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에서
만년주인
고시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은 김치와 밥 정도가 다였다. 만년은 언제 담갔는지 가늠이 안 가는, 익다못해 뭉그러진 김치를 혀로 눌러 해체하며 밥 한 공기를 꾸역꾸역 삼켰다. 다른 고시원에서는 라면도 준다던데. 옮길까. 만년은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로스쿨도 합격했는데 웬 고시원? 오랜 시간을 지내온 공간을 떠난다니까 아직 실감이 안 나나. 늘 곤두서있던 신경줄이 합격 소식 이후로 감감해진만큼, 만년은 스스로에게도 너그러워졌다. 깨끗이 비운 밥그릇과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남긴 김치를 정리한 만년은 이름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와 책상과 옷장을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집어넣은 4평이 오늘따라 넓었다. 만년은 노끈으로 미리 묶어 침대 위에 둔 문제집들을 손으로 툭툭 밀어보다 침대에 앉았다. 묵은 것들을 다 내다버리고 새로운 것을 들일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엄마도 오랜만에 보겠네. 그동안 연락도 못 했는데. 책상을 검지로 두드리던 만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어요~ 맥아리 없는 목소리였음에도 듣긴 들었는지 문이 열렸다. 주인이었다. 만년은 책더미 틈에 낀 채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웃는 얼굴로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일삼았던 주인이 옅은 미소와 함께 문가에 기댔다.
- 만년 학생, 축하해. 잘됐다. 아니지, 주 변호사님이라고 해야 하나?
- 하하...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지내다 가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패턴이라, 만년은 주인의 의중을 읽지 못한 채 조용히 의아해했다.
- 혹시 특별히 말씀 주실 게 있나요?
- 응? 아니.... 만년 학생이 나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못하는 것도 많이 도와주고. 고마웠어서....
- 괜찮아요. 제가 짜증 많이 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하죠. 변시 합격하면 그때 또 찾아올게요. 고기랑 이것저것 사들고.
앞으로 겹칠 일은 없겠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안 좋은 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만년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는 주인에 최대한 신뢰가 갈만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이 잠시 만년 자신을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주인이 어색한 목소리로 반찬 맛있는 거 해둘테니 저녁 먹고 가, 말하며 돌아섰다. 만년은 대답 대신 느릿한 목례를 하고 벽지의 무늬를 눈으로 더듬었다. 먼지와 습기가 엉켜 무늬가 제각각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다니. 만년은 눈을 끔뻑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친목인지 좆목인지 시간도 존나리 남아도신다, 생각하며 억지로 참석했던 고시원 고기 파티 때 강제로 받은 전화번호를 써먹을 때였다.
누나. Books too heavy.... 이젠 못 본다니 까비. 래퍼가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만년은 '새 랩 멋지다' 정도로 래퍼를 다독여주고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낑낑대며 책들을 다 옮기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래퍼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배달앱이 켜져 있었다. 얘는 평생 소원이 누룽지인 편이구나. 만년은 로스쿨이니 예비 변호사니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치킨을 얻어먹을 생각으로 눈을 반짝이는 래퍼에 피식 웃었다. 두 마리 시켜. 래퍼가 환호하며 후다닥 주문을 완료했다. 만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래퍼의 자작 랩을 흘려들었다.
학기 시작 전까지 뭐하지. 특별한 계획이랄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당장 치킨 오기 전까지 뭘 할지도 정해진 게 없었다. 만년은 래퍼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며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앞서가며 계속 재잘거리던 래퍼의 말이 잠깐 멈췄다. 한 발 내딛은 만년은 그 이유를 바로 이해했다. 부엌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어느새 래퍼는 부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긴. 남자들은 이십대 중반까지도 키 크니까 많이 먹지. 느릿하게 부엌에 들어선 만년은 입이 댓발 나온 채 주인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래퍼에 키득거리다 식탁으로 눈을 돌렸다. 엥? 만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에 주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맛있는 반찬 해준다고 했으니까. 자잘한 사이즈의 생선구이와 시금치무침, 무생채와 오뎅볶음이 놓인 가운데 찌개를 올릴 예정이었는지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런 반찬 why only now? 손을 휘적여 막 시작된 자작 랩 작사를 멈춘 주인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미역국이랑 된장찌개랑 무국 중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미역국엔 어묵 넣으려고. 만년은 덩달아 머뭇거리다 얼결에 미역국이요, 답했다. 주인의 표정이 오늘 본 중 가장 밝아졌다. 잘됐다. 내가 백반집에서 일할 때 미역국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전수 받았거든. 만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간절한 눈빛의 래퍼를 알아차리고 카드를 넘겨주었다. 결제하고 방에서 알아서 먹어. 난 주인 아주머니랑 밥 먹을게. 카드를 낚아챈 래퍼가 No prob, 말하며 부엌을 나갔다. 만년은 그 사이 가스레인지로 돌아간 주인에 조용히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어떤 식으로든 쓸 생각이었는지 이미 불려둔 미역이 도마 위에 놓였다. 그 앞에 선 주인이 통통통통 소리를 내며 미역을 써는 동안, 만년은 주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합격 소식으로 잠시 찾아왔던 마음의 여유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뺐다. 만년도 모르는 사이 몇 마디가 다물렸던 입을 기어코 비집고 나왔다.
- 왜 갑자기 잘해주세요? 저 나중에 뜯어먹으실래도 뭐 없어요.
주인은 답이 없었다. 토막난 어묵을 냄비에 넣고, 참기름으로 볶다 도마로 되돌아가 미역을 써느라 답할 틈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로 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흥, 콧방귀를 뀌며 턱을 괸 만년은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답이 돌아와 눈썹을 꿈틀거렸다.
- 알아. 그냥 해주고 싶어서 그래....
공기 중으로 힘없는 목소리가 흩어졌다. 울음을 참는 목소리였다. 만년은 당황한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세요? 만년은 어느새 칼질도 멈췄음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안 울어. 만년은 도마 위에 놓인 손을 붙들고 주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는 거 맞네, 미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던 만년은 식탁에 놓인 휴지를 손에 감은 뒤 주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우는 게 아니라면서도 조용히 만년의 손길을 받던 주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됐어. 만년은 지금 주인의 말은 믿을게 못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벗어나려는 주인의 손목을 붙든 채 계속 새어나오는 눈물방울을 닦았다. 어색해진 상황을 무마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 앞이 어질했다.
- 주인님 저 진짜 좋아하시나보다~ 저 간다고 하니까 맛있는 것도 해주시고. 우시고. 진짜 사랑하는 수준인데?
곧바로 경박스레 터질 웃음을 예상하며 같이 웃을 준비를 하던 만년은 예상했던 타이밍에도 잠잠한 주인에 직감했다.
- 내가 어떻게 그래.
맞나보다.
-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래.
맞나보다, 진짜로.
만년은 당황한 표정을 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울음을 최대한 억누른 채 담담한 목소리를 연기하는 게 보였다. 책을 옮기기 전, 제 방을 찾아왔던 주인의 표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문득 기억났다.
- 아줌마 저 좋아해요? 슈퍼 아저씨랑도 사귀었으면서.
- 아니야.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닌 건지, 슈퍼 아저씨와 사귀었던게 아닌 건지. 멍하니 생각하던 만년은 후자가 기정사실임을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 죽겠어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우긴다고. 만년이 바삐 머리를 굴리는 동안 불에 올려둔 냄비에서 탄내가 올라왔다. 만년은 불을 끄는 체 도망가려는 주인의 손목을 잡은 채 손을 뻗어 불을 껐다.
- 언제부턴데요?
- 그런 적 없다니까....
- 왜 그런 적이 없어요? 아니, 애초에 왜 거짓말을....
집요한 질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주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만년은 제 볼 위에 놓인 주인의 손에 눈을 끔뻑였다. 주인은 숨을 참기라도 하는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서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 학생, 학생이 다른 시험 준비하지 않는 이상 여기로 안 돌아오잖아. 동정 받기도 싫고 지금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부탁할게.
만년은 답을 않았다. 초조했는지 주인이 덧붙였다.
- 얼굴 안 보면 마음도 사라지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마 위에 놓인 주인이 뻐끔거리며 빌었다. 제발 넘어가달라고. 분수도 모르는 마음은 고마움과 애정과 친숙함으로 분리수거해 내놓으면 그만이니 모른 척 지나가달라고. 만년은 알겠다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온 것을 부지런히 뱃속으로 내리누르며 우선 주인이 눈물을 그치기만 기다렸다. 이야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 ..+ 2
댓글 1
메모하는 땃쥐
2편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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