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호장] 편애
오늘의 전호장은 역대급 하이텐션임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환과 함께 가을체전 대표로 선발되어 훈련을 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해남에서 1학년에 주전을 꿰찬 수퍼루키이긴 했지만 설마 도내에서도 10명만 뽑히는 도내 대표로까지 선발될 줄은 몰랐다. 감독님께 선발 소식을 듣자마자 농구장에서 방방 뛰어다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린 놀러 가는 게 아니니 진정하라며 정환이 핀잔을 줬지만 그러면서도 정환이 내심 자기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호장도 잘 알고 있었다. 정환의 옆에서 함께 훈련장으로 향하며 호장은 다짐했다. 정말 열심히 훈련해야지. 그래서 정환이형에게 더욱더 인정받는 후배가 되어야지.
그러나 이런 다짐은 카나가와 대표 선수들이 모두 모여 훈련을 시작하자 조금씩 흔들리고야 말았다.
“서태웅, 방금 움직임은 엄청난데?”
“강백호, 지금 시도는 좋았어!”
“도저히 1학년이라곤 믿기지가 않는 실력이야, 서태웅.”
“강백호는 볼 때마다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군.”
도내의 다른 학교 루키들에게 쏟아지는 정환의 칭찬에 호장은 배알이 꼴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환이형이 다른 선수들을 평가하고 칭찬하는 건 습관적인 행동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선수들을 칭찬하는 만큼 나도 좀 칭찬해주면 안 되나?!
불만이 턱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뱉지는 못 하고 호장은 애꿎은 강백호와 서태웅에게 괜히 꽥꽥 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 결국 정환이형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구석으로 끌려오고 말았다.
“전호장, 여기까지 와서 이러기야?”
“...죄송해요.”
“그래, 다시 집중해서 잘 해보자.”
정환이 호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호장은 그런 정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기다리는듯한 눈빛에 정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뭐 잊은 거 없어요?”
“응?”
“저 오늘 훈련 열심히 했는데… 아까 강백호 제치고 덩크도 성공했고…”
호장이 우물쭈물 말하자 정환이 하하 웃더니 호장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잘했어, 전호장.
그 말 한마디에 호장은 언제 기분이 가라앉았냐는 듯 펄쩍 뛰어서 정환의 등에 매달렸다. 그래, 다른 선수들 칭찬 좀 하면 어때. 어차피 정환이 형이 제일 예뻐하는 건 나일 텐데!
…그런데 내 눈앞에 보이는 저건 대체 뭐지?
“애늙은이, 봤지? 이 천재의 멋진 리바운드!”
“그래, 이번 건 정말 대단했어. 강백호.”
정환에게 칭찬을 받은 강백호가 정환 쪽으로 머리를 숙이자 정환이 손을 들어 강백호의 짧게 깎은 빨간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었…다?
정환이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해남에서도 정환이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자신 밖에 없었다. 근데 오늘 처음 같이 훈련해 본 강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고? 저렇게 기특하다는 눈빛을 하면서? 호장은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남은 훈련은 제대로 집중하지 못 하고 완전히 망쳐버린 채, 호장은 벤치에 앉아 입술을 뜯으며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한 일이었다. 정환이형에게 확실히 말해야 했다. 훈련이 끝나고 하나둘씩 숙소로 돌아가는데 호장이 정환의 옷자락을 잡았다.
“...정환이 형, 저 형한테 할 말 있어요.”
당황한 표정의 정환이 멈춰서자 호장이 그를 끌고 훈련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에 말했다.
“형이 다른 선수들 칭찬하는 것까진 이해해요. 참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근데… 다른 1학년한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건 하지 말아주세요.”
“응? 내가 그랬다고?”
정환은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호장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까 강백호가 리바운드 성공했을 때 강백호 머리 쓰다듬으셨잖아요! 저 다 봤어요!”
“그랬었나?”
“아, 형! 아무튼 앞으로 절대 다른 선수 머리 쓰다듬어주는 건 안 돼요! 알았죠?”
정환이 푸스스 웃더니 알았다고 하며 호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달래주는데도 호장은 여전히 입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정환이 난감해하는데 호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저 좀 편애해주면 안 돼요?”
붉어진 얼굴로 저렇게 말한 뒤, 창피했는지 호장이 뒤돌아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빠르게 사라지는 호장의 뒷모습을 보며 정환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우리 팀의 1학년 루키를 다루는 건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에도 아침 일찍 연습이 시작되었다. 호장은 어젯밤에 그러고 도망친 게 민망해서인지 정환의 시선을 자꾸 피하고 도망 다녔다. 내가 미쳤지, 형한테 그런 철없는 소리나 하고. 나를 얼마나 어린애로 봤겠어? 진짜 창피하다. 시간 되돌리고 싶어.
호장은 속으로 오만 생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잡생각을 날려버리기 위해 경기에 집중하자며 양손으로 뺨을 살짝 때렸다. 잠시 후 연습경기가 시작되었다. 연습경기는 5명씩 두팀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호장은 정환과 다른 팀이 되었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경기를 하고 있는데 강백호가 수비수를 제치고 덩크를 성공시켰다. 이번 덩크는 호장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폼이었다.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바라보는데 신난 강백호가 방방 뛰더니 같은 팀인 정환에게 달려갔다.
“애늙은이! 방금 내 덩크 봤어?!”
“그래! 잘했다, 강백호.”
칭찬받아 기분이 좋은 듯 헤헤 웃던 백호가 자연스럽게 정환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습관적으로 손을 올리던 정환이 멈칫하며 다시 손을 내리고 말했다.
“아, 머리는 안 돼.”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이 전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하고 있는데, 정환이 씨익 웃으며 호장을 보고 말했다.
“다른 학교 선수를 귀여워하면 우리팀 막내가 질투하거든.”
“네에?! 혀엉-!! 그게 질투는 아니고… 그러니까!!”
모두의 시선이 호장에게 쏠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호장이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정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무튼 난 우리팀 루키만 편애하니까 그런 줄 알아.”
그렇지? 정환이 웃으며 호장의 머리를 한번 헝클고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데 호장만 멍하니 정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야, 전호장, 얼른 오지 못해! 같은 팀 주장을 맡은 김수겸이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뛰어갔다.
처음으로 호장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자각한 순간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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