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9화
가지 않은 길
“이야,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두 분이 남매지간이셨다니.”
“….”
사각사각, 능청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월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린은 조용히 사과를 깎았다. 얇고 길게 나오는 붉은 껍질을 보니 실력이 제법이었다. 그린이 한입 크기로 과육을 썰어 담은 접시를 제노에게 건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제노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갑자기 일이 생긴 난천을 대신해 몬스터볼을 전해주러 온 그린은 처음엔 제노의 침대에 반쯤 올라탄 월로를 보고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가, 난천과 똑 닮은 얼굴과 제노의 다급한 만류에 들어 올렸던 주먹을 내렸다.
현재 체육관 관장직을 맡고 있는 그가 사고라도 쳤다간 큰일이었다. SNS에서 화제라도 되어봐, #상록체육관_논란 #상록체육관_관장 #관장_그린_논란….
순간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픽, 쓰러지는 제노의 상체를 본 그린이 놀라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렇게 월로는 병실 바닥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후 제노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그린, 이쪽은….
반갑습니다, 난천 님의 먼 친척이에요.
… 응, 그렇대, 월로 씨, 여긴 그린이에요.
중간에 월로가 이쪽이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이냐는 개소리를 하였으나, 그린이 다시 주먹을 들기 전에 제노가 남매 관계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 상태다. 제노가 깨어났다는 정보를 들은 것인지 그린이 가져온 봉투 안에는 간식거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사과를 꺼낸 그가 조용히 제노를 먹이는 데 집중했다. 월로는 눈치도 없이 방싯방싯 웃으며 옆에서 같이 받아먹었다.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제노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입안으로 사과를 밀어 넣었다.
“그나저나 겉으로만 봐선 정말 모르겠네요. 두 분, 하-나도 안 닮으셨어요!”
“불만 있냐?”
피가 안 섞였으니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그린은 월로가 하는 말은 다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세모나게 뜨고 과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가 병원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그린이 월로를 찌르더라도, 살인죄는 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교도소에 면회를 가고 싶진 않다. 제노는 그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너 바보야?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당연히 보호자한테 연락이 갔지.”
제노가 열심히 사과를 오물거리던 것을 멈췄다. 오 박사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신다는 말이었다. 관동을 떠나 몇 년간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애한테서 들려온 소식이 사고로 입원했다는 것이니, 연구실이 발칵 뒤집어졌을 게 뻔했다. 나중에 한 번 전화드려야겠다. 속으로 생각한 제노가 계속해서 물었다.
“아니, 그래서 네가 신오에는 왜 있냐고.”
그 말에 그린이 과도를 탁, 내려놓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시선에 제노가 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네가 쓰러진 이 주 동안 난천 씨가 혼자 너를 돌봤다고 생각해? 그렇게 바쁜 사람이?”
“… 그렇게 따지자면 너도 바쁘지 않아?”
“체육관은 짐 트레이너들에게 맡기고 왔어. 지금은 병원 근처 숙소를 쓰고 있고.”
어쩐지 찬장에서 과도랑 접시를 꺼내는 손길이 너무 능숙하더라. 그제야 모든 의문이 해결된 제노가 다시 열심히 사과를 씹었다. 그만 깎아 이놈아, 이 정도 먹으면 백설 공주가 아니어도 죽겠어. 먹기 싫다는 의미로 밍기적거리자 곧장 그린의 잔소리가 쏘아졌다.
“넌 좀 더 먹어야 해.”
“저도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도 님.”
“이도가 아니라 제노.”
“그치만 이도 님께선 눈을 뜨신 지 얼마 안 된 참이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제노.”
“아참, 이도 님, 이건 코기토 님께서 보낸-”
“제노라고! 제노! 대체 누구야 이도란 놈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난 그린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월로가 제노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도 님은 이도 님인 거예요, 그렇죠?”
이러니까 꼭 둘만의 애칭 같네요. 사르르, 눈웃음을 지은 월로가 은근슬쩍 제노의 손을 잡아 왔다. 그것으로 그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
다시 일어난 소란은 병실로 들어온 난천과 코기토에 의해 중단되었다. 제노가 한 공간에 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터, 터진다, 이거 터진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듯 그린이 제노의 귓가에 속삭였다.
“뿌요뿌요였으면 벌써 터졌어. 저 자식, 먼 친척인 거 맞아? 완전 판박이구만.”
“….”
제노가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뜻으로 그린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그가 과하게 엄살을 부렸지만, 무시했다. 난천이 투닥거리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제노, 이쪽은 코기토 씨.”
“다시 보게 되어 기쁘구나.”
제노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코기토의 말과 제노의 반응에 난천이 놀란 눈을 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코기토 씨도 그렇고, 월로 씨도 그렇고. 제노랑 이미 서로 아는 사이신가 봐요?”
“아는 사이기만 하겠어요? 이도 님과 전 아주 각별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래, 목숨이 오갈 뻔한 것도 각별하다면 각별한 거지…. 제노가 황당해하는 사이 그린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저 두 사람은 왜 데려오신 거죠?”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에 조금 망설이던 난천이 입을 열었다.
“제노, 저번에 나에게 부탁했던 일 기억해?”
“제가 부탁한 거라면….”
“공신의피리를 찾는 일 말이야.”
그 말에 제노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 확연한 움직임에 그린은 예민하게 모두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대 신오지방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먼 친척이 계신다고 했잖아? 그게 월로 씨거든. 네 얘기를 듣고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나 싶어서 여쭤봤어.”
한 호흡 쉰 난천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랬더니 얼마 뒤에 찾았다고 하시더라고. 그 피리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
“바로 코기토 님이셨답니다~”
짜안! 월로가 양손으로 코기토를 가리키며 귀여운 효과음을 냈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천계의피리가 어떻게 되었나 했더니, 공신의피리 형태로 코기토가 가지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정령플레이트를 도마로 쓰던 분이시니까.
잠시 납득하던 제노는 다시 의문을 가졌다. 잠깐, 그런데 왜 과거형이지? 잠시 생각하던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럼 지금은 설마, 설마…. 그 절망스러운 얼굴을 본 코기토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는 데 쓰다가, 월로가 준 막대와 바꿔버렸단다.”
월로가 음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노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 그냥 그린이 칼로 찌르게 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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