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관

지중해의 바람과 오스카의 세계

made in heaven by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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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경주가 있었다. 해가 하늘의 꼭대기에서 조금 기울었을 때 영지의 초입에 설치된 관중석에는 양산을 쓴 사람들이 가득했다. 관중석에는 앉지 못했지만 경주로를 따라 서 있는 평민들도 제법 있었다. 땅을 울리는 산발적인 말발굽 소리, 땅이 머금고 있는 열기와 그 위로 피어오르는 흙먼지 구름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가슴 뛰게 만드는 좋은 오락이었다. 본 경주에 울스워터 공작이 참여한다는 건 영주에게 있어선 경사였다. 아니면 그가 온다는 말에 특별히 경주를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공작이 그런 것에 사족을 못 쓰는 남자라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깃발이 올라감과 동시에 기대에 찬 환호 소리가 경주의 시작을 알린다. 공작의 말은 바람처럼 빠르다고, 마치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리는 것 같다고들 했다. 그 말대로였다. 공작이 지나치며 일으키는 바람에 맞은 사람들은 즐거움이 전염된 것처럼 웃는다. 공작과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내심 승리욕을 불태우며 고삐에 박차를 가한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대결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진심으로 기뻐하고, 분해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저 멀리서부터 울스워터의 검은 말이 가장 먼저 머리를 들이밀 때, 바닥을 힘껏 박찬 앞발굽이 곤두박질쳐 결승선을 밟을 때 관중석에선 박수와 웃음, 경탄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관중들은 웅성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울스워터 공작만큼 말을 잘 타는 사람은 없지. 아니야, 저번에는 르블랑 경이 그를 제치는 걸 봤다니까… 그 모든 말을 뒤로 하고 말에서 내리는 오스카의 뺨은 혈기가 돌아 붉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한 번은 귀족들을 향해, 한 번은 울타리 너머에 모여 있는 젊은 평민들을 향해. 그는 체통 없이 웃고 있었다. 이윽고 심판이 공작의 머리 위로 월계관을 가져갔다. 세례자가 세례인에게 기름 부음 하듯 향유를 엄지에 묻혀 그의 이마에 찍었다. 햇빛이 그의 만면에 쏟아지고 있었다. 영화롭다는 단어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을 클라디아스는 관중석과는 조금 떨어진 그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의 짧은 이벤트가 끝나자 흥분은 가시고 무더운 열기가 사람들을 덮쳤다. 저 멀리 흙길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하나둘 영지 안으로 돌아갔다. 원초적이고 폭발적인 온도로부터 눈을 돌리고 차갑고 달콤한 핑거푸드와 샴페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클라디아스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한 차례 쓸어올렸고, 이마를 손등으로 찍어내며 바람이 여기까지 열기를 몰고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오락을 즐기는 건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던 차였다.

“클라디아스!”

너무나 친숙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몸을 돌린 클라디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스카의 말이었다. 그 위에 올라앉아 있던 오스카가 가벼운 몸짓으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왔다. 문득 왜인지 오스카가 포옹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보는 눈이 많았다. 그를 끌어안으라는 마음속 조용한 부추김을 외면하며 마주 다가가던 클라디아스는 무심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이마에 묻은 향유가 마르지 않고 남아 있었다. 손에 묻은 기름에서 초록빛 과실의 향, 풀 냄새가 났다. 그 향이 코끝을 스치는 순간 오스카가 클라디아스를 서슴없이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 고삐를 잡고 있었을 두터운 손이 등을 안으면 클라디아스는 비로소 그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오스카가 나무에 편하게 뒤통수를 기대고 있는 동안 클라디아스는 그 옆에서 다리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뻗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제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오스카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팔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까딱거리는 손끝만이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땀이 마른 뺨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떼어주자 오스카가 눈을 떴다. 새파란 눈이 제 얼굴을 뜯어보는 것 같아 클라디아스는 괜히 눈을 피했다. 오스카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 느리게 목소리를 냈다.

“경주를 보고 있었나? 관중석에 없던데.”

“그 뒤편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그런 곳에 앉아 있으면… 이목을 끌 것 같아서요.”

“그렇지. 거기 앉아있으면 다들 말을 걸어온단 말이야.”

그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나. 경주에 대한 감상을 물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라도 덧붙여야 하나 싶어 입을 다시 열려던 때에 오스카가 불쑥 무언가를 집어 내밀었다. 조금 전에 심판이 그의 머리에 씌웠던 월계관이었다. 클라디아스는 눈을 깜빡였다.

“클라디아스, 이게 뭔지 알겠어?”

“이건… 월계관이군요. 당신이 쓰고 계시던.”

“그래. 근데 이건 조금 특별해. 잘 봐.”

그렇게 말하며 오스카가 월계관을 쥔 손을 까딱거렸다. 클라디아스는 그것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반듯하게 자란 월계수의 가지를 엮어 만든 화관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빛이 났고, 꼭 처음부터 주인을 두고 만들어진 것처럼 그에게 딱 맞아 보였다. 그러나 그게 오스카가 원하는 대답 같지는 않았다. 클라디아스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잘 만들었군요. 만듦새가…….”

“아니야, 클라디아스. 잘 보라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스카가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스카가 말하는 ‘특별한’ 구석이 클라디아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며 애먼 잎을 꼼꼼히 살펴도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답도, 특별한 부분도. 결국 눈을 들어 오스카를 바라보자 그가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잎을 매만지는 클라디아스의 손을 그의 손등이 툭 건드렸다.

“이건 올리브 나무잖아. 월계수가 아니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올리브요.”

“자네 생각이 났어. 그래서 갖고 싶었지.”

오스카의 말과 속뜻을 연결시키는 것보다 그가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을 내어줄 때면 가끔 그 의도가 빤히 보여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오스카는 클라디아스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어 했다. 엉뚱한 수수께끼의 해답보다도 그의 투명한 의도가 클라디아스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클라디아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실은 올리브의 가지라는 그 푸른 잎을 만지작거리다 그렇군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낯 뜨거운 침묵이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아 재빨리 대답을 덧붙였다.

“당신께선… 월계관이 아니어도 결승선에 있는 건 무엇이든 취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오스카가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이 부끄러움을 덜어주는 것 같아 숨이 트였다.

“자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올리브를 보면 그 본연의 뜻보다도 자네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인걸.”

제 손에 들린 월계관에 시선이 와닿는 게 느껴졌다. 오스카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 이름을 붙여줄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드는군. 이렇게 우연찮은 기쁨도 얻을 수 있고 말이야.”

올리, 오스카가 말끝에 넌지시 덧붙였다. 기대감이 차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클라디아스도 이번에는 알맞은 대답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마음에 차신다면… 저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요, 데미안.”

그러자 오스카가 눈을 접어 웃었다. 자신을 기특히 여기는 듯한 그 웃음에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잠깐의 눈맞춤 끝에 그의 손끝이 클라디아스의 손을 다정히 쓸고 지나갔다. 클라디아스는 그 손길이 제 손등 위에 머무르기를 바라게 됐다. 그렇지만 떨어지는 온기가 아쉽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긴 기다림은 그 열매를 더욱 달게 만드니. 거기다 아쉬운 소리를 하기엔 그의 손길에서도 미련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그 찰나에도 목이 말라올 만큼.

그러나 오스카는 욕망에 불을 지피는 만큼 그것을 마음대로 흩어버리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자였다. 달콤한 침묵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바람에 흘러가는 흥얼거림처럼 퍽 가벼웠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를 닮은 그 월계관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야. 침실 벽에 걸어 전시해 둘까? 아니면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해줄까? 그것도 아니면… 자네와는 견줄 바가 안 되니 그냥 아무렇게나 던져놓을까.”

클라디아스는 눈을 내리깐 채 월계관을 바라보며 오스카가 말한 곳에 놓여있는 제 모습을 상상한다. 그의 침실, 응접실, 성내의 어느 곳이든. 상상이 가지 않는 곳은 없었다. 오스카는 고작해야 침실과 응접실을 겨우 내어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가 클라디아스에게 허락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클라디아스에게 그저 온전한 선택지를 주는 것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고. 클라디아스는 짧게 고민하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족하실 때까지, 그저 손 닿는 곳에 두고 어여삐 여기시다가… 말라갈 때쯤에나 알려주시렵니까?”

클라디아스가 신중하게 내뱉는 단어를 하나하나 주워 담듯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스카가 말미에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클라디아스가 좀 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땐 저도 제 자리를 되찾아야 할 테니까요.”

“뭐…….”

오스카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윽고 그 눈매가 날렵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여느 때처럼 호쾌한 웃음소리로 이어지는 것을 클라디아스는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나 실은 그가 온 힘을 다해 즐거워하는 것을 보노라면 클라디아스도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오스카가 부서지는 파도라면 클라디아스는 그 해안가에 서 있는 이였다. 새하얗게 밀려오는 포말이 발목을 핥고 지나가는 게 때로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다.

채 잦아들지 않은 웃음과 함께 오스카가 짐짓 질색하는 시늉을 했다.

“말로는 못 당하겠어, 올리.”

그렇게 말하는 오스카의 얼굴이 실로 즐거워 보여서, 클라디아스는 무심코 마주 웃었다.

*

늦여름의 바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긴 호흡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울창한 나무 이파리가 숨죽여 속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클라디아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란히 앉아 맞닿은 팔에서부터 온기가 옮아오고 있었다. 클라디아스는 그와 체온이 비슷해지는 순간이 좋았다. 오스카는 계속해서 그의 안으로 클라디아스를 끌어들인다. 그와 자신은 너무 다른 사람이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때로 클라디아스는 놀랍게도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영영 녹아들 수 없을 것 같던 세계의 일원이 된다.

오스카는 언제부턴가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 나지막한 물음을 던져 대화를 이어갈 수도 있겠지만 클라디아스는 그저 이 순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귀를 기울이면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고요함이 그 또한 기꺼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의 바람에 답하듯 오스카가 잔디밭을 더듬어 클라디아스의 손을 찾았다.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면 오스카의 거칠고 딱딱한 손이 제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정적 속에서 클라디아스는 그의 온도를 느낀다. 가끔은 감정을 부추기고 가끔은 목구멍을 간지럽히기도 하며 많은 순간에 늘 함께 하기를 요구하는 그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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