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누디아] 단편소설 타입 커미션 샘플
뮤지컬 <디아길레프> ㅈㅅㅇ 배우님 기반 디아길레프, ㄱㅈㅇ 배우님 기반 브누아
악몽
디아길레프는 암흑 속에서 다시 한번 눈을 떴다. 눈이 적응할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는 눈을 뜨기 전부터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익숙한 악몽, 고열을 앓다가 홀로 눈을 떴던 그 순간에 버려지는 꿈이었다.
그렇게 눈을 뜨자마자 예상과는 다른 소리가 울렸다. 늘 자신조차 소리를 낼 수 없던 정적 속에 죽은 듯 누워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게 울렸다.
“깼어?”
브누아의 목소리였다. 이 악몽만큼이나 반복해서 들어 익숙해진 목소리. 디아길레프는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매번 이 꿈속에선 어떻게 해도 움직이지 않던 것도 잊을 만큼 놀란 탓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이상하게도, 익숙한 악몽은 익숙하지 않게 그의 움직임을 허락했다.
고개를 들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브누아가 서있었다. 심지어 물수건과 대야를 든 채로 문을 열고 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이 악몽에 이런 변주가 생긴 건 처음이었다. 디아길레프 자신이 기억하는 한, 이 꿈에 누군가 나타난다든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던 적은 없었다. 디아길레프는 당연하다는 듯 ‘이 악몽이 브누아까지 끌어들여 무슨 장면을 보이려고 하는 걸까’ 하는 냉소적인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처럼 꼼짝없이 방에 갇혀 눈물만 꾸역꾸역 참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이제는 라이벌의 수준 낮은 수작질에도 눈 깜짝하지 않을 노련한 어른이 되었단 말이다. 그렇게 그가 냉소적으로 차분한 감상을 유지하던 때에 브누아가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브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물수건으로 디아길레프의 얼굴을 닦고, 시원한 물을 다시 적셔 이마에 수건을 올렸다. 디아길레프는 자기 이마에 시원한 기운이 닿자, 시험하듯 목소리를 내보았다.
“브누아…?”
갈라진 목소리가 아주 형편없이 흘러나왔다. 이 꿈에서 목소리를 내보긴 처음이었다.
“그래, 이제 좀 열이 내렸나 보네.'”
브누아가 가볍게 대답했다.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디아길레프는 멀쩡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자문하듯 질문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
브누아가 씩 웃으면서 눈썹을 까닥이며 되물었다. 그 웃음도, 물음을 던지는 목소리도 모두 디아길레프가 알고 있는 브누아 그대로였다. 다 안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
“그래. 여긴… 내 악몽이잖아.”
그 얼굴을 보고 디아길레프는 결국 홀린 것처럼 제 속에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꿈속의 브누아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단 마음도 반쯤 있었다.
“네 악몽이니까.”
브누아는 놀라는 눈치도 없이 당연하게 긍정했다. 오히려 왜 모르냐고 반문하는 느낌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디아길레프가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브누아는 누워있던 디아길레프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야? 괜찮아졌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일어나 봐.'”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던 게 아닌 디아길레프는 억울함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브누아가 손을 대자마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악몽에 여러 변수가 들이닥치기 시작한 그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네가 한 거야.”
브누아는 여전히 당연하게,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듯 말했다. 브누아의 시원한 웃음이 담긴 얼굴 옆을 은은한 달빛이 밝히고 있었다. 분명 어둡기만 했던 방 안에 빛줄기가 드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디아길레프는 이 방에 창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늘 창문으로 빛이 한 움큼 쏟아져 내렸었다. 그는 브누아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도 잊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디아길레프의 옆얼굴을 본 브누아가 손을 내밀었다. 말없이, 디아길레프는 그 손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다리는 어쩐지 오래 앓다가 이제야 깨어난 사람처럼 힘이 없었지만, 창문까지 걸어가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익숙한 풍경이야….”
정말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기도 했다. 옛날 그 시절 달이 밝은 밤에 창문을 내다보면 집 옆에 있던 야트막한 언덕과 그 언덕 위의 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언덕이 가게들로 가득 차 나무가 보이지 않게 됐겠지.
“옛날에, 저 나무까지 숨차도록 달려가서 뛰어놀기도 했었어.”
아주 오래된 기억이라 이젠 떠올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악몽 속의 대화 한 번으로 이렇게 기억나게 될 줄은 몰랐던, 아마도 행복했던 기억. 그러나 아주 단편적이고 흐릿한 기억…
“저 나무까지 한 번 달려가 볼래?”
디아길레프의 회상을 잠시 지켜보던 브누아가 제안했다.
“뭐? 이 나이에?”
“뭐 어때, 여긴 우리 둘밖에 없는 네 꿈속이잖아.”
디아길레프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브누아의 얼굴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이렇게 쉽게 남의 제안을 수긍하고 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꿈속에선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협상도 없이 그저 신나게 웃는 얼굴만으로 제안을 수락하다니.
브누아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발코니를 뛰어넘어 아래층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아래로 사라지는 브누아를 보곤 디아길레프가 불안하게 발코니 난간을 붙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브누아가 손을 뻗으며 웃고 있었다. 얼른 내려오라고, 어차피 꿈 속인데 뭐가 무섭냐고 말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결국 디아길레프는 눈을 질끈 감고 발코니 난간을 뛰어넘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언덕 위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힘이 없던 다리는 어린 시절처럼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간질간질, 무언가 속에서 움트는 느낌이었다. 웃음이 뱃속에서부터 튀어나오려는 것 같은 것을 참고 있으니 옆에서 브누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하게 터트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니 디아길레프는 자기도 모르게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숨이 차도록 달리면서 웃음을 마구 터트리는 건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힘껏 달려 언덕 위 나무에 도착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더니, 브누아는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봐도 아무도 없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브누아의 옆얼굴을 보며 디아길레프가 물었다.
“넌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인다?”
디아길레프는 체통도 없이 잔디에 털썩 앉아 나무줄기에 등을 기댔다. 브누아는 그런 디아길레프는 웃으며 내려보다가 마찬가지로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며 옆자리에 앉았다.
“당연하지. 난 하나도 안 무섭거든. 여긴 네 악몽일 뿐이니까.”
디아길레프는 그 뜬금없는 답이 슬슬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이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때? 이 악몽도 이젠 너무 나쁘진 않지?”
브누아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어둡고 좁은 방을 이렇게나 넓혀놓은 사람다운 웃음이었다.
“그야 네가 있으니까.”
왜 갑자기 이 악몽에 등장했는진 모르겠지만, 디아길레프는 브누아가 없어지면 다시 좁은 방으로 쫓겨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난 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브누아는 디아길레프가 차마 뱉지 못한 두려움까지도 알아챈 듯 그렇게 약속했다. 디아길레프는 그 단단한 약속을 듣고, 평소라면 못할 질문을 덧붙였다.
“네가 없는 악몽을 꾸면?”
“그럼 얼른 악몽에서 깨서 날 찾으러 와.”
브누아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반드시 디아길레프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확신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늘, 자기가 자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이렇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신나서 말하곤 했다. 디아길레프는 그걸 알았다.
“…그래.”
널 만나러 가야겠다.
디아길레프는 다시 한번 눈을 떴다.
“아, 드디어 깼네.”
익숙한 브누아의 목소리. 옆에는 물수건과 대야, 식은 죽이 놓여있고 브누아는 팔을 걷은 차림새로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공연은 그냥 다 취소했어. 의사도 왔다 갔고.”
“브누아…?”
“그래. 또 쓰러질 건 아니지?”
브누아는 걱정스럽게 말하여 디아길레프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체크했다.
“이젠 열이 좀 내렸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연락도 없이 안 나오질 않나, 문을 따고 들어왔더니 곧 죽을 것처럼 열이 펄펄 끓질 않나.”
“아….”
“미열인 줄 알고 방치했지?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브누아의 타박이 담긴 말에, 디아길레프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누군가를 닮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계속 내 곁에 있는다며.”
브누아는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디아길레프를 보다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거 다 듣고 있었어?”
“…꿈에서 들었거든.”
악몽에서 깨서 널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너는 늘 내 악몽에 먼저 발 디딘다. 내가 빛을 보고 걸어갈 때면 늘 뒤를 바라보며 그림자에 발 묶이지 않게 해주니까. 내가 상상치 못한 환상을 현실로 옮겨내는 한, 너는 내 곁에 머물겠지.
- 페트루슈카를 찾던 길의 어느날.
추가 버전
디아길레프가 여우가 되어버린 건에 대하여 ~당대 대학에 대한 고증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에 주의~
<사건편>
“브누아! 브누아! 큰일이야!”
“뭐야, 왜? 나 지금 바쁘니까 짧게 말해.”
“디아길레프가 여우가 됐어!”
“뭐?”
-
때는 브누아와 디아길레프의 대학 시절, 종강을 앞둔 때였다. 브누아가 개인작을 그리는 사이 디아길레프가 여우가 됐다며 동기가 소리 지른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곳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한쪽 벽면에 달린 문이 수면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브누아는 그림을 그리고, 디아길레프는 동기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수면실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 수면실에 들어간 학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뛰쳐나온 것이다.
목격자의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은 앞다투어 수면실로 뛰어 들어갔다. 선두에 선 것은 당연하게도 브누아였다. 수면실을 들여다보자마자 그 자리에는 디아길레프의 양복을 덮은 여우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오니까… 이 상태였어.”
첫 번째 목격자는 정말로 얼이 빠진 상태로 상황을 설명했다. 본인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브누아는 침착하게 사건 현장을 살피다가, 수면실 문 반대쪽에 달린 창문을 살펴봤다.
“창문도 제대로 잠겨 있고, 수면실의 문은 우리가 들어온 곳 하나고. 그러니까… 이거…”
“진짜로 사람이 여우가 됐다고?!”
급격하게 웅성거림이 커졌다. 브누아의 침착한 목소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당황을 키웠다. 그 웅성거림을 들은 사람들이 점차 몰리기 시작하고, 목격자 중 몇 사람이 소식을 퍼트리려 수면실을 뛰쳐나갈 때쯤 브누아는 디아길레프의 양복을 갈무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여우-디아길레프-를 옆구리에 낀 채 동기에게 물음을 건넸다.
“혹시 케이지나 목줄 있어?”
-
안타깝게도 케이지도 목줄도 찾지 못한 채로, 여우는 브누아의 옆구리에 붙은 채 교정을 활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강의실까지도. 평소 동물을 싫어하고 학생도 싫어하고 디아길레프는 그보다도 더 싫어하던 교수는 여우로 변한 디아길레프를 자기 수업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거의 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다. 결국 교수는 여우를 쫓아내는 대신 디아길레프의 출석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우를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하는 브누아의 출석 역시도.
“합법적으로 수업 째서 좋겠다?”
“어차피 종강이 곧인데 필요도 없는 수업을 두 시간이나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교수님 쪽이잖아.”
“뭐, 그건 그래. …그보다 어떡할 거야? 이거 교황청에 가서 악마 퇴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랬다가 악마 들린 짐승이라고 죽여버리면 어떡해?”
브누아와 그의 동기는 한숨을 내쉬며 코 위에 팔랑이는 나비를 잡기 위해 앞발을 휘두르는 천진한 표정의 여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근데 저 여우 진짜… 디아길레프랑은 안 닮았다.”
“그건 네가 강의실에 안 들어와서 그래. 강의실에서 여우 보고 기겁하는 교수를 물어뜯을 것처럼 캬악거려서 내가 급하게 옆구리에 끼고 있었거든.”
브누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여우를 노려봤다. 저 여우가 영리하게 행동한 덕분에 강의실에선 빠져나왔다지만, 너무 상황이 꼭 맞아 들어가는 것이 수상한 탓이었다.
-중략-
<해결편>
- 카테고리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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