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AH

한울건엽

이글을 안식처가 아직은 없는 노아에게 바칩니다.

차갑게 볼을 스치는 바람과 바람 소리 외엔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칠흑 같은 암흑과 퍽 잘 어울렸다. 한울이 손목에 맨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4시 30분이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발을 딱딱 구르며 기다리는 30분은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5시, 붉은 태양이 천천히 올라오며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교도소의 철문이 열렸다. 출소자들이 속속히 나왔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나온 청년은 터벅터벅 한울에게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어?" 그가 나오고 한 첫 마디는 마치 데이트 장소에 방금 도착한 연인이 할법한 말이었다. "별로 안 기다렸어, 받아" 한울은 그러곤 두부를 건네주었다. "하얗게 다시는 죄짓지 말자는 뜻으로 먹는 거래" 건엽은 두부를 받고는 한번 짧게 웃었다. 아마 그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떠들썩했던 게 생각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어느 때보다 따스했던 겨울, 사회에서는 날씨와 반대로 싸늘한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채널을 틀어도, 어떤 신문을 펴도 나오는 YB 그룹의 몰락,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그룹의 민낯이 샅샅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고등학생을 이용한 사건 묻기. 마약 재배 및 유통, 인천 경찰과의 연통 그 외에도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정과 비리는 주요 조직원들 모두 교도소에 수감하기에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놀란 것은 이 커다란 화재의 시작은 어느 고등학생이 모든 자료를 정리해 경찰에 넘긴 것에서 불씨가 지펴졌다는 것이다. 그 고등학생은 마약 유통을 간접적으로 도왔으며 살인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10년으로 기소되었으나 최초로 폭로를 한 점을 감안해 징역 3년에 그쳤다. 그 이후로 모범수로 건엽은 재소자들 사이에서 모범이 되었으며 맡은 일을 성실히 한 것 등으로 2년도 채 되지 않아 가석방 승인을 받아내었다 그렇게 한울이 유성 공고 퇴학을 기점으로 연백파와 모든 연을 끊은 지 3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만에 건엽까지 연백파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완전하게 벗어났다. 이제는 하고픈 것을 하며 삶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교도소에 있을 때 한울은 적어도 달에 한번은 면회를 왔었다. 처음 몇 달간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고, 어느 정도 이후엔 교도소에서도 많이 들은 연백파의 끝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이후엔 뭐 하고 지내는지 말했다. 밥은 뭘 먹었는지, 우연히 들어간 곳이 맛집이었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건엽이 가석방 승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출소 후에 무엇할지 같이 고민도 해주었다. "박건엽 너 갈 곳 없지?" 한울은 함께 걱정해주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누구 아버님이 없애버려서?" 건엽은 농담같이 받아쳤다. "그러면 같이 살래? 어디든 좋으니까" 한울의 제안에 건엽은 조금은 당황했다.

"나 밤에 잠 잘 못 자"

"알고 있어서, 몇 주 전에 말해줬잖아 악몽 꿨다고"

"나랑 사는 거 안 껄끄럽겠어?"

"껄끄러울 게 뭐가 있어 그냥 은사님 아들이랑 사는 거지 네가 껄끄러우면 안 와도 괜찮아 나 혼자 넓게 살고 좋네, 하여튼 결정하면 말해줘 룸메이트가 지낼 자리 만들 시간은 있어야지"

"...그래"

한울은 고민 끝에 달동네에 작은 집을 구했다. 돈이 별로 없기도 했으나 전에 달이 가까운 곳이 좋다는 건엽의 말 한마디가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둘은 가방 하나도 안되는 건엽의 짐을 들고 올랐다. 가파르고 금도 가 있는 계단은 어찌 보면 불안하고 흔들릴 수도 있는 둘의 동거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대청소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자 해는 뉘엿뉘엿 지고 달이 떠올랐다. 둘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피한울 하나만 물어보자 왜 굳이 같이 살자고 한 거야?" 건엽은 둘이 같이 살기로 한 그날부터 매일 품어온 질문을 드디어 한울에게 던졌다. "그냥 너랑 같이 살면 괜찮을 거 같아서…. 밤에 잠이 좀 올 거 같아서" 한울은 건엽이 누운 자리로 자세를 틀었다. "그래서 어때 잠은 오는 거 같아?" 건엽은 슬쩍 한울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엽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잘자…." 이 말이 상대에게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나 좀 일어나봐…. 제발 나 좀 살려줘…." 새벽 4시 즈음 건엽은 한울을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 박건엽" 한울이 눈을 비벼 잠을 깨고 본 건엽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꿈에서 엄마가 나왔어…. 그리고는 피눈물을 흘리는데…." 한울은 건엽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 박건엽 꿈일 뿐이야 환상일 뿐이라고, 진정해" 건엽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한울은 생수를 가져왔다. 건엽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셨다. 생수 뚜껑을 닫고 건엽은 계속 복부를 어루만졌다. 아마 저 위치는 중학생 시절 칼에 맞은 부분일 것이다. "거기 아직도 아파?" 한울은 아마 건엽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을 거다. 건엽은 그 뜻을 반대로 이해 했다. "너는 예전부터 매번 그러더라? 그렇게 자꾸 사람한테 시비를 걸어야 마음이 편해져?" 건엽은 방금 악몽을 꾼 것도 잊은 것 같이 한울에게 화를 내곤 밖으로 나갔다. 한울은 당황해서 그런 건엽의 손목을 붙잡았다. "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너 아직도 아파하는 거 같아서, 

둘은 밤중 촌극을 정리하고 조금은 이른 아침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울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일하러 갔다. 얼굴도 되고 비율도 좋다고 어쩌다 스카우트 돼서 어디선가 모델 일을 하고 있다 했다. 그에 반해 건엽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하고 밥을 먹으면 하면 할 게 없었다. 남아있던 집안일을 하려 하면 피한울이 미리 해놓고 가서 할 게 없어졌다. 그럴 때마다 건엽은 남는 시간에 집 앞에 나가서 웅크려 앉아 풀을 보거나 도시 풍경을 봤다. 그러고 있다 보면 종종 이 도시에 자신의 자리가 없는 거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피한울 나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저녁 피한울이 돌아와서 같이 저녁을 먹던 중 건엽의 충격 선언이었다. "왜? 뭐라도 하고 싶어졌어?" 확실히 그간 건엽이 어딘가 비어있는 사람같이 있긴 했다. 삶의 목표를 끝낸 게 이렇게 작용했던 것 같다. 본인도 예상 못한 눈치였다." 네가 집안일도 다하고 할 게 없어서 멍하니 있으면 무언가 낙오자가 된 거 같은 기분이야." 한울은 살짝 놀랐다. 그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무언가에 구애받지 말고 하라는 신호였는데,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을 거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해 아르바이트하던, 글을 쓰던, 너 하고 싶은 건 다 해 대학이 가고 싶으면 가도 좋겠지."

건엽은 그날 이후로 하고 싶은 것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이래로 복수만 바라보고 있어서였는지, 목록 다섯 개를 적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목록 다 적었어?"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건엽을 보며 한울은 물었다. "아니 너는 해보고 싶은 거 있었어?" 건엽은 한울에게 되물었다. "글쎄 딱히 뭘 해보고 싶다는 건 없어서 딱히 조언을 못 해주겠네" 건엽은 책상을 톡톡 치다가 무언가 번뜩 떠오른 듯이 한울을 바라보았다. "나 같은 애들 도와나 줄까…?" 한울은 잠시 고민하더니 청부폭력이라도 하는 거냐고 농담으로 받아쳤다. "…. 그거겠냐 그냥 힘들 때 어른 한 명이 진지하게 이야기라도 들어주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너도 그랬을 거 아니야 피한울" 한울은 꽤 진지하게 그런 건엽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꽤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울 역시도 그런 사람이 곁에 잠시나마 있어 주었기에 지금에 한울이 되었기에, 그렇게 목적이 생긴 이후 건엽의 하루는 바뀌었다. 건엽은 대학을 입학하기로 했다, 원체 공부를 잘하기도 했고, 의욕도 꽤 됐기 때문인지 고등학교를 제적당한 공백이 무색할 정도였다. 대학 입학 요건을 채우기 위한 검정고시가 결과가 나온 이후 둘이 마주칠 일은 더욱이 없었다. 한울에게 일이 더 들어 온 것도 있었고, 얼마 준비하지 않고 단번에 검정고시에 통과한 의욕 때문이었는지 건엽은 독서실에 그 누구보다 먼저 가서 그 누구보다 늦게 들어왔다. 둘이 대화하는 건 우연히 시간이 맞는 저녁 시간이거나, 먹고 가라며 한울이 메모한 포스트잇에 건엽이 잘 먹었다며 아래 적는 것 정도였다. 자동으로 둘이 같은 시간에 잠을 자는 일도 줄어들었다. 

"다녀왔어" 한울은 아무도 없는 집의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근 몇 달 동안 둘이 살면서 습관이 돼버린 것이다. 한울은 늘 그랬다는 듯 집을 청소하고 밥을 먹고 했다. 이렇게 저녁 일과를 하고 있다 보면 혼자 있으면서 생기는 외로움이 집안을 가득히 채웠다. 그럴 때마다 좁던 집이 넓어 보이곤 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건엽을 기다리곤 했다. 귀가한 건엽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이상하게도 잠이 잘 오곤 했다. 마치 고등학생 때 듣던 노래처럼 말이다. 건엽 또한 한울이 자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곤 했다. 내 주변 사람이 다시 돌아와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일까 시작은 엄마였고 그다음부터는 손에 꼽기도 두려울 만큼 많은 이들에 마음을 주고 그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을 자주 봐서인지 더 이상 누군가와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었는지 이제는 생각하기엔 멀리까지 왔다. 무엇이 되었든 더 이상 누군가를 잃지 않고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이 그저 상상에서만의 일이 아닌 현실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인생에 빛이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건엽은 그런데도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지냈다.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와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건엽은 아직도 그렇게 지냈다. 이미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 일 텐데 말이다. 건엽은 독서실 공부를 끝마치고 나와서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었다. 어떨 때는 도심 한복판으로 어떨 때는 부둣가로 향하였다. 마치 무언가 응어리가 다 풀리지 않은 사람처럼 건엽은 계속해서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기절하듯이 잠을 청했다. 그러는 건엽은 정말 불안정해 보였다. 아주 짧게 밖에 안보는 한울마저 건엽이 불안정 해 보인다는 것을 피부로 직접 느낄 정도였으니 말을 다 한 것이었다. 결국 한울은 불안정해 보이는 건엽을 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피한울 뭐 하는 짓이야 안 멈춰?” 건엽은 한울에게 계속 묻고 따졌다. “아 그냥 앉아 있어 건엽아” 한울은 그런 건엽이 무어라 하던 악셀에서 발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별로 크지 않은 놀이동산이었다. “…. 그래서 냅다 사람 태우곤 온 곳이 놀이동산이야? 내가 무슨 애냐….” 건엽은 허탈한 듯 입을 열었다. 물론 한울은 건엽이 그러든 말든 표를 끊고 놀이동산 안으로 입장했다. “그냥 즐겨 건엽아, 맨날 무슨 곧 죽을 사람같이 다니지 말고 음… 역시 넌 고양이는 안 어울리는 거 같네” 한울은 건엽에게 머리띠를 이리저리 대보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결국 건엽은 마지 못한다는 듯 한울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한울은 건엽을 데리고 놀이공원 이곳을 쏘다녔다. 어린이들이니 탈법한 것부터 롤러코스터 같은 긴장감 있는 것까지 한울은 그렇게 건엽을 한치도 가만히 두지 않고 움직이고 말을 걸었다. 거기에 주기적으로 추로스와 같은 간식까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울이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줄 이유가 없었다. 저 역시 건장한 성인에 이런 어린아이 취급을 받을 나이는 지난 지 한참이었다. 이윽고 밤이 되고 놀이공원에서는 불꽃놀이를 해주었다. 개장 때부터 지금까지 어림잡아도 예닐곱 시간 동안 한울의 손에 이끌려 다닌 것이었다. "건엽아, 우리 이러고 있으니깐… ᄋ… 아니다" 놀이공원 어딘가의 벤치, 폭죽이 터지는 것 때문에 한울의 말소리가 옅게 들려왔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래 가족 같네, 가족 나 가족이랑 놀이공원 오는 거 소원이었잖아" 저건 뻔한 거짓말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을 무마하려는 그런. "그래서 오늘 나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은 이유가 뭐야" 아마 차에 건엽이 탈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었을 것이다. "음… 네가 되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거지 명색이 은사님 자제인데 그것도 내 잘못으로 돌아가신 은사님의 자제잖아 간단히 말해 동정 길게 말하면 동거인이 다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려는데 너라면 그걸 그냥 놓고 보겠니? 건엽아, 너는 밤보다는 해가 뜨기 직전이 새벽이 가장 잘 어울려 그러니깐…. 제발 그러지 마" 한울은 마치 헤어지는 연인을 붙잡는 것처럼 입을 뗐다. "내가 쉼이 되어 줄게 "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낯 뜨거운 소리 성격상 하지도 않을 말의 연속이었다. 한울의 옆에서 웃음을 참다 참다 나온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왜 이렇게 웃기지 요즘 무력감에 빠지긴 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티 났어?" "어 완전 매일 기절하듯 자지, 내가 말해도 못 들은 것처럼 있는 데다가 또…." 한울은 마음에 두었던 서운한 것을 말하는 듯 속사포로 하나하나 말해갔다. "그만 좀 말해…. 이 정도면 그냥 진즉에 말하지 왜 묵혀둔 거야" 당황한 듯 건엽은 입을 뗐다. 제아무리 한울을 말려봐도 한울은 계속해서 말을 해갔다. 건엽은 물리로라도 입을 막으려 했으나, 한울은 싸움하던 실력으로 건엽의 손을 피했다. 건엽이 진심으로 화가 나서 한울을 한 대 치기 바로 전 놀이공원 가득히 폐장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 집으로 가자 이제” 한울은 다시 건엽의 손을 잡고 차에 탔다. 무엇이 되었든 놀이공원에 올 때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차 안이었다. “건엽아” 도심 속 불빛을 달리는 적막 사이 한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건엽아 자?” 건엽은 계속해서 끌려다닌 게 피곤했는지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 자는구나 건엽아 못 듣겠지만 네가 누군가의 위안, 휴식처가 되어 주겠다고 그랬잖아 그러면서 네 휴식처는 못 찾고 방황하고 있었구나” 한울은 건엽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기억도 나지 않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해주던 것처럼 애정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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