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B-Karzen

2019.08.21

자캐 커뮤니티 기계인형의 춤 애프터 합작

“저기 좀 봐.”

“아, 그 아기들?”

“다행이야. 그 작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나봐.”

 

안드로이드들의 시선들이 닿는다. 몰래 보며 신기한 듯 쑥덕거리는 이가 있었고 대놓고 바라보며 한없이 귀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흐물흐물한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양 걸음마다 시선을 떼지 못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든 행위에는 순수한 호의가 깃들어있다. 그러나 카르젠은 그런 눈망울을 마주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바이저를 벗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시선이 마주치는 일이 퍽 버겁다는 건 둘째 이유였고, 첫째는......

바이저가 없으니 자신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카르젠 자신도 알지 못 했지만 분명 반갑게 받아들이는 표정은 아닐 것이다. 아차 싶었고 빠르게 고개를 땅으로 돌렸다. 구형 안드로이드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양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첫째는, 전투경험은 수천 번 겪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어서 대처 방안을 모르겠어서. 대체 저 기기들을 어찌 대해야 좋은가?

 

구형 안드로이드들은 인류의 문명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의 도시를 그대로 따와서 쓰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의 문명은 발달하여 여러 체계가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가 안드로이드들을 실어 날랐고 아래에서는 지하철이 오간다. 운송장치가 교차하며 원활하게 도시를 오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시끄러웠다. 판도라의 바이크 같은 것이 수백 대가 쉼 없이 모터 소리를 내며 도로를 오갔다.

 

벙커는 항상 정적을 유지했었다. 가끔 요란스럽게 떠드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도시의 소음과 데시벨을 따져보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카르젠은 전투 중에 폭격 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 전투 중에 굉음을 듣는 것과 일상에서 소음을 마주하는 것은 다르다. 청각은 상대의 접근을 눈치 챌 수 있는 중요한 신호였기에 항상 신경 써야 했고, 일상생활에 동반되는 소음은 반사적인 경계를 불러 일으켰기에 주의가 낭비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경우였다. 카르젠은 조용한 골목을 꺾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골목 모퉁이를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 개체 수는 하나, 이족보행 형태, 이동 중이지는 않다, 벽에 기대어 있고 공연히 발을 툭툭 치고 있다. 카르젠은 제 창에 손을 대었다가 곧 맥이 풀려 그만 두었다. 이 도시에 그런 안드로이드들은 널리지 않았던가?

 

자연스러운 체 하면서 모퉁이를 돌았다. 이곳에는 흔한 구형 안드로이드였다. 이십대 초반의 외형을 갖춘 자유분방한 차림의 인간 소녀형태. 그것이 카르젠을 응시했다. 곧,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 소문 자자한 블리스카 애들이잖아?”

 

카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길을 잃었어?”

 

어투가 사려 깊어졌다. 어째 과도하게 상냥해지는 모습이 본성 이상의 의무로 상냥함을 취하는 모양새였다. 마치 어리고 경험이 없고 미숙한 기체를 챙기듯이. 수백 수천 년을 지낸 이곳의 안드로이드들은 블리스카들을 곧 잘 그리 대하곤 했다. 카르젠으로서는 영 익숙해지지도, 내키지도 않는 반응이었다.

 

“대로가 시끄러워서 이쪽으로 왔을 뿐이네. 자넨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여기 길은 알고?”

“지도 데이터는 진작 받았네.”

 

소녀는 씩 웃었다. 제 능력에 취한 새내기를 용인해주며 그래도 나름 대견하다는 듯 취해주는 웃음이었다. 눈으로 아, 그러니?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어디에 뭐가, 어떤 것이 있는지 알기 힘들걸? 어때? 안내해 줄까?”

“되었네, 내 알아서 둘러보겠네.”

 

카르젠은 제안을 물렸다. 혼자 행동하는 것이 카르젠은 편했다. 소녀는 가볍게 고민하더니 다른 말로 카르젠을 꾀었다.

 

“시끄러워서 골목으로 빠졌다고 했지? 내가 조용한 장소를 알아. 지도에 소리 정보는 암만 찾아봐도 없을 거 아니야?”

 

 

“허, 아니. 자네, 그래서 온 곳이 여기인가?”

“도시에선 낮의 술집만큼 조용한 곳 찾기 힘들거든?”

칵테일 바였다. 입구에서 꺼진 네온사인이 화살표를 그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통로는 어둡고 비좁았다. 긴급 상황에 빠져나오기 쉽지 않아 보인다. 카르젠은 경계를 세웠다. 소녀가 먼저 들어서서 내려갔다. 철 계단을 밟는 소리가 텅텅 울렸다.

 

“어서 들어와. 내가 설마 널 위험한 곳에 데려오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안드로이드를 무슨 수로 믿을까? 항상 회로 속에 새겨두었던 불신이 올라와 벽을 세웠다. 전에 마주하던 안드로이드들은 최소한 전부 동료였으나, 이곳의 기기들은 모두 타인이다. 카르젠은 입구 밖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있었다.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소녀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만약 너를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안드로이드가 있으면 걔는 여기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거든? 그럴 만큼 겁 대가리 상실한 안드로이드는 없으니까 안심하고 내려와.”

 

......그 말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굳이 규율정도로 치환하여 듣지 않더라도 여기 안드로이드들이 블리스카 출신 안드로이드에게 보이는 애착은 충분히 이해한 상태였다. 망설임 끝에 카르젠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들어가기 전, 좁은 입구에 등에 맨 창이 걸렸기에 창을 고쳐 쥐어야 했다.

 

소녀의 말대로 조용하기는 한 장소였다. 손님이라곤 그 둘뿐이었다. 소녀는 능숙하게 바에 걸터앉았다. 카르젠은 바로 다가갔으나 깊숙한 곳에 앉는 대신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창을 발치에 두었다. 언제든 창을 차 올려 낚아 챌 수 있도록. 카르젠의 오랜 습관이었다. 소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텐더는 능숙하게 곧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칵테일 잔을 내놓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그 또한 둘의 관습인 듯 했다. 소녀는 잔을 기울여보였다.

 

“한 잔 할래?”

“그건 술인가? 거절하겠네.”

“왜? 너희 기종은 알코올 처리 장치가 없어?”

“알코올이 전투에 영향을 미치지 못 하게 설계 되었네. 마셔도 별 효과 없을 걸세. 또한, 혹시 그렇지 않는다고 한들 판단력을 흐리게 할 가능성이 있는 물품을 가까이 하는 건 좋지 않아 보이네.”

“으음.”

 

소녀는 칵테일을 입에 머금고 웅얼거렸다. 그러더니 삼키고 말했다.

 

“불쌍해라.”

 

카르젠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불쌍하다는 말은 이 도시에서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카르젠은 그 동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결론을 내지 못 했다. 그들은 무엇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가? 블리스카에 속했던 것? 전투만 하며 살아온 삶? 인간들에게 실험대상으로 쓰인 것? 그 일들이 마땅히 동정을 받아야하는 일인가? 굳이 따지자면 카르젠을 힘겹게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삶과 소속 단체. 비록 그것에서 빠져나온 것이 카르젠의 행동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그러나 그 말을 내뱉으면 자신을 향한 시선이 한층 더 측은해질 것을 모르진 않았다.

 

순간 카르젠에게 휘몰아친 긴 고민이 무색하게도 소녀는 가볍게 말했다.

 

“술 맛을 모른다니.”

 

카르젠은 어이가 없어져서 허, 소리를 내었다. 소녀가 눈을 가늘게 했다.

 

“진담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뺨이 붉게 상기되고 곧 눈이 나른하게 풀렸다. 그걸 지켜보며 카르젠은 역시 저런 것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삶은 길거야.”

 

더운 숨을 내뱉으며 소녀는 말했다.

 

“우리들은 긴 시간을 살아왔어. 너희도 그렇겠지. 우리에겐 수명이 정해져있지 않잖아? 어쩌면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지도 몰라. 여기 기술이면 얼마든 신체를 복원 가능하니까. 그러니까 우린 그 긴 삶을 지낼 수단을 마련해 두어야 해. 술도 나쁘진 않거든? 꽤 기분 좋게 만들어줘. 아, E - drug는 손대지 말고.”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 없네. 물론 술도 마찬가지일세.”

 

소녀는 카르젠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훅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떻게 살아갈 생각인데?”

 

카르젠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입을 달싹였으나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없는 말을 대충지어내서 답하는 건 카르젠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생각이네.”

 

겨우 질문을 닫았다. 그 미숙한 태도에 소녀는 코웃음을 지었다.

 

“글쎄다? 별로 안 믿기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왜냐면, 아직도 적응하지 못 한 것 같아 보이거든.”

 

소녀는 느긋하게 말했다.

 

“너 말이야, 여기를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소녀의 시선이 발끝의 창에 가닿았다. 움츠리고 있었기에 바위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던 기계생명체가 붉은 인광을 낼 때처럼, 카르젠은 눈앞의 상대가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한 느낌을 받았다. 감각이 확 깨어났다. 하마터면 튕겨 올라 창을 겨눌 뻔했다. 수초 만에 조용하고 정갈했던 술집의 기물이 넘어지고 깨지고, 유리파편이 날리고 바를 밟고 한 손에는 무기를 쥐며 말이다. 그러나 카르젠은 주먹을 꽉 쥐며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참아내었다. 이 도시에선 안 된다. 더 이상은 아니다. 소녀는 카르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소녀는 알까?

“블리스카 꼬맹이.”

 

소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기사단 같은 거 없어. 충성을 바칠 상대도, 대항할 적도 없어. 그에 맞서야 할 군인도, 병사도. 하다 못 해 범죄자도 없어서 경찰도 필요하지 않은 도시야.”

 

소녀는 카르젠을 직시했다. 해킹을 당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쌓아왔던 프로그램들이 소녀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와 함께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허망함이 카르젠을 휘감았다. 카르젠은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가 떼었다. 필요이상으로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나왔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마. 때론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 하는게 안드로이드야. 다만 그렇더라도....... 난 그저, 네가 보기 안쓰러워서 그래. 네 행동은 전쟁터에서는 신중한 군인의 표본이었겠지만, 이곳에서는 강박이야. 인간들이 심어둔 강박.”

 

강박? 당연하게 몸에 배었던 습관, 경계, 전투. 때로는 연산보다 빠르게 행해져야 했던 행위들. 그것이 정말 필요 없는 것인가? 카르젠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 있는가? 불쾌함이 확 올라왔고 카르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카르젠은 알았다. 안드로이드 거주지역에서는 단 한 번의 전투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이나. 그들은 무기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다지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넘어 창을 놓지 못 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 반응들로 그들의 무력에 대한 인식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반응을 마주할 때 마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사고방식들을 느꼈다.

 

벙커에서는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렇기에 결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같이 파견 나온 블리스카 대원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반박했으며, 행동했다. 그 일은 견고한 믿음에 금을 냈다.

 

그리고 이젠 매일 같지 않은 의견을 가진 이들을 마주하며 나간다. 기본적으로 다르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가치관을 기른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더 이상 무엇 하나를 붙잡고 옳다, 그르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카르젠은 나가버리는 일을 하지 못 했다. 소녀는 카르젠을 살피더니 느닷없이 목소리를 경쾌한 톤으로 바꿨다.

“내가 보기엔 네게 일이 필요해!”

 

소녀는 척 카르젠을 가리켰다. 카르젠은 미간 앞에 놓인 손가락을 미심쩍게 보았다.

 

“공연히 지내지 말고 뭔가를 해봐. 사실 좀 놀고 즐기라고 말해주려고 했더니 넌 영 그럴 것 같지도 않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데려온 게 술집인가?”

“시끄러워, 네가 이 알코올의 참된 의미를 몰라서 그래. 이게 아니고. 하여튼!”

 

소녀는 손가락을 가져가서 제 머리에 대었다.

 

“너 지금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고 있지? 메모리에 과거 회상 말고 다른 걸 올려놔봐. 내가 일을 권하는 건 그래서야. 메모리는 한정되어 있어서 다른 걸 돌려두면 과거 생각은 미뤄 둘 수 있을 거야.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 대신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질 거야. 하루를 즐기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아직은 까마득해? 군인일 했던 데이터 말고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 좀 달라질걸?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해봐.”

“대체 내가 어떤 걸 하면 좋겠는가?”

“스스로 생각해 봐. 아니면, 내가 명령이라도 내려주길 바래?”

 

카르젠은 답하지 못 했다. 주절주절 거리던 소녀도 입을 닫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녀의 처음 말했듯 정말 조용한 공간이었다.

 

“에라,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를 무턱대고 사회에 내보내는 것도 어른의 도리가 아니지.”

 

소녀는 잔을 벌컥 들이키며 비우더니 탁 내려놓고 말했다.

 

“뭐가 있을까, 이게 좋겠다. 얘, 너 그거 알아? 이 행성이 전부 정화된 건 아니거든. 아직도 오염지역에서 정화작업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단체가 있어. 그런데 그런 지역에서 간혹 맹수가 오염된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날뛰기도 한다더라. 거길 정화하는 기기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제압하거나, 포획해서 치료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 이거라면 익숙하지 않겠어?”

 

카르젠은 소녀가 제시한 업무를 따져보았다. 꽤 괜찮게 들렸다. 무엇보다 자신도 있었다. 전투 및 신체 활동 성능이라면 이곳 안드로이드보다 자신이 더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업무 내용을 되짚어 보다가 소녀의 설명 중에서 사냥이나 제거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까지나 예시야. 이런 것도 있다는 걸 알려준 거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소녀는 빈 잔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떠날 시간이었다.

 

 

 

“너 그 옷 계속 입을 거야?”

 

나가던 중 소녀가 태연하게 의상을 지적했다. 카르젠은 방어적으로 코트를 움켜쥐었다.

 

“무슨 말이지?”

“우선 이곳의 구형 안드로이드들은 일상복으로 그런 제복을 입지 않아. 너 가는 곳마다 블리스카 출신인거 티내고 다니는 거 좋아해? 물론 그걸 벗는다고 여기 안드로이드들이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만.”

“그럼 어쩌라는 건가?”

 

카르젠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유독 매서웠다. 소녀가 얘가 왜 이러지?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곧 뭔가 알아차린 표정을 지었다.

 

“아하, 너 아직?”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무것도 아니야. 음, 내가 옷을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 옷, 딱 하나 남은거지? 그렇게 입고 다니다가는 곧 헤질걸?”

“......군용이어서, 그리 쉽게 망가지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그것만 입고 있으면 빠르게 상하잖아. 가자, 내가 다른 옷 사줄게.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은 잘 보관해둬.”

 

옷 가게의 안드로이드는 카르젠을 보고 호들갑을 떨더니 (“어머, 어머. 너 새로 온 애 맞지? 생산된 지 얼마나 되었어? 아이고 애기다. 이런 애들을 두고 그 따위 짓거리라니, 인간들이란 진짜......”) 옷가게의 옷을 전부 내줄 것처럼 굴었다. 이것저것 쉴 새 없이 들이밀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했다. 옷을 사준다던 소녀의 말은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카르젠은 처음에는 그 많은 물건에 곤혹스러워하다가 적당히 골랐다.

 

“그게 좋겠어?”

 

검고 긴 바지. 질긴 청색 재킷. 카르젠은 어색한 옷의 감촉을 툭툭 건드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하기는 편할 것 같네. 그런데 너무 어두운 것 같은데, 다른 색은 없나?”

“하얀 색을 찾아? 그런 옷은 때가 타서 원래 하얀 색을 잘 안 만들어.”

 

안드로이드가 단을 맞춰 개켜 종이 가방에 넣어준 블리스카 제복을 카르젠은 소중하게 챙겼다. 나가는 길까지 장갑이며 모자 같은 걸 사은품이라고 주는 안드로이드의 선심을 적당히 받고 또는 거절하며 상점 밖으로 나왔다.

 

“그럼, 이만 하면 되었겠다.”

“무엇을 말인가?”

“안내 말하는 거야. 이제 혼자 갈 수 있겠지?”

“원래부터 혼자 잘 다니고 있었네만.”

“그래그래.”

 

소녀는 골목길로 몇 걸음 가볍게 뛰어나갔고 뒤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 잘 지내라.”

“알겠네.”

“그냥 하는 인사말이 아니야. 정말 잘 지내야 한다.”

“......노력해보겠네.”

“좋아.”

 

그리고 정말 소녀는 골목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카르젠 홀로 남았다. 소녀가 오기 전처럼 정처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도를 보지 않고 걷다가 다시 대로로 나와 버렸다. 차들이 코앞에서 스쳐지나간다. 옷가지를 사정없이 뒤흔들고, 또다시 울리는 굉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으나 곧 누그러트렸다. 카르젠은 일상의 감각을 경계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했다.

 

그 기기를 대하느라 미뤄둔 고민이 덮쳤다. 그 기기는 이곳을 전쟁터로 생각하냐고 물었다. 블리스카의 벙커가 아니면 전부 임무지역이었다. 이곳에 군인 같은 건 없다고,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카르젠은 누가 뭐라 해도 블리스카의 단원이다. 스스로를 아직 그리 여기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강박이라고 했다. 카르젠을 안쓰럽게 여기며 말했다. 그러나 카르젠이 보기에는 위험을 염두 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쏘다니는 이들이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도시였다. 카르젠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카르젠은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갈 길을 정해야 했다. 소녀의 말대로 오염지역에 가서 일을 거들 수도 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이곳에 대해서 알지 못 하니 고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알고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곳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카르젠은 고집이 질길지언정 고민을 길게 끄는 이가 아니었다.

 

내일은 오염지역으로 가는 길을 알아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카르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어서.

 

텅 빈 골목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카르젠은 벽에 기대어 제복을 한번 꺼내들었다. 손에 익은 재질이 닿았고 흰 천이 후드득 풀렸다. 옷단에 아로새겨진 금빛 파도 무늬가 쏟아지는 모래처럼 반짝였다. 매캐하고 마른 먼지 냄새가 훅 올라왔다.

 

옷을 손에 들고 보는 건 오히려 어색했다. 항상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 카르젠의 부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카르젠을 그것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상자에 넣고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둘 것이다. 망가지거나 헤지지 않도록.

 

평생 그 단체를 잊을 수 없기에. 간단히 지워낼 수 없기에.

 

 

 

“저거 비행이 이상한데?”

누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안드로이드가 눈가를 두드리며 시각센서를 조절했다.

“어? 부엉이다.”

“부엉이?”

“부엉이가 대낮에 왜 돌아다녀?”

“확실히 이상하네.”

“오염에 노출 되어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럼 잡아서 치료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이지?”

“문제는 저걸 어떻게 잡느냐는 건데......”

 

구 안드로이드들이 제각기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일을 진행하였다. 카르젠은 그 사고방식이 신기하기도 하고 와 닿지도 않아서 지켜만 보고 있는 일이 잦았다.

 

“포획용 드론으로 낚아채자.”

“드론 그거 망가졌다.”

“아니 어쩌다가?”

“저번에 사슴 잡다가 망가졌잖아.”

“수리는?”

“요청은 했는데 아직 안 된 모양이더라.”

“야, 그물 가져와 봐.”

“상공 10미터 위에 있는 건데?”

“저것도 지상에 내려앉을 때가 있을 거 아니야.”

“저 부엉이 꽁무니를 평생 하루 종일 쫓자고?”

“그 문제는 둘째 치고 저거 나는 거 보니까 조만간 호수에 추락할 것 같다.”

“아, 그럼 어쩔 건데? 내버려 둬? 그럴 순 없잖아?”

“......내가 한번 해보겠네.”

 

카르젠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안드로이드들의 시선이 쏠렸다.

 

“진짜?”

“저걸 어떻게 잡으려고?”

 

카르젠은 창을 꺼내들었다. 한 안드로이드가 기겁하면서 붙들었다.

 

“카르젠! 우리 목표는 저걸 무사히 포획해서 치료하는 거야! 알지?”

“자네...... 내가 부엉이를 창으로 맞추겠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그런 짓은 안 하네. 포획해야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창에 그물을 달아서 위로 살짝 빗겨가게 던져 보겠네. 그물만 던져서는 저 위까지 닿지 않을 테니 말이야”

 

다른 안드로이드 몇몇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만 되면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다른 수가 없기도 하잖아.”

“문제는, 진짜로 부엉이 안 맞추고 잡을 자신 있어?”

“해보겠네.”

“으아, 정말 하려고? 그거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아니야? 동물들은 부품 교체 식으로 간단히 치료 못 해. 알지?”

“잘 알고 있다네.”

 

그 안드로이드가 불안해하면서 카르젠의 팔을 놓았다. 다른 안드로이드가 잽싸게 창에 그물을 달아놓았다. 풀려난 카르젠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나며 부엉이의 비행을 눈으로 쫓았다. 신중하게 부엉이의 높이와 거리와, 창의 궤도를 계산했고 창을 들었다. 사살도 피해도 입히지 않으려니 신경 쓸 것이 많았다. 곧 창을 곧게 쥐며 자세를 잡았고 창을 던졌다. 창은 포물선을 그리며 부엉이의 위쪽 허공을 스쳤고 이어서 창에 달린 그물이 부엉이를 낚아챘다. 구 안드로이드들은 환호하며 평지를 달려 나갔다. 누군가 부엉이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모두에게 보여주듯 들어올렸다. 덕분에 부엉이가 푸드덕대며 깃털이 날리고 그 기기가 부리에 쪼이는 것도 모두에게 보였다. 보던 이들은 깔깔 웃었고 그 옆에 있는 이들은 황급히 붙잡아 케이지에 넣으려고 했지만 부엉이가 거세게 파닥거리는 통에 쉽지 않았다.

 

카르젠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짓에 그 사이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51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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