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커스
늦은 오후 예닐곱 살 정도가 된 것 같은 한 아이가 의자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그저 평범하게 공부를 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이가 문제의 답을 내지 못하는 시간만큼 어느 소년이 매질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답은 3번” 그러자 매질 소리가 멈추고 여자가 입을 뗐다. “한울 도련님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답이 늦으시네요. 내일은 조금 더 발전된 모습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만 수업을 마치죠” 그러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저 괜찮은 거야?” 한울은 평소와 달리 관심을 두었다. 마치 오늘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안 가지시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갑자기 무슨 측은함이라도 든 것에요? ” 그는 한울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작은 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는지 정강이와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입고 있는 셔츠와 반바지는 고급품이었으나 관리를 잘 하지 않았는지 꼬깃꼬깃 주름이 져 있었다. 소년은 한울을 보지도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쳐 앉아 자기 정강이를 살폈다. 그러던 중 한울이 소년의 방으로 쭈뼛쭈뼛 들어왔다. “그 연고 내가 대신 발라줄까 싶어서 어쨌든 내 잘못도 있는 거잖아” 한울은 소년이 뭐라 하든 소년의 정강이에 약을 바르며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한울의 물음에 소년은 짧게 답했다. “건엽입니다. 박건엽.” 건엽은 한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도련님 제가 뭐라고 이렇게 챙겨 주세요?” 소년의 말에 한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여태껏 온 애 중에는 제일 오래 버텼어. 그래서 이제는 정을 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한울의 나지막한 말에 건엽은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야 돼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한울의 첫 휘핑 보이는 한울이 4살일 때 왔었다. 그는 한울보다 5살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을의 처지임에도 언제나 당당했고, 한울이 좋지 않은 성적을 냈다고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울이 처음으로 만나는 또래 친구였던 만큼 한울은 그를 따랐고 그가 맞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울에게 꽤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한울 역시 그가 가르쳐 준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추억은 무로 돌아갔다. 한울이 정을 많이 주었단 이유로 어르신은 그를 해고했다. 한울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어르신의 방 앞에서 몇 날 며칠을 빌었으나 그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에 들어온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기 싫다며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자기 발로 나갔었다. 그다음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울이 애정을 주고 싶어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의 곁을 떠나갔다. 이러한 일이 몇 개월 사이 몇 번이나 반복되며 한울은 깨달았다. 정을 주어봤자 다들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난다는 것을 그 이후로는 한울은 모든 사용인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한울을 얼음 도련님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었다. 그렇게 다시 반년이 지나 다시 꽃이 피고 하늘이 푸른색으로 변하였다 마치 이전에 그가 왔던 날처럼 말이다. 물론 그때와 다른 점은 건엽이 온 것이었다. 휘핑 보이가 바뀌기 만을 열 몇 번째 이번에도 기껏해야 한 달이라도 버티면 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건엽은 한 달을 지나 어느덧 삼 개월이 넘게 남아있었다. 모두가 놀란 결과였다.
*
반바지가 제 나이에 맞지 않는듯한 느낌이 들 만큼이나 자란 현재까지도 역시나 가정교사의 회초리는 건엽을 향했다. 건엽은 그저 오늘은 손바닥이라 조금은 생활하는데 불편하겠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 그 외에는 무덤덤 해졌다. 다만 다른 쪽으로 문제가 생겼다. 피한울이 풀 수 있는 문제도 의도적으로 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미 한참 전에 끝냈을 내용임에도 틀리고 있는 모습은 그저 자신을 괴롭히려는 명목으로밖에 안 보였다. 종이에 붉은 선이 하나하나 그어질 때마다 제 손에 그어질 붉은 선을 생각하면 건엽은 계속해서 손바닥에 찌릿함을 느꼈고, 그저 빠르게 오후 4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를,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 종이 울리면 적어도 다시 수업이 시작 될 때까지 평화가 계속되었으니 말이다. 두 손을 모으고 빠르게 시간이 지나가 이 지옥 같은 서재를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 기도가 통한 것인지 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렸다. “건엽 군 이쪽으로 와주세요” 가정교사는 늘 수업이 끝이 나면 건엽을 불러 직접 틀린 문제의 개수를 세 개 했다. 이미 몇 개가 틀렸는지 알면서도 굳이 건엽이 한 번 더 세 개 만들었다. “이번에는 몇 개 인가요 건엽 군” 부드러워 마치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은 목소리로 묻는 말은 정말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책에서 열다섯 개, 두 번째 책에서 열일곱 개 합쳐서 총 서른두 개입니다” 담담한 것 같으나 말 사이사이 묘하게 떠는듯했다. 가정교사는 서재 한편에 놓인 채찍을 가져와서는 제 손바닥을 뒤집어 보였다. 장갑을 벗고 손을 달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건엽은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 전에 맞은 흉이 채 낫기 이전이었다. 가정교사는 연민의 눈길을 그런 건엽에게 보이며 그의 손바닥을 한번 살짝 쓸었다. 건엽이 어떻게든 통증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 오늘도 이 아이가 맞는 것은 도련님께서 잘못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머리에 새겨 두세요” 가정교사는 크게 숨을 내쉬더니 채찍을 휘둘렀다. 손바닥을 향해 내리치는 소리가 적막한 서재를 가득 채웠다. 소리가 끝이 날 때까지 30분 하루 중 가장 최악의 30분이었다.
건엽의 제 방으로 돌아가 오늘 맞은 부분에 연고를 발랐다. 붉은 피와 하얀 연고가 손바닥 위에서 왈츠를 추고 있었다. 아마 가장 아프고 쓰라린 왈츠일 것이다. 그렇게 손바닥과 허벅지, 종아리까지 빠짐없이 연고를 바르고 침대에 털썩 눕는 순간이었다. “괜찮아?” 문을 연 사람은 한울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말했었죠. 같잖은 연민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저는 도련님이 문제 하나라도 덜 틀리는데 더 좋다고 힐끔힐끔 저 볼 시간 있으면 문제를 하나 더 보세요. 네?” 건엽은 화가 난 듯 대꾸했다. “오늘은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너 도대체 십 년이나 여기 붙어 있는 거야 돈 때문이면 이미 받을 만큼 받았을 거 아니야!” 한울은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곤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으면 오늘 밤에 나가 오늘은 아버지 외출 있어서 경비가 그렇게 험하진 않을 거니깐 그렇게 나가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이에 맞지도 않는 반바지도 그만 입고” 한울 그날을 뒤로 다시 방을 나갔다. 한울에 갑작스러운 말에 건엽은 당황했다. 제 손으로 권속을 풀어주는 꼴이라니 우습기에 짝이 없었다.
건엽은 저택에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떠났다. 도망이라면 도망이고 회피라 한다면 회피였다. 아마 한울의 말은 진짜 도망가라는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색하지도 않는 건엽의 모습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서 그냥 울 거면 울지 매번 제 입술이나 손을 깨물면서 버티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저 충동적으로 내지른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저 우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년의 절규였다. 이윽고 다음날 당연하게도 수업에는 건엽이 나타나지 않았다. 저택에서 10년 만에 생긴 일이었다. 한울은 나가라고 소리친 것이 후회되고 있었다. 그게 진심이 아니었는 데 최악이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고 조금만 더 진심을 보였다면 안 그랬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휘감았다. 인생에서 이렇게 바보같이 느껴진 순간이 있었던가…. 그날 이후 한울은 저택의 온갖 곳에서 건엽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어떨 때는 건엽의 방에 연고를 두었고 어떨 때는 늘 시선이 가는 그 자리에 책상을 두었다. 이전에 그랬다면 아마 저곳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겠으니 상상도 했다. 어떨 땐 옷장에 옷도 바꿔보았다. 셔츠도 더 큰 것으로 저택에서는 못 입었던 긴바지도 옷장에 걸어보았다 그 옷을 입은 건엽을 상상하며 그렇게 저택에 혼자서의 추억이 쌓일수록 시간은 더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제는 저택의 주인이 아버지가 아닌 내가 되었다. 더 이상 가정교사에게 수업도 듣지 않았다. 건엽의 얼굴은 흐릿해져 갔다. 이제는 다 잊은 건가 싶다가도 만들어둔 것들은 보면 다시 흐릿했던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가도 멈췄다. 이제 너에게 가지는 감정은 연민이 아닌 사랑인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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