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EAEN

눈먼 남자

올리안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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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도시는 활기차다. 온화한 색의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화단에는 잎이 긴 꽃이 몇 촉이 심겨 있으며,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하는 거지들 사이를 주민들이 산만하게 걸어 다닌다. 항구 도시기 때문에 종종 산 물고기와 죽은 생선의 비린내, 소금기 같은 것들이 바람을 타고 몰려온다.

다리를 지나 도시의 중심부로 가면 광장이 있는데 그곳엔 화가나 조각가가 나와서 비싼 값을 붙여 작품을 팔고 상인들이 가판대를 끌고 나오며 영원히 불타는 장작 위에 마녀나 주술사나 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들이 묶여서 잦아드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지금, 초봄을 기대하듯 낡은 것들을 전부 치워버린 광장 중앙에는 화형대도 교수대도 없이 한 남자가 묶여있다. 저 남자가 광장에 놓인 지는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남자가 입은 천옷은 오물과 부패한 것으로 더럽혀져 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검은 머리는 어깨에 겨우 닿는 길이로 막무가내로 잘려 산발이 되었다. 그는 맨발이었는데 뒤꿈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발바닥에 말라붙었다. 아마 족쇄가 풀려도 걷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족쇄가 풀릴 때 그는 이미 허공에 매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남자의 두 눈에는 검은 천이 동여매져 있는데 저곳에 묶이는 이는 두 눈이 뽑혀서 천이 없어도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남자의 얼굴에는 피딱지가 붙어 있으며 자주 먹고 마시지 못해 뺨이 꺼지고 입술이 갈라져 있다. 가끔 지나가는 이가 먹다 남은 음식 쓰레기나 오물을 끼얹으면 남자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그것을 받아먹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락거리라 생각하고 웃다가, 조롱하다가, 곧 그 남자의 처지를 두려워하며 다시 지나쳐간다. 그들 중 남자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해도 남자는 정말이지 목숨이 질겼다. 누군가는 길거리의 거지보다도 못한 신세의 남자를 내심 동정하고 존경하며 깨끗한 물을 그의 얼굴에 붓고는 했다. 그러면 남자는 물 한 잔에 기대어 겨우 목을 축인 주제에 선량한 자를 보고 씩 웃음을 지었다.

 


 

해가 진다. 경비병들은 남자가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순히 두고 물러간다. 철갑이 절그럭거리는 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가 난다. 그러한 신호들로 남자는 밤이 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눈만이 아니라 귀까지 멀었대도 낮과 밤을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덮쳐오면 그게 밤이었고 겨우 한기가 가시면 그게 아침이었다.

한낮의 오락이 끝나면 싸늘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그게 남자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다. 남자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어서 몸에 힘을 푼다. 뻣뻣하게 굳은 관절을 조금씩 움직이자 손발목에서 요란하게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들은 남자에게 가축한테나 쓸 법한 쇠사슬을 걸어놓았다. 어깨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 묶어둔 손은 그 끝부분부터 차츰 감각이 둔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누군가 다가오는 걸음 소리와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남자의 까지고 부르튼 얼굴 위로 불시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닿는다. 남자는 흠칫 몸을 굳혔으나 그것이 근 며칠간 끊이지 않았던 불특정한 폭력의 연장선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이어질 고통을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뺨에 손바닥이 조금 오래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그 살갗의 온기를 특정해낸다.

 

_ 해밍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형편없다. 손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오스카는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_ 해밍턴, 정말 간만이야. 나를 구경하러 왔나? 마음 같아선 극진히 대접해 주고 싶은데 보다시피 내 처지가 이래서 원.

_ …….

_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아. 그야 나 같은 죄인을 자네가 찾아올 이유라고는 그것밖에 없지 않나. 그래 그렇고말고…….

 

끊임없이 떠드는 입술을 엄지 끝이 지그시 누른다. 오스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힘겹게 깜빡였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검은 천을 벗기려 들었기에 고개를 돌렸다. 중죄인을 보듬는 것 또한 중죄였다. 속이 텅 빈 눈꺼풀을 깜빡이듯 오스카는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_ 자네는 겁이 없군.

_ 아무도 당신을 겁내지 않지요.

_ 그들은 내가 아니라 왕을 두려워하지.

_ 당신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요.

_ 그럼 자네는?

_ 저는 지금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클라디아스는 아주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거칠고 먹먹해 오스카는 못내 가슴이 아팠다가, 곧 아직도 남의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한 번 그에 대해 떠올리니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눈을 맞추고 정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밤. 다시금 클라디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_ 혼자 계시는군요. 이 도성에 죄인이라고는 당신밖에 없는 것처럼.

_ 그래, 여긴 내 독무대야.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것 같군. 목이 매달리고도 죽지 않기 위해 연습 중이라네.

_ 주술이라도 쓰실는지요?

_ 그보다 강한 것이지. 난 목숨을 갈아 넣어 저주하고 있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자, 내 눈을 뽑은 자, 내 머리와 발목을 끊은 자…….

 

오스카는 농담하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클라디아스가 조금 웃었다.

 

_ 그 저주의 끝엔 저도 있습니까?

_ 자네가?

_ 당신을 배반했으니까요.

_ 배반이라.

_ 나를 저주하면 당신은 영원히 살 텐데…….

_ 쉿.

 

그 찰나에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부른 것은 그 자신이었는데 갑자기 그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나 장작 쪼개지는 소리 같은 것이 무척 생경하게 느껴졌다. 오스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올리, 아직 있는 거지? 같은… 우습도록 나약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려다 목이 잠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_ 혼자 살아가는 건 배반이 아니야. 자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난 자네를 모른 체 했을 거야.

_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_ 내가 자네를 구하러 오기라도 했을 거란 말인가?

_ 분명히. 당신의 애마를 타고 성벽을 넘어서…….

_ 여태 나를 잘 몰랐군, 해밍턴.

_ 당신은 분명 그랬을 겁니다.

_ 아니야,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 누구도 그럴 필요 없어. 자네도…….

 

외마디 한숨과 함께 오스카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목에 힘을 풀었다. 떨어지는 머리를 클라디아스의 손이 받쳐 들었다. 그는 가엾게도 여태껏 떨고 있었다. 그 감각이 밤의 한기를 상기시키는 듯해 오스카는 덩달아 한 차례 떨었다. 그리고 짐승이 경련과 함께 잠에서 깨듯 현실을 자각했다. 그의 앞에서 비 맞은 개처럼 볼품없이 떨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클라디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클라디아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오스카의 고질병일 뿐이다. 그를 지금 이곳에 묶여있게 만든 들불 같은 충동과 멈출 줄 모르는 열망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죄였다. 그러니 더더욱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해선 안 될 일 아닌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이 그 며칠 사이에 기억 속에서 흐려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만날 일 없는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테다. 잠시 나약해져서 경솔한 행동을 했다. 이제 와서 해봐야 너무 늦은 말들인데도 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연인을 잃은 불행한 남자의 슬픔에 휩쓸려서. 너무나 비슷한 처지라서…….

 

_ …그러니 자네를 저주하지 않아.

_ …….

_ 해밍턴, 자네가 오래 있으면… 나는 약해져.

 

더는 혀를 움직이고 입술을 오므릴 힘조차 없었기에 오스카는 발음을 뭉개며 중얼거렸다. 머리로 손을 밀어내자 클라디아스가 손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틈이 벌어지기 무섭게 찬 바람이 그 사이를 메워 입이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러나 채 떠나지 않은 온기 한 줌에 기대어 오스카는 마지막 한 마디를 쥐어짜냈다.

 

_ 더는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고… 애초에 온 적 없던 것처럼 떠나…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살게.

 

클라디아스는 여전히 동요 한번 없이 고요하고, 오스카는 그가 돌연 없어졌다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는 숨소리 하나 없는 암흑 속에 연인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손이 다가와 닿았던 것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클라디아스의 숨결이 다가와 닿았다.

불현듯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그때 그들은 지금보다 어렸고 아무도 진지하지 않았으며 한없이 가벼웠고 조금은 음탕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닿았던 입술. 그때 오스카는 입맞춤 한 번에 클라디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메마른 입술에 실로 간만에 맛보는 더러움 없이 짭짤한 것이 닿았다. 우는구나. 반역자를 위해 우는군. 바보 같으니. 그러나 오스카는 눈이 멀기로 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저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그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애초부터 없었던 시선이 클라디아스를 완전히 떠나면 그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느리게 걸음을 돌렸다. 오스카에게서 멀어져 클라디아스에서 차츰 불특정한 인기척으로 돌아간다.

그 사람은 발을 끌었다. 매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떼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오스카는 젖은 입술을 핥았다. 약간의 짠맛과 해소되지 않는 약간의 갈증. 그의 눈물을 맛보며 문득 생각한다.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한 마디 해줬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다가도, 아니, 아니다. 오스카가 정말로 건네고 싶은 건 그저 짧은 되물음이었다. 저주와 함께 평생 살아도 좋을 만큼 나를 사랑하냐고.

 


 

클라디아스가 자신을 괴롭게 만든 게 아니었다. 오스카는 홀로 괴로웠다. 너무나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수치를 모르는 짐승이기를 바랐으나 결국에는 한낱 인간임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치욕 앞에서 혀를 깨무는 것도 수 차례 생각해 보았다. 손발이 없으나 살 의지로 죽고자 한다면 필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사투 끝 결론은 늘 같았다. 오스카 울스워터는 죽지 않는다. 오물을 받아 마시고 거름을 씹어 먹게 되더라도. 목줄이 매인 채 홀로 시들어 죽는다면 그것은 실로 별 볼 일 없는 죽음이다. 오스카는 누군가 그를 벨 때까지, 그의 목을 매달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힘입어 악몽과 저주로 영원히 살 것이다. 고작 육신의 고통 따위에는 지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마침내 오스카 울스워터의 길지 않은 시대가 끝났을 때, 시체에는 눈이 없을 것이다. 지난봄 죽었다던 그 공작의 눈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빠르게 잊힐 것이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만큼은 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백색의 오른눈을 기억하는 이는 그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해밍턴 후작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펜던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다 결국은 그가 펜던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을 것이다. 그러다 그가 죽고 나면 그제야 눈먼 이의 조각난 초상 또한 함께 무덤에 버려지리라. 홀로 사는 것조차 배신이라 믿는 불쌍한 남자에게 오스카가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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