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스토리 관련

다도회에는 율무차를 준비해주세요, 루예나!

上편 : 다도회의 율무차 (미완)

한가로운 날이다.

아니, 루예나만 그렇다.

아니, 정확히는 루예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오늘은 한가로운 날이다.


메인 스토리

시즌 : 생사 너머의 반짝임

다도회에는 율무차를 준비해주세요, 루예나!

Garden Teatime at the Temple of the Moon

[ 아몬드 쿠키와 크랜베리 치즈 케이크, 초콜릿 아이스크림 ]


그런 일들이 있고 난 후이지만, 태초의 도시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달려 나가는 중이라고 봐야겠다.

지나온 이야기의 끝과 다가올 이야기의 시작을 장식하는 축제가 머지않았는데, 오랜 전통을 뒤로 미룰 만큼 그들은 이타적이지 않다. 그것이 만다라의 축제, 라고 루예나는 생각한다. 비록 선택적인 영생일지라도 삶의 유일한 정석적인 휴식을 보장받는 기간을 누가 뒤로 미루면서까지 다른 일을 해결하려고 들겠는가? 루예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 같은 괴짜 부류나 그러겠다고 생각하지만 루예나도 딱히 축제를 미루고 싶진 않다. 존재의 아이들이니, 잔해니 하는 그런 정석적인, 주인공의 새로운 방해물과 빌런 등장 루트 따위, 내 알 바인가? 루예나는 그저 재미있는 것과 제 기준에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소중하게 여겨주고 싶을 뿐인 만다라다.

 

세월의 도서관은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사심을 가득 담아 채운 이야기의 보고, 사랑하는 인간의 작고 강렬한 반짝임이 남긴 흔적의 모음. 루예나가 사랑해 마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그렇다 해도 프로젝트라는 건 역시 공적인 부분이 될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루예나는 열심히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써의 의무를 다했다. 아니,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정정하고 싶단다. 아직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의무를 마쳤다, 라고 단정 짓는 문장은 오늘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나 적어달란다. 그래, 모든 게 루예나의 마음대로다. 그러니 이 티타임도 루예나의 마음대로인 것이다. 티타임을 가장한 오늘의 미팅이야 말로 그가 세월의 도서관에 쏟아붓는 애정의 형태에 틀을 조금이나 잡게 해줄 것이다.

세월의 도서관 건축에 협조한 모든 만다라와의 일대일 면담을 오늘부로 끝낼 예정인 루예나는 지난 만남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 고되었던 실랑이들이여.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는데!

가장 먼저 찾았던 기록이야 말로 말할 것도 없이 그 누구보다도 호의적이었다. 기록의 만다라는 탄생 때부터 단 하나뿐인 사명을 짊어지고 생성된, 특이한 존재였다. 영원히 우주를 기록해야 하는 사명, 하지만 이 우주에서 가장 무거운 족쇄를 짊어진 만다라. 그런 기록이 원하는 것을 루예나는 알고 있었을 뿐이었고 그것이 들어맞았을 뿐이다. 그러니 기록이 예외적인 만다라일 뿐, 다른 만다라들은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메어는 온전한 기억의 보존을, 렌카르누타는 모든 운명의 서사시를 한 자리에서 보고 싶어했으며, 델라트라는 꿈에서 보는 과거와 미래의 기록을 원했고, 나이트 미드리아는 델라트라의 조건에 불행의 결과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식의 우호적인, 혹은 적대적이지 않은 만다라와의 대화는 늘 루예나를 즐겁게 했다. 하지만 말살, 지식. 특히 그 사람, 슈라.

오빠 되는 만다라인 레프라스가 없었다면 아마 아직도 슈라와 미팅 때마다 무력으로 싸우고 있었을 거란 생각은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그러면 그냥 책 같은 매체는 레프라스만 있었어도 되는 게 아니었을까? 요즘까지도 몇 번이고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지식이라는 이름에는 둘 다 한 점 부족함 없는 이들이니까. 그래, 결국 둘 다 섭외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는 결론으로 루예나는 스스로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세 당파 중에서 극단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예지의 만다라인 카트레리아의 당파원들 뿐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인원인 차원의 체렌과 학문의 예시스는 그나마 수월했다는 것이 작은 위안과도 같았다고 보면 되리라.

그래서 루예나에게는 율리시스의 등장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사실 그를 제외한 모든 멤버는 루예나가 스스로 찾아다니며 섭외했기에 더 그런 모양인 것 같았다. 그가 율리시스를 만다라 공식 석상 자리 이외의 곳에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루예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그가 '어나더'라는 것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는 카나트와 본질은 같았으나 비슷한 결의 성정은 아니었으므로히 마주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면 카나트는 꽤 최근의 일인데도 자연스럽게 오랜 과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루예나는 이런 시간의 모순을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모순은 우주 너머에서부터 전해지는 약속이기에. 우주 너머의 일은, 그 너머에서 알아서 해결될 것이다.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이 자각하는 존재가 되기 전처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율리시스에 대한 첫인상은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고, 그저 외모만을 봤을 뿐이었다. 아, 이 만다라. 나쁘지 않은걸. 아마도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그는 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소문이란 게 건너 건너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는 여타 만다라들과 같았으나 조금은 다른 것 같다고 루예나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시스는 정보의 빠르고 쉬운 접근, 만인을 위한 기록의 보고,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 없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든 법이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 그것이 그의 오롯한 조건이었고 루예나는 더 얘기도 않고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냉큼 받았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오래 걸리긴 했다만, 마침내 오늘인 것이다. 누가 그랬더라, 축제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아마 조혜린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싫었다. 이미 충분히 오래 걸렸고, 여기서 미루면 다음 이야기에서나 해야 한다는 것이 루예나의 이유였다. 그는 다음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좀 일을 마쳐놔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과 준비된 일정의 거친 파도 속에서 루예나는 혼자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사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의 만남을 다음으로 기약하자는 거절이 오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이 법의 고세대는 오겠다고 한 것이다. 웬걸? 아, 오면 물어보자고. 그러면 되는 문제다.

그의 성정이 어떤지는 알음알음-특히 미드리아에게-들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루예나는 고민 끝에 정석적이고 익숙한 서양식 티타임 양식을 내버리고 동양식으로 차리기로 했다. 차를 우리는 법, 어떤 다과가 차와 어울리는지 따위는 알지 못했으나 어차피 음식을 내오는 것은 본인이 아니었으므로.

날씨가 좋았다. 온화한 햇살이 도시를 가볍게 매만지고 있는 오후였다. 오랜만의 햇살을 만끽하는 것은 비단 지성이 있는 생명체뿐만이 아니었다. 달의 신전 부지의 여러 정원 중 하나인 잠 못 이루는 낭만의 정원, 짧게는 낭만의 정원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있었다. 평소에는 햇살이 들지 않아 인위적으로 꽃망울을 터트려줘야 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변덕인지 그토록 만사를 귀찮아하는 오스카가 태초의 도시 상공에 태양의 불씨를 던져두었기 때문이어서, 루예나는 어쩐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연못 위로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육각정이 한 치의 균열과 흠집 없는 흰색의 대리석으로 매끈히 깎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직 오늘의 꽃을 피우지 않은 열대 수련이 형형색색의 봉오리만 내민 채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저 부근의 흰 난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하양을 보랏빛이 제 사이에 두고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 따라 흔들리는 꽃밭 사이로 난 회색빛깔의 돌길은 정갈하기 그지없었고, 그것은 루예나가 있는 연못 위의 정자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있는 루예나는 정갈하게 놓인 직사각형의 붉은 식탁보에 어두운 빛깔의 금실로 끝없이 수가 놓인 국화 무늬만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푸른 하늘이건만, 흰 구름 한 점 없으니 아마 차가운은 바쁜 모양이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 속에 축제나 잔해에 대한 것도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생각, 율리시스는 언제 오나 그런 것. 축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저런 것, 벌써 지루하니 다른 재밌는 일이 없나 하는 이런 것들. 아, 정말로 그 잠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인지, 루예나는 빨랫줄에 널린 이불 마냥 난간에 걸쳐져 아래로 팔을 뻗었다. 오, 손끝에 물이 닿, 을락, 말락,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아 보여서 조금 더 뻗으면 닿을락, 말락……

찰랑,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

“……?”

아…?

“설마 이것이 대표가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요?”

에? 그럴 리가요?

 

루예나는 그때, 수면 위만 내려다보던 고개를 문득 들었을 때 마주쳤던 보랏빛 눈동자가 마치 난초꽃 사이 제비꽃망울 같았다고 생각했었다.


낭만의 정원에 찾아든 방문객은 이질적이면서도 풍경에 녹아든 하양과도 같았다. 그는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그저 등 뒤로만 늘어트린 체, 루예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표정도, 말투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루예나가 눈을 껌뻑이며 방금 들었던 말은 환청인지 고민하는 동안, 상대는 어느새 연못을 돌아 돌다리를 건너 정자에 도착해있었다. 아, 루예나는 짧은 탄성과도 같은 감탄의 비명을 내며 난간에 걸쳐있던 몸을 일으켰다. 알겠다, 이 만다라. 완전 어르신이다. 그 생각만이 루예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표께서는 그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요?”

아까 들었던 그 말이다, 역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루예나는 고개를 살짝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뗐다.

“그럴 리가요. 안녕하세요, 율리시스.”

아, 목소리 조금 삐끗했다. 상대는 루예나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소, 우리가 율리시스요. 헌데, 우리는 이 자리가 공적인 자리라고 듣고 왔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오? 설사 그런 것이 아닐지라도 상대 간의 첫 만남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아, 아니, 그런 건, 아닌, 데……요.”

이 만다라, 생각보다 굉장한 만다라일 것 같다…! 루예나는 삐칠 거리는 제 모습을 애써 가리며 호호, 웃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와주심에는 감사합니다. 제가 미숙하게도 기분을 감추지 못해 실례된 모습을 보였네요.”

“모름지기 약속이라는 것은 지키기 위한 것이니 앞서 왔다 해도 결례될 것이 전혀 없소. 대표께서도 알 법한 것에 이리 방정맞은 태도로 객을 기다리는 것은, 초대해둔 손님에게 예를 차리지 않겠다는 것이오?”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저, 일단 앉으시겠어요?”

그에게 존댓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런 불가항력인 것이다. 루예나는 늘 제 감에 충실했고 이번 상대에게는 공손히 대하자는 레이더가 삐삐 울리고 있었다. 루예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율리시스에게 제 건너 자리를 손짓하며 앉기를 권했다.

“다과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선호하시는 차라도 있으신가요?”

“수정과로 부탁하오.”

루예나는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젓고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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