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언듀페어

*시체 묘사 있음, 죽음 묘사 있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숲으로 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만치 기쁜 일이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을 헌신짝이며 허물처럼 벗어내고 던진 후에 그 선언 한마디 명령 한마디로 자유다. 맨몸으로 추위에 얼어 죽어도, 나뭇가지며 억센 풀이 헐벗은 내 몸을 상처 내더라도 좋았다.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겁이 났다. 내가 숲으로 간 이후에 너는 어디에 있을 것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차가운 철근과 거친 콘크리트 곽의 세상에 남겨져 울지는 않을까. 마음은 무거우나 발걸음은 그와 대비되게 가볍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숲의 문턱에서 나는 뒤돌아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다 아는 이야기처럼,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아, 나의 관이며 요람이며 한 걸음 남겨두고 나는 애끓는 마음으로 온 걸음과는 반대로 늪을 헤치며 돌아갔다.

놔두고 온,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숲이 일렁이며 이내 팽창한다. 그렇게 내 모든 꿈을 집어삼키고 터졌다. 나는 꿈에서 깬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이부자리를 바라본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렸고, 자기 전 깜빡 잊고 닫지 않은 창에서 눈이 날려 들어와 창틀에서 녹았다.

바람이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속삭인다. 시린 손으로 뺨을 매만지고, 턱을 잡아 올려 더운 숨 나오는 구멍 안쪽으로 입김까지 모조리 잡아먹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합시다. 풀밭에 서서, 날이 어둑해져 가 푸른빛 그보다 더 진한 쪽빛으로 하늘이 번질 때 - 서로 사랑하는 연인은 손을 맞잡고 속삭인다. 필름 카메라로 찍어둔 듯 그 색감은 뿌옇게 흐려질 듯 번들거리면서도 선명했다. 몇 번이고 돌려본 비디오다. 달칵, 플레이어에서 테이프를 꺼내면 지직거리는 채 멈춰 있던 화면은 꺼멓게 죽는다. 저번으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같은 장면일까?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턱 긁고 말겠지만 손때 묻을 정도로 돌려보았으니 퍽 좋아하는 것일 테다. 연작처럼 찍어둔 이 테이프들은 각각 태어나지 못한 곽 안, 첫울음의 숲, 익살스런 만담, 이어 붙인 종이 더미에 제작 연유를 써놓은 다음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그 다음 작도 숲에서 시작해야지. 안 그런가, 지금까지 맥락을 잡지 못했어도 상관 없다. 이 비디오의 시점을 가진 감독은 쉽게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불친절하게 장면들을 돌리고 보여주고 담아내서 이 비디오를 즐기도록 했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서초희는 테이프를 뺀 상태에서도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재생할 수 있었다. 죽음이 우리를….

..

.

치익, 탁. 요새는 상점마다 신기한 걸 많이 팔아서- 성냥을 태워도 곧잘 향이 났다.

조향 노트: 스파이시 우드, 미모사

향기를 나열해둔 꼬리표를 흘끗 본 검푸른 머리의 청년은 제 짧은 머리를 헤집고 은색의 귀걸이를 무심코 매만진다. 병원의 소독용 알콜 내하고도 퍽 닮았으나 계열은 다른 선득한 향내다. 검게 머리부터 타들어 가는 성냥은 제 몸을 태우며 잠을 깨울 만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게 건네준 자는 일어날 생각을 않아서, 그자가 엎어져 누운 그대로 그 옆에 앉아 성냥이 다 타들어 가고도 한참은 방 안에 맴도는 향을 맡았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는 상대의 몸을 뒤집어, 사인을 확인한다. 서늘한 손가락, 굳어 움직이지 않는 몸. 그 손을 잡아 본다. 그 손은 제 손을 꽉 쥐어 온다. 아니다, 착각이다. 시체가 그럴 리 없지. 머릿속으로 사망을 확정 짓고서야 굳게 잡은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가슴에 달린 명찰을 가져온다. [초희] 성 없는 이름 두 글자. 그것을 제 가슴에 옮겨 달고, 제 명찰은 시체의 손에 쥐여준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치마도 가지런히 두고, 벗겨진 신발도 신기고.

친구여, 좋은 꿈을. 그리 속삭인 자는 허리를 편다. 그리고 타 부스러진 성냥이 피워낸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

오일램프 특유의 기름 타는 내는 그리 역한 건 아니나 오래 맡고 있을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뚜껑을 열어, 아른아른 흔들리는 불빛에 세이지를 던져 넣었다. 화이트 세이지.

조향 노트: 화이트 세이지, 화이트 머스크

학생회장 선배가 죽었대! 그런데 글쎄, 그 장소가 온실 뒤편의 숲 입구라지 뭐야? 그런 소문이 알음알음 들려온다.

죽지 않았어. 나는 가만히 중얼거린다. 백설 공주가 관 안에 들어가서도 살아 있었듯이, 그 녀석도 목에 걸린 사과만 토해 내면 살아날 것이다.

평소와 같은 학원이며, 어수선한 분위기며, 괴담까지. 몇 반 누구가 누구랑 손 잡고 뛰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 이후로 본 적이 없대!

그런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들. 이야기는 세계를 만들고, 그리고 어떻게 되더라. 거기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었다. 소문이 사그라들어도 없던 이야기가 되진 않으니 어딘가엔 존재하겠지. 모두에게 잊힌 이야기로서 말이다. 적어도 하나는 명확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 소문 사이에서 자기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만 있는 저 녀석. 주변에서 보기에 죽은 자와 키는 엇비슷하나 분위기도, 말투도, 옷차림이나 색도 전부 달랐다. 그 녀석의 눈은 누군가 짓밟아 녹아 버린 듯한 흐린 백색의 눈이지, 빛 하나 들지 않은 심해의 것이 아니었다. 또 보면 언제나 길고 찰랑이나 자세히 보면 윤기 없을 정도로 퍼석한 검은 머리카락이지, 자로 잰 듯 깔끔하게 잘려 목덜미를 드러내는 짧은 머리칼이 아니었고. 그 녀석은 학생회장 따위도 아니야. 위장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 귀에 걸린 은색 귀걸이는 핑그르르 돌며 빛을 반사했다. 잠시 그것에 눈길을 빼앗겼다 싶을 때, 상대는 눈앞에 나타나 저를 내려다본다.

“저를 아십니까?”

“…….”

“다시 묻죠, 이 이름을 아시나요?”

한겨울은 고집스레 바닥을 쏘아보던 시선을 올려 상대방이 가리키는 그 가슴께의 명찰을 읽는다. ‘초희’.

“알아, 하지만 ….”

“대답해주진 않으실 요량이군요.”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허리를 끊어 차분히 말하는 태도가 그 녀석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이에 겨울은 입을 다물고 덧붙일 말을 잃었다.

낮임에도 밤처럼 어두운 탓에, 다들 촛대나 램프를 손에 들고 다녔다. 화상과 화재를 주의하세요! 선도 학생들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알콜 램프나 오일 램프, 양초에 불을 나누었다. 하지만 다들 이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건…. “마술 같은 일이죠.” 제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대답해 오는 것도 그 녀석이나 마찬가지여서 불쾌한 감정이 약간 일어난다. 물론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녀석의 곁에선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문 모르고 제가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기억이 뒤섞였다. 모르는 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던 기억, 거울 속에 갇혀 있던 기억, 서초희와 서한서 사이에 낀 기억…. 내 이름은 한겨울이 맞나? 누군가 절 윈터 롯지라고 시끄럽게 불러 대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덩달아 소란스럽다.

그래서 ‘나’는 눈꺼풀을 내리닫고, 고개를 저었다. 상대 또한 침묵을 유지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입을 연 건 좀 더 키가 큰 쪽이었다.

“불려오신 겁니다.”

“……?”

“확실히 상황이 심각하긴 하군요, 이렇게나 조용하다니.”

그 말을 마치고서 ‘초희’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흘러가는 활자나 장면이라도 있다는 듯이.

“설명해 줄 거라면, 알아듣게 말해.”

“…당신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한겨울 씨.”

“…그럼 깨면 되는 거 아냐?”

“예, 그러시면 됩니다. 동시에 하나만 부탁드리고 싶군요.”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어디 말해보라는 식이었다. 그러자 상대는 희미한 웃음기를 띈 채로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 애를 보거든…,

“그만 돌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세계는 어긋나고 깨졌다. 그 표현이 맞는다면 말이다. 코끝에 남은 다 탄 세이지와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등불용 기름, 베갯잇에 묻어나는 화이트 머스크 향만 두고서.

..

.

.

마술이라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일전에 꾼 꿈에서 마술 비슷한 걸 보아서, 꿈속의 내가 쓴 마법을 참고하기로 했다. 나의 금붕어들, 그리고 어항.

거기에서 시작되는 마술…. 꿈속에서는 어설픈 누군가의 첫사랑과 바다의 짠 내음도 함께 났다.

조향 노트: 아쿠아, 라일락, 씨솔트, 서양 배

오플레네는 공들여 향수를 고르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반 친구는 오플레네가 집어 든 향수를 보고 재잘재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약간 귀찮기는 했으나, 도움이 되었기에 가만 듣고 있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요. 오플레네는 드디어 하나를 골랐다. 아쿠아 향료가 들어간 향수. 그러자 친구는 눈을 빛내며 또다시 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아쿠아는 사실 그 이름과 다르게 꽃향기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 거야. 과일 향기도 들어가고, 나무 향기도 들어가지만- 이렇게 꽃향기가 많이 들어가는 향료도 또 없을 걸. 요새는 화학 물질로 조합하면 끝나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오플레네가 대답하며 친구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이는 온데간데없었고, 오플레네는 그자가 반 친구가 아니라, 다른 반이었겠거니- 생각했다. 어쩌면 선배나 후배였을까? 어차피 상관 없었다. 향수를 손목과 목 안쪽, 종아리에 문질러 바르고 익숙하게 온실로 향했다. 그러면 제 조수가 반겨줄 것이다. 아니아니, 회장 선배가! 아니다, 회장 선배는 죽었다고… 음, 아쉬운 일이었다. 회장 선배가 만들어 주는 음료수 좋았는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플레네는 실망한다. 온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또 어떤가. 누군가 올 때까지 온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반 친구와 놀러 가면 되겠지. 여기 없는 걸 보니 바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누구더라? 회장 선배는 아니었다. 죽었으니까. 그래, 나를 마술사로 만들어준 선배.

잠시 상념에 빠져있을 때, 온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기다렸나요?”

“아뇨! 그다지요.”

생긋 웃으며 돌아본 상대의 얼굴은 흐렸다. 오플레네는 제 눈을 비벼 본다. 하지만 여전히 흐렸다. 원래 저런 인상이었나? 그간은 학원의 축제로 바쁘기도 했고, 만날 일이 그렇게까지는 있지 않았다. 방과 후에 하기로 한 마술 연습을 일주일 정도 못 했긴 하지만… 그 사이에 얼굴을 까먹기엔 저는 금붕어가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오플레네를 아랑곳 않고, 상대는 차분히 입을 열어 묻는다.

“후배님, 마술사는 마술을 믿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 앞에서 마술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나요?”

“네, 그건 그렇지만…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선배님은 오늘따라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오플레네, 당신은 마술을 믿는군요.”

그럼요, 제가 마술을 스스로 써 보았으니까요! 그 말을 하려던 오플레네는 잠시 입을 다문다. 스스로조차 왜 말을 하다 말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마술에 문제가 생겼나? 하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마술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럼 모두가 마술을 믿는 세계라면요?”

그 순간 우르릉 쾅, 하는 벼락 없는 천둥이 하늘을 갈라놓은 듯했다. 온실에 놓인 정원용 탁상의 끄트머리가 약간 흔들린 것도 같았고.

오플레네는 어디서 비가 오려나 하고, 생각한 후에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전 모두의 앞에서 마술을 선보일 수 있겠죠. …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흐린 미소를 지은 상대방은 허리를 숙여 오플레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어딘지 조금 낯선 감촉이었다. 풍겨오는 향기도 언뜻 달랐다. 하지만 눈을 조금 찌푸리고 보려고 해도- 상대의 얼굴이며 분위기는 영 누가 지워 버린 것처럼 희미했다.

“기억해요, 오플레네. 제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입니다.”

모두가 마술을 믿는 세계에서의 마술사는, 마술을 믿지 않아야 마술사일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어딘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코를 찌를 정도의 아득한 꽃향기가 터졌다. 오플레네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 사이로 짧게 무언가를 떠올린다. 제가 지금 잠겨 들어가는 의식의 바닥은, 마치 늪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것을.

의식이 아주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는 누군가 테이프를 자꾸만 되감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따라오는 희미한 말소리는 돌아오고 또 돌아왔다. 끝없이.

..

..

.

조향 노트: 헤이즐넛, 바닐라, 티트리에 편백 약간.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뒤섞여 어떤 세계를 아주 완벽하게 모방해 내면서도 누군가가 원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때로는 꿈을 꾸지만 …결론은 같다.

이야기는 언젠가 끝나고, 적어도 입술을 축일 정도의 시간 동안 끊기고, 깨지 못할 꿈을 위한 영원한 잠은 죽어서 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파국 언듀페어!

침잠하는 녹색 캠페인 2부, <비단잉어 살인사건>을 마치고 3부 <숲이 번진다>를 위한 사잇글

그냥 추천곡:다 카포-영원한 사랑(자우림 11집)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