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에도 빛은 들고.
함가 합작 로그 < 그믐밤, 새벽이 오기 전까지…… >
기도의 순간
긴 세월을 사는 동안 수많은 일을 스쳐 지나갔지만, 단 하나만 기억나는 순간을 꼽아보라 한다면…
그건 누가 뭐라 해도 단언컨대, 그 애를 만났던 때일 것이다. 그래서 그 애도 같은 마음이길 빌었다. 내가 너에게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남고 싶다고, 너도 내가 그런 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신도, 뭣도 믿지 않는 남자가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그믐에도 빛은 들고.
[ 할 수 없다는 것, 마치 쓰레기통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쌓아두게 되는 일. ]
해피 엔딩
막연하게 느껴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대체로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인 순간들. 하나하나 쌓였을 때, 자신의 근간을 이루게 될 것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시작은 전부 호기심이었다. 관심을 잡아끄는 것은 다양했고, 하나를 지나면 또 하나가 나타났다. 산 넘어, 물 넘어 마주하는 것이 자신을 압도시킬 만큼 거대한 풍경임을 알고 있었다. 그 애도 그런 존재가 되었다. 사랑하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던가? 그는 그걸 몰라서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한다는 건 그런 일임을, 주변을 계속 봤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보기만 하던 것과 노력해서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 사냥꾼과 사냥감처럼, 둘은 잡힐 듯 말듯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게 제대로 된 연애를 위한 첫 번째 순서라는 걸 몸으로 느낀 끝에, 고백에 성공했다. 진실한 마음의 고백은 어느 매체에서나 달콤하게 그려내고, 두 사람도 그렇게 잘…… 아니, 아니지. 그러면 모든 게 마법처럼 다 잘 해결될까?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게 끝을 맺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기만 할까?
당연하게도, 요즘의 수많은 매체에서 조명하듯, 답은 '아니'다. 교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해가 바뀌자마자 그 애가 잠시 관계를 멈추자고 했다.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렇다고 주변에서 위로해줬지만, 알게 뭔가?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세속적인 것에 얽매였던가? 진실된 것은 이상과 감정이 도출해내는 관념뿐인데도. 타인의 시선 따위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지만 원한다니 들어주었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애니까.
윤수민에게 인간은 어려웠다. 어리고 여린 연인이었던 조혜린은 혼자서도 잘하는, 정확히는 잘 해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너무 잘 해내려고 해서, 도움도 받기 원하지 않아 보이는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 말이 그런 뜻인 줄 알았으니까.
'선배, 선배가 다른 종……족-혜린은 만다라니, 종족이니, 하는 말을 내뱉는 걸 당시에는 어렵고 부끄러워했다.-인 건 알아요. 이젠 나도 그렇다는 걸 알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긴 지구고, 사회적 통념이 있는 곳이니까요. 제가 한국의 나이로 성인이 될 때까지만 잠깐 이 관계를 멈출 순 없을까요? 일시 정지처럼요.'
그게 그냥, 이성적으로의 교제를 멈추자는 건 줄, 윤수민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는 방탕해서 아무나 가리지 않고 만났고, 나이 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던 쓰레기였다. 시원시원한 불연소 쓰레기였던 그는 어떻게 하고 다녀도 잘생겼다며 다들 좋아했다. 혜린을 만나고 나서 삶의 태도가 바뀌었으니 혜린은 아무래도 그의 삶에 있어 큰 전환점인 게 맞긴 했다. 다만, 전환점을 맞이했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가 되긴 했지만.
그러니까,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건 좀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특히 두 사람에게는 더.
감정의 표정
얼마나 지났을까, 인간의 시간은 긴 것 같아도 짧기에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좀 추웠던 어느 날, 다 같이 놀이공원에 갔을 때, 루예나가 한창 웃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여길 보라며 냅다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20180822 흑백 1인 커미션
"하나, 둘, 셋, 까꿍!" 찰칵, 소리와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바로 흑백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모습이 선명해지었지만, 그 사진은 그의 손에 들어오지 못했다. 루예나는 다른 사람에게만 줄 거라고 했다. 그 다른 사람이 혜린이었다는 건,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수민은 가끔 그 사진이 생각난다. 머리가 짧았던 시절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알았다면, 별것 아닌 일로 진심을 담아 활짝 웃는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알았다면, 진짜 안 줄 거냐고 더 졸라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그는 혜린을 만나고 난 후론 머리카락을 단 한 번도 짧게 자르지 않았다.
그렇게 환하게 웃던 시절은 갔어도, 그때의 추억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 있으나 한참 빛바래버린 그것. 윤수민은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확히 모른다. 위선과 가식에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착함에 지쳐서,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아서. 그래서 기대하지 않기로 했는데, 혜린이 나타났다. 그를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말하고 싶어서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대는 감정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런 나를 나로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감정들은, 어떤 표정의 가면을 쓰고 대해야 하는가.
늘 쉬운 일만 찾아가면, 꼭 항상 어려운 일이 그를 따라온다. 삶은 빙글빙글, 어려운 존재. 윤수민에게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는 존재.
손끝의 인연
길다면 긴 삶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시간과 함께 머리카락도 길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르면 쳐내고, 늘 그렇게 짧은 머리를 유지했다. 그가 마음을 바꿔 먹은 건, 한숨처럼 지나가던 연인의 말 때문이었다.
'있죠. 선배, 다들 머리가 길던데, 나도 머리라도 길러야 하나?'
그는 단발 아닌 혜린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걸 생각하기엔 지금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겠지. 아니라고, 그런 게 고민이면 내가 길러도 되는 문제 아니겠냐고. 머리를 기르는 게 뭐 대수겠어?
대수였다. 도대체 에르아 누님과 루예나는 이걸 어떻게 관리하고 다니는 거래? 하지만 혜린이 제 긴 머리카락을 만질 때만큼은, 표정이 편안해 보여서 그냥 계속 기르기로 했다. 피곤해 보이는 혜린의 삶에 한줄기 사소한 빛이라도 준다면, 이 머리카락의 길이는 그걸로 쓸모를 다한 거다. 그래, 업무 도중 우연히라도 혜린을 마주치는 날에는 얼마나 즐겁고 기뻤던가? 그 시절의 설렘이 바래졌을지언정, 사라지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진심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또 오겠는가? 그는 잘 모르겠다.
혜린이 주는 감정은 어떤 무언가가 샘솟는 것과도 같았다. 그건 마치 루예나가 가끔 쳐주던 타로의 어떤 카드가 생각나게 했다. 그 카드가 의미하는 것은 감정, 예술적인 것들과 생각의 영감이 넘쳐나게 만드는, 샘솟게 만드는 근원이 있다는 것.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솟아나게 만다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게 너였겠지. 그가 혜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될 때면 늘 곱씹는 주제 중 하나였다.
루예나는 그걸, '손끝의 붉은 머리카락 실'이라고 부르고 다녔었다. 무슨 뜻인지는 둘 다 가장 나중에 알았다.
온기의 잔향
그날의 혜린은 울고 있었다. 그는 제 연인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연애하기 전, 저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납치당했을 때도 울진 않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서럽게 했지.
불안하고 두려우면 손에 땀이 난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내색하진 않고 있겠지, 따위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윤수민이 지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건, 왜 우냐고, 괜찮다고 말하며 혜린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괜찮다는 말로도 해결될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정말 힘들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동안도 계속 힘들었는데 이런 일이라고 못 이겨낼 것 없어요. 하지만… 내가 옆에 기댈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건 절대로, 옆에서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옆에 있어만 주세요. 나는, 나는 처음이라 실패하고, 울 수도 있어요… 근데, 옆에 누군가 있으면 위안이 돼서, 울진 않을 거 같아요.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거니까, 혼자일 때보다 힘이 나요. 혼자이기에 막막한, 몰려오는 두려움, 그런 걸 어떻게든 지워볼 수 있게… 옆에만 있어 주세요. 그거면 돼요! 무슨 일이든 힘든 것만 계속되진 않으니까요. 그렇죠…?“
마지막에서 꼬리를 끌던 '그렇죠…?'는 불안으로 옅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좀 더 일찍 혜린과 얘기해보면 좋았을까?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입안이 쓰다. 관계를 멈추자는 게, 아무래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수민이 윤수민으로 있지 못하고 드레케논만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는 명목하에 방관했다. 그게 그가 스스로에게 내린 현재 상태에 대한 판단이었다. 감정의 교류라는 건, 너무 어려워서 뭐라고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수민은 제가 그 대상 중 하나가 될 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좋아하면, 지고 들어가는 거라고 민재윤이 그랬는데.
“옆에 있을게. 누가 뭐라던, 그냥 옆에 있을게.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겠어. 네 뜻을 존중해서 거리를 뒀는데…… 그냥 옆에 있을게.
네 말대로 아무것도 대신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게.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옆에 있을게. 네가 기댈 수 있게.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도 돼.
그거면 돼?“
그거면 돼요. 그날 처음으로 혜린이 울다 말고 웃었다.
윤수민의 세계가 하나로 엮여간다, 그를 중심으로 단단히 붙들려져 간다. 세상의 구심점은 하나이고, 이치는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며, 그가 진리 그 자체이다. 조혜린만이 그를 살아 움직이게, 숨 쉬게 만들고, 따스함을 준다. 이젠 온기가 잔향처럼 남으면, 그제야 비로소 윤수민은 제 주인이 다녀겠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믐에 드는 빛
보통, ‘밤’ 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조혜린을 떠올리곤 했다. 보편적이고 당연한 인식이자 관념이었다.
인간 출신 밤의 만다라, 최초의 마법사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소녀, 어느 날 갑자기 마법계의 신데렐라가 된 고등학생…… 수많은 타이틀이 혜린의 뒤를 따라붙었다. 수민은 당연히 보았다. 혜린에게 몰려드는 인파, 필터를 거치지 않은 무례한 질문의 파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사진 요청과 사인 부탁. 그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수민은 인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 혜린은 눈빛으로 도와달라고, 그런 신호라도 보냈던 건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밤이 지나고 내면, 새벽이 찾아오고 해가 떠올라 아침이 된다. 두 사람은 약속을 정했다. 밤에는 같이 있기로, 한쪽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은 다 들어주고, 다음 날 밤에는 반대로 하기로.
둘은 연인이지만, 연인의 관계로 시작된 동업자의 관계였다. 불친절한 직장에 데리고 온 사수와, 종족, 전공, 뭐든 그 자체가 다르고 새로운 신입. 신입은 직장에 적응하는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사수는 당연하게도 자신의 책임이 맞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관계가, 혜린의 20살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그것보다 더 당연한 관계가 과연 존재했을까? 둘은 지금의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유대감, 다정함, 깊은 사랑과 가늘고도 긴 확실한 믿음. 보라, 그 증거가 그의 머릿결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혜린의 머리 스타일이 어떻든, 이제 방탕한 생활을 하고, 남의 말에도 잘 신경 쓰지 않는, 짧은 머리의 윤수민은 없는 것처럼.
그러니 이 품에 안긴 것은 절대 놓아줄 수가 없다, 절대……
@HIYARU 2인 커미션
또 다른 그믐
사랑스럽게도, 정말 사랑하니까. 네가 날 어떤 눈으로 보든, 우리의 그 긴밀한 시간이 날 저버리지 않게 만들 것임을 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너만큼은.
그러니까, 무력행사자의 제어자는 단 한 사람뿐이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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