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을 잘 하는 사천당가의 독녀 - 외전(1)
가잘독 본편시작 이전 시점의 외전(당가시점)
1회:
전체:
다음편 쓰기 어려워서 씀
*한자작문은 야매(아마 일본어체)
당잔이 눈을 떴다. 익숙한 향 냄새가 났다. 당가의 의원들이 진통효과를 위해 주로 피우는 약재의 냄새다.
그는 채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 풍경을 보니 당잔이 누운 곳은 그 자신의 침상이었다.
몽롱한 와중에도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니, 그의 곁에 앉은 누이 당소소가 당잔을 빤히 째려보고 있었다.
당잔은 그제서야 자신이 독공을 수련하던 도중 독에 못 이겨 기절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분명 이정도는 버틸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니? 다음엔 버티지 말고 그냥 도망쳐."
"누님."
"애초에 십중팔구 도망칠 거 다 염두에 두고 시키는 훈련인데 너 혼자서 무식하게 다 버티면 어떻게 해?"
독공 훈련을 마치고 오거나 중간에 실신한 자들을 숱하게 살펴온 당소소는 알 수 있었다. 당가의 독공 수련은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 따위 고려해서 설계한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거나 나가 떨어지면 그저 예상 안의 일이고, 혹여 전부 다 버텨내면 드디어 당가를 빛낼 인재가 탄생한 것이라 여길 터이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독에 대한 내성의 경지가 이후 구사할 수 있는 독공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득보다 실이 많은 방식은 아닐까?
당소소는 문득 든 의문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당잔의 손가락에 침을 더 놓아주었다. 지난 여름만 해도 그녀 못지 않게 희었던 당잔의 손가락이 독으로 인해 검디 검었다. 마치 먹에 담갔다가 빼낸 것 같았다.
"손 끝을 보니 이 집안 무인이 다 되었네. 소가주 자리라도 노리고 있는 거야?"
"제가 무슨... 그보다 누님, 보호구를 쓰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다간 중독이... 윽,"
당잔이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신음하며 쓰러졌다. 누이가 그에게 화를 낸 이유가 있었다. 생각보다 부상이 깊었다.
독공에 당한 자나 독공을 수련하며 독을 뒤집어쓴 당가인들을 치료하는 의원들은 보통 중독되지 않기 위해 두꺼운 보호 장구를 착용한다. 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의복을 껴입는 것은 물론 몇겹의 복면위에 면사를 쓰고, 장갑을 낀다.
그러나 당소소는 검은 장갑 외엔 어떤 보호구도 없이 평소의 차림 그대로였다. 게다가 당잔이 거친 수련은 다른 때보다 더욱더 많은 독을 뒤집어쓴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당잔이 뒤집어 쓴 독을 닦아내고 그를 간호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의식을 찾으니 점점 확실히 느껴졌다. 독을 처리하기 위해 기운을 돌리며 내뱉는 규칙적인 호흡, 살짝 찡그린 얼굴. 분명 독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소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도 무인이야. 이 정도 독은 견딜 수 있거든? 당가인들이라면 너처럼 수련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내성이 있는거 알잖아."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저 보곤 무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누님 자신은 왜...!"
"혼날래? 환자 주제에 어디서 의원을 걱정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죠. 누님도 이 독의 내성을 기르려는게 아닌 이상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위험한-"
당잔이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잇지 못하고 헙 입을 다물었다. 속내를 제대로 짐작 당한 당소소의 눈빛이 그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당잔에게 예리한 살기가 겨누어졌다.
"말 조심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리하는 건 제가 아니라 누님 아닙니까?"
"너, 어디서 누님에게…."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누님이 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다가 자칫 중독되기라도 하면 들킬 수 있단 말입니다. 당잔이 작게 속삭였다.
"……."
침묵하던 당소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깜빡 잊었어. 자다가 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챙겨 나오다가 보호구를 두고 온 거야."
"누님…."
"깜빡 잊었다고. 못 알아들어?"
"……잊은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허술한 핑계에 잠시 침묵한 당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안심한 당소소가 곁에 있는 차를 마셨다. 찻잔에서 진통초와 같은 냄새가 훅 풍겨왔다. 그의 누이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지막이 물었다.
"너는 못마땅하거나 화가 나지 않니?"
"예?"
"당가의 가장 중요한 규율을 거스르려 하고 있잖아. 일이 커지면 네게도 해가 올 수 있는데."
당소소가 어릴적 자신에게도 당가의 무학을 전수해달라는 요구를 한 것은 꽤 오래간 당가 내에서 심심찮게 회자되는 이야기가 되었다.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맹랑하다, 이상하다는 평가가 심심찮게 들려왔었다. 태상장로들을 비롯하여 충분한 벌을 받지 못했다며 분을 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보다도 의식하고 있을 당소소는 그러고도 자신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독의 내성을 배우려 하고 있다.
지금껏 누이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은 당가의 무학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지?
대체 무슨 의중으로?
당잔은 의문이 들지 않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
"……칠 일 후 한번 더 독공 수련이 있습니다. 그 날도 누님 신세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도망치느니 기절하는게 성미에 맞습니다. 시간은 밤중이 될 것 같습니다."
"잔아."
"저도 압니다. 십수년 전 그 일로 온 당가인들이 입을 모아 누님을 비난했었죠. 그러니 나 하나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너, 그러고도 나를 돕겠다고,"
당잔이 누운 채 말을 이어갔다.
"제가 받은 가르침에서 말하길, 무인은 어느 곳에서나 날 수 있다 했습니다. 거지들은 물론 가장 미천한 곳에 있는 이들도 무학을 원하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그 의지의 발현이 '무'이고, 누구도 뭐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회를 주지 않는 가문의 방침에 반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누님이 스스로 만든 기회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아요. 누님이 가문의 도움은 커녕 핍박을 견디며 배워온 무공을 헛되이 유출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단지 그 뿐입니다."
"진심이야?"
"예. 잠시 누님 걱정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중독으로 쓰러지지 않게 몸을 잘 살피는건 사실 저보다도 누님이 더 잘 할 일이죠. 그리고 뭐, 여기가 누님이 독에 내성 조금 기른다고 무너질 집안이 아니잖아요."
"…잔아,"
당소소가 당잔의 손을 그러쥐었다. 장갑 아래로 색깔을 감춘 손이었다.
"엽비(葉匕)가 만신창이가 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몸에 꽂혀 있던 겁니다."
당잔과 당패, 당군악 셋만이 가주전에 모인 어느 날, 당패가 당군악에게 보고를 올리며 피가 묻은 대나무조각을 탁자 위에 올렸다. 막대처럼 긴 대나무 조각에는 소소의 이름과 함께 칼로 새긴 단 한 문장이 있을 뿐이었다.
'保護無庸'(보호무용, 지킬 필요 없다)
"소소가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가문의 보호를 거절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모양입니다."
"필체를 보니 소소의 것이 맞군."
당군악이 한숨을 쉬었다.
"이로써 당채와 당호에 이어 엽비도 당했습니다."
"이 정도면 기재로구나."
진지한 얼굴이 된 당패가 당잔을 가리켰다.
"가주님, 잔이를 보내는 것을 제안합니다. 잔이는 소소와 가장 가까이 지내온 편이니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입니다."
당군악이 당잔에게 물었다.
"잔아. 너는 어떠냐. 소소에게 가고 싶으냐?"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당잔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호했다. 당패가 얼굴을 살풋 찡그렸다.
"가주님께서 소소에게 당채와 당호를 보냈을 때에도 너만은 가지 않겠다 했었지. 그 이유를 물어야겠다."
당잔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강호인이 된 누님은 절대 저를 봐주지 않을테니까요."
당잔은 그때 자신의 말을 듣고 제 누이가 지었던 표정을 줄곧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 날 그녀가 그의 손을 그러쥐고 했던 말도.
- 잔아,
- 사정을 봐주어 고맙다. 하지만 나중에 와서 나를 막거나 이 일을 발설하면...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린다.
'어우.'
당잔의 어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한편, 당패는 그 말이 그저 농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무위만으로 소가주 자리를 노려봐도 된다는 말이 나오는 당잔이 진심으로 당소소를 두려워할 리 없다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일거라 생각하며 당군악의 얼굴을 돌아보았지만, 의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무표정 뿐이었다.
"말장난은 삼가라. 형님으로서는 받아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가주님, 차라리 저를 보내십시오. 제가 조용히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아니, 둘 중 아무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가주님. 하지만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안-"
"이제 누구도 보내지 않겠다."
"네?"
당군악이 사색이 된 당패에게 물었다.
"패. 소소가 중경지부의 하오문도들을 협박했다지? 지부장과 비무도 하고."
"...예.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종된 사천당가의 독녀라는 정보를 누구에게도 주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냥 죽은 사람이라고 하라고..."
"당채와 당호의 소매도 탈취하고?"
"...예, 당채는 장포를 통째로 빼앗겼습니다."
당군악이 옅게 미소지었다.
"그정도면 자신의 몸을 지키기엔 충분하겠군."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잃은 적 없는 아들들보다도 잃었다 되찾은 딸 하나가 더욱더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군악이 느낀 감정이었다. 그 반응에 당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소소를 찾았는데도 데려오지 않으시겠다는-"
"소소는 자신의 삶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
"그리고, 내게는 죽었다가 살아난 소중한 여식이기도 하지. 그 아이의 결단을 해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바깥에 있길 원하는 아이를 다시 이 곳으로 데려와 가두는건 아비로서도 힘든 일이다. 가끔 잘 지내는지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가주님…!"
"소소를 잃고 나서 내가 가장 원망한 이가 누군지 아느냐?"
고요한 가주전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잔과 당패 모두 짐작이 닿아 떠오르는 하나의 답이 있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나 자신이었다."
"……가, 가주님."
"내게 가주다운 힘이 있었더라면, 내가 가주로서 온전히 가문의 모든 것을 관장할 수 있었더라면, 내가 모르게 소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리고 지금 너희들이 내 앞에서까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지도 않았을테고."
가주로서는 해서 좋을 것이 없는,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군악은 망설이지 않았다. 참척의 아픔에 비하면 이깟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침없었다.
"그날, 피로 젖은 소소의 신을 받아들던 때에, 뼈저리게 느꼈지. 나는 아비로서도 그닥 훌륭하지 못하다고."
당패와 당잔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고요하던 당가의 밤이 불처럼 붉었던 날. 당가에게 향하던 '독랄'이라는 수식어가 무엇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던 날. 그것을 겪은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말로 형언하기도 어려운 사건이었다. 누이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동분서주하던 나날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뿐인 여식을 지켜내지도 못했는데, 내가 마음대로 잡아와 묶어둘 명분이 어디있겠느냐. 그러니…."
"가주님."
"비영의라고 했던가."
몸을 떨며 누님이 정녕 살아있었다고 보고하던, 당호와 당채가 읊은 당소소의 별호였다. 그가 모르게 태어난 이름의 음절들을 곱씹던 당군악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날 위에 맺힌 독보다도 검고 차디 찬 목소리였다.
"지금은 그 이름으로 살도록 두겠다."
잠시, 아주 잠시이다. 그가 덧붙였다.
"소소는 언젠가는 당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때가 지금은 아닐 뿐이다. 그때까지는 소소가 중경에 있다는 것을 장로들도 모르게 해라. 그게 이제부터 너희가 할 일이다."
"예."
당패와 당잔이 고개를 숙였다.
- 카테고리
-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