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롬

만성고등학교 2학년 1반 재학생

합동온실 by n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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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더럽게도 안 따르는 하루였다. 기껏 일찍 일어난 아침에는 나가기 직전에 핸드폰을 잃어버려 지각을 겨우 면했고, 급식 업체가 바뀌어 좋아했던 메뉴가 맛이 달라졌으며, 버스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그대로 넘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느려진 걸음 덕분에 눈 앞에서 학원 엘레베리터를 놓쳤을 때는 아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차라리 좀 다쳤다면 그 핑계로 집에 가서 눕기나 했을텐데 아무튼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좀 아픈데도 괜히 학원엘 가서 강민주랑 싸우기나 했다.

학원에 들어서기 전부터 어둑했던 하늘은 이제 완전히 까맣게 변했다. 그럼에도 눈 앞의 거리는 번쩍거리는 것들로 가득하다. 박새롬은 두터운 외투에 고개를 꾹 붙이며 찬 바람이 스미지 않도록 주변은 쳐다도 보지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오늘같은 날은 도저히 저 번쩍거리는 것들을 마주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꾹 넣었는데, 이번엔 이어폰이 없다. 잠들기 전까지 이럴 셈인가? 어디에 두고 온 건지는 알지만 반에 돌아가면 재시험을 위해 남은 강민주와 마주칠 것 같았다. 어색한 것도 싫고, 그렇다고 누구한테 부탁할 만한 일도 아니다. 방을 잘 찾아보면 전에 사용하던 중국제 무선 이어폰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한숨을 쉬고 혀를 차면 하얀 입김이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그래도 주머니 속이 따뜻하니 손은 그대로 잘 넣어 둔다. 손 끝에 걸리는 체온에 데워진 핸드크림튜브, 립밤, 그리고 비슷한 온도로 데워진 지폐 몇 장.

주머니 속 현금은 아직 계절이 겨울이라는 증거였다. 넉넉한 지갑사정이 아니라 금액은 오천원에서 만원 정도 뿐이지만, 아무튼 이거면 학생 상대로 장사하는 문어빵 집이나 붕어빵 노점 혹은 군밤 트럭 앞에는 줄을 서 볼 수 있다. 가끔은 탕후루 집으로 직행하는 날도 있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이 탕후루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 이후로는 어쩐지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뭘 먹어야 이 지지부진 이어지는 작은 불행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오늘 이어진 일들에 대해 골몰하느라 문어빵 집은 지나쳤기에 발이 멈춘 곳은 격일로 서는 군밤트럭과 붕어빵 노점의 사이 쯤 되는 곳이었다.

매 해 보는 긴가민가한 얼굴에 그보다는 더 익숙한 트럭이지만 군밤트럭 앞에 줄이 서 있으니 오늘따라 밤이 더 맛있어 보인다. 붕어빵 집 앞에도 줄이 늘어져있지만 군밤 집 앞에 줄이 있는 건 드문 일이라 좀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어쨌거나 어디든 줄을 서지 않으면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 박새롬은 주머니 속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줄 뒤쪽에서 고개를 앞으로 빼들고 가격표를 살펴본다. 저번 주에도 확인한 가격이지만 기억이 나야 말이지, 정말 이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격은 변하지 않은 것 같으니 줄을 서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때까지 지나가는 배경으로만 여겼던 옆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아, 여기 줄 서신거에요? 몰랐네... 죄송해요. 앞에 서세요."

"...감사합니다."

줄 선 건 아니었는데... 박새롬이 서 있던 위치를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 아무튼 줄을 설 생각이기는 했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걸어온 여자의 앞으로, 사실 서 있는 자리는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괜히 앞사람과 조금 더 붙어서 줄을 섰다. 짧게 마주했지만 기억에 남는 큰 눈이며 삭 올라가던 입꼬리,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결혼을 했을까? 뒤쪽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은 아는 향이다. 향수를 좋아하는 강민주가 끌고 다닌 탓에 시향했던 수많은 향수 중 하나. 물기어린 흙에서 올라온 장미향. 퇴근하고 온 건가? 나같이 하루 일진이 드러워서 오신 건 아니겠지. 이어폰 없이 서 있으려니 잡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그나저나 강민주한테 미안하다고 해야하는데.

"여보세요. ...아, 그래요?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나는 현장 근처에요... 응, 아주 근처는 아니고. 보고싶어서."

현장이라는 단어가 몰고오는 공사장 같은 풍경을 얼른 머리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박새롬은 자기 핸드폰이나 쳐다보고 있기로 했다. 이어폰이 없어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남의 사생활을 엿듣는 것 또한 맘 편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꺼내서 본 화면에 떠 있는 발신인이 강민주인 메시지 알림이 그 결심을 금방 흐트러 놓았다. 메세지를 열어 보는 게 두렵다. 잘못한 게 누구인지 명확한 상황인데 사과도 하기 전에 연락이 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뒷 사람의 통화는 조곤조곤 이어진다. 시끄럽게 통화하는 것도 아닌데 가깝게 서 있다 보니 내용이 다 들리는 것은 별 수 없다. 듣기 싫은 것은 아니고 그냥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른 생각을 하고싶지만 귀를 막을 수도 없고 단어들이 그 어느때보다 명확하게 들린다. 수업시간에나 좀 이러면 좋으련만,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간만 흐른다.

"학생, 작은 걸로 드려?"

핸드폰을 꾹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에 앞 사람이 군밤 봉투를 들고 자리를 뜬 모양이다. 뒤늦게 고개를 들면 약간의 훈기에 군밤 내음이 실려와 표정이 금방 풀어진다.

"저 7000원 짜리로 주세요."

"7000원~ 카드도 괜찮고 계좌이체는 고맙고. 여기."

"여기요."

"현금은 더 좋고."

웃는 낯으로 잔돈을 거슬러준 군밤장수가 종이 봉투를 탁 탁 소리를 내며 펼친다. 뒤에 선 여자는 아직 통화중이다. 어쩔 수 없이 들은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아마 애인인 사람이 이쪽으로 온다는 것 같다. 핸드폰에 와 있는 메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한 통이 더 왔다. 내년이면 아마 반이 갈라질테니 학교에서는 잘 못 볼 거라 크게 싸운다고 해도 반에서 불편할 일은 없겠지만 역시 강민주와는 화해를 하고 싶다. 그 애랑 같이 걷던 학교에 가는 길을 혼자 걸으면 재미가 영 없을 것 같다. 학원에서도 그렇고... 아무튼 메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사과를 해야지. 괜히 심통부려서 미안해. 너한테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학생 밤 안 받어?"

"아,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황급히 뜨끈한 봉투를 받아 옆으로 빠지면, 옆에 웬 여자가 서 있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어쩐지 운동을 할 것 같은 인상... 그리고 이 여자가 아까 뒤에 서 있던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아는 사람인가? 저 여자보다는 꽤 어려보이는 얼굴이... 아, 둘이 눈이 마주쳤다. 군밤 봉투를 받는 중에도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박새롬은 두 사람이 팔짱을 꼈다가 손을 잡으며 주머니에 잡은 손을 넣는 광경을 목격했다. 둘은 아무래도 애인 관계인 모양이다. 서있던 자리가 조금 뒤쪽이라 덜 어색하게 되었다. 다행이다. 커플들이 길거리에서 눈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는 건 정말 싫었지만 줄을 양보해 준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서 있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전해들어서인지 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실은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 기분이 안 나쁜 것일 테지만. 아무튼 그 때의 박새롬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 답장..."

팔에 안은 군밤 봉투는 이제 딱 안고 있기 좋을 정도로 따뜻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메세지는 그 사이에 한 통이 더 왔다. 내용을 차근히 읽은 그는 친구에게 어쩌면 전화를 하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으면 우선 미안하다고 해야지. 왜 네게만 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래도 네가 나 때문에 속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야지. 내일도 같이 학교에 가자고.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해야지. 눈이 내리는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까보다 춥지 않았다. 박새롬은 따끈한 밤 하나를 입에 넣으며 오늘 하루도 결국엔 그렇게까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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