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Eyed Jack
한겨울 밤 외눈의 광인을 조심하라


그 오래된 저택은 런던보다도 케임브리지 쪽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북대서양을 건너 뉴포트에 도착하고서도 열차를 타고 족히 세 시간은 더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클라디아스는 미국인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테네시주만 해도 영국의 절반에 육박하는 크기였다. 오스카는 열차로 미국을 횡단하는 데에는 '고작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족히 세 시간이란 어느 정도의 거리일까. 오스카의 손에 이끌려 거대한 쇳덩이에 몸을 싣고 나서야 클라디아스는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영국행 배에 오를 때 그가 넌지시 건넨 말이 있었다. 영국은 계속 비가 와. 해가 나는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지. 그 말을 증명하듯 차창 너머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온통 빛바랜 색을 띠고 있어서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달리면 먹구름 아래를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열차는 육중한 몸뚱이를 이끌고 말보다도 빠르게 달렸다. 마차가 온종일 달려야 할 거리를 고작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증기기관이 내는 규칙적인 소음은 마치 심장박동 같았다. 그 박동에 따라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언젠가 들었던 남부 촌뜨기라는 별명이 떠올랐다.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아직도 농장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해밍턴 가도 마찬가지였다. 해밍턴은 근방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였다. 테네시주에 있는 농지 중 절반은 해밍턴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가진 땅의 반만 가지고 있어도 클라디아스는 남은 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윌리엄이 죽은 이후로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비교적 자주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클라디아스가 마침내 해밍턴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가문의 사람들은 여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영속적이고 평온한 부가 지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드넓은 땅을 클라디아스가 돌연 전부 처분하여 어느 한 영국인에게 내던지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즈음 나란히 앉은 오스카의 어깨가 닿아왔기 때문에, 클라디아스는 놀라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오스카 울스워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린아이 같았고, 탕아 같았으며,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같았다. 클라디아스는 심지어 그를 대면하기 전에도 사기꾼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19세기의 끝 무렵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는 우스꽝스러웠고 그가 늘어놓는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 허무맹랑하게까지 들렸다. 요컨대 오스카는 클라디아스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한 이방인이고 일종의 개척자였으며 어느 날 테네시에 도착해 클라디아스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소문의 중심지가 되어 어디를 가도 그 백작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만큼은 오스카를 구태여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클라디아스는 변화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 있어 오스카가 몰고 온 파문은 산뜻한 바람이 아닌 거친 풍랑 같았고, 그의 서슴없는 태도가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 그를 내쫓고 싶다면 클라디아스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었다.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그를 마음껏 씹고 즐기다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은 오스카의 외모와 돈, 태도에는 관심이 있었으되 그가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철도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클라디아스가 가장 잘 알았다. 테네시는 폐쇄적이었고 배척적이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이 공동체는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었다. 오스카는 철도가 놓이면 미국 전역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다고 선전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주장이었다. 그가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새롭고 혁신적이고 도전적인—그런 단어들은 그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몇십 년 뒤에는 후회하게 될지 몰라도 최소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깟 철길 하나 없어도 먹고 사는 데에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이었다. 오스카와 입을 맞춘 클라디아스의 정혼자는 아직도 클라디아스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건 진실이었다. 만찬 식탁에서 그를 위해 건배를 외쳤던 한 사업가는 투자 유치를 위한 자리에는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다. 모두가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오스카의 그 당당한 얼굴, 한 번도 거절당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낯 앞에서 마침내 문이 닫히려는 순간 충동적으로 그를 붙잡은 것은 분명 클라디아스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 영역이 침범당한다고 느꼈지만 애초 클라디아스의 마음이 이곳에 매여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무엇이 마음을 그토록 뒤흔들었는지만큼은 알 수 없었다. 영국행이 결정된 이후로 클라디아스는 밤마다 마음이 흔들린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처음 그의 눈을 보았을 때는 푸른 눈을 가졌던 제 형제를 어렴풋이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 윌리엄은 잠시간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그마저도 그가 죽음에서부터 되돌아온 이후로는 썩 그렇지도 않았다. 유난히 스산하고 어둑한 밤이면 자꾸만 죽은 자의 기척이 맴도는 것 또한 어쩌면 윌리엄의 탓일 것이었다. 형제를 회상할 때면 자연히 떠오르는 그리움과 두려움, 무엇보다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어린 클라디아스의 머리맡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던 목소리, 외눈의 광인을 조심하라는… 기실 그조차도 오스카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죽은 형제의 경고가 떠오른 것은 단순한 기우일 뿐이라고, 클라디아스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거기다 사실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오스카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클라디아스 또한 무릇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가. 약속하는 손을 잡으면 그는 정말로 어디로든 데려가 줄 것만 같다고…….
케임브리지로 가려면 런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잠시 하차한 런던의 기차역에서 오스카는 기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 철도를 놓도록 도운 게 다름 아닌 그 자신이며, 준공을 알리는 비석에도 제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빌미로 기관실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클라디아스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스카를 말릴 마음이 들었을 때쯤 그는 이미 넓은 보폭으로 멀어져가던 참이었다. 기관장은 그와 몇 마디를 나누고선 금세 오랜 친구처럼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특히나 그와의 차이를 체감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클라디아스는 문득 어깨 너머에서 누군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마치 클라디아스가 그렇게 느끼듯 그들 또한 클라디아스와 오스카가 일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스카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클라디아스는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저 모습은 전부 그의 저주받은 천성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며, 끊임없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불길한 저택을 하루빨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
클라디아스는 눈을 떴다. 닫은 줄 알았던 창문이 어느샌가 열려 그 사이로 들어온 냉기가 잠을 깨운 것이었다. 두꺼운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방바닥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달빛이 함께 흔들렸다. 풀과 나무가 밤바람에 몸을 기울이는 소리가 아득히 멀게 들려왔다. 클라디아스는 일어나 창문을 확인하는 대신 차갑게 식은 어깨 위로 이불을 한껏 끌어당겼다. 뺨을 식히는 가느다란 바람 정도는 외면하고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할 셈이었다. 낮에는 우체국과 은행을 오가느라 케임브리지 시내를 온종일 걸어 다녔다. 오스카와 동행하는 것은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는 늘 넓은 보폭으로 걸었고 늘 다음 행선지가 있었다. 클라디아스는 그와 함께 지내면서 열차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또한 얼마 정도의 체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는지 느껴졌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돌아다녔대도 이렇게까지 피곤하진 않았을 텐데…….
사실 클라디아스가 지나친 피로를 느끼는 게 오스카의 탓만은 아니었다. 몇십 년 만에 충동적으로 고향을 떠나온 이가 바다 건너 땅에서 마냥 편하게 잠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그가 오스카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스카에게는 남의 시선을 끄는 능력이 있어서 클라디아스도 그와 함께 있으면 별수 없이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렸다. 그러나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꾸밈없는 선망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이었더라면. 클라디아스의 머릿속엔 그저 주저하며 그를 가늠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눈을 떼고 싶지는 않은 모순적인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것에 대한 불확신을 안고 런던에 발을 들였던 그날 우연히 주워들었던 그에 대한 소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이토록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울스워터의 탕아인가? 혹은 항간에 떠도는 대로 저주받은 독자인가? 무엇이 되었든 클라디아스는 낯선 땅 위에서 유일하게 낯익은 이를 조금 더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처럼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때로 클라디아스가 말을 고르는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는 그의 목소리. 서슴없이 마주쳐오는 눈과 거리감 없이 다가오는 몸, 체온…….
꿋꿋하게 이불을 두른 채 누운 자리에서 한참을 버티고 있던 클라디아스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바로 잠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으로 나서면 맨발에 차가운 공기가 와 닿았다. 바람이 들어오는 틈을 확인해 보니 기껏해야 간신히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좁은 폭으로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힘주어 닫은 클라디아스는 침대로 돌아와 맥없이 걸터앉았다. 침묵 속 초침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로마자로 쓰인 숫자 2와 3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클라디아스는 술에 약했다. 잠들고 싶다면 위스키 한 모금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려면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늘어진 끈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 까마득한 새벽, 고요한 저택에서 누군가를 깨우기 위해 소리를 내는 게 망설여졌다. 클라디아스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여태 집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면 반가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던 클라디아스는 문득 멈췄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그것은 여느 사용인의 걸음이 아니었으며,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듯 아주 짧고 가벼운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머리맡 협탁에 놓여 있는 은촛대에 클라디아스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손님방은 2층 긴 복도의 끝에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한동안 발길이 닿지 않아 녹슨 경첩만큼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천천히 방문을 열자 어둑한 복도에 길고 음산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한 손으로는 문을 꽉 쥔 채 남은 손으로는 촛대를 들고 클라디아스는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의 끝에서 맞은편 끝을 내다보면 저택 군데군데에 나 있는 기다란 아치형 창문에서부터 창백한 달빛이 비스듬히 들이쳐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 희끄무레한 빛과 대조되어 모서리마다 깃든 그림자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그 광경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진 것은 고개를 내밀기 직전까지도 들려오던 발소리가 홀연히 사라진 탓이다. 어린아이가 집에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물론 그의 집에 머문 지 몇 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이 집에서 아이는커녕 흔적조차 발견한 적 없었다. 하지만 클라디아스는 그 인기척을 분명히 들었다. 텅 빈 복도를 내다보며 클라디아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길을 잃고 들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이 넓은 저택에서 아이의 발소리를 들은 게 정녕 자신밖에 없단 말인가? 문틀 밖으로 촛대 쥔 손을 내밀면 양초 끝의 불씨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클라디아스는 무의식중 옷깃을 바짝 여미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융단이 깔린 복도는 그 위를 밟을 때마다 발소리를 먹먹하게 집어삼켰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문은 그 안의 광경과는 아무 관계 없이 일률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유리등은 왜인지 불이 들어와 있는 것 하나가 없었고… 모두가 잠든 적막한 저택에서 홀로 걷다 보면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숨소리마저 죽이게 되었다.
울스워터의 넓고 고상한 저택은 빛이 들지 않아 잿빛이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하여 마치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이곳이 십자가 첨탑이 달린 묘지와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미약한 촛불의 빛을 빌려 어둠을 조금씩 지워가며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옮기던 클라디아스는 문득 그를 복도로 끌어내었던, 어쩌면 그의 잠을 깨웠을지도 모르는 소리를 다시금 들었다. 아이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다시 들려왔다. 그 기척은 점점 가까워져 클라디아스를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없는 문 닫힌 복도를 걸어오지 않았던가…….
복도 끝의 고딕풍 음각과 어둑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클라디아스는 결국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는 걸어갈 길도 없었기 때문이다. 뒤돌아본 그곳에는 두 손을 모은 소녀가 클라디아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겐 마주칠 눈과 말을 건넬 입술이 없었다. 살가죽이 해져서 뜯겨 나간 듯한 얼굴은 경계선이 흐릿해서 바람이 불면 허공으로 흩어질 것 같았다. 클라디아스는 예전에도 이러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윌리엄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차가 굴러떨어져 살아날 길이 없었다 했는데, 윌리엄은 어린 클라디아스의 얄팍한 상상력으로도 그 광경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참혹한 모습으로 찾아왔었다. 그렇다면 이 이름 모를 소녀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눈 감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나. 하얗고 반투명한 치맛자락은 바람 없이도 얇게 나부꼈다. 옷자락을 쥔 손과 그 아래 작고 연약한 맨발은 손발톱이 전부 빠져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소녀가 형편없이 찢어진 입을 여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와 함께 불꽃이 훅 꺼졌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을 클라디아스가 제 눈앞이 아득해진 것이라고 착각하기 직전,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심지 끝에서부터 천천히, 그리고 불안정하게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클라디아스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정신없이 뛰던 심장박동이 차츰 가라앉았다. 죽은 자들의 집요한 목소리를 피해 이불 속으로 끊임없이 도망가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소녀는 그들과 다르게 적어도 클라디아스에게는 전하고픈 말이 없어 보였다. 다만 텅 빈 눈구멍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클라디아스는 허리를 조금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길을 잃었니?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들어온 거니? 소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클라디아스는 말문이 막혀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녀는 걷기 시작했다. 클라디아스는 소녀를 따라갔다. 좀 전과 다르게 복도에는 소녀의 발소리 같은 건 조금도 남지 않고, 그저 그가 걸어 다니는 소리만이 낮게 깔렸다.
흑단목을 매끄럽게 깎아놓은 난간은 돌처럼 서늘했다.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는 소녀의 뒷모습은 색이 아주 옅고 허여멀건 것을 빼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잊고 있었던 오스카를 둘러싼 여러 추문이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 그는 미국에서처럼 매력적인 이방인이 아니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과 환대를 받는 건 클라디아스 쪽이었고, 때로 오스카에게 꽂히는 강렬한 시선은 단순한 호감만 담겨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클라디아스가 오스카와 동행하는, 정확히는 그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이유를 유난히 궁금해했다. 누군가는 오스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에게 ‘재미있는 소문’이 있는 것을 아냐며 은근한 뉘앙스로 묻기도 했다. 모른다고 대답하면 될 텐데, 클라디아스는 무심코 압니다, 그렇게 입을 막아버렸다. 그가 미쳤고 저주받았으며 저택에서는 장례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는 그 소문. 진상이 누구보다도 궁금한 것은 다름 아닌 클라디아스 해밍턴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아봐야 클라디아스에게는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상자의 뚜껑을 여는 건 그의 일이 아니었고, 원래대로라면 오스카와 동행하는 일도 없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는 지금 그의 저택에서 깃든 망령의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소녀가 자신을 어떤 진실로 이끌어주리라는 기대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클라디아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구심과 회의감만이 공허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소녀는 오스카와는 아무 상관 없는 길 잃은 헛것이며 오로지 클라디아스를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클라디아스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고, 발이라도 헛디뎠다가는 익숙한 침대 위에서 화들짝 놀라며 깨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단의 마지막 층계를 밟을 때까지 클라디아스는 미끄러지지도 잠에서 깨지도 않았다.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을 바라보면 그곳은 서재와 응접실이 있는 복도였다.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소녀는 한 번도 헤매지 않았다. 집이 익숙한 것은 물론이며 목적지도 분명해 보였다. 클라디아스는 그리고 마침내 서재와 복도 사이를 가로막는 단단한 호두나무 문 앞에 멈춰 선 소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마치 문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통과하여 들어갔다. 홀린 듯 손을 뻗어 문을 열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너머에서부터 냉랭한 공기가 그를 훑고 지나갔다. 촛불이 다시 한번 심하게 흔들렸다.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는 눈앞의 광경과는 대조되는 온도였다. 그리고 난로 앞에 놓인 소파에는… 오스카가 몸을 푹 묻고 있었다.
이 시각에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노크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클라디아스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오스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짚고 팔걸이에 팔을 괸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닐까. 문을 등지고 있는 탓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저 소파 옆 협탁에 놓여 있는 반쯤 비운 와인잔과 와인병이 그 추측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 도착한 이래로 그가 먼저 침실로 향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클라디아스의 몸이 피로와 졸음으로 한없이 무거워질 때도 그는 지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잠들었다가는 다음날 분명 고생할 텐데. 무엇보다도 이곳은 너무 추웠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탓이었다. 비가 아니라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인데 이렇게나 창문을 열어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는 클라디아스보다 조금 앞서서 오스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라디아스는 누구를 불러야 할지, 첫 마디를 어떻게 떼어야 할지 고민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울스워터.”
그리고 그 부름에 소녀가 불현듯 클라디아스를 돌아보았다. 이어 클라디아스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오스카에게 걸어 들어갔다. 마치 서재에 들어왔듯 여상한 발걸음으로… 아담한 인영이 녹아들듯 자취를 감추는 순간 오스카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열에 들뜬 환자가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스카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꺼림칙하고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클라디아스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의문들을 삼켰다. 그 대신 서랍장 위에 촛대를 올려놓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각에… 노크도 없이.”
평소와 달리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잠잠한 목소리였다. 클라디아스는 입을 열었으나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세간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이야말로 저주받은 광인이라 보지 않던가.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건 어린아이나 할 법한 변명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그 말을 듣고는 시원찮은 변명을 들은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말동무라도 필요한가?”
마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 자신이야말로 몸을 누이기는커녕 침실에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오스카는 여전히 클라디아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느슨히 늘어져 있던 몸을 조금 일으켜 앉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걸음했는지 말할 수 없다면 그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클라디아스는 그가 앉은 소파의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당신께서도 피차 마찬가지 아니신지요.”
“…….”
“몸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오스카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조금 전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신경 쓸 건 없어. 겨울이 되면 편두통이 종종 있거든.”
평소와 달리 확신 없이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것에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며 클라디아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술은 두통에 좋지 않을 텐데요…….”
그라고 해서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테다. 오스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종종 창밖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잦아들었다가 겨우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불길이 방을 충분히 덥히지 못해서 클라디아스의 목덜미를 덮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도 한기가 집요하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작 줄곧 이 바람을 쐬고 있었을 오스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클라디아스는 문을 닫을지 물으려다 마음을 달리 먹었다. 소파의 등받이를 손끝으로 쓸던 클라디아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스카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비로소 벽난로의 따뜻한 불빛을 빌려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스카는 클라디아스가 무릎 꿇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클라디아스를 내려다보는 그는 지쳐 보였고… 드물게 취기가 조금 도는 얼굴이었다. 또 이상하게도 한쪽 눈을 거의 감고 있었다. 실내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 중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의 얼굴을 살펴보던 클라디아스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금쯤이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라디아스의 시선을 의식한 오스카가 꼭 자신의 빈 눈구멍을 보려는 것처럼 한쪽 눈을 굴렸다. 그는 한쪽 눈이 없었다. 그는… 외눈이었다. 클라디아스는 놀란 기색을 내비친 게 뒤늦게 부끄러웠다. 본인을 앞에 두고. 오스카의 목소리가 한층 느슨해졌다.
“내 눈 색은 아는지 모르겠어.”
“압니다. 푸른색이지요. 아주 푸른…….”
그것만은 잊을 리 없었다. 입안에서 속삭이며 바라본 오스카의 낯은 마치 직전까지의 두통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어쨌거나 핏기가 없어 몰골이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이 얼굴이 완연한 병자의 행색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스카가 비로소 입꼬리를 올렸다. 한숨을 삼키며 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오스카가 별다른 말 없이 불쑥 클라디아스의 손목을 잡아 왔다. 그가 앉을 자리는 없었지만 클라디아스는 굳이 그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그저 곁에 서 있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간 말없이 벽난로 안에서 불꽃이 장작을 태우고 쪼개는 것을 지켜보았다.
꿈이라기엔 생생했지만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오스카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의 손바닥 아래서 제 맥이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찬바람을 오래 맞아서 그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가 어쩌면 제 손목에서부터 미미한 온기를 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손목을 잡고 있는 것보다는 손을 잡는 편이 좋을 텐데.
그의 손끝이 흘러내려 팔걸이 위로 떨어졌다. 반대쪽 손이 와인잔을 쥐었다. 와인으로 입을 축인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성인이 되는 날을 며칠 앞두고 사고를 당했어.”
낮은 음성이 모닥불 타는 소리 아래로 가라앉았다. 클라디아스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보니 한쪽 눈이 없더군. 뭘 끼우지 않으면 흉해서 봐 주기 힘들어.”
중얼거리는 그의 손끝이 텅 빈 눈가에서 무언가 찾는 것처럼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라디아스는 가슴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어떤 충동을 달래야 했다. 얌전한 천성이 내리누르고 있던 호기심이 마치 누군가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조용히 떠올랐다. 가다듬고 정돈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은 체 부드럽게 흘려보내면서도 그 뒤로 삼킨 수많은 질문 때문에 혀끝이 간지러웠다.
“그 사고는… 당신이 이 저택에서 혼자 사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왜 모두가 당신에 대한 구설수를 입에 올리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고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라도 한 건지. 그들은 어떤 경위로 사라졌는지. 무엇보다도 왜 이 저택에는 흔한 가족 초상화나 사진 하나가 걸려 있지 않은지. 마치 처음부터 혼자 지내던 집처럼… 그런데도 한밤중에 당신을 찾아온 죽은 여자아이는 대체 누구인지……. 다시금 와인잔을 매만지던 오스카가 대답했다.
“없어.”
“가족들이 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잘 모르겠군.”
“몇몇 사람들은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 하더군요. 그들의 죽음에 당신의 책임이 있으리라고…….”
말이 길어지는 순간 돌연 오스카가 고개를 젖혀 클라디아스를 바라보았다. 클라디아스는 자신이 그가 볼 수 없는 곳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여태껏 얼마나 많은 순간에 알지도 못한 채 그래왔던가. 그러나 클라디아스가 어떤 대답이나 행동을 할 새도 없이 오스카가 대답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래 보이나?”
조곤조곤히 이어져가던 대화 아닌 대화가 끊겼다. 문득 자신이 오스카를 심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질문은 정답도 오답도 분명했다. 그렇다고 대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고개를 한 번 저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클라디아스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다 주저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쎄요. 저는…….”
순간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또 한 번 불어 들어왔다. 창문이 잘게 흔들리는 소리에 클라디아스는 그것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으나 오스카는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이상해 보여?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소음처럼 섞여 들었고, 어쩌면요, 그 대답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오스카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클라디아스가 그러한 감상을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이유 또한 알고 있을까. 그러나 오스카는 아무래도 그의 비밀 중 어떤 것도 클라디아스에게 내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스카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 클라디아스.” 탄식처럼 흘러나오는 음성과 함께 오스카가 자신의 푹 꺼진 눈가에 다시 손을 올렸다. 아니, 눈가가 아니라 이마를 짚었다. 그를 괴롭히는 통증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이나 하러 온 거야?”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나는 자네가, 나를…….” 이제 오스카도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클라디아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바람 소리가 멎었다. 오스카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눈을 깜빡이던 오스카가 곧 클라디아스의 손안에 뺨을 기대왔다. 창백하고 반듯한 이마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식은땀이 배어난 살갗은 시체처럼 서늘하고 뻣뻣했으며, 그의 눈—한때는 그리운 형제를 회상하게 하던, 그래서 불길하게도 느껴지던, 하지만 이제는 그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고도 생각했던… 언젠가 그 푸른 눈과 시선이 얽힐 때 오스카는 그에게 불쑥 눈동자가 한여름의 올리브를 닮았다고 이야기했었다. 당시에는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기 바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문득 그의 눈이 지평선 위 하늘의 색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라디아스가 지금 그에게 비추는 벽난로의 빛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짙푸른 눈은 심해와도 같이 검다.
*
느슨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제 손목을 간지럽혔다. 머리가 아파.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스카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창문을 닫겠다고 달래듯 속삭이며 클라디아스는 눈앞의 광경에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두통이 심해지기만 했을 뿐 결코 잦아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통증을 느낄 때마다 술잔을 입에 가져갔기 때문이고, 또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았던 소녀가 어디 있는지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는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오스카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클라디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제 양팔을 꼭 붙잡은 채로.
나를 위로하러 온 줄 알았어. 상처 입은 것처럼 읊조리는 이는 정작 클라디아스에게 단 한 번도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말해주지 않고, 울스워터의 소녀는 그의 어깨 위에서 재잘거리는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입을 달싹이며 클라디아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형제의 목소리가 십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금 이 방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외눈의 광인을 조심하라고… 외눈의 광인……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던…… 어린 상상 속에서 광인은 아주 두렵고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어떠한가? 불온한 소문을 끌고 다니는, 저주를 받았다는, 하나뿐인 눈으로 파리한 얼굴을 하고 제 온기에 기대 오는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