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끝나지 않는 리로드 에피소드
쳇바퀴 돌 듯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서 무엇 하겠는가. 밤이 오면 아침이 밝는다, 아침이 밝으면 밤이 온다. 자연의 섭리에 깃든 지나친 필연성과 인과 관계가 운명이란 말의 낭만을 오히려 무색하게 만든다. 지나친 확실함에는 낭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두가 미래라는 불확실한 꿈속에서 유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어스름이 찾아들고 밤이 깊으면 아침까지 온기를 잃지 않고 붙잡아 두는 꿈을 꾼다.
꿈을 꾸는 게 싫은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단지 덧없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절감하면, 그때부터 참을 수없이 추워진다. 사실은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 추우면 추운대로 몸을 덥히고 싶어지니까. 꿈이 없고, 미래가 없는 나에게 추위가 당장 동기를 부여해 주는 적당한 변수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행복과 불행, 낮과 밤, 온기와 추위, 운명과 우연. 대체 이것들을 이분하여 정의하고 판단하는 일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걸까.
꿈을 꾸고, 꿈에서 깬다. 또 다시 꿈을 꾼다. 언젠가 잘 자, 로 끝나지 않고 다시 한번 아침이 찾아 온다면. 아침까지 함께 마주보고 웃으면서 덧없는 백일몽을 만끽할 수 있다면. 그렇게 다시 찾아 온 아침에는 네게 좋은 아침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그러나 나는 꿈을 꾸고 꿈에서 깨어나길 반복할 뿐, 결코 깊은 잠에 빠지지 않는다.
결속을 우선하여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포기할 것인가, 스스로의 유기체적 욕구를 우선하여 환경으로부터 포기당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내키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환경이 제시하는 요구에 따르다 보면 내가 나를 서서히 버리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간수 씨는 제멋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조작하고, 있지도 않은 나를 만들어 낸다. 있지도 않은 나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목소리들. 아마 내가 나를 붙잡지 못한 대가겠지. 외부에서 조달받은 규범과 사상. 개성을 상실한 빈 껍데기. 기계적이고 전형적인 진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쾌해진다. 나는 나를 그 정도까지 잃어버리긴 싫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까지 뺏기고 싶진 않다. 차라리 죄책감을 자극했더라면 타인의 판단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었을 텐데. 타인의 허상으로 대체된 빈 껍데기 같은 나를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는 내 일에 대한 책임을 나 대신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 싫다. 어떨 때는 연인이라서. 어떨 때는 간수라서.
그것도 부모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러는 나는 왜 책임을 저버렸을까. 타인을 자신의 부속품이라고 멋대로 착각하고 책임감을 느껴도 좋은 건가. 나에게 결속되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단념하게 만든다고? 과연 어디까지 기대해도 좋은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러다 문득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단념하게 되는 건 내 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기만의 가면을 쓴 채 말라죽어 갔겠지. 미래를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이 의무감으로 번져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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