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달

반사광

해달 연기자AU

아비게일은 데려다주겠다는 해럴드의 말을 한사코 거부하고 차에서 내렸다. 늦은 밤의 역에는 지친 직장인의 얼굴과 느릿하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취객 정도만 보였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알아보면 어쩔 거라느니 했던 매니저의 얼굴이 생각나 아비게일의 미간이 팍 좁혀졌다. 단순히 비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경고의 의미가 더 크겠지. 네가 이걸 퍼트리지 않는다면, 난 너와 해럴드의 사이를 먼저 밝히겠다는 뜻의. 그렇게 되면 아직 배우로서의 입지도 제대로 없는 자신만 불리했다. 해럴드야 뭐…

오른쪽의 전광판에서 나오는 불빛에 아비게일이 눈을 깜박거렸다. 커다란 화면 가득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바로 전에 차 안에서 헤어진 자신의 애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향수 광고를 찍었다고 했었지.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아비게일은 전광판에 비친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이 스캔들을 퍼트려도 금방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그의 빛이 필요할 테니까. 

 밖은 추울 텐데. 그렇게 걱정하며 다정하게 웃던 얼굴이 전광판의 것과 겹쳤다. 제게 보여주던 그런 모습이 연기인지 아닌지 잘 구분하기 어렵다는 게 어쩌면 자신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오히려 퇴화했다고 하는 것이 옳으려나? 예전에는 그가 바깥에서 비추는 모습은 전부 연기 조차로 못 되는 가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비게일은 끝까지 그가 제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진심이길 바라는 제 마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의 연기자로서의 눈이 먼 것으로 족했다. 그게 차라리 덜 비참했으니까. 

아비게일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광고판에 있는 해럴드의 모습은 컸다. 난 아직 광고 하나도 찍지 못했는데. 피식 나오는 자조가 그녀의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눈가에 뭉실거리는 것이 모여드는 기분이 심히 불쾌했다. 하아, 입김을 하얗게 내뿜으면 안에 있던 초라함도 없어지는 걸까. 자신이 맡았던 단편 영화에서 상대역이 그런 말을 하며 담배를 피우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런 냄새나는 건 피우고 싶지 않아. 아름답지 않잖아. 

그래. 아름답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원인도, 이유도. 

“해럴드… 나는…”

아비게일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전광판 위의 해럴드의 뺨에 살짝 올라갔다. 작은 입술이 달싹여도 화면 남자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아비게일에게 어떤 용기를 주었다. . 

“난 네가 너무 싫어.”

눈을 감고 작게 고백을 읊조렸다. 밝은 빛이 제 붉은 눈동자를 찌르는 감각이 싫어서, 이 정도의 편법은 괜찮다는 변명으로. 

“네가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주물럭거리는 게 싫어. 나랑 방송할 때마다 일부러 연애 사실 흘리는 것도 싫어. 내가 계속 대본 주기만을 기다렸던 그 감독 작품 너는 쉽게 얻어버리는 것도 싫고, 난 그렇게 노력하고 싶어도 비중 없다고 넘어가는 데 네가 나오는 장면은 다들 정성을 들이는 게 싫어.”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미운 모습뿐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인생이 망쳐지길 기도했었다. 그가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자신이 성공할 수가 없는 거라며, 그런 억하심정을 갖고 그를 저주하는 밤도 흔하디흔했다. 

“네가… 네가 대본을 목소리 없이 읽어내리는 입술과 눈동자가 역겨워. 네가 컷 사인 전까지 정말 다른 사람 같은 눈빛을 하는 게 가증스러워. 네가 연출을 바꾸고 싶다고 너무 당당하게 요구할 때마다 꼴 보기 싫어서 미칠 것 같아. 그리고 꼭 그런 장면이 훨씬 아름답게 나올 때마다… 정말, 정말…”

커다란 뺨에 댄 손가락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목소리의 떨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녀가 하순을 콱 깨물었다 놓았다. 

“부러워서 죽고만 싶어져.”

얼마나 흠모하고 또 얼마만큼 원망했을까. 저의 재능의 모자람을 남을 미워하는 걸로 채우면 마음은 편했다. 저 자식만 없어진다면 내게도 기회는 올 거야. 그런 믿음은 편안하게도 자신의 두 눈을 가려주고 있었다. 높이 떠 있는 이 태양 빛으로부터. 

“그래. 나는 네가 너무 싫어.”

하지만 이제 때가 온 거겠지. 아비게일이란 여자는 아름답지 못한 것이 싫었다. 제 눈을 가리고, 추하게 그를 깎아내리려고 해도 틈새에서 나오는 반사광에 두 눈이 멀어버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빛나는 것을 동경했기에 누구보다 더 처참하게 깨닫고 있었으니까. 

나는 연기자인 해럴드를 이길 수 없어. 

갖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는 건 아름답지 못했다. 이제야 알았으니 다행일까. 아니면 이런 시점에서야 겨우 알아차린 걸까. 

“그러니까 난 내일 너랑 헤어질 거야.”

나랑 어울리지 않거든. 아비게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하리라. 어쩌면 조금 아플지도 모르지. 먼저 떠올린 걱정이 제 연기 인생보다 그런 마음이라니 이미 조금 늦어버린 걸까. 잠시 화면의 해럴드의 턱 가에 이마를 대고 있던 아비게일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괜찮아질 테니까. 아마도, 분명히….  

아비게일은 천천히 차가워진 손을 전광판에서 땠다. 뒤로 두어발짝 물러나서 보면 천사라고 착각할 정도의 미모의 남성이 웃고 있었다. 

“안녕. 해럴드.”

아비게일은 눈가에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며 도로 목구멍 아래로 삼켜내었다. 가슴에 턱, 하고 얹힌 기분이 이상했으나 더 신경을 쓰면 무언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내일은 연기를 해야 하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괜찮을 거야. 그녀 또한 배우였다. 이별을 위장하고 말하는 것쯤이야 잘 해낼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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