도 애머디의 눈에 그는 다정한 부류의 사람이었고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 일라이저 넌 다른 이를 해칠까 두려워하는것 같더군. 그럴만한 전적과 힘이 있으니. 나는 대규모 파견임무를 마친뒤 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른다. 듣는다 해도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 "
해칠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조절만 잘 한다면 이를 자각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언제나 문제인 것은 내면의 악의였다. 정부에 대한 악감정을 빼놓더라도 그들의 욕망은 저열했고 비인도적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그 모습을 두번 보고싶지는 않았다.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찌푸리던 눈가에 힘을 풀었다.
" 허나 거기서 나눈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한다. 네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위로하고 챙겨주었던 것도. 네 삶을 축복하고자 하는 바램도 여전해. 그날부터 난 너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받아들이는 중이다. "
커다란 무력감 초조함 허탈함. 인간의 악의 오만함 이기심. 숨겨진 비리 정부의 실상 실종자들의 진상. 그리고 연구소의 실험 에너미의 근원.. 그 모든것을 천천히 파헤치고 파고들어 갈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한계를 시험하듯이. 그때의 기억은 제법 선명한 편이었다.
그렇게나 나쁜기억 임에도 어째서 선명히 기억하며 동시에 크게 괴로워하지 않는가. 답은 간단했다. 위로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같이 함께한 동료들이 잊지못할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그들의 다정하고 상냥한 온기는 자신을 진정시켜 주었다. 같은 회사의 에스퍼로 동시에 작전에 참여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나를 믿고 지지해주었다.
그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거리를 두었음에도 그들은 굳이 그 선에 기웃거리며 자신을 들여다 봤다. 당시에는 도대체 왜그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불안정 했던 것이다. 홀로 서서 어떻게든 앞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걸음을 멈추게 한것은 별것 아닌 걱정과 잔소리 그리고 인정이었다.
"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정도 경각심은 있는게 좋아. 그게 두려운 이상 너는 앞으로도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지. 다만 이젠 에너미와 사람을 나눌 필요가 없으니... "
일라이저가 홀로 감싸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애머디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능한 일이 있다면 그가 제 옆에 서기를 결심했듯이 일라이저의 신뢰를 인정하고 믿음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지금껏 함께 하면서 제대로 속내를 터놓는 것을 미뤄둔 제 탓도 있었으니까.
억지로 믿음을 강요해 나약함을 들춘 것에 대해선 여전히 미안했지만 그걸 내비쳐준 덕분에 조언해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줄곧 혼자 끌어안는것 보다야 어떤식으로든 표현 해준다면 그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 네 몸을 지켜야할 상황이 아니라면 남을 해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사람을 죽인다는 가정은 앞으로 쉽게 하지마라 일라이저. 네가 그러지 않을거라고 믿지. "
물론 나도 그런 말은 되도록 삼가도록 할테고. 다짐하듯 내뱉고는 일라이저의 어깨를 조심히 쓸다가 손을 놓고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댔다.
모든 것을 전부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애머디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일말의 불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이 있었고 이는 그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자신과 그 주변을 지키고 싶다는 신념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 덕에 한가지만 바라보고 집중하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다.
짊어진게 너무 많은 탓이었다.
제 옆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애머디에게 있어 이미 소중했다. 오랜시간 불평불만도 없이 고지식한 저를 믿고 따라와준 만큼 비교적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그가 꼼꼼히 챙겨주고자 하는 것을 막지않은 것도 그것이 일라이저의 의지라서 그랬다.
받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정작 애머디가 돌려주고자 할때 일라이저는 어딘가 어색한 모습을 보였다. 선물을 건넬때도 똑같이 식사를 차려줄때도 받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다음에도 부탁한다던가 기대된다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씁쓸했다.
먼저 허락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것들은 바래도 좋을텐데. 이정도는 돌려주지 않으면 이쪽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제대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동거하고 있었지만 오래 지낼수록 그 영역은 점점 넓어져갔고 주고 받는 것도 늘어만 갔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까지 주고 받아야 좋을지는 고민됐다.
얼만큼 네게 기대는게 좋은걸까. 얼마나 숨김없이 보여줘야 실망하지 않고 또 부담스럽지 않을까. 내 신뢰는 어느정도로 맡겨야 네가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애머디는 멈추지않고 뻗어나가는 가지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에 비하면 일라이저는 신뢰에 관해서라면 별 다른 고민도 망설임도 없어보였다.
반드시 원하는 답을 내주진 않더라도 제가 묻는 말에는 곧잘 대답해주었고 무언가를 건네면 곧잘 받아들고 하는 명령에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허나 애머디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꺼려했다. 한쪽이 없으면 휘청거릴 관계는 불안하기만 했다.
도저히 혼자 버티기 힘들때 기대는 정도로 충분하다 여겼다.
결국 신뢰의 문제였다. 일라이저는 내가 없더라도 한사람으로서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가. 나는 일라이저가 없어도 꿋꿋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인가. 무엇보다 제가 가는 길이 옳다며 앞으로도 함께 걸어나가자 할 자신이 있는가. 이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감히 손을 내밀수도 잡을수도 없었다.
지금껏 그가 손댄 관계들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이 더 많았다. 그러니 확고함도 자신감도 모자란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당히 못난 모습을 보이고 그럼에도 자신을 믿으라며 뻔뻔히 손을 내미는 짓을 하기에 그는 양심적이었다. 일라이저의 헌신에 보답하는 것만으로 벅찼으나 그마저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해 명분을 덧칠하고 말았다. 선의는 좋아했으나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관심 그리고 행복은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애머디의 작고 나약한 본체는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흔들림 없는 곳에 정착했다 한들 본디 그릇이 작은 인간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과분하지 않다고 여길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번과 같은 일들이 이어진다면 곤란했다.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애머디도 일라이저도 다시금 생각을 정돈하는것 같았다. 숨소리만 나직하게 들려오던 때에 일라이저가 스륵 몸을 일으켰다. 슬슬 다리가 저릴만한 시간이긴 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만 돌려 받아들었다. 이에 일라이저는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 ..선배는.. 지금도 저를 믿으십니까. "
" 네 인간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여전히 모르는게 더 많지. "
아이러니 하게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난 뒤에야 그가 인간처럼 느껴졌다. 저도 화가 많은편은 아니었지만 피곤한 일이 있거든 종종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러나 일라이저는 나름 신경쓴 것인지 제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 일라이저. 나를 따르는 것에 후회한 적이 정말 없나? "
이번에는 애머디가 반문했다. 고저없는 목소리로 뒤에 서서 따르는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굴면서 제게 항의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만한 태도를 취할 정도로 몰아 붙였으니 신뢰가 깎일만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도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 그런적은 없습니다. "
낯빛하나 바뀌지 않은채 들려오는 답에 애머디는 제 턱을 쓸었다. ...이러니까 곤란하단 말이야. 흔들리지 않는 대답이 돌아올 것은 알았는데도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기쁘면서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기대를 걸어주는 만큼 부응하고는 싶었지만 본심을 내뱉는 것은 주저했다.
나약한 면까지 이미 알고 있을 터였지만 가능하면 좋은 이미지로 기억해주길 바랬다.
고집에 가까운 마음. 그러나 그렇게 체면을 챙겨서 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의지가 될만큼 챙겨주었던 사람을 상처준 마당에도 자존심을 챙기고 싶진 않았기에 애머디는 한풀 꺾이기로 했다. 일라이저의 신의는 여전히 납득이 되질 않았고 자신이 그럴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나...
적어도 그가 나를 굳게 믿어준다는 사실에 대해선 더는 의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편이 낫겠지. 완벽히 맞춰줄 수는 없겠으나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어제는 일라이저의 불안을 엿보았으니 오늘은 내가 불안을 꺼내들 차례였다.
적어도 그래야 치사한 마음은 달래줄수 있을것 같았다. 마음을 다 잡듯 두 손을 마주 잡고서 애머디는 입을 뗐다.
" ... 조금은 내 본심을 보이도록 하지. 앞으로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날 신뢰하는건지 더는 의심하지 않겠다. 실은 줄곧 불안해 했다. 언젠가는 내게 등을 돌리고 실망하는게 아닌가 하고... 무얼 보고 그렇게 따르는 건지 당최 모르겠으니 말이야. "
과거에는 자주 존경스럽단 말을 들었다. 허나 대규모 파견사건 이후로는 그런 말을 쓰는일은 줄어들었다. 태도가 특별히 바뀌거나 한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따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분명 볼품없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여전히 믿고 따를수 있는 동기는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분명 돌아온 답은...
고개를 잠시 까닥이고는 축 처졌던 등을 쭉 폈다. 언제나 제가 모자란 사람이란 기분이 들었다. 능력적으로 저보다 뛰어난 이들은 차고 넘쳤고 그를 상대할 때마다 자격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다. 그것을 티내지 않은것은 여기까지 올라온 제 신념과 노력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그건 옆에서 줄곧 도와준 일라이저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적어도 직속 부하에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게 마땅하지 않은가. 부하가 아닌 사람으로서도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빈약한 본성은 어딜가지 않아서 늘 한켠에 불안을 품고 말았다.
이런 면을 그에게 보여도 되는 것일지는 여전히 고민됐으나 여기서 더 후회할 바에는 지금 터놓는게 나았다.
" 그런 생각도 하셨군요. 충분히 말씀드렸다 생각했는데.. "
별로 납득되지 않는건 일라이저도 마찬가지 였는지 떨더름한 표정이었다. 제법 어색한 상황이었으나 이미 엎지른 물을 담고 싶지는 않았다. 마주 잡았던 손에 어느새 땀이 찼다. 어느새 또 긴장을 한건지. 별것 아닌 이야기 였는데도 나약함을 표하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 ... 잘 알듯이 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다지 듬직하지도 않고... 네게 의지도 많이 했지. 일라이저 클레멘트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오는데는 조금 더 걸렸을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되지 못했거나. 그만큼 널 인정하고 있어. "
이 또한 숨김없는 본심이었다.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얻었다. 불만없이 그리고 일말의 긴장없이 보낼 수 있는 집이 없었다면 정신과 신체 둘 중 하나는 뭉게져 있었겠지. 그만큼 센터장으로서 지내는 하루는 고된 것이었다.
지치지 않고 이 모습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던건 그만큼 보조해준 사람이 있어서 였다.
" 그러니 가능하면 네가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게 무시 당하는 건 꽤 아팠거든. "
마지막 말은 농조로 끝맺었다. 입꼬리를 올리기는 했으나 영 어색했다. 실제로 제법 따가웠기에 되도록 그런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라는듯 애머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은 여유로운 편이었으나 심적으로 피곤했다. 어제는 잠을 설치기도 했으니.
쭉 가볍게 기지개를 피더니 졸린 낯으로 설렁설렁 거실을 나가 복도를 걸었다. 오늘은 일찍 낮잠을 자야겠어... 안하던 말을 했더니 어깨도 뻐근한 기분이었다. 민망함에 자리를 뜬 것도 없잖아 있었다. 속이야 조금 간지럽지만 역시 솔직히 말하는게 제일 깔끔했다.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는건 역시 어렵겠지만.. 가끔씩은 힘든 일도 터놓도록 할까. 그게 일라이저에게 더 도움이 된다면 생각해 봐야겠어.
신뢰받는 것이 불안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떠나는것이 두려워서 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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