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ific Esqualo

2021 중국행 저속선

made in heaven by 살
7
0
0

허스트와 테베가 방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너나할 것 없이 심히 지친 상태였다. 비와 바닷바람에 흠뻑 젖은 몸은 쿡쿡 쑤셔왔고,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걸을 때마다 다리 사이로 감겨들어 걸음을 유난히 무겁게 했다. 진심으로 무도회를 즐길 생각은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이 날이 나름 평화롭게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던가, 일련의 추격을 거치고 나니 고작 몇 시간 전 즐겼던 무도회가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기분 좋은 소음이 들려오던 선내는 유혈사태가 있었던 탓인지 돌아온 이래로 줄곧 어수선하고 기분 나쁜 침묵이 감돌았다. 침대에 앉아 부어오른 발을 주무르며 테베는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끔뻑였다. 의무실에서 목이 쉴 정도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허스트는 지친 것인지 말이 없었다.

소란의 끝에 군중을 헤치고 달려나온 것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친 것은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녹아서 사라졌다던, 혹은 갑판에서 몸을 던졌다던,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던 그 금발의 사나이……. 처음 보았을 때는 낯설기만 하던 그의 얼굴은 두 번째 만남에서는 외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막연한 착각을 일으켰다. 하지만 테베가 킬데어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고작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태평해보이는 그 남자 앞에서 울거나 창백하게 질리거나 공격적으로 질문을 퍼붓는 일행의 모습을 보며 그 또한 죽은 지 수 년은 지났고, 누구도 그 죽음이 정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했을 뿐이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알렉 뉴먼은 아무래도 보타이가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일행들을 지나쳐 달리던 그 남자의 옷차림이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테베는 처음으로 비극의 밖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했다. 딱 허스트의 몸보다 조금 더 넓게 열린 문틈으로는 그녀의 앞에 누가 서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대신 초라하게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부른 그의 이름은 그 날 하루종일 들어오던 것이라. 악몽처럼 뻗쳐와 그녀의 왜소한 어깨를 쥐던 손이 더 젖을 수 없을 만큼 흠뻑 물을 머금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잿빛 수녀복에 딱 그 정도 크기의 물자국이 남아있었던 것도. 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날 밤이후 한층 더 넋 나간 표정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가끔 테베가 손을 잡으면 차갑고 부드러운 손끝으로 그녀의 손을 한 번 맞잡곤 했다.

*

축축하고 끈적거리던 몸을 씻어내리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았다. 테베와 허스트는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옷을 갈아입은 후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어둑한 선실에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워있으면 차츰 정적에 귀가 익숙해지며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배의 갑판과 옆면을 쉴새없이 두들기는 빗줄기와 파도 소리도. 테베는 잠시 그 침묵에 순응해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불쑥 입을 열었다.

“허스트, 자니?”

등 뒤에서는 한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내일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유달리 말이 많았던 탓에 결국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숙소 바닥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스트는 그 남자가 그렇게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 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그보다 더한 것을 엿보았거나. 그 이후로 그녀는 내내 가느다란 목소리로 아무 의미 없는 계획을 늘어놓았고, 일행들은 두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것이다. 

계획, 하고 되묻기에는 그녀의 계획이 그렇게 체계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 이유를 너무 깊게 파고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 그녀는 몇 년 전 어떤 끔찍한 경험은 그 파편을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테베는 그이가 이걸 좋아했는데, 그이가 자주 해주던 것이었는데 하고 시답잖은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해졌다. 끝나고 나면 조금 공허해지더라도. 테베는 눈을 감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있지, 허스트. 그 남자랑 사이좋았어?”

“몇 년 전에 임무를 함께 했었어요……. 그렇게 살가운 사이라고는…….”

“그 사람은 네가 무척 반가운 눈치던걸.”

정말 그랬다. 겁먹었다고 해도 좋을 허스트와 달리 그의 표정은 맥없을 정도로 쉽게 풀렸으니까. 그 물음이 그녀에게 어떤 감상을 가져다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또한 그 기억이 마음에 드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동안 작은 숨소리를 내며 말이 없던 허스트가 뒤늦게 변명하듯 긴 말을 늘어놓았다.

“임무지에 갔을 때… 의뢰인이 사흘이 넘게 연락이 두절되었던 적이 있어요. 별다른 지령이 없어서…… 며칠 더 대기하다 하버빌로 돌아올 예정이었거든요…….”

건조한 목소리에 차츰 옅게 웃음기가 배어나왔다. 테베는 몇 년 전 지금보다도 젊었을 허스트를 상상했다.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나이다. 애초부터 대화할 상대는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 허스트의 회상은 느리고 길게 끊임없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손도 대보지 못했을 비싼 음식과 음료, 침대, 더블 스위트룸의 발코니와 하얀 난간… 파도소리… 호텔의 교향악단이 연주하던 조화로운 노래들…….

“그 때 알렉이 제게 춤을 가르쳐줬어요… 저는 사교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돌연 그녀가 허공을 떠다니는 것처럼 가볍게 허밍했다. 그 멜로디가 얼마나 느리고 불규칙한지, 한참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그게 탱고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불안한 음정으로 길게 지속되던 노래는 시작만큼이나 초라하게 끝이 났고, 보다 일찍 맞이했어야 할 고요가 찾아왔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허스트가 작게 훌쩍였다. 빗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테베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수마에 몸이 잠겨 들어가게끔 두었다. 귀가 먹먹해지며 차츰 또렷해지는 꿈의 윤곽 안에서 테베는 손이 가는대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뒤의 스탠딩 바에서는 어떤 금발의 남자가 바체어에 걸터앉아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허스트의 기억 속에서 재조립된 그 남자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배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어딘가 다정하고 인간적이었으며, 특히 웃을 때면 콧잔등을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제 계획은 이래요, 테베…….

일단은… 알렉에 대한 생각을 그만둘 거예요. 리들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고,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든, 잠깐이나마 살아있었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대신, 그를 위해 기도를 해야겠어요. 그가 더는 고통스럽게 이승에서 헤매지 않게…….

그리고 만약 무도회가 한 번 더 열린다면, 알렉이 가르쳐준 춤을 보여드릴게요. 

알렉은 제가 배움이 빠른 편이라고 했으니까…….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