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연
꽃집<리모네>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짧게 잘린 줄기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떨어지는 소리와 막 끊긴 줄기 틈에서 피어오르는 독한 풀냄새, 생화향이라고 포장해 판매하는 향이 실은 생에서 끊어진 풀들이 내뿜는 향이라는 걸 대놓고 선전한다면 그 향수를 사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뭐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요란스럽게 홍보하거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꽃다발을 만드는 풍경을 눈 앞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텐데 방향제 업체들이나 향수 회사들이 그들의 추악한 면들을 감추려 애쓰지 않아도 소비자가 눈감아준다니 대단히 편리한 현실이다. 물론, 꽃다발을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잘린 절화라는 것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 테니 추악함에 대해 논하는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생화향이라는 향을 팔아치우고 꽃다발을 사러 오고 그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꽃집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곧장 보이는 카운터 석에 앉은 대학생 안지연은 생각해봐야 답도 없고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내지 않을 생각들을 멈추고, 이 새로운 일터에 출근한지 며칠이나 되었는지를 속으로 세어 본다. 월급을 두 번 받았고 다음 주면 다시 월급날이 오니 이제 세 달 째인가. 제 뒤에서 또각또각 거침없이 장미 줄기를 아작내고 있는 아름다운 사장은 보기보다 대하기 까다롭지 않았다. 전에도 해본 일이었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고 손님이 없을 때 책을 읽거나 과제를 꺼내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화려하게 생긴 젊은 사장이고 동네 꽃집 치고는 여러가지 이유로 유명한 것 같아 긴장했지만 아무튼 사장이 알바생인 지연에게 기대하는게 많지 않았다. 그저 가게를 지킬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주문이 들어온 꽃다발은 모두 본인이 직접 만들고 꽃 관리도 아침에 한 차례 직접 했다. 그리고 주문받은 꽃다발을 만드는 일을 하고 나면 그냥 퇴근하는게 사장의 일상이었다. 아무튼 가게 영업에 목 메는 분위기가 없다. 장사가 잘 되는 달에도 안 되는 달에도 그 방침은 변화가 없었다. 물론 다른 알바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안지연은 통장에 제 때 약속된 금액이 찍히는 것으로 만족했기에 이 곳에서 일하는 것에는 만족하고 있었다.
뒤에서 짧은 한숨소리가 들리면 꽃다발이 하나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디자인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엔 꽃집 안이 최대한 조용하기를 바라는 눈치였기에 사장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안지연의 주 업무는 조용히 있기 혹은 가끔 있는 손님을 최대한 조용히 응대하기 정도였다. 그렇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잡 생각이 늘었다. 아무튼 저걸로 픽업 주문의 수량은 채워졌으니 도구들을 정리하고 손 씻는 소리가 들린 후에 사장은 가게를 제게 맡기고 떠날것이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이 날은 평소와 조금 다르게 곧장 도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건 드르륵, 하고 유리 문을 밀어 여는 소리 그리고 으음...하고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사장의 목소리. 안지연은 집중하기 좋으라고 살짝 줄여두었던 음악의 음량을 다시 키우려던 손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뒤돌아본다. 꽃을 보관하는 곳에 환하게 켜진 불이 사장의 얼굴에 쏟아진다. 안경이 얹어진 섬세한 옆 얼굴, 사장은 꽃을 고를 때 꼭 안경을 쓴다. 은테 안경 아래로 눈을 깜박일 때 마다 속눈썹이 꽃잎처럼 하늘거린다. 짙은 색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얼굴인데 왜 이리도 또렷하게 보이는지, 그냥 미인이라 그런 거겠지만 안지연은 젊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사장 같은건 존재하면 안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부류기 때문에 그냥 한번 의문을 가져 본다. 혼혈이거나 외국인인가? 잠시 꽃들을 바라보던 여자가 그 안에서 카라 몇 송이를 꺼낸다. 그 손 끝에 든 풀 물은 그가 오랜 세월 꽃을 만지는 일을 했음을 증거한다. 이러나 저러나, 안지연이 상관할 바는 아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원래대로 꽃집의 문간이나 바라보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카라 다섯송이. 받쳐주는 잔 꽃이나 풀 같은 건 하나도 고르지 않았지. 따각 따각 꽃의 줄기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안지연은 카라 다섯송이로만 이루어진 꽃다발을 상상한다. 노란 술이 뻗어진 흰 꽃을 감싼다면 무슨 색이 좋을까,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포근한 크림색이 무난할 것이다. 아니면 톤 다운된 녹색도 나쁘지 않을 테고, 조금 분위기가 있는 꽃다발을 만든다면 버건디도 나쁘지 않겠지. 사실 이런 것들 보다는 저 사장이 주문도 받지 않고 만든 꽃다발이 누구의 손에 들려질 지가 더 궁금했지만, 상상이건 뭐건 어느정도 정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 안지연은 이제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노란색이네...."
"이 꽃다발이요?"
그러니 무심결에 눈 앞을 지나치는 사장의 손에 들린 꽃다발이 머스타드에 가까운 노랑색인걸 입 밖으로 내 버린 것은 의식 밖의 일이었다. 알바생이 제 꽃다발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사장의 입장에서도 조금은 색다른 일이었으리라. 안지연은 사장의 이름 세 글자를 문득 떠올린다. 장이랑, 항상 꽃과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관련된 한자는 하나도 없지만 그저 부드럽게 굽은 느낌이 비슷했다.
"네, 누구 선물하시나봐요."
"같이 사는 사람 줄 거에요. 그 사람 머리가 노란색이라서, 노란색으로 포장하게 되더라구요."
그냥 짧게 대답할 수도 있었겠지만 궁금증을 해결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입이 멋대로 뒷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의외라 안지연은 아, 하는 탄성으로 잠시 대답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같이 사는 사람? 전혀 몰랐다. 어쩐지 혼자 살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길러도 어울릴 것 같았다. 근데 고양이가 아니고 사람이 그 집에 있는 거구나. 몰랐는데 결혼하신거에요? 아니면 가족분? 그것도 아니면 애인?
"그럼 이제 들어가시는 거에요?"
대학생이라고는 해도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입 밖으로 내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배운 나이다. 안지연은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여자를 길게 잡지 않기로 한다.
"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 잘 부탁해요. 고마워요."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를 끝으로 여자의 코트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점심을 같이... 그렇구나, 이 시간에 점심을 같이 먹는다는건 직장을 안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일하는 시간대가 다르거나... 재택근무일지도. 어느쪽이던 일개 알바생인 안지연이 오래 생각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게 있는 노릇이라, 사장이 사라진 꽃집에 혼자 남은 알바생은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해본다. 카라의 꽃말. 분명 다섯 송이였으니 그냥 꽃말 말고, 다섯송이의 꽃말. 그리고 검색 결과를 가만히 읽던 그 알바생은 작은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물론 꽃말은 신경 안 쓰고 고른 걸지도 모르지만 꽃말을 영어로도 외우는 저 사장이 그럴리가 없다.
"그냥 점심이 아니겠구만...."
다른 사람이라면 잘 안 되었을 경우를 대비라도 해야하나 싶겠지만 상대가 저 사장이라, 그 부분은 그닥 걱정되지 않았다. 한편 꽃을 받을 상대에 대해서는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더 궁금해졌는데, 알바생 안지연씨의 머리 속에 살짝 자리잡은 노란 머리의 얼굴 없는 남성은 미리 스포하자면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알바생 안지연씨도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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