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y Days

the day before christmas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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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가운데 비상등이 깜빡이는 소리만이 초침 소리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주정차 금지 구역에 차를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선일은 조금 초조했다.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적어도 건물 앞에는 나와서 서 있을 줄 알았더니 천락은 5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핸드폰을 슬쩍 뒤집어보면 시각은 오후 5시 37분. 분명 5시 반까지는 도로변에 나와서 서 있기로 했었다. 더 서 있기는 좀 그런데…….

선일이 차를 대 놓은 곳은 모 호텔이 보이는 도보 근처였다. 옆에는 가로등이 서 있고, 차를 대지 말라는 표지와 함께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늦어봐야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기 때문에 잠깐이면 괜찮겠지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전화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마침 몇몇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게 보였다. 손을 맞잡은 커플, 나란히 걷는 커플, 그리고 한 손에 케이크 박스를 든 채 혼자 성큼성큼 걷는 덩치 큰 남자 하나. 차를 발견한 견천락이 걸음을 재촉했다. 코끝과 뺨이 빨갛게 터 있었다. 선일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휴대폰을 도로 덮었다.

견천락이 손잡이를 당기자 덜컥 소리가 날 뿐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웃었다.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잠금을 풀어주자 문이 덜컥 열렸다.

“어유, 춥다. 어우 추워.”

천락이 조수석에 몸을 밀어 넣자 찬 기운이 함께 물씬 밀려 들어왔다. 선일은 시동을 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 참, 케이크 파는 데가 여기밖에 없나.”

하기야 크리스마스니까. 늦었다고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다. 천락이 끌어안고 있는 박스를 흘끗 들여다보면 그 안에 사진으로만 보았던 케이크의 모양새가 얼핏 보였다. 크기가 좀 큰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천락은 케이크가 그저 그런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무 빵집에서나 사다 줘도 맛있게 먹었겠지만.

주는 사람 입장에선 먹고 싶다는데 아무 데서나 사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일도 호텔 케이크를 예약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얘 때문에 별짓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했다. 뭐, 맛은 있겠지.

“안전벨트.”

느리게 액셀을 밟으며 한마디 던지자 천락이 옆자리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익숙하게 핸들을 돌리던 선일은 문득 미소 지었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조각 케이크를 샀다. 정확히는 이브에. 같이 살기 시작한 뒤로는 처음으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다. 둘 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특별히 계획을 세우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에, 만약 뭔가 하게 된다고 해도 당일에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바쁘게 걷던 중 눈에 띄었던 작은 카페의 조각 케이크 하나가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엔 퇴근하고서 충동적으로 그 카페에 다시 들렀다. 하지만 케이크는 딱 한 조각이 남아있었고 마음에 담아뒀던 것도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그걸 포장해 올 수밖에 없었다.

견천락은 그날도 현관까지 나와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선일은 갑자기 구두를 먼저 벗어야 할지 케이크를 먼저 내밀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조금 무뚝뚝하게 케이크 상자를 건네며 툭 내뱉었다. ‘남아있길래 샀어…’ 무슨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락이 자그마한 종이상자를 덥석 받아 들더니 케이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연신 감탄하며 그 안을 들여다봤다. 어이가 없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가 돌연 남은 손으로 선일의 손을 잡아챘다. 선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빨갛게 언 손에 그의 살이 닿으니 델 것처럼 뜨거웠다. 견천락이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이거 들고 오느라 손이 이렇게 꽁꽁 언 거야?’

말문이 막혀 입을 벙긋거리던 선일은 결국 그의 손에 끌려가듯 집 안으로 들어왔다. 구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야 했다. 집 안은 더웠고, 뒷덜미가 금세 화끈거렸다.

이선일은 그 케이크를 얼마 먹지 않았다. 천락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뺏어 먹기가 뭐했다. 솔직해지자면… 좋아하니까 좀 더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둘러댔다. 너 먹어라. 아니… 나 뭘 먹고 왔어. 그러자 천락이 뭘? 하고 되물었다. 선일은 할 말이 없어서 바보처럼 대답했다. 어, 뭐.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내기 전에 한 점 떼어낸 케이크가 입술에 닿았다. 천락이 불시에 포크를 들이댄 것이다.

케이크는 쇼케이스 안에 끝까지 남아있던 것치고 제법 괜찮았다. 빵은 조금 눅눅했지만 과일은 신선하고 달았다. 원한다면 그 한 조각을 밤새도록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

 

집에 오는 내내 케이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던 천락은 집에 들어오자 갑자기 돌변했다. 문을 열자마자 천락이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화장실까지도 안 가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지 물소리가 요란했다. 애도 아니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그냥 발로 운동화를 대충 정돈해 놓은 선일은 천천히 그의 뒤를 쫓았다.

“지금 먹으려고?”

“아니, 그냥 까보기만 하려고.”

그리고 잠깐 바스락거리는 소리 끝에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들어서자 선일도 그 케이크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에서 영 볼품없어 보였던 건 아무래도 조명 때문이었나 보다. 노란 부엌 조명 아래 놓으니 케이크는 확실히 근사해 보였다.

“좋냐?”

천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까보니까 멋있네.”

“저녁 먹고 먹을 거지?”

“지금 맛만 보면 안 되나.”

“그래라 그럼…….”

자기가 까보기만 한다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고갯짓하자 천락이 대뜸 가장 꼭대기에 있던 장식을 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옆에 있는 체리를 하나 집었다. 자연스럽게 들이미는 손을 한 번 흘겨본 선일은 그에게 다가갔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에 잡힌 체리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선일은 괜히 목을 가다듬고 그걸 입으로 받아먹었다. 진한 체리 향과 겉에 묻어있던 크림의 맛이 뒤섞여 났다. 우물거리다 입을 가리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좀… 잘라서 먹지.”

“어차피 둘이 먹는데 뭐 어때. 자르는 건 좀 있다 같이 자르는 게 좋잖아.”

천락이 씩 웃자 눈이 가늘어졌다. 선일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이 상황이 조금 멋쩍었다.

“맛있지.”

“…어, 맛있네.”

엄지로 입가를 한 번 훔치며 못 이기듯 웅얼거리자 천락이 웃었다. 그가 선일의 입이 닿았던 손끝을 아무렇지 않게 제 입으로 가져갔다. 이선일은 결국 못 본 체 옷을 갈아입는다며 허겁지겁 침실로 향했다. 쟤는 저러고 싶을까. 그를 괜히 비난해서 이 낯간지러운 느낌을 흩어버리고 싶었다.

 

내일 저녁 괜찮은 식당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챙겼다. 말이 간단이지 이선일이 나가 있는 사이 견천락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차를 몰고 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근사한 냄새가 풍기자 금세 배가 고파졌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와인과 함께 케이크를 한 조각씩 나눠 먹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식탁 위로 고꾸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일은 그날의 와인을 ‘각자 한 잔’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자 견천락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눈을 끔뻑이다 ‘그래,’ 라고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얼굴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이선일은 단호하게 말한 게 무색하도록 한참을 웃었다. 케이크는… 맛있긴 했지만 가격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천락이 똑같은 말을 입 밖으로 냈기 때문에 선일은 동의했다. 천락이 포크를 까딱거렸다. “내년엔 다른 데에서 사자.” 선일은 벌써 내년의 케이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아무것도 없어도 그만 있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내년 이맘때쯤엔 분명 훨씬 오래 고민하겠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지… 그런 의미 없는 것들로.

“내일은 뭐 할까?”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천락이 하품 끝에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했겠다, 거기다 거실 불도 꺼놓았기 때문에 선일도 조금 노곤했다. 스탠드 조명이 벽에 부딪혀 거실 한구석을 은은히 밝히고, TV에서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소리를 줄여놓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이선일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눈을 깜빡이다 멍하니 대답했다.

“글쎄. 영화나 볼까…….”

“영화? 지금 나오는 것도 잘 안 보잖아.”

“나 지금 보고 있잖아. 안 보는 건 너겠지.”

천락은 짧게 코웃음을 쳤지만 할 말이 없었는지 그 뒤로는 조용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역시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 팔을 등받이에 걸친 채 머리를 괴고 있던 천락이 눈썹을 들썩였다. 선일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뭐 하고 싶은데, 그럼.”

천락은 눈을 굴리다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으로 제 뺨을 긁적였다.

“늦잠 잘까?”

“그래도 되고.”

“어차피 저녁 먹으러 나갈 거니까 점심때까진 좀 늦장 부려도 되지.”

“그러고 싶으면…….”

선일은 입을 다물었다. 은근슬쩍 팔을 선일의 어깨 뒤로 걸치던 천락이 주춤하고 멈췄다. 그리고 잠깐 눈치를 보더니 선일이 아무 말 않자 다시 슬금슬금 달라붙기 시작했다.

“뭐하냐?”

“내가 뭘?”

“눈치는 왜 봐?”

“써니가 방금 째려봤잖아.”

“내가 언제 째려봤어. 아, 왜 이래, 진짜…….”

“뭐가아.”

말꼬리를 잔뜩 늘리는 그 한마디와 함께 차츰 기울던 몸이 마침내 넘어갔다. 퍽 소리가 났다. 견천락은 숨이 턱 막히게 무거웠다. 고개를 살짝 들어 제 위에 엎어진 천락을 내려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차례 꼬집자 천락이 콧등을 구기며 웃었다.

“영화 진짜로 보고 있었던 거 아니지.”

“보고 있었는데. 저 여자 지금 전 남자 친구한테 문자 받아서 만나러 가는 거야.”

“오우… 보고 있었네. 로맨틱한 내용이었네.”

짓궂은 질문이 무색하게 선일이 곧바로 받아치자 천락이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견천락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방금 한 말은 반쯤 거짓말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영화라 망정이지 이선일도 실은 썩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TV를 슬쩍 곁눈질하면 그새 영화는 훌쩍 흘러가 앞뒤 내용을 알 수 없는 장면에 다다라 있었다. 선일은 짐짓 한숨 쉬는 척 작게 숨을 돌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이 또한 크리스마스에 일어나 마땅한 일이었다. 견천락이 한참 전에 영화에 흥미를 잃었단 걸 일부러 모르는 척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이런 날에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가끔 왜 이렇게 생소한 기분이 드는지 싶어서. 선일은 불이 꺼져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한 말이 낯간지러워서 귓바퀴가 뜨거웠다. 분명 얼굴이 좀 달아올랐을 거다. 견천락이 모를 린 없겠지만…….

 

*

 

너랑 있는 게 좋아. 당황스러울 때도 많지만 싫지는 않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했다.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이선일은 왁자지껄한 노래나 폭죽 같은 게 늘 낯부끄럽고 어색했지만, 그게 어떤 것도 기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끄는 순간이 좋아서 그 모든 일들도 좋아하게 됐다.

 

어둠 속에서 이선일과 견천락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누워 있었다. 어느덧 자정이 지나 진짜로 크리스마스였고, 영화가 끝난지도 한참이라 이제는 정말 지쳐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 정적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던 찰나, 견천락이 풀어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케이크 말이야, 엄청 먹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응.”

“당신이 지난번에 말도 없이 사 온 게 좋아서. 또 먹고 싶었어.”

천락은 아직도 가끔씩 영어를 썼다. 그 말을 듣던 이선일은 대답 대신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웃었다. 이불 속에서 옆을 더듬자 그가 한 손을 내려 마주 잡았다. 늘 제 손보다 따뜻한 손이지만 오늘은 비슷한 체온을 띠고 있다. 선일은 그것을 한참이나 쥐락펴락하다가, 그 감각에 익숙해질 때쯤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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