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전낭]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5,469.

저온화상 3부 가족몰살 부분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하후낭의 감정선.


조조에게서 아름다운 옷을 받았다. 비단의 촉감을 보니 겉보기뿐만 아니라 품질도 좋은 옷이렷다. 하후낭은 푸른색이 감도는 비단옷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가 갑자기 상을 내린 이유는 명확했다. 제 어머니의 가문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충신에 대한 보상, 여 가문을 치는 건 조조로서도 꽤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문을 치는 것 자체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오른팔처럼 아끼는 하후돈 처의 가문이었고 여 가문의 비밀도 세상에 쉬쉬했으니 몰살하기에 명확한 명분은 없었다. 물론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지만, 게다가 여 가문은 실제로 이단 종교를 믿는 가문이었고, 가뜩이나 요 근래 조조에 대한 안 좋은 소문으로 쑥덕이는데 괜히 가문 하나 잡겠다고 그 소문에 불을 지피는 건 이익보다 큰 손해였을 것이다. 허나 하후낭은 제 어미를 잡아먹은 딸이라는 호칭까지 얻으며 조조가 가려워했던 부분을 긁어주었고 조조는 세간의 눈치를 보다가 한달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고마움을 표했다. 하후 가문의 여식이라면 해야 할 일을 한 거라고 하후낭은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어린 아이들의 눈동자가 밤마다 떠오른다. 그렇지만 화근을 남겨둘 수는 없잖아. 하후낭은 푸른색 옷을 옷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고작 그 이유가 무고한 어린아이의 목숨을 빼앗을 명분이 되나?

충에 따른 보상을 받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하후낭은 옷장에서 등을 돌린 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요새 자신은 조금 이상하다. 간간이 자신이 걷는 길에 의심을 품게 된다. 한치의 의심없이 걸어온 길이 정말로 정답이었을까? 창틀에 기대선 채 하후낭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순욱처럼 한 황실에 대한 충성이 있는 건 아니다. 순욱과 다르게 하후낭은 단 한 번도 한 황실을 자신이 따라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며 가문의 입장은 둘째치고 한 황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가엾지만 한심하게 여기는 쪽이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조조가 없었다면 한 황실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힘이 있을 때는 환관들의 놀음에 빠져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싶어하며 조조를 견제한다. 그 견제의 끝이 전부 비참할 거라는 것도 모른 채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제 왕좌를 찾아올 생각만 한다. 하후낭은 헌제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했다면 힘이 있는 자에게 왕좌를 넘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가 조조가 아니더라도. ‘그 자가 조조가 아니더라도’… 하후낭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조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을 바꿀 자격이 있는 사람이 조조냐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자꾸 그의 마음을 흔든다.

자신은 무엇을 보고 그를 따랐나.

하후낭에겐 오직 가문뿐이었다. 조조를 따르면 난세가 진정될 거라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아니, 순수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어차피 자신은 일찍 죽을 테니 가문에게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그저 그 마음 하나로, 조조 님이 난세를 타파할 영웅일 거라고 게으르게 생각해버린 것뿐이다. 창가에 기대있던 그의 눈동자에 익숙한 인영이 비쳤다. 이 만성, 조조 님만을 보고 지금까지 달려온 내 부군, 그는 자기 스스로 이유를 붙이고 지금까지 달려온 거겠지. 그는 그를 사랑하면서 시기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전의 시선이 문득 창가를 향했다. 하후낭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그에게 하후낭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전은 금방 집에 들어왔다. 그는 오자마자 몸은 괜찮아졌냐고 물으며 걱정을 표했다. 하후낭은 어제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대답하며 그를 바둑판으로 이끌었다. 하후낭은 단 한 번도 바둑으로 이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바둑판 앞까지 이끌려온 이전은 고개를 기울였다가도 금방 수긍하며 흰색 돌을 집었다. 하후낭이 먼저 검은색 돌을 판 위에 올렸다. 가벼운 이야기들과 함께 금새 어지럽혀진 검은색 돌과 하얀색 돌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았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만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하후낭은 조조를 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 제도를 구축했고 빈곤기에는 곳간을 풀어 백성들의 근심을 달랬다. 그리고 그는 실력만 있다면 출신도 신분도 따지지 않고 기회를 주어 백성들 사이에 희망을 퍼뜨려주었다. 하지만 하후낭은 조조를 백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핑계로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했고 승리를 위해 마을 전체를 물에 익사시켰다. 또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경죄의 무게를 부풀려 함부로 타인의 목숨을 빼았았다. 애매한 색깔인 회색이 싫다. 하후낭은 흰 돌들 사이에 검은색 돌을 놓았다.

“이전은 조조 님을 왜 따라?”

그가 이야기하길 기다리던 이전의 손이 멈췄다. 몇 초의 정적 후 그는 격자로 흰돌의 집을 지으며 대답했다. 숙부님이 조조 님을 따르고 있기도 했고, 자신도 조조 님을 봤을 때부터 따라야 한다는 감이 왔기 때문이란다. 이 사람이라면 난세를 끝낼 수 있을 거 같다는 감이 왔다고 그는 덧붙였다. ‘감’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한 미소를 짓는 하후낭에게 이전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감만으로 따른 건 아냐. 그 사람이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닮아있었거든. 아마 난 조조 님이 진다는 감이 왔어도 조조 님을 따랐을 거야. 아니,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이전이 그리는 세상은 뭔데?”

“백성은 백성의 도리에만 집중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에만 집중하고 군주는 군주의 도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갓 지은 밥을 먹으며 다같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라, 나는.”

조조 님이 그런 세상을 보고 있다고 지금도 확신해? 하후낭은 그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 예전에는 조조 님도 그런 세상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후낭도 갈등없이 조조만을 따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큰 권력을 쥐어버린 지금의 조조는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권력이 변하는 것처럼 사람도 변한다. 하후낭은 여전히 조앙의 애정을 두고 투닥투닥 다투고는 했던 날의 조비를 그리워한다. 말이 없어진 하후낭에게 이전은 괜찮냐고 물었다. 쉽사리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에게 하후낭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조조 님의 뜻을 저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더 변하시지 않는 한, 난 내 가문이 가는 길을 끝까지 따르고 싶어.”

“…낭.”

“…그저 조금 외로워진 것뿐이야. 다들 변하니까.”

어쩌면 나도 변했을지도 모르지. 어린 내가 지금의 조조 님을 보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전혀 예상이 가지는 않지만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으리라 그는 확신한다. 바둑의 수는 끝났다. 오늘도 그에게 완벽하게 패배해버린 하후낭은 웃으며 이전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역시 만성이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해.” 하후낭은 그의 얼굴에서 17살 소년의 풋풋한 얼굴을 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부담이 될까봐 하후낭은 그에게 “변해도 어쩔 수 없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창백한 것만 닮아있을 뿐, 자신의 얼굴에서는 15살 소녀의 순수한 얼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피곤해졌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세상이 자신을 혼자 두고 빙그르르 도는 것처럼 시야가 어지러워졌지만 그는 그를 위해서 티내지 않았다.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얼굴도, 마음도, 그리고 병세도. 의원에게 진료를 받은 하후낭은 밖으로 나왔다. 예전보다 더 자주 현기증을 느끼는 몸에 하후낭은 순간 세상을 원망할 뻔했다. 건강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자기보다 뭐가 그리 잘났기에 건강할 수 있는지 억울해한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걸 인지했을 때 그는 스스로가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고충이 있을 거고, 나는 나만의 고충이 있는 거고, 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웃고 있는 아이에게 하후낭은 달콤한 떡 하나를 건넸다. 비단옷을 입은 아이는 활짝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느 가문 자제인지 묻자 영광이라는 듯 아이는 자신의 가문을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낭.”

“아, 여기야.”

기다렸다는 듯이 제게 오는 이전에게 손을 흔들며 하후낭은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의원한테서 별 다른 말은 없었고?” “응. 항상 똑같아.” 여전히 부드러운 그의 손이 하후낭의 작은 손을 잡는다. 시선만으로도 느껴지는 애정에 아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자기도 당신들처럼 잉꼬부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잉꼬부부라는 말에 하후낭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전이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잉꼬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변하지 않고 계속 서로에게 진심이면 돼.” 아이의 머리에서 야윈 손을 내렸을 때 아이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혼까지 마쳤는지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잠을 못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뭐래?”

“음, 아마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 같아.”

“왜?”

하후낭은 순간 그에게 백색 거짓말을 해줘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에게 ‘건강이 괜찮아져서’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분명 기쁘게 웃겠지.

“마음이 심란해서 잠을 못 자는 거라고 하더라고.”

“아….”

“에이, 그런 표정 금지.”

하지만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 그 거짓말은 어차피 언젠가 들통날 거짓말이기도 하고. 하후낭의 손가락에 의해 이전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 같다고 했잖아. 난 이제 괜찮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밤마다 들리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울음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걱정은 되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이전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는 같이 밖에 나온 김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고 물었고 하후낭은 그의 예상대로 설탕떡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딱히 설탕떡을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던데, 오히려 그는 따듯한 차를 마시거나 뜨끈한 국물의 면을 좋아한다는 걸 이전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그는 단골집으로 향했다. 하후낭과 이전을 발견하자마자 단골집 주인은 비닐을 팍팍 펴며 오늘은 몇 개를 드리면 되냐고 물었다.

“아이고, 장군님과 부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그려.”

“똑같아요?”

“그럼요. 부인은 언제나 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오늘이 부인이 갓 18살에 처음 이 가게에 들어왔던 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부인은 전혀 변하지 않으셨어요.”

하후낭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요? 고마워요. 오늘은 평소보다 더 사가야겠다.” 눈웃음과 함께 가게 주인의 입가에도 미소를 피게 하는 그가 이전에게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사랑스러웠다. 설탕떡을 가득 비닐에 담은 채 이전은 “갑자기 국수가 먹고 싶네.”라고 운을 띄었다. 하후낭은 그의 말에 두 눈을 깜박이더니 웃으며 자기도 국수는 좋다고 답했다. 서로의 손가락을 엮은 채 두 사람은 서로가 18살, 20살 때도 걸었던 길을 같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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