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논커플링Non-Coupling

그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지 말아줘

아토 하루키 메인.

-본편 SS+루트 클리어 이후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아토 하루키는 탐정이다.

그게 뭐야, 외국 소설을 너무 읽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루키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솔직히 자신의 직업을 밝혔다가 살짝 마음에 금이 갔던 경험이 있다. 이후 적당히 이름을 지어낸 중소회사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융통성을 갖추게 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지어낼지언정 직업 자체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회사의 사장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 점이 현재의 직업을 유지하는데 큰 지분을 차지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탐정이란 무릇 조사하고 추론하여 안개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직업일지니, 천성적으로 몸이 병약한 아토 하루키에게는 일반적인 직업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적성이 맞았다. 물론 이 직업에도 디메리트는 있다. 첫째로 근무 시간이 불규칙하고, 둘째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직접 발품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친구 오토와 루이의 마음 씀씀이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위협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번 의뢰에서 몸싸움이 벌어지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루이가 건넨 것은 이번 의뢰에 쓰일 위장 신분증이다. 받아서 살펴보면 학생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로 유명한 대학교 학생증에 [오오하라 유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입학 연도를 살펴보면….

"나 스물 넷에 대학교 입학한 거냐."

"음. 하츠기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생이자 미미즈 학원의 시간강사, 라는 게 이번의 네 신분이다."

"어째 이번은 복잡한걸. 그냥 시간강사로 해도 좋지 않아?"

"의뢰인이 섬세해서 말이야. 자신과 같은 학교 같은 학과로 위장하면 적당히 얘기를 맞춰주겠다는군."

"그래? 그래 주면 나야 편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더."

달칵, 하고 오토와 루이가 무언가를 꺼내 든다.

한 박자 늦게 그 물건을 본 하루키의 몸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하루키… 받아주겠어?"

"……."

"농담이다. 이건 의뢰인이 부타칸."

"의뢰인의 물건으로 장난치지 말라고!"

팡, 소리 나게 사건 파일로 오토와의 머리를 내리친 하루키가 긴 한숨을 내쉰다. 마침 바깥에서 야채를 실은 트럭이 천연덕스럽게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조용한 사무실에 그런 말이 퍼져나갔다간 대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생각하니 또 괘씸해서 친구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친 뒤 ("아야.") 하루키는 자신이 받은 반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살짝 얇은 감이 있는 금빛 반지는 별도의 장식이 없어 심플했지만, 심플한 만큼 상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설마 이거 진짜 결혼반지는 아니겠지. 하루키가 반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동안 오토와가 말을 이었다. 

"반지는 예전에 의뢰인이 썼던 커플링 중 하나…라는 군. 지금은 결혼한 몸이기에 얘기하는 모습이 잘못 목격되어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동안에는 자기와 같은 기혼자로 위장해달라는 게 그쪽의 부탁이다."

"결혼하고서도 커플링을 가지고 있는 거냐…. 터무니없는 의뢰인이라는 예감밖에 안 들어."

"대신 이번 의뢰는 의뢰인이 품은 심증이 사실인지 짚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간단하게 끝날 거다." 

"그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별수 없다. 이런 데에서 탐정업의 또 다른 단점이 드러난다. 의뢰를 받는 입장에서 의뢰인의 요청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이른바 갑을관계의 설움이라는 것이다.

"의뢰 기간은 내가 볼 때 길어봤자 일주일 정도일 거다. 그 정도는 참아줘, 하루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고집을 부려봤자 중간의 오토와 루이가 난감해질 뿐이다. 하루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선 그가 내민 반지를 받아들었다. 하긴 몇 년 동안이나 신분을 위장하며 돌아다녔는데 반지 하나 낀다고 뭐가 달라지겠냐고 생각하면서.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루이와 하루키의 예상대로 의뢰는 7일째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의뢰인도 조사 결과에 매우 만족해,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서면상의 자료를 제출하고 의뢰비의 잔금을 계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그런가. 별일 없이 끝났다면 다행이로군.』

"되려 너무 평온하게 끝나서 기분이 이상해."

『넌 평온함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내가 매번 익스트림한 일에 자진해서 뛰어든다는 듯한 말투네."

『음, 병약한 몸이면서 무모한 면이 있다는 걸 자각은 하고 있나보군.』

"이보세요."

의뢰를 마치고 오토와 탐정 사무소로 돌아가는 길. 간단한 사전보고 겸 오토와에게 전화를 건 하루키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의 창문에 기댄 채 통화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수고 많았어. 피곤할 테니 오늘은 그대로 퇴근하도록 해.』 

"어, 그래도 괜찮아? 의뢰보고서는?"

『돌아와서 작성하기도 애매한 시간이잖아. 쉬고 내일 아침부터 써서 제출해.』

"하하, 상냥한 건지 엄격한 건지 모르겠네."

『합리적이라고 해주면 좋겠군.』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가벼운 태클을 걸며 통화를 잇던 하루키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사람들이 많이 갈아타는 환승역, 반대편 플랫폼 쪽에도 전철이 들어와 있어 맞은편 차량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엇…."

『왜 그래?』

"아니, 레이지가 보여서."

『네 의동생 말인가?』

"응. …아, 전철 출발해버렸다."

『음? 길에서 만난 게 아닌가?』

"어. 그나저나 둘 다 엄청 깜짝 놀란 얼굴이더라. 우연히 마주친게 그렇게 충격이었… 나…."

그리고 아토 하루키는 번개처럼 깨닫는다. 

자신이 왼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오른쪽으로 몸을 튼 채 서 있었으니, 바깥쪽 창문에서는 제 왼손이 아주 잘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제 왼손 약지에는 지난 일주일간 익숙해지는 바람에 아직 손가락에서 빼지 않은 가짜 결혼반지가 있다. 얇은 디자인이라고는 해도 한 번 보면 '앗, 저건 반지구나'하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전철이 출발하며 멀어지는 동안 레이지와 그 망할 아버지가 보였던(그렇다. 거기 아버지도 있었다) 표정을 다시 떠올려본 아토 하루키는.

『하루키?』

"루이, 일단 끊을게."

냉정하게 통화를 끊는다.

아무래도 일이 귀찮아질 예감이 들었다.

*

《이번 역은 소와, 소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내릴 역, 2개는 지나쳐버렸네. 이소이 레이지는 묘하게 냉정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물론 머리 일부분만 냉정해졌을 뿐이라, 이번 역도 전철에서 내리지 못한 채 전동 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 노선의 종점까지 가버리겠어. 조금 전 이뤄진 사고회로의 오버 클록을 견디지 못해 퓨즈가 나가버린 머리에선 놀라울 정도로 단발적인 사고밖에 되지 않는다. 레이지는 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정신을 차릴까 하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응, 일단 이 사람부터 정신 차리게 하자. 

"아버지, 괜찮아요?"

"……."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봐도, 이소이 사네미츠는 전철 창문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바로 조금 전 웃는 얼굴로 통화하는 아토 하루키를 발견했던 자리다. 굳어버린 사유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조금 전까지 이소이 레이지도 같은 이유로 사고회로가 나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목적지에서 멀리멀리 떨어지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므로, 이소이 레이지는 일단 넋이 나간 아버지의 팔을 끌고 전철에서 내리기로 했다. 본래 내리기로 했던 역을 네 정거장이나 지나친 뒤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고 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면 의형 아토 하루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흔적이 가득하다. 다시 전화를 걸어서 여기가 어딘지 말해줘야 할까. 레이지가 잠깐 고민하던 찰나, 이번에는 단문의 메일이 도착했다.

[위치 어디야?]

잠시 고민하다, 자판을 두드려 현재 내린 역의 이름을 보낸다. 답장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돌아왔다.

[지금 간다 거기서 기다려.]

이렇게 서둘러서 쫓아온다는 건 역시 상대방도 이쪽의 반응을 눈치챘다는 이야기겠지. 레이지는 지하철역의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앉아버린 아버지를 곁눈질하며 알겠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플랫폼 안쪽에서 기다리겠슴다.]거기까지 보내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4시 23분을 가리키는 참이었다. 

…지고천 사건으로부터 벌써 일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관계자들은 다들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을 견뎌내고 더 강인해져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 레이지도 그들의 소식을 이따금 전해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러니까 의형인 아토 하루키에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축복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오후 4시 23분에서 24분, 다시 25분으로 바뀌는 시계를 바라보던 레이지는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지. 너 혹시…."

"저도 들은 게 전혀 없어요. 하늘에 맹세코 진실이에요."

"……역시 상대는, 그, 오토와라는 친구일까."

"형의 인간관계를 생각한다면, 네, 제일 가능성 높은 건 그 사람 정도네요."

"맙소사, 그럼, 그럼."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여유를 잃은 기색이 역력하다. 멈춰있던 사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2차 쇼크가 찾아온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채 양손을 깍지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보면 분명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던 사네미츠가 침통한 목소리를 꺼냈다.

"하루키는… 이제, 오토와 하루키가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니면 그쪽이 아토 루이가 되거나.

머릿속에서 덜컥이며 도출된 결론은 쉽사리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토와 루이라는 사람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형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이와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런데도 왠지 마음 한 편이 어둑해지는 이유는 뭘까.

레이지는 의자에 힘없이 앉은 아버지의 곁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충격이긴 하네요. 서프라이즈로 전해줄 생각이었을까요."

"……."

"하지만 허튼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형도, 그 사람도."

"………."

"뭐가 어찌 됐든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나눴다면…."

"…축하해줘야 하는, 거겠지."

"……네."

사네미츠가 얼핏 웃는다. 

레이지도 그걸 따라 하듯이 웃어 보였다.

"찾…았다, 이… 멍청이, 부자…!!"

그리고 아토 하루키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

하루키, 축하한다! 같은 소리를 하는 아버지의 명치에 일단 주먹을 꽂아서 조용하게 만들고, 하루키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레이지는 불시에 습격을 받고 바닥에 무릎 꿇어버린 아버지를 돌봐야 할지, 아니면 무슨 이유에선지 숨이 몹시 거친 형을 먼저 챙겨줘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해하고 있었다.

"…하, 루키 형. 쑥스러운 건 알겠지만."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경황 중에 아직 빼지 못했던 반지를 왼손 약지에서 뽑아낸다. 그걸 본 레이지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그냥 장식이야!"

"하루키 형…."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어, 빼낸 반지를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레이지와 사네미츠는 그 행동을 엉뚱한 방향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허위결혼입니까? 어디의 어떤 놈팡이가 감히?"

"하루키, 괜찮으니까 성과 이름만 말해보련.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좋아, 둘 다 일단 속에 찬물 붓고 그 사람 하나 잡을 듯한 얼굴부터 풀어볼까?"

부전자전이라더니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똑같담.

결국 일찍 퇴근하라는 루이의 배려도 무의미하게, 약 반나절 가량 카페에서 사태를 설명하는데 투자하고 만 하루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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