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 방
죽음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첫 숨을 들이킨 순간 밴시는 눈 앞에 선 시꺼먼 형체를 보았다. 눈을 뜨기 전이나 후에 차이가 없으니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감아야만 할 때가 되어서야 알아챈다. 의식이 생기고 마주한 최초의 것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죽음, 시야를 가득 메운 불길한 어둠이 느릿하게 움직이다 금방 멈춘다. 생물들은 태어나 처음 마주한 이를 부모로 여긴다던데 그 말은 밴시라는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말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 밴시는 제 눈 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천 자락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읽을 수 있는 글자라도 되는 것 처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죽음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 본 밴시가 있을까? 그 밴시는 올리브나무 곁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짙은 녹색의 드레스에 회갈빛 망토를 걸치고, 산자락에 있는 집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 날은 밴시가 세번째 사망의 증인이 되던 날이었다. 그 즈음 밴시는 다른 밴시들과 제가 다른 존재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다른 밴시들은 왜 일하지 않는 때에 모습을 흐려 스스로를 감추는가. 다른 밴시들은 왜 서로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가. 그 많은 밴시 중에 왜 나만, 죽음을 바라보며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는 거지?
-샤오첸. 죽음이시여.
-어여삐 여기는 아이야. 말하라.
하지만 신에게 감히 뭐라고 물을 수 있을까. 눈을 뜨며 삶을 시작하여 발생과 함께 가져온 사명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게 요정의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이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면 이 밴시의 삶 역시 같았을 것이다. 밴시는 눈동자 안에 빛이 최초로 침범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 시꺼먼 시야 안에 죽음의 얼굴이 가득 들어차던 순간을. 저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제 모습을.
-방 안에 안개가 자욱하니 침대로 모시는 길이 하염없이 길어 보입니다.
-내가 기거하는 곳이니 이상할 게 없구나. 저승으로 이어지는 강에 안개가 자욱한 것을 보지 않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함께 보러 가면 되겠어.
죽음이 닿는 곳에 늘 안개가 깔리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인지 존재가 흐릿해지지 않는 바람에 할 일 없이 놀게 된 밴시를 죽음이 데리고 다닌 덕에 이 밴시는 제가 보조한 세 번의 사망 외에도 수많은 사망을 목격했다. 그보다 확실한 증거는 이 방에 안개가 전혀 없던 날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신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밴시는 자욱한 안개 가운데서 죽음을 느낀다. 그가 밴시를 바라보고 있다.
-이 방에 다른 밴시를 들이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이다.
밴시는 죽음이 제게 와 닿는 것을 느낀다. 안개 탓에 지금 방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살짝 밀려 앉혀진 곳이 침대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그 구석진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 지가 오리무중이다. 허리와 배를 부드럽게 누르며 올라타는 이는 퍽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밴시는 그 미소 너머로 여러 얼굴을 떠올린다. 이 방에서 혹은 이 방이 아닌 곳에서 저를 바라보던 죽음의 모든 표정을. 하지만 미소 뒤에 따라붙는 욕망어린 낯을 알고 있는 이는 이 밴시 뿐이다. 죽음은 밴시의 이름을 부른다.
-칭샤, 나의 어여쁜 아이야.
밴시는 미끄럽게 포개지는 입술 너머로 질문 하나를 삼킨다. 짙은 안개 속에 두 명분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섞여든다. 밴시가 배운 것은 모두 죽음이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이 밴시가 모르는 것들은 죽음이 그러길 바란 것이다. 죽음은 밴시에게 그가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밴시이며, 유일하게 신과 밤을 보낸 밴시이고 또 유일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밴시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궁금해 하는 게 많아짐을 숨기지도 못하는 그의 밴시를 사랑스럽게 여겼고, 질문의 내용보다는 저를 바라보는 눈이나 움직이는 입술에 더 관심을 두었다. 모든 밴시는 결국 죽음의 소유기에 그는 이 밴시가 장차 무엇을 궁금해 할 지도 이미 알고있었다. 제가 뭐라고 대답 할 지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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