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KMT

식지 않는 사랑 上

모브 x 19 아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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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가 아카기와 구면이라는 설정...

*사람에 따라 껄끄러울 수 있는 묘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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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왔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빈 그릇을 대충 식탁 끄트머리에 밀어 치웠다. 김빠진 맥주를 속에 마저 털어 넣으며 먹구름이 우글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오후 나절부터 한층 굵어진 빗방울이 어느덧 가랑비 행세를 집어치우고 궂은 소나기로 돌변할 눈치였다. 난 빈 캔을 우적 구겨 넘치기 직전의 방구석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날아간 캔은 보란 듯 봉투 가장자리에 맞고 튕겨 나가 바닥으로 맥없이 굴러갔다. 나는 혀를 츳 차곤 벌렁 드러누웠다. 목뒤가 배겨오건 말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기분으로 곰팡이 새 식구가 둥지를 튼 천장이나 멀거니 쳐다봤다. 바깥 베란다에 일렬횡대로 각 잡힌 빨래 무리도 습기에 금세 흐물텅해지고 마는 여름. 그 한 주의 끝은 늘 시간을 반죽해 무한한 길이로 늘여둔 것처럼 느껴졌다. 뭉근한 적막 속에 한창 추적대는 빗소리만이 어스름한 방 안에 내리깔렸다. 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식곤증의 나른함이 손발 끄트머리부터 슬금슬금 엄습했다. 이참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찝찝한 기분도 가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그런 결심이야말로 얼마 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망치질 소리라고 생각했다. 마치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줄을 하나씩 당겨 퉁기듯이 철판을 묵직하게 텅텅 치받는 소음이 불현듯 귀를 파고들었다. 오랜 공동생활의 고충으로 짓무른 잠귀는 그에 재깍 반응했다. 난 그게 계단참을 오르는 누군가의 발소리라는 걸 금방 알아챘고 때마침 내려앉기 시작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낡은 복도식 아파트는 이래서 불편했다. 저리 방음이 빈약하니 단잠 자다 깨기 일쑤인 건 물론이고 뻑하면 성가신 이웃들과 시비까지 붙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애초에 역세권치고는 방값이 싸다고 무턱대고 계약서 쓴 내 아둔함이 불행의 발단이었으니, 억울해도 어쩐들, 내 머리나 쥐어박을 노릇이긴 하다만. 주말에서까지 괜한 언쟁 벌이기는 싫었던 나는 그냥 옆으로 돌아누웠다. 한편 발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어느 지점에선가 우뚝 멈춰 섰다. 연달아 신경질적으로 문을 쿵쿵 내리치는 소리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 집 현관에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누워있다가 말고 눈을 굴렸다. 뜬금없는 작태에 귀찮음 반, 이런 시기에 웬 백수 날건달 같은 남정네 집에 선뜻 발길 할 머저리가 있는가의 미심쩍음이 반이었다. 

떠오르는 몇 가지 얼굴이 있긴 했다. 몹쓸 술주정을 가진 청년이 작년 벽두 무렵부터 옆방에 들어앉았다. 술 처먹었으면 곱게 집에나 기어들어 가서 잘 것이지, 남의 집 앞에 속을 게워놓을 일은 또 뭐란 말인가. 지겹도록 받아낸 사과에도 불구하고 통 고쳐질 기미라곤 없는 민폐에 골치를 썩던 기억이 선연했다. 한데 이 웬수조차 요 며칠 동안은 근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건너 듣기로는 저 멀리 홋카이도로 여행을 갔다던가 그랬었지. 내심 그 여행이 길어지길 바랄 따름이다. 머릿속에서 그를 지워내며 생각했다. 아무튼 그가 아니라면 아마 만성적인 관절염을 앓는 집주인이 구태여 귀찮은 걸음을 행차해 분리수거 건으로 다시 면박이라도 주려 왔는가? 허나 그쪽은 이제 흠뻑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집에서 종일 연금 뭉치나 세며 썩는 게 자연스러울 할망구였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주말에도 회사에서 부려지는 수금원이리란 추측이 더 합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숫돌을 녹이는 물방울처럼 균일한 재촉 역시 그런 직군의 성급함과는 또 동떨어져 있었으므로 영문 모르는 나는 어찌어찌 꿋꿋한 무시로 일관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불청객 되려 작정하고 온 듯했다. 문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가 슬슬 귀가 따가워질 지경으로 집요해지자 나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결국엔 내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다. 몸을 굴려 일어나자 습기 먹은 다다미 장판이 팔뚝 살에 들러붙었다가 뚝, 떨어졌다. 소리는 문가로 다가가자 언제 그랬냐는 양 끊겼고 철문 건너 무거운 인기척이 서성대는 것만 어렴풋 느껴졌다. ⋯아, 그렇군.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거칠게 열어젖힌 문 안으로 비 냄새가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귀신처럼 불쑥 솟아난 흰 인영을 보고도 놀라 자빠지지 않은 까닭은, 그 직전 반사적으로 어떤 익숙한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녀석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몰골로.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더 분별할 거리도 없이 어련히 친숙한 낯짝에 대고 첫인사를 뱉었다.

"그냥 문 열어달라 하면 되잖아."

귀찮아⋯⋯. 

아카기가 맥없이 중얼거리자, 녀석의 어깨 너머로 회빛깔의 하늘이 스산하게 으르렁댔다. 그럴 바엔 아예 숨도 쉬지 말 것이지 아직도 멀쩡히 목숨 붙어 있군⋯. 나 역시 중얼거리면서도 문간 옆으로 살짝 비켜 길을 터 주었다. 아카기는 모자를 벗어들고 젖은 머리칼을 고양이처럼 푸르르 털며 들어왔다. 나는 걸쇠를 도로 잠그며 물었다.

"오늘은 기숙사에서 자고 오는 줄 알았는데. 웬일이냐?"

그럴 기분이 아니라⋯.

"복제 키 준 건 어디로 갔어?"

남자는 빗물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돌아보았다.

잃어버렸어.

어련하시겠지, 한 달이면 그래도 오래도 갔네⋯. 빈집 털이 도둑이 어쩌다 운 좋은 발견을 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난 바짓단을 사박사박 스치며 현관으로 발을 딛는 아카기를 돌아봤다. 빗속을 얼마나 헤치고 걸었는지 회색 작업복의 절반이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처럼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녀석은 빈손이었다. 웬일이람. 오늘은 정말로 예정에 없었던 모양인데, 그걸 보며 생각했다. 뭐, 원래도 아카기 녀석의 방문일에는 정해진 규칙이나 패턴이 없긴 했다. 방문 시간대는 보통 컴컴한 저녁나절이나 자정쯤으로. 언제나 사전에 연락 한 통 없이 불쑥 얼굴부터 들이민다. 게다가 손에는 술안주를 주렁주렁 매단 채다. 그건 기실 정말로 술이 당겨서가 아니라, 야심한 시각에 남의 집 문을 두들겨대는 게 세간의 상식으로 무례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를 변제할 만한 주전부리를 손에 닿는 대로 집어 온 편이 가깝다. (무엇보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종류는 가지각색이다. 얇은 비닐에 둘둘 싸인 건어물, 때로는 퉁퉁 불어 터진 어묵, 겨울 찬바람에 식어버린 군밤 등⋯.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재치들. 지난 그믐달에 시금치 한 다발을 무턱대고 덜렁 들려줄 땐 이 자식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싶어 캐물었다. 

"뭔데?"

근처에 문 연 가게가 없어서 이거라도.

"밤중에도 채소를 파나?"

직장에서 줬어.

나는 눈썹을 치켰다.

"거긴 봉급을 채소로 가불해?"

꽁으로 주길래 받았어. 사장 아내가 재배했다던데. 다들 하나씩 챙겨가는 분위기길래. 

아카기가 뒷목을 문질렀다. 

그거 가져가는 대신 다음 회식에는 꼭 빠지지 말라고 일갈하더군.

"직거래의 눈총을 받았군⋯."

아카기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부스럭대는 봉지를 내밀며 물었다. 

필요 없어?

"뭐, 주면 받긴 하겠지만."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손이 처지지 않을 무게로 가벼웠다. 

"무턱대고 받았다가 졸지에 책잡힌 건 어쩔 셈이냐."

흠, 뭐, 그러라지. 난 상관없어.

아카기는 으쓱했다. 끝끝내 마땅한 쓰임새를 찾지 못한 채소는 결국 이웃 간의 정이라는 변명을 빌미로 고스란히 옆집 사람 손에 떠맡기듯 넘어갔고, 그 고집불통 녀석이 결국 가짜 병가 내는 걸로 꿋꿋이 상사 잔소리를 제쳤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중의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결말이 뻔한 소정의 예의를 녀석은 지겹도록 반복했다. 좀처럼 받는 사람 사정을 고려할 줄 모르는 습성은 아카기의 어설픈 성격을 비추는 거울이었으나 이를 딱히 제지해 본 적은 없군. 한참 연락이 없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거의 까먹을 즈음에나 다시 발걸음을 하니 그때마다 지적하는 것도 귀찮아져 관뒀는지 뭔가. 모름지기 충고도 시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녀석이 신발장 앞에서 자세를 엉거주춤 굽히는 게 눈에 밟혔다. 나는 성큼 다가가 신발을 벗으려 미적대는 아카기의 어깨를 재빠르게 붙들었다.

"어이, 거기 잠깐 서 있어."

바로 들어올 생각 말고. 일갈하자 녀석이 멈춰 서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녀석의 발치를 중심으로 서서히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저러고 방바닥까지 번거롭게 적시는 건 딱 사절이었다. 마른 수건을 찾아볼 겸 녀석을 지나쳐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별안간 목덜미를 낚아채여 끌려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텐데. 뒤로 무게중심이 홱 쏠리며 등에 축축한 어깨가 부딪치다시피 닿아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자 날 빤히 내려다보는 아카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젖은 양 팔로 내 위팔을 꽉 휘감자 발꿈치가 살짝 들렸다. 빗물 먹은 옷감에서 찬 물비린내가 훅 뿜어졌다. 

"뭐 하는 거야."

⋯자. 

녀석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녀석이 지긋이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하자. 

까끌까끌한 목소리가 풀려나왔다. 나는 순간 황당해져 입을 여닫았다. 아카기는 그저 채근하듯이 그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어.

"⋯그 꼴로?"

안 돼?

"아니 이게 무슨⋯⋯ 악, 차가워!"

다짜고짜 바지 속으로 찬 손이 불쑥 쑤셔 넣어져 나는 덜컥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꺼칠한 손이 냅다 쓸고 내려간 허벅지 안쪽부터 윗배까지 소름이 절로 쫙 돋아 나는 녀석의 팔을 철썩, 내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한다고⋯.

"그렇게 얼렁뚱땅 통보부터 날려봤자⋯ 아, 제길." 

아카기의 손이 내 운동복 바지의 허리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그걸 미처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그의 품에 얼떨떨하게 묶여있는 동안, 아카기가 내 정수리에 대고 냄새를 한번 맡더니 생뚱맞게 물었다.

⋯당신 씻었어?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뭐? 아니."

그럼⋯. 아니다, 됐어.

하? 그럼 왜 묻는 거야. 찝찝한 줄 알면 적당히 관두지. 그러나 그 떨떠름한 반응과는 달리 매듭 푸는 손놀림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덕분에 이틀째 불결한 내 상태만 의식한 꼴이 되었다. 대뜸 통첩을 날리고선 말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달려드는 것이 영 켕기는 구석이 있었던지라, 난 부러 캐묻는 대신 갇힌 팔을 뒤로 쭉 비틀어 녀석의 겉옷 주머니를 뒤졌다. (아카기는 별달리 제지하지 않았다) 찌글찌글 구겨진 담뱃갑이 툭 튀어나왔다. 안이 텅 빈 갑으로 나는 비로소 전후의 인과관계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어쩐지 눈이 돌았다 싶었는데 궁극의 니코틴 중독자로서의 패악이셨다 이거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담배 떨어졌냐?"

그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오늘따라 일진이 더럽게 사나워서. 녀석이 느슨하게 벌어진 바지 밴딩에 엄지를 걸며 대꾸했다. 나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거 빌려줄 테니까 우리 대화로 푸는 게 어때."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 자아, 바지 벗어요⋯.

'우라질.'

결국 나는 항의하듯 결박당한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위팔이 나란히 뒤로 묶인 채로는 녀석의 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 새낀 힘이 무식하게 셌다. 이봐, 이거 엄연히 유린이야. 강간이라고. 난 최대한 차분히 설득을 시도했고 아카기는 깔끔하게 씹었다. 이 썩을 놈. 대꾸할 틈도 없이 팬티까지 훌렁 벗겨졌을 땐 아까 먹은 미소 된장국과 맥주가 한데 뒤섞여 역류해 체할 것만 같았다. 녀석의 손이 내 성기를 콱 그러쥐자 나는 떠벌리던 입을 딱 다물었다. 거시기를 쥐어짜다시피 흔드는 손아귀에 배려라고는 없어서 절로 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러다 뜯겨나가겠네. 그런 공포에 톡톡히 부응하듯이 내 물건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카기가 인상을 쓰더니 손을 멈췄다.

왜 이래?

"내가 할 소리다. 뭘 기대했어?"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평소엔 안 이러잖아.

"그게 그렇게 심각할 문제야? 이 나이 먹으면 자연스러운 일이지."

어쩌나. 새 나라의 청년에겐 금시초문인가 보군. 메슥대는 속을 억누르며 말하자 아카기가 번뜩 열 받은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눈 앞머리 주름이 푹 패면서 여차하면 아무나 하나 걸리라는 듯한 면상으로 돌변했다. 난 침음성을 삼켰다. 저거 보고도 세운다면 그게 기적이겠지. 나는 매도에는 취미가 없거니와 세상 그 어떤 창기도 저런 표정을 지으면 옴 붙었다고 소금이나 쳐질 판이었다. 말인즉슨, 전혀 동하지 않았다. 아카기는 굴하지 않고 꿋꿋한 태도로 기둥을 몇 번 더 쓸고 주물렀으나 내 거시기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카기가 꾸깃꾸깃하게 씹어뱉었다.

흡사 불능이구나, 당신⋯.

무슨 버튼 누르면 물 찌그리는 완구라도 다루는 수리공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그 맹렬한 평가에 실로 기가 찼다. 하지만 꺾인 자존심보다는 다짜고짜 비난당한 억울함이 단연 더 컸다. 

"이 자식. 그러니까 설 리가 없대도⋯. 이제 비켜."

슬슬 열 받을 참이었다. 나는 팔꿈치로 녀석의 옆구리를 낑낑대며 밀어냈지만 아카기는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 내가 잘 아는 감정의 기류, 그러니까 어떤⋯ 불순한 궁리를 할 때면 으레 지어 보이곤 하던 표정이 서서히 떠올랐다. 녀석의 탄탄한 가슴팍과 바짝 맞붙은 등줄기가 섬찟했다. 역시나 두말할 것 없이, 아카기는 나를 홱 잡아당겨 신발장 옆으로 내던지듯 쿵 밀어붙였다. 그 반동으로 너저분하게 장 밖으로 뒤꿈치 빠져나와 있던 신발들이 현관 타일 위로 우수수 낙하했다. 들입다 벽에 짓찧어진 뒤통수에서 찌르르한 아픔이 기어올라 나는 크게 컥, 기침했다. 

이후로는 항거의 연속이었다. 나는 바지를 다시 끌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카기는 굴을 뒤지는 너구리처럼 잽싸게 내 앞섬을 파헤쳤다. 기껏 추슬렀던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가 다시 걸렸을 때는 모든 의욕이 풀썩 꺾였다. 주말에 이게 무슨 패악질이야. 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아카기가 무릎을 꿇고 덜렁 늘어진 내 성기를 고쳐 쥐었다. 어떻게 조리할지 간을 보듯 가볍게 문지르는 꼬락서니가 아주 전리품을 챙기는 약탈꾼 저리가라였다. 그리고 녀석의 눈동자에 얼핏 어떤 광채가 맺히는 듯하더니⋯.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벌어진 입으로 성기가 쑥 빨려들어갔다. 둘레를 지그시 압박하는 입술의 감촉에 난 볼 안쪽 살을 잘근 짓씹으며 녀석이 투박한 입놀림으로 내 자지를 빠는 꼴을 지켜봤다. 그래도 쉽사리 설 턱이 없잖냐, 고 생각했다. 내 물건을 우격다짐으로 덥석 물어 삼키는 모습은 색정적인 애무라기보단 어린애 생떼에 가까웠다. 요령 없는 입놀림도 여전한지라 이따금 앞니 끄트머리가 좆기둥을 바늘처럼 따끔하게 긁고 내려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녀석의 입 안 만큼은 부드럽고 축축하면서도 따뜻했다. 성기를 완곡히 감싸는 뜨끈한 점막의 위력에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이런 미친⋯. 나는 불현듯 탄식 같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벽을 짚고 가빠진 숨을 골랐다. 결국 기어이 내 좆이 먼저 공세에 굴복하고 말았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며 절로 뻐근해졌다. 제기랄, 이제 그만해⋯. 나는 지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녀석도 그걸 감지했는지 확연히 단단해진 자지를 제 혀에서 미끄러뜨리듯 스르륵 뱉어내더니 괜스레 고분고분한 눈치로 제 아랫입술을 한 번 쓱 핥고는 눈을 굴려 날 올려다봤다. 망할 녀석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얄미운 호선을 그리는 걸로 미루어 짐작건대, 분명 난 영혼 털린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테다. 염병 안 봐도 뻔하지.

거 봐, 아직 쓸 만하네요.

아카기가 번들거리는 끄트머리를 검지로 가볍게 눌러 튕기며 말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나는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쏘아붙였다.

"넌 진짜 갈수록 돼먹지 못한 버릇만 배워와서⋯."

어라,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스운데.

녀석은 아픈 기색도 없이 심드렁히 말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내 말은, 성질나면 좀 다른 방법을 찾자는 거지, 애먼 데 힘쓰지 말고.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카기가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지막 남은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이 녀석은 자기가 그저께 섹스라는 말을 처음 배운 초등생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까? 그럼 적어도 변소에라도 다녀올 수 있게 허락해 준다면 고맙겠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사정했지만 날 벗겨먹을 집념으로 똘똘 뭉친 이 머저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 치르기 전에 먼저 목욕재계부터 하겠다던가, 그런 경건한 요구사항은 아니다. 단지 반나절 넘게 갈아입지 않은 런닝이 슬슬 찝찝했고 좀 전부터 자꾸 사정감과 분간되지 않게 치밀어오르는 요의로 불안해진 참이었다. 정말이지 이대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난 무릎을 털고 일어나 제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하는 아카기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라. 거 뭐냐, 너도 그대로 할 셈은 아니잖아. 그, 준비도 필요할 거고⋯." 

아카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허리띠를 잡아당기다 손등으로 한 번 입을 훔치더니 말했다.

하고 왔어.

"뭐?"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얼빠져 반문했다. 아카기가 덧붙였다. 

아까 화장실에서.

그가 평이하게 말했다.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러니까 여기 오기 전에⋯." 

뒷말은 절다시피 했다. 아카기가 한숨처럼 말했다. 

말 그대로. 됐지? 

그러나 어투는 수치심이 아닌 짜증을 내포했다. 똑같은 거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듯이. 멋대로 앞서나간 내 머리가 홀로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속을 비워내는 아카기를 떠올리려 들었지만⋯ 상상이 잘 가지 않아 관뒀다. 내 머리가 도무지 둘의 친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집요함이 섬뜩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카기는 그런 나를 흘깃 보더니 내게 바짝 붙어 섰다. 하반신이 빈틈없이 접붙자, 돌덩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 나는 더 물러날 곳도 없으면서 괜히 뒷걸음질했다. 녀석이 내 땀에 전 내 러닝 밑으로 손을 밀어넣으며 가슴을 세게 꼬집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벽에 뒤통수를 바짝 짓누르며 녀석의 백발을 힘껏 움켜쥐었다. 녀석이 내 귀에 대고 낮게 키득대는 걸 들으며 체념하듯 뇌까렸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녀석 같으니⋯.


⋯하여간 제멋대로인 녀석. 

그 생각을 다시 띄웠던 건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공장에서 일한다고."

나는 아카기와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눈앞의 녀석을 보면서 아까 들은 말을 반복했다. 꼭 말귀 어두운 앵무새처럼. 아카기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말했다.

⋯정확히는 내일부터, 죠.

짐은 진작 기숙사에 옮겨뒀어요. 아카기는 그리 말하며 마저 커피를 홀짝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난 별말 없이 그쪽으로 프림 통을 밀어주었다. 녀석은 마다하지 않고 스푼으로 프림을 양껏 푹 퍼내어 잔에 털어 넣었다. 누가 보면 금연이라도 시작한 줄 알겠어. 나는 커피의 검은 표면 위로 산처럼 쌓인 프림이 투명한 결정 언덕이 되어 녹아내리는 걸 잠시 지켜보다 시선을 들었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장난감 공장이라니. 언제 완구 취미를 들였어?"

그냥 적당히 일할 곳이면 충분했어요. 그다지 어디건 상관없고.

그가 심드렁히 말했다.

"다른 일들은 할 만하더냐?"

전혀.

내 물음에 아카기는 우물거리다 말했다.

하나같이 별로죠, 다들. 

"어지간히 재미없었나 보네."

그것도 있고. 뭐랄까⋯.

아카기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전에 있던 직장에서는 싸움이 났거든요.

그 전전 직장이랑 똑같아. 정말이지, 귀찮아서 원. 아카기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싸움? 나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직도 그러고 다녀?"

아니라고 하진 않을게요.

"골 때리네. 그럼, 아까 그⋯ '전전' 직장이라는 건?"

아⋯. 하하, 그것도 싸워서 잘렸거든요.

아카기가 산뜻하게 말했다.

길 가던 사람을 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사장 아들이라서.

그냥 직장 내 괴롭힘인 줄 알았건만, 한술 더 떠서 츠지기리까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자칫 카페가 아니라 유치장이 될 수도 있었겠군. 내 맞은편의 얼간이가 이제는 행인 상대로 뻔뻔하게 주먹질 행사도 하고 다닐 줄 아는 청년으로 자랐다는 걸 나는 새삼스레 의식했다⋯. 장장 6년인가.

아카기가 컵 받침에 달그락, 잔을 내려놓았다.

난 사람은 안 죽였어요.

그러더니 혼자 무슨 오해가 앞섰는지 그리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으쓱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딱 반죽음 지경까지 몰아붙이기는 쉽겠지. 너라면."

백날 내가 먼저 때려눕히진 않았어요. 엄밀히 말해 휘말렸달까. 

아카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대개는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거든요.

"넌 어지간히 인상이 나쁘니까."

나는 긍정했다. 발 디딜 틈 없는 닭장 같던 중학교 풍경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카기는 거기 빼곡히 들어찬 한 철 사춘기 방랑아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기피 대상이었다. 소위 반감의 집합체랄까⋯. 녀석이 여전히 시비깨나 붙고 다닌다는 게 그다지 놀랍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다. 내 지난한 교생 생활 동안 추억할 만한 순간은 그다지 없었지만, 매주 조례 시간에 녀석 쪽의 교실을 슬쩍 기웃거릴 때면 열에 아홉 번 정도로 눈깔 똑바로 뜨라며 정수리에 너구리 교감의 책등이 꽂히던 꼬락서니만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떠올릴 수 있었다. 

뭐, 이젠 됐어요. 그런 건 익숙하고.

"그래도 너무 지나치다시피 맞받아치고 다니는 거 아냐? 왜 무시하지 않고."

뭘 모르시네요, 그러지 않으면 더 귀찮아져.

그야말로 폭력이 생활에 밴 사람이 할 법한 말이로군.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긴 녀석은 그때도 중학생 신분으로 감당하긴 영 흉흉한 스케일의 소문을 아무렇지 않게 달고 다녔지. 용케도 정학 안 당하고 학교에 붙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 나중에 어디 사고 현장 같은 데에 괜히 얼씬거리지 마라. 자칫하단 건수 잡힌다."

알 반가. 

녀석이 큭큭 웃었다. 참으로 속 편한 웃음이었다. 아마 저 얼굴로 오만 사람들 부아를 치밀어오르게 했겠지. 미움받을 용기를 감내하기로 했다면 면전의 돌팔매질을 피해 가는 요령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녀석은 늘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될 대로 되라는 둥, 자기 일에도 지나칠 정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구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일이 그저 가만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무심함. 그건 얼핏 자포자기와도 혼동될 수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녀석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괜한 걱정이에요. 

역시나. 나는 팔짱을 꼈다. 

⋯물론 그쪽에서 다시 떼거리로 덤벼들면 말이 달라지긴 하겠죠.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한 번 철저히 열세에 몰려보면 다시는 그럴 엄두 못 내더군요.

설령 여러 명이 하나를 상대한대도 말이죠. 아카기는 커피를 다시 한 모금 가져가더니 불룩 혀를 말았다. 아마도 설탕의 티끌 같은 자취를 쫓는 것일 테다. 아카기 녀석의 팽팽히 부푼 뺨으로부터 나는 한때 플라스틱 스푼으로 파르페의 생크림 설산을 결연하게 채굴하던 열세 살의 흔적을 슬쩍 엿보았다. 

아카기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패거리들이랑 홀로 동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먼저 앞서는 겁쟁이들이야. 자기네들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뿌리 박히면 그걸로 끝. 

다들 정말 제대로 된 '끝'은 보고 싶지 않아 하거든. 정작 진정한 바닥에는 다가가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하나같이 쫄기는⋯. 아카기가 비릿하게 웃으며 끝맺었다. 보는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미소가 추억의 이편을 자극하는 듯했다. 미지근한 얼굴로 애매한 규율의 준수와 대범한 일탈의 경계를 오가는 녀석의 모습은 꺼림칙하게 비치는 한편으로 사람의 은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지. 한 가닥 실로 간신히 묶여있는 듯한 녀석의 부자유스러운 분위기에 당시의 나는 어떤 감응 感應마저 느꼈는데, 이 주변머리 없는 녀석에게 말을 한번 걸어보자는 생각을 홧김에 품게 되었던 것도 아마 그즈음이었나. 난 턱을 긁적였다. 불현듯 이 녀석이 제대로 졸업이나 했을지 하는 궁금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신경이 쓰였던 건 그게 아니라⋯.

"그래도 뭔들 못 일어나겠냐. 이런 시국에." 

아카기는 그저 후후 웃었다. 

그렇게 꺾인 의지를 추스를 만큼의 분노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드물죠⋯. 

녀석은 생각이 어딘가로 잠시 샌 것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시선이 멀찍해졌다. 녀석은 그렇게 잠시 알맹이만 빠져나간 듯이 굴더니, 이윽고 대답을 다시 조곤조곤 이어나갔다.

그래도 역시, 별로.

"그래?"

아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차하잖아요. 게다가 진 사람을 그렇게 다시 쫓아가는 취미 따위도 없고⋯. 전.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더 대꾸할 말 없었던 나는 어색하게 뒷말이나 곱씹으며 그를 보았다. 아카기는 여전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리고 있었다.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그의 정수리부터 팔뚝께까지 진한 금빛으로 적셨다. 무릇 이 시간대에 사람을 느른하게 방심시키는 자연광이 아카기의 옆얼굴로 엎질러지면서, 그간 젖살이 빠져 보기 좋게 굵직해진 그의 이목구비를 부각했다. 거기다 언뜻 위협적으로 비치는 풍채까지 더해진 녀석은 얼핏 탁월한 격투사의 재목 材木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도 보였으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가로막힌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녀석의 뿌리 깊숙이 깃든 음울함. 행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근본에서부터 좌우하는 무언가. 녀석은 소위 기백이라 할 만한 게 부족해 보였고, 저 혼자서 세상만사를 다 짊어진 양 짙게 가라앉은 표정은 그러한 심지가 깎여 내려가긴커녕 오히려 침향처럼 단단하게 굳어졌음을 어렴풋이 견지하고 있었다.

"여기 카스텔라 하나요." 

그 모습에 어쩐지 속이 답답해져,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직원을 불렀다. 아카기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들어서 날 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손을 머쓱하게 내렸다.

"이걸로 대충 아까 빚은 다 갚은 거다."

아카기는 그제야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별론가?"

아뇨. 

아카기가 말했다.

단지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라.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그 놈팡이들한테 뜯겼을 돈이었잖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카기는 그다지 큰 흥미도 놀라움도 느끼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어딜 가나 그런 무리가 있는 게 짜증났을 뿐이에요. 한 사람 상대로 셋이 뻔히 보이는 사기를 치다니. 

"오늘만 운 나쁘게 얻어걸렸을 뿐이야. 선뜻 아는 척 해줘서 고맙다."

뭘요⋯. 내기 마작에도 관심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더 시킬 거 있으면 시켜도 돼."

나는 듣지 못한 척 넘겼고 이내 아카기가 말하길,

딱히 대접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에요. 

"응?"

아카기의 입매가 일직선으로 다물어졌다. 

⋯⋯선생님인 걸 알아보지 못했으면 그냥 지나쳤겠죠. 

녀석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뗐다. 그에 나는 실소했다. 

"결과만 괜찮으면 됐지, 뭘. 그리고," 

나는 반도 채 비우지 못한 그의 커피잔을 가리켰다.

"기껏 주문해 놓고 그렇게 얼굴 구겨가며 앉아있는 것도 보기 불편해서. 겸사겸사 입가심 좀 하라고."

그러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는 왜 주문해서는. 나는 내 몫의 커피잔을 후룩 빨아들이며 말했다. 순간 아카기는 말문이 막힌 듯 대꾸하지 않고 날 빤히 보더니, 곧 볼을 약간 붉혔다.

⋯이 나이 먹었는데도 여전히 애 취급이네요. 

"그러냐."

네.

"나도 코흘리개들 뒤치다꺼리하던 버릇이 남아서, 원⋯."

전공이란 아무리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임했어도 끝내 삶에 자잘한 흔적을 묻히고 마는 것이라⋯.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카기는 그런 내게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지만, 타이밍 좋게 끼어든 점원이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나는 아카기 쪽으로 접시를 쓱 밀어주었다. 그는 한참을 쭈뼛대더니 그러면 사양 않고⋯. 들릴락 말락 읊조렸다. 나는 턱을 괸 채 포크로 찍은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녀석의 표정이 금세 눈 녹듯 풀어지는 걸 지켜보며 클클댔다. 덩치만 컸지 여전하군.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아카기가 입 안 한가득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 소규모 사설 도박장은 직원들 감시가 엄중하지 못하거든요. 

그에 나는 턱을 받친 손을 무심코 풀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덕분에 나도 깜짝 놀랐지 뭐냐. 그렇게 대놓고 눈 가리고 아웅 할 줄은."

그렇게 끼리끼리 작당하는 걸 보면 잠깐 하던 짓은 아니었겠지. 나는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아카기는 태연했다. 

아카기가 빵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뭐, 뻔한 수법이죠. 같은 일반인 상대로 터무니없는 레이트를 걸 순 없으니.

"그래서 의심 사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게 돌아가면서 뜯는 건가."

순 개자식들 같으니. 내 말에 아카기는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원래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일수록 앞에 나서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상실의 총액은 쌓아두는 양에 비례해 커진다. 한편으로 주머니에 든 두툼한 종이 봉투의 부피감이 내게 시시각각 일러주고 있었다. 아카기에게 건네받은 돈은 생활비를 메꾸고도 남을 액수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써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눈앞의 아카기 때문에 그까짓 고민은 들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남이 기약 없이 맡긴 재물을 쥐고 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을 들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런 기묘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자칫 개털 될 뻔한 날에 동네 마장에서 녀석을 마주친 것도 참으로 기막힌 우연일 노릇이었다⋯.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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