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스토리 관련

독이 들어가고 있거든요.

어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_막간, 그 이후.

그의 막간의 식사

왜 이 자리에,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루시엘라 웨드거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첫 번째 생각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만찬은 자리에 걸맞게 호화스러운 구성으로 빛나고 있다.

따뜻한 김을 내뿜는 크림수프와 스테이크, 여러 가지 소스로 맛볼 수 있게 준비된 소스 그릇들과 신선한 야채. 식탁 중간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의 곁을 레몬 조각들이 상큼하게 꾸며져 놓여있었고, 스크램블 에그에는 녹아내린 치즈가 길게 늘어져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다. 낮인데도 준비된 붉은 와인은 얇게 썰려 먹기 좋게 놓인 감자 요리와 함께 자리하고, 오븐 파스타의 진한 토마토 향은 베이컨과 함께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자길 어서 먹으라고 신호하고 있었다.

이걸 다 먹고 나면 디저트는 뭐가 어떻게 나오려나, 그는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간을 보았다. 잠깐 머물게 된 베칼 가문의 안주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여기서 안 먹겠다고 하면, 내가 눈치챘다고 생각할까? 아니, 생각보다 멍청했는데 진짜로 식욕이 없는 줄 아는 거 아냐? 그동안 떡밥은 여럿 던져둔 거에 제대로 걸린 적은 별로 없었고… 그래, 그렇게 잘된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의 머릿속이 지난 일들로 팽팽 굴러갔다. 잠시 간의 사이가 식탁 위를 떠돌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마침내 식기를 들었다.

루시엘라는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그 맛은 집에서 늘 먹던 식사에 비하면 ‘그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에 상대적인 평가였다. 이 석찬은 자리에 어울리는 구성이었고 인간 나름대로 훌륭한 편이었다.

그래, 훌륭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완벽함이 기준이었다. 그러니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이 이물감이 빠졌다면 훌륭하다는 거지.

식사에는 해결사 루시엘라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걸 먹은 건, 만다라인 루예나였다.


메인 스토리

시즌 : 월광환상곡과 회천교향곡

어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

Benevolently Watching Over All

[ 네가 어떤 것을 보고 있든, 모든 희망에게 꿈이 있기를…… ]

~ 독이 들어가고 있거든요 ~


베칼 부인의 표정이 썩 볼만하다고, 루예나는 생각했다.

나름대로 평정은 유지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생각대로 안 되어서 눈가가 좀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식사에 들어간 독-그게 소량이든, 즉사할 정도든-정도는 만다라인 루예나에겐 별것 아닌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달의 만다라인 만큼 자연 회복 능력의 효과와 속도는 다른 만다라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금은 루시엘라의 몸이지만, 이 정도는, 뭐.

루예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꽤 재밌어 보이는 표정-루예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을 짓고 있는 부인에게 넌시시 말을 던졌다.

“어머, 부인. 어서 드시지 않고요. 댁의 식사가 매우 훌륭하니 이 집안사람들은 늘 먹을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겠어요.”

“호호……… 저는 괜찮답니다. 좀 전에 뭘 잘못 먹었는지… 속에 탈이 나서요.”

“아, 그렇군요.”

뻔한 대답에 루예나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만찬의 간이라도 미리 보셨나 보죠?”

“ㅇ, 예?”

부인의 몸이 잘게 떠는 찰나를 보았지만, 루예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너무 뻔했고, 그래서 지루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으면 다 끝이다. 그러면 즐겁게 놀러 가야지. 루예나는 미래를 열심히 그리며 자신을 열심히 달랬다.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오지 않았는가. 어차피 곧 다 부질없어질 텐데, 조금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루예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누군가 그걸 알았다면 또 악취미에 시동 거는 거냐고 태클을 걸었겠으나… 안타깝게도 같이 온 이는 루예나를 잘 아는 뮬 셀레의 일원이 아니라 페브리렐로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태연하게 입술을 한 번 닦으며 루예나가 말을 이었다.

“부인”

“ㅇ, 예. 말씀하세요, 해결사님.”

“제가 왜 그 많고 많은 가문 중에서 이 집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한 건지 아직도 안 궁금하신가요?”

“구, 궁금하답니다? 해결사님은 아주 귀해서, 비싼 몸이라고 들으셨는데 말이죠? 호호호…”

여전히 음식에는 입도 안 대고 똑같은 웃음소리만 내는 부인을 향해, 루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부인 곁으로 다가갔다.

“그건 말이죠……”

손끝이 아래서부터 위로.

“제가……”

천천히, 부드럽게.

“이 집을……”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목으로.

“제일 먼저……”

목에서 볼로, 볼에서 코를 거쳐…

“눈여겨봤기 때문이랍니다……”

코에서 이마로.

루예나의 검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의미로 말이죠.”

“해, 해결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

“부인이 제 식사에 손을 댈 만큼 배짱이 크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그냥 쉽게 갈 걸 그랬네요, 후후…”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내, 내게 어떻게 이런 무례를! 당장, 밖에 경비를,”

“그러니까, 무례인 줄은 아시는 거군요? 부인.”

루예나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고저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사람을 부르면, 사람이 아닌 것에게 불리는 듯한 기분을 주게 만들어서, 그래서 베칼 부인은 온몸에 돋는 소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 기회랍니다.”

“무, 무슨 말을,”

“식사.”

그 한마디에, 부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루예나를 돌아보려고 했으나 그의 이마를 누르고 있는 검지 하나 때문에 고개는커녕, 몸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드세요! 아주 맛있던데, 왜 자기 집에서 나온 요리를 손도 안 대세요? 나라면 손님이 먹는데 민망하지 않게 같이 먹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겠어요!”

부인에게 권유하는 그 목소리는 기괴하리만치 고저가 과장된 음색이었다. 정작 해결사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았는데도. 인간적이지 않은 태도가 베칼 부인의 기세를 부러트렸다.

“이건, 그러니까, 아, 아까 말했다시피! 속이 안 좋아서,”

“부인.”

루예나가 다른 손으로 부인의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가에 가져다 댔다.

“부인. 저도 먹었잖아요? 어서요. 집주인이 안 드는데, 손님이 어떻게 숟가락을 들겠나요?”

“나, 난 됐어요! 괜찮아요! 아, 그, 그러니까, 다, 다신, 이럴 일 없을 거예요! 제발, 제발! 잘못했어요, 다신 이러지 않을게요! 조용히 살겠어요,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비명을 지르듯 애원하는 부인의 목소리를 산뜻하게 넘겨버린 루예나가 두 손으로 베칼 부인의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이 부인의 눈과 입을 완전히 덮어버리자, 입과 손 사이로 흘러나오던 신음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린 식당은 일순간에 마법처럼 고요해졌다.

루예나가 부인의 귀에 가까이 속삭였다.

“부인, 부인은 지금, 가장 인간적인 방법을 저버리셨다는 것만 아시면 된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인의 머리가 사라졌다.

머리가 터졌다기엔, 식당 안은 너무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래, 그냥 단숨에 죽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쓸데없는 결론을 내린 루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베칼 남작 저가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택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식당 밖이 점점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예나는 제 몸을 한 번 점검하고,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무구와 힘을 점검한 뒤, 공간을 불렀다.

“소반체.”

〖 응 ! 엘 라 리 스 !

루예나의 사랑스러운 분신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루예나는 소반체에게 별사탕을 한 움큼 주며 다 먹을 동안 기다리기로 혼자 생각했다. 어차피 부려 먹어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먼저 좀 쉬게라도 해줘야지. 역시 난 착하다니까.

“자, 소반체. 다 먹었지?”

〖 응! 소반체는 뭐하면 돼, 엘라리스?

“자, 이제 할 걸 알려줄게! 어딘가에 페브리렐로라는 이름의 시공여행자가 갇혀있거나 묶여있을 거야. 가서 구해주고, 곤나에 태워서 나에게 데려와. 그러고 나면 나한테 연락할 필요 없이 바로 내 주변 반경 100km 정도만 정리해두렴. 어떤 일이든, 필요하다면 인간화해도 좋아!”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공간이 사라졌다.

루예나는 하품을 한 번 쩌억, 하곤 기지개를 켰다. 방금 사람 하나를 죽인 태도치고는 너무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죽든, 말든, 그것이 루예나와 무슨 상관인가? 루시엘라는 오늘 이 차원에 오지 않은 사람이고, 루예나는 만다라인데. 그래, 루예나는 본업을 착실히 수행해야 할 때였다.

직장에서의 외근이 꼭 빠른 퇴근은 아니지

처음 봤을 때와 전혀 감상이 달라지지 않는 곳이었다.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사람은 죽고, 죽이고, 약탈하고, 부리고, 강탈하고, 겁간하고, 농락하고. 뻔한 일들인데도, 한곳에서 모아보니 이토록 짜증 날 수가 없다.

왜 여길 왔더라? 맞아, 집행.

루예나는 집행을 하러왔다. 명을 다한 차원에 끝을 선고하려고, 차원의 핵인 중심 행성에 종말을 주려고, 그래서 다시금 새로운 차원으로써 깨끗한 시작을 주려고. 그러니까, 만다라들이 하던 말로 하자면…… ‘인간 물갈이’를 하려고.

늘상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양화의 동굴 토벌로 카이제 개체수를 감소하고, 회의에 참석해서 말살파들과 아웅다웅-어감처럼 귀엽진 않지만-싸우고, 공장도 꼬박꼬박 시찰 나가고, 신제품 아이디어 고민하느라 머리 끙끙 싸매고, 따로 찾아오는 신들 맞이도 해주고, 신전에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가끔 얼굴도 비춰주고, 그리고 또…… 아무튼.

그러니까 차원 관리도 그 많은 만다라의 업무 중 하나였다. 차원 사이에 큰 이상은 없는지, 제 계열의 신은 잘 일하고 있는지, 내 관리 구역의 차원들에는 문제는 없는지, 중심 행성은 잘 있는지, 차원 입구의 마그나의 경제에는 문제없는지, 말썽부리는 시공여행자는 없는지…… 뭐, 그런 것들.

그리고 루예나는 엔스파일에서 황제 노릇 하던 시절부터 따라붙는 이들은 죄다 뿌리치고 뛰쳐나가 땡땡이치다 돌아가기 일쑤이던 질 나쁜 상사였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외근이라니. 루예나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왜 언니는 자기 할 일을 나한테 시켜? 난 대표라서 할 일도 더 있는데! 별로 할 일을 착실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위한 핑계를 생각하던 그의 발걸음이 마침내 멈췄다. 상공 50km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인간에겐 재앙이었다.

홍수와 가뭄, 지진과 태풍, 아사와 폭동, 루예나는 그중에서도 전쟁이 가장 우스웠다. 서로 힘을 합쳐도 안 될 마당에, 자기들끼리 챙길 게 뭐가 그렇게 많다고. 종류도 다양하다, 작게는 사소한 갈등부터 욕심으로 일어나는 폭동, 약탈… 그런 것들 따위가 커지면 땅에서, 바다 위에서, 하다못해 이 공중에서도 내란이니 침략이니 하며 끊이지 않는 거겠지.

그래도 이젠 다 끝이야! 이어가기조차 지긋지긋한 삶에 고요를 줄게! 고통과 슬픔, 비난으로 점철된 괴로움에 안식을 줄게!

그게 만다라가 살아갈 의지를 잃은 세상에 내리는 마지막 축복이니까.

루예나는 끝없는 비명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옹호론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애도인 동시에,

그리고 마침내, 떴다.

그의 눈이 이채로 빛나기 시작했다. 두 손 위로 빛나는 문자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씨의 윤곽은 계속해서 선명해지어서 빠르게 손 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 마침내 육안으로도 선명히 보였으며, 한 번에 몇 개의 줄들이 지나가는 건지 알고 싶다면 유심히 봐야 할 만큼 많고 빠른 속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 위를 오가는 문자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빛줄기는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었고, 루예나의 등 뒤, 양옆, 머리 위, 발바닥에서부터 점차 진(陣)이 그려져 갔다.

문양과 문자들, 모든 테두리는 원형이었으나 속에 그려지는 것들은 똑같이 원형인 것도, 별 모양인 것도, 초승달의 형태인 것도 있었다. 누군가 봤다면 하나하나가 전부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기하학의 형태라고 했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그걸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예나의 몸 주변은 그저 시작이라는 듯, 빛줄기들은 하나를 다 그리고 나면 바로 다음 진을 그려나갔다. 루예나가 계속 공간 위에서 문자들을 빠르게 흘려보내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힘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진들은 점점 범위를 늘려나갔다.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 올려다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광경은 루예나의 눈앞에서만 펼쳐지고 있었다.

짧은 순간, 마침내 빛의 진들이 행성 전체를 감싸자, 루예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으나 루예나는 계속해서 말하듯 입을 움직였다. 다른 이가 봤다면 뭐라고 벙긋거리는 건지 입 모양이라도 따라 하며 추측하려 했으나 실패했을 것이었다.

그건 단순한 입 모양이 아닌 언어의 본질 자체, 진리를 깨우친다면 자연스럽게 듣고,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주의 위대한 이치는 지금, 행성의 인간들에게 말로만 부르짖던 세상의 종말을 친히 하사해주는 중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7일 동안 심판의 날이 계속될 것이고, 마지막 날에는 모든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땅이 열리리라!’ 따위의 속설이 있지 않은가?

당연하게도 루예나가 그런 날들을 불러오는 편이었으니, 대충 그렇게 된 이야기였다. 다만, 그 새로운 땅에 지금 사는 인간들은 아무도 가지 못하는 거지. 안타깝게도 내 마음에 든 인간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런 시시콜콜한 잡념이 슬쩍 들어와도, 루예나는 머릿속에서 금방 지워내곤 프로토콜을 가동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힘의 흐름-마법이든, 수식이든, 뭐든 간에-결국 이것도 오차 없는 계산으로 실행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컴퓨터의 경우는 그런 걸 하기 위해 여러 부품으로 데스크톱의 본체를 원하는 대로 커스텀 해서 세팅하지 않는가?

마법도 그런 것의 일종이었다. 흔히 보이는 TV나 게임 같은 여러 매체에서도 다양한 부류의 마법사들은 완드니, 스태프니, 마법서니 하는 여러 가지의 매개체 중 하나로 마법을 시전하고 그러니까.

여러 이야기의 설화와 신화들이 입증했다시피, 마법사는 마력을, 신은 신력을, 그런 신에게 힘을 받은 애들은 신성력이라고도 하고.

만다라의 경우는 자기들의 힘을 다력이라고 불렀는데, 존재가 존재다 보니 자기 힘의 일부를 알맞게 가공해 사용하는 형태에 가장 가까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앞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 매개체를 사용했고. 만다라에게 있어 매개체는 무구(武具)라고 불렸다.

무구는 각자에게 알맞은 형태로 가장 이상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는데, 대게는 당연하게도 전투에 쓰였고, 또 다른 형태로는 어딘가에 강림해 전능함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로도 형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루예나는 무언가를 행할 때 기본적으로 제 몸, 물리적인 육신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그의 입버릇 중 하나는 ‘굳이 슈퍼컴퓨터 놔두고 쪼잘한 단말기 쓰기엔, 컴퓨터 너무 놀리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방치하면 컴퓨터도 성능 떨어진다’라는 것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만다라치곤 꽤 독특한 성격과 행보를 보여온 동시에 몇십 이야기째 대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압도적인 강함을 알아 그 말에 아무도 태클 걸지 않았다. 제 몸 제가 맘대로 굴린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를 고깝게 보던 어떤-꼰대-고세대 만다라들은 그러다 육신이 망가지면 쉽게 고칠 수도 없는데 제 손해라고 뒤에서 흉이나 보았으나, 그런 선배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루예나에겐 물리적인 육신을 새로 지급해주는 전문 인(?)력이 있어 결국엔 뭐든 그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

이런 간단한 거조차 무구를 불러서 해야 한다니, 다들 얼마나 효율이 떨어지는지!

아, 그래서 언니가 나한테 부탁했나? 월급이 깎이는 정도로 이런 외근 면한다면 야, 언니입장에선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튼.

루예나의 발끝에서부터 3개의 빛무리가 피어올라 나선으로 몸을 휘감으며 정수리까지 올라오고 사라졌다. 딱 적당한 정도로 권능을 발현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끌어올렸으니, 이젠 거리낄 것도 없다, 루예나는 다시 한번 감았었던 눈을 뜨고, 내내 위를 보고 있던 양 손바닥을 뒤집어 아래를 보게 했다.

손안의 빛이, 낙하한다.

점차 부스러져 가며 흩날리는 것은,

어찌 보면 꽃잎처럼.

어찌 보면 눈처럼.

어찌 보면 비처럼.

『 내가 여기에 왔노라. 』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에 내리는 그런 것들처럼.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 뻗어, 나가면,

『 세상에 끝이 도래할 때, 』

그걸 보고 희망을 품는 이들에게 집행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마침내 그날이 오니, 』

누가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는가?

『 내가 당도한 오늘이 모두 부르짖던 구휼의 날이요, 』

누가 여전히 미래를 꿈꾸고 있는가?

『 길이 열리면 갈 수 있는 자만이 발을 올리고 벗어나리라. 』

왜 포기를 쉽게 잊어버렸는가?

『 그러니 심판이 시작되는 첫 번째 날에는, 』

이미 끝난 세상에는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 세상 모든 불과 물이 빛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길 계속할 것이며, 』

인간만은 반드시 살아남는다, 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 심판이 눈을 뜨는 두 번째 날에는, 』

왜 그들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남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 땅이 울고 하늘이 온갖 손을 뿌리치니 끝없는 외면을 볼 것이요, 』

누가 그들에게 만들어진 것조차 없는 운명을 속삭여주고 사라졌는가?

『 심판이 내려다보는 세 번째 날에는 』

어떤 용기는 무시당하거나, 또는 만용인데,

『 세상 너머의 것들이 저 멀리서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시선에 스러지고, 』

왜 그런 만용조차 갈 길이 없는 시대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가?

『 심판이 솎아내는 네 번째 날에는 』

어떤 사랑은 죽음보다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데,

『 빛도 어둠도 나눠 부르는 것이 무가치하게 될 것이며, 』

애수에조차 잠길 수 없는 감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 심판이 분류하는 다섯 번째 날에는 』

그래서 절망에 끝이 있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 생명은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 길을 떠날 것이요, 』

이미 끝난 세상을 다시 일구어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 심판이 행해지는 여섯 번째 날에는 』

이미 끝난 세상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 모든 소원이 대지 위로 돌아올 것이며, 』

도대체 누가 쥐여주고 떠났는가?

『 심판의 재단이 끝나는 날에, 』

그리고 왜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삶이 이토록 부질없다는 것은,

『 세상 모든 것이 마침내 끝나리라. 』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가?


그렇게 그 행성은 마지막조차 경시 당했다.

특별하다고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페브리렐로는 보았다. 상공을 뒤덮은 빛무리, 그건 거대한 결계였다.

그가 알기론 이 행성에 저런 규모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행성 밖에서 온 사람이라면 가능하다는 논지였다.

이번이 벌써 4번째 동행이었으니, 페브리렐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루예나라는 이는, 얼마나 달콤하게 반짝임을 노래하고,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기분으로 떨어트릴 만큼 냉정하던가.

좋은 척, 무해한 척, 정말 즐겁다는 미소를 보여주며 완벽한 힘을 보여줄 때는 모두가 넘어가 버려서, 내몰린 선택의 순간에 도움을 구하면 자신은 개연성이 없어서 도와줄 수 없다는 말로 빠지곤 방관자가 되어 은근슬쩍 모든 걸 즐거워하는 이.

만다라가 인간인 척, 구원이 절망인 척.

페브리렐로도 다른 시공여행자들처럼 L급 중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여행자인 루시엘라 웨드거에 대한 동경을 품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에게 들어온 모든 의뢰를 완수하는 해결사. 당연히 고용하기 위한 값도 비쌌다. 그리고 시공여행자다운 낭만을 가져서, 고액의 의뢰만 받는 게 아니라 본인만의 어떤 기준으로 의뢰를 수락한다는 풍문까지.

그게 자신을 홀리게 만든 거라고, 페브리렐로는 아직도 종종 돌이켜 보곤 했다.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다 털어서 모인 돈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는 단 한 가지를 믿고 루시엘라에게 찾아갔다.

당신이라는 시공여행자를 꿈꿨다고, 시공여행자가 될 때부터 당신처럼 되고 싶었노라고, 완수율 100%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해결사는 우주의 모든 해결사들을 넘어 거의 모든 시공여행자에게 동경이라고, 당신의 의뢰를 수행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좋다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아니 단 순간이라도 좋으니 동행하게 해달라고.

그런 구구절절한 고백 아닌 고백이 정말로 루시엘라의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나 중요한 건 일이 일어난 그다음이었으니까.

루시엘라가 그렇게 말했었다.

난 의뢰를 승낙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넌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넌 좀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뭐, 대충 그런 내용의 말들. 지금이라도 뒤돌아 떠나서 동경만 해도 괜찮을 거라는, 그런. 그때 말을 들을 걸 그랬는데, 페브리렐로는 아직도 종종 생각한다.

아니면, 행복에 겨워 뭐든 괜찮다고 말한 게 문제였을까? 루시엘라가 자신의 의뢰를 승낙했을 때 이미 늦었지만.

자신은 소일거리로 해결사를 하는 거고, 나는 이 우주의 진리와 이치를 세우는 토대 중 하나인 만다라, 루예나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인간에게 옹호적인 만다라라 더 멋지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루예나와의 첫 여행은 온통 납득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졌다. 엔스파일에 갔던 거? 괜찮았다. 갑자기 목적지를 산간도시 린데마론으로 잡은 거? 거기도 괜찮았다. 연쇄살인마 때문에 도시 안에 갇힌 거? 어쨌거나 우주에서 가장 강한 이가 동행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예나는 도시 내부의 일은 도와주지도 않고 사라졌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니 얘들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다는 건 뭐야, 난 당신의 여행을 동경해 따라왔는데?

도시에서 겨울을 보내고 나오자마자 다른 행성으로 넘어가면서, 그래도 이번엔 뭔가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건 없었다. 신의 유산을 회수하러 온 거니 바로 끝이라는 게, 도대체 뭐가 끝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 정말 해결사인가? 종교의 분쟁은 별일 아니라는 걸까? 도대체 루예나는 왜 해결사를 하는 걸까?

여기서 만나기 바로 직전의 만남은 앞선 두 여정에 비하면 오히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페브리렐로가 보는 루예나는 변칙적인 이였다.

오히려… 만다라도, 인간도, 어디에도 잘 녹아들 수 있는 만큼,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속성. 그래, 그런 속성을 가진 사람.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뭐든 다 아는 사람. 태양 아래서 춤추는 걸 봤는데도 눈 깜빡이면 자리에서 증발해버리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모순적인 사람.

페 브 리 렐 로 ?

그가 타고 있는 공간이 말을 걸었다. 그제야 페브리렐로는 제가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페 브 리 렐 로 , 괜 찮 아 ? 이 상 하 다 , 죽 으 면 안 되 는 데 ……

“아, 난 멀쩡해. 말 걸어줘서 고맙다.”

응 ! 죽 으 면 안 돼 ! 엘 라 리 스 가 슬 퍼 할 거 야 !

이런 생각은 그만 해야 한다,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도 좋지 않고, 상대방에게도 실례였다. 당장만 해도 자길 살리려고 공간을 부려 꺼내오지 않았나. 그게 만다라로써의 최고의 호의 같은 거겠지. 그래, 그런 셈 치자.

생각을 날려 보낼 겸, 그는 머리를 한번 저었다. 아직 여기서 할 일도 있으니 정신 차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기함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인간은 싫은 거에도 이유를 붙여야 납득해

루예나는 지상으로 내려온 지 오래였다. 숲속을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풍경을 둘러보았다. 숲은 완전히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에게 뭐 어쨌단 말인가?

완전히 타버려서 잿더미가 가득한 길-아니지만-을 걷다 보자, 공터가 나왔다. 나무가 다 타버린 바람에 생긴 검은 바닥의 공터였다.

시야가 탁 트여서 좋군. 그런 생각이나 하는 루예나의 시선 끝에 페브리렐로를 태운 곤나가 저 멀리서 하늘하늘 날아오는 것이 걸렸다. 곤나치곤 느린 배송에 루예나는 제가 냅다 일하는 바람에 분신들에게 뭔가 영향이 갔나, 따위로 잠시 고민했다. 정말 사소했다.

그 새 지상에게 가까워진 인간 하나와 공간의 일부분이 루예나 근처로까지 고도를 낮추자, 페브리렐로는 냅다 하차해 허겁지겁 루예나에게 달려갔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모든 재앙의 원흉은 옆에서 헐떡이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남정네를 돌아보긴커녕,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으로 결계진들을 훑기나 하고 있었다.

“루, 루예나! 오면서 본 게 전부 당신이 한 겁니까? 온통 불바다였는데,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고요! 그리고 어딘 또 홍수가, 아니, 이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쉬이……”

루예나는 보지도 않고 다가오던 그의 얼굴에 검지를 치켜올렸다.

“루시엘라, 라고 했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잊지 말기로 했잖아.”

이런 곳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니, 있더라도 없게 된 지 오래일 텐데. 급한데 별걸 다 따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뭘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그런 말을 해 봤자 게 돌아올 리 없다. 세상의 중요한 이치 중 하나는 잘 알고 있는 그는 바로 호칭을 고쳤다.

“……예, 루시엘라. 이게 다 뭡니까…….”

“이젠 봐도 모르나? 하고 있잖아요, 집행.”

“때가, 아니 때가 벌써 되었다고요? 아직 더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요! 말이 다르잖아! 좀 더 지켜봐도 괜찮겠다며! 내가 해야 할 일을 끝내는 정도의 시간은 있을 거라면서요! 마음이 바뀐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인간의 절박함이란. 알고는 있어도 정말이지, 내로남불 되게 만든다니까.

내버려 두면… 어디까지 매달리려나? 옆에서 계속 시끄럽게 뭐라고 말하는 페브리렐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루예나는 생각했다. 계속 이대로 두면 어떤 말까지 튀어나올까, 잠깐 고민해봤지만 역시 별 소득도, 재미도 없겠다고 판단한 루예나가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페브리렐로는 저와 떨어지는 게 두렵기라도 한지 허겁지겁 뒤를 쫓아왔다. 그럴 만도 했다. 세계가 온통 어둡고 붉은 아비규환이었다.

바야흐로, 행성의 종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그저 걷고 있었다.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사실은 꿈인가 싶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 계속되었다. 마을, 대도시, 신전, 성, 농작지, 호숫가, 집안, 주점, 여관방…… 강탈, 살인, 겁탈, 방화, 사기…… 온갖 죽음이 이 땅 위를 흐르다 못해 쌓여가고 있었다.

아무리 시공여행자라지만 페브리렐로조차 그를 바짝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분명 이 재난 중 어딘가에는 휘말렸을 것이다. 여행자는 종일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계속해서 주변을 보며 다녔고, 만다라는 당연한 걸 보는 눈으로 앞만 보고 나아갔다.

“일단은 너도 이 행성 위에 있었으니까 들었을 텐데.”

갑자기 시작된 루예나의 뚱딴지같은 말에 페브리렐로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내가 행성 전역에 쏜 그거.”

“……?”

“아잇, 정말! ‘왔노라, 심판하노라, 끝나노라!’ 이거!”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에엥? 재미없게… 아~ 나 완전 제대로 각 잡고 했는데~ 진짜 완전 간지나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파악! 했는데… 아~ 이런 걸 시공여행자가 보고 좀 이렇게 저렇게 퍼트려줘야 내가 좀 더 어떻게 잘 되는 건데두…”

정말 별거 아닌 걸로 안타까워하시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영혼 없이 루예나의 말을 맞장구치던 페브리렐로가 급히 루예나의 말을 잘랐다.

“잠시만, 저건 뭡니까?”

“아, 뭐…… 아, 저거.”

이젠 산맥 위를 걷고 있던 두 사람이 절벽 아래를 보았다. 페브리렐로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거대한 무쇠솥이 보였다. 아주 두껍고, 엄청 깊어 보여서, 한번 달궈지면 장난 없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하게 만드는 엄청나게 큰 솥.

와, 정말… 저게 다 뭐지?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으면 드는 생각이 이런 건가? 페브리렐로의 두 번째 반응은 응시였다. 무쇠솥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깥에는 거인이 넷이나 있었다.

마치 거인이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서인 것 마냥, 한 거인은 솥 안에 물을 쏟고 있었고, 다른 거인은 계속 어디서 잡아 온 건지 모를 인간들을 던져 넣고 있었고, 또 한 거인은 이상한 약재 같은 걸 솥 안에 뿌리는 중이고, 다른 거인은 솥 밑에 쭈그려 앉아 불을 피우려고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아우성과 비명이 뒤섞여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둘이 있는 절벽 위까지 소리가 힘을 잃지 않고 올라올 지경이었다. 페브리렐로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을 옆으로 홱 돌렸다. 귀까지 막고 눈을 질끈 감은 그와는 다르게 루예나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페브리렐로가 루예나의 반응을 살피다 입을 뗐다.

“루예나, 이건,”

“응, 안 돼요.”

“정말 구할 수 없는 겁니까?”

“응, 못 구해요.”

“그, 그래도…… 아, 당신은 만다라잖아요!”

“아! 크게 말하지 말래도! 아, 진짜, 말 정말 안 듣는다니까…….”

이 와중에도 그게 중요하구나. 페브리렐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도, 당신은… 그렇다 쳐도 당신은 해결률 100%의 L급 해결사 시공여행자잖아요…! 왜……”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듯, 말꼬리를 흐리는 페브리렐로를 힐긋 곁눈질한 루예나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알고 나면 내가 왜 이걸 들었나, 싶어질 텐데?”

“그래도 들어야겠습니다, 당신이 왜 손 놓고 있는지!”

페브리렐로의 대답에 루예나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보았다.

저 멀리, 루예나의 동생이 제 누이들과 교대하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에휴…… 우리 여행자는, 받으면 안 될 이상한 의뢰나 받아서 이런 고생을 다 하고…….”

루예나가 중얼거렸다. 페브리렐로는 반문하려고 입을 뗐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딴 세상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어달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뢰란 말인가?

그런 건 루시엘라 웨드거나 가능한 건데도. 그리고 그런 루시엘라에게도 거부권이 있는데.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나 못 만났으면, 꼼짝없이 행성이랑 같이 매장당할 뻔하고…… 운도 엄청 좋네.”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이 계속됐다. 페브리렐로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한 말 중에선 틀린 게 없었다.

“나도 잘해주고 싶은데, 어떡해… 하필 내 구역도 아니어서 뭘 해줄 수도 없고, 땅 잘못 걸린 걸 누구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에휴, 하다못해 옹호론자 구역이기만 했어도 끝내주는 인간 찬가 수기 하나 나왔을 텐데…….”

전부 알아듣지 못한 페브리렐로가 요상한 표정을 짓자, 그걸 힐긋 본 루예나는 다시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휴 진짜, 어쩔 수 없지, 뭐! 언니는 인간말살이나 주장하고 다니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일어나야 하는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의 흐름, 지고한 이치, 당연한 결과.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난다.

생명이 타오르고, 지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고한 이치. 달은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며, 태양은 그렇지 않고 늘 뜨던 대로 뜨는 것이 세상의 규율인 거다. 그건 생명도 똑같았다. 죽을 때가 되어 죽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 중 하나. 지금 명을 달리한다면, 그게 그 생명의 운명인 거겠지.

운명을 바꾸고 개척해나간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을 테니까. 루예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추억이 있었던가? 그 모든 일에는 한 점의 티끌 없이, 순수하게 불타오르는 생명만이 존재했다.

그러니, 죽음으로 오라며 손짓하는 것들에게 이미 휩쓸린 생명은 그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완전히 태양이 지고 나서야, 저 먼 하늘에 자신의 언니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루예나는 입을 뗐다.

“저 솥 안에, 지금 독초도 같이 들어가고 있어.”

아무리 나여도 독 먹은 인간은 좀, 귀찮아서.

뒷말은 삼킨 루예나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허망한 표정을 짓고 한동안 가만히 있던 페브리렐로는 루예나가 시야 끝에서 사라지려고 하자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가 아직 세상을 내리쬐고 있는 밤이었다.

여기엔 독이 들어가고 있어

세상이 저물어 가고 있는 어느 행성이 있었다.

어떻게든 뭔가 해보려던 인간이 있었다.

그때 진리가 나타나 독을 부었다.

진리가 말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손도 대지 마.

인간은 진리를 보았다.

진리도 인간을 보았다.

인간은 진리 속에서 보았다.

아, 그것이 세상의 불변이라면.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진리가 속삭였다.

깊이 생각하면 안 돼. 그러라고 한 적 없는걸.

인간이 고뇌하기 시작하자 진리가 떠났다.

독이 든 병 하나만을 남기고.

그런데 그건, 무슨 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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