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 해양

리리 작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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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시티는 정말 살기 좋은가?

: 미지의 세계, 해양

글을 어느 정도 써야 삼천 자가 되는 걸까? 살면서 제 손으로 긴 글을 쓸 일이 몇 없었던 페르디난드는 적다 보면 삼천 자가 되겠거니 하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국대학교 해양학과 20****** 페르디난드… 해양의 이해 기말 보고서. 제목은 뭐로 하지? 감수성이 풍부한 최 교수님의 수업이니 만큼 근사한 제목이 필요한데. 평소에 문학을 좀 읽어둘걸 후회하며 고심 끝에 고른 제목은 ‘비키니 시티는 정말 살기 좋은가?: 미지의 세계, 해양’이었다. 그리고서는 서론을 몇 줄 적어 내렸다. 인간은 저 먼 우주만큼이나, 우리 옆에 있는 거대한 웅덩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지 못한다. 바다란 예로부터 우리들의 아주 친숙한 친구이자, 재앙을 내리는 신화이자, 음, 블랙홀이었다. 블랙홀은 좀 바다한테 너무한가? 하지만 6글자가 더 있고 덜 있는 것 중엔 더 있는 게 아무래도 좋다. 벌써 3줄 째 쓰고 있다니, 이대로라면 할 만 한데?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머지않아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흰 바탕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차라리 머리에 발광체 가닥이 주렁주렁 있는 심해어로 살고 싶다. 과제를 적지 않아도 괜찮은……. 페르디난드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몇 분을 더 날려 먹은 후, 비장한 얼굴을 하고 익숙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정말이지 내가 읽어본 보고서 중에서 답이 없기로는 일등이군… 이걸 교수님께 내겠다고 결심한 그 용기만큼은 높게 산다.”

올해 말이면 석사 학위를 갖게 될 헨리는 성의 없이 페르디난드의 3시간__몸을 배배 꼬고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을 포함하여__이 들어간 보고서를 대강 훑어본 후 정말이지 이골이 난다는 투로 거침없는 힐난을 퍼부었다. 페르디난드는 불쌍한 얼굴을 하고 팔자 눈썹을 했다가, 두 손을 모으고 헨리를 쳐다봤다가, 잘 되지 않자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턱을 괴고 고쳐 앉았다.

“이게 뭐냐? 요즘 학부생들 수준이 이렇다니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군, 암담해. 제목은 또 뭐야 이게. 카툰 네트워크가 널 고소하지 않을까 싶다.”

“에이, 비유가 참신하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알고… 베인 형님은 좋다고 했는데요?”

“그럼 그 놈한테 첨삭 해달라고 하지 뭘 나까지 찾아?”

“무슨 소리세요, 형님. 제 생명줄이라고는 형님 뿐입니다. 제발요.”

사실 베인이나 페르디난드나 과제 마감 기한을 앞두고는 거기서 거기였다. 보고서 앞 장에 적는 학년의 숫자만 다를 뿐이다. 꼭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헨리를 찾는 것도 비슷했다. 최종 제출 기한을 일 이분 앞두고 제출한 후, 고생한 과정은 잊어버리고 다음 과제물 또한 그렇게 방치하는 것까지 둘은 형제래도 믿을 만큼 비슷한 패턴을 가졌던 것이다. 페르디난드는 헨리가 저렇게 이골이 난 것도 이해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지만 나까지만… 이번 과제까지만 도와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이번 학기만 벌써 네 번째다.

“뭐야, 이거 천 사백자 조금 넘어서 스크롤이 내려가지도 않네.”

“알아요, 안다구요. 아파요!”

도대체 이게 1,496자라는건 어떻게 안 걸까? 헨리 형님은 정말이지 귀신같다. 저러니 해양학과의 과사무실 전화는 도통 울리질 않는 거겠지. 해양학과 조교는 정말 개무섭다는 에**타임의 호소문들을 볼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게 양가감정이라는 걸까?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이 아닌가? 또 잡념에 사로잡혀 천장 무늬를 세다가 따가운 시선에 괜히 머리만 벅벅 긁었다. 이 헤어 스타일로 말하자면, 아침 일찍 일어나 헤어드라이기와 롤빗으로 삼십 분을 열심히 드라이한 머린데…….

헨리는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포기한 건지, 피곤한 얼굴로 페르디난드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를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드는 두어번 정도 자신이 찾은 참고 자료나 인터넷 기사를 들이밀고, 세 번째부터는 읽어보는 것조차 거절당한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을 하기로 했다. 헨리에게 주문을 받아 그 대신 커피와 샌드위치를 결제한 후 픽업대 앞에서 서성이자 머리를 질끈 묶은 종업원이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손님, 자리에 앉아 계시면 진동벨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냥 여기 서서 기다리고 싶어서요.”

“그러시면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천천히 주셔도 되는데…. 페르디난드의 말은 샷 추출 기계의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기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종업원의 귀 끝이 붉었다. 가시방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지. 오늘 이 카페에서 과제가 끝난다면 퇴근을 같이 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트레이에 담겨 나온 라떼와 샌드위치를 받으며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돌아가는 걸음이 한결 상쾌해졌다. 심해어로 살고 싶다는 바람은 완전히 취소입니다, 하느님!

헨리는 그 사이에 페르디난드가 쓰고 있던 보고서 대신 새로운 창을 켠 것 같았다. 그래도 세 시간이 들어간 천 사백자 글인데… 수정해서 쓰이지도 않는다니 마음이 쓰렸다. 헨리는 무표정으로 뭔가를 마구 써내려 가다가, 심각한 얼굴로 창을 몇 개 왔다 갔다 했다가 하지 페르디난드나 식어가는 라떼에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펠은 지루하지만 그렇다고 딴짓을 하기에는 눈치 보이는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길 바라며 시계를 봤다가 헨리의 옆얼굴을 봤다가 나중에는 팔에 고개를 묻고 잠깐만 눈을 감고 있는 다는 것이 그만 꿀 같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야 임마, 일어나.”

헉 하고 고개를 든 페르디난드가 눈을 벅벅 비비며 물었다.

“저 얼마나 잤어요?!”

“얼마 안 잤다. 한 두 시간 잤나?”

“죄송해요… 형님은 제 과제 도와주시는데.”

“말은 바로 해라. 대신 해주는 거지.”

마지막 말은 대강 흘려들었다. 아직 양심이 세모난 모양이라 그런가 깊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카페에 왔건만 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헨리는 페르디난드가 자는 사이에 라떼도 비우고, 샌드위치도 먹고, 과제도 대신 해주고, 심지어는 페르디난드가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겉옷을 덮어주기까지 한 것 같았다. ‘삼천 자 맞지?’ 하는 헨리의 물음에 겉옷에 팔 한 짝을 넣다 말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나가서 밥이나 먹자.”

“앗, 그럴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사겠습니다!”

헨리가 보여준 과제물을 열어보지도 않고 제출한 페르디난드는 신이 나서 노트북을 챙긴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종업원 아가씨와의 데이트는 나중을 기약해야지. 이번 학기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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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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