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샛길 하나
“미안해, 내 고집 때문에 이런 곳에 머물게 되어서.”
킁, 코를 한번 훌쩍인 제노가 고개를 저었다.
실컷 내부를 조사한 난천과 유적을 나왔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시간이었다. 하늘에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수색하던 토게키스가 두 사람의 모습에 서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지면에 착륙한 토게키스가 무척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천은 토게키스에게 5일의 시간을 추가로 줄 것을 부탁했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토게키스에게 제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건 말릴 수 없었다. 한숨 섞인 울음소리를 내뱉은 토게키스가 혼자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별똥별처럼 까만 하늘을 유영하는 그 모습을 두 사람이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
“… 저, 그래서 저희는 어디서 자나요?”
유적 안에서 자요? 그 질문에 난천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제노는 허망한 눈으로 토게키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냥 나도 데려가달라고 할걸….
두 사람은 다행히 근처에 동굴 하나를 찾았다. 이걸 찾아내느라 한카리아스가 꽤 고생을 했다.
제노는 포켓몬들이 모아온 가지를 한곳으로 모았다. 이렇게 추운 상황에서 불을 피우는 건 처음이었다. 나뭇가지들의 상태를 살피던 제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갈 꺼내기 시작했다. 휴지와 보습크림이었다.
난천이 다가와 제노가 하는 행태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제노는 보습크림을 듬뿍 떠 휴지 조각에 발랐다. 그리곤 거기에 대고 열쇠 정도 크기의 막대기를 긁기 시작했다.
“그건 뭐야?”
“파이어스틸이에요. 편할까 싶어서 한번 사봤어요.”
슥, 슥, 몇 번 긁어내자 불꽃이 튀더니,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오오, 두 사람은 감탄하며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냥 불꽃 타입 포켓몬을 한 마리 데리고 다니는 게 낫지 않아?”
난천의 물음에 제노는 현재 오 박사님의 연구소에 있을 윈디를 떠올렸다. 설산이니만큼 데려올까 생각했다가 역시 오 박사님 곁을 지키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만뒀는데,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부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으며 도리어 물었다.
“혹시 난천 씨는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
“….”
당당하게 돌아오는 답에 제노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쪼그려 앉아 불을 쬐었다. 조용히 몸을 데우던 제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난천 씨의 화강돌, 혹시 도깨비불은 배운 적이 없나요?”
“….”
난천이 다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늦은 저녁으론 만약을 위해 챙겨 왔던 비상식량을 먹었다. 물만 부어도 데워진다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직접 한 요리보다야 당연히 그 맛이 떨어졌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애초에 이것저것 가려먹을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기로 한 토게키스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추측하며 제노가 리조토와 죽 사이의 어떤 식감을 가진 식사를 입에 집어넣었다. 중간중간 씹히는 고깃덩이가 제법 큼직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자리에 누웠다. 각자 침낭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웃다가, 내일 계획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
“….”
그러니까, 난천 혼자 말이다. 난천의 고른 숨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제노가 몸을 뒤척였다. 이상하게 울렁이는 기분에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이렇게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것도 고문이라고 생각하던 제노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 몰라 수통에 담아온 술을 가방에서 꺼내는 순간 불침번을 서던 루카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
“….”
루카리오는 말이 없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한 제노가 계속해서 움직였다. 가디안이라면 몰라도 루카리오에게 쫄 필요는 없었다. 크하, 뚜껑을 열고 몇 모금 마신 제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
루카리오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결국 빤히 쳐다보는 제노의 시선에 못 이겨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눈이 내리는 동굴 밖을 바라보는 루카리오의 등이 어쩐지 우울해 보였지만, 제노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정말 술 덕분인지, 아니면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몰라도 금방 의식이 희미해져 왔다.
*
다음 날 아침. 모든 생물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듯 밤새 내린 눈이 사위를 소복하게 덮었다. 태양빛을 반사해 새하얗게 빛나는 눈밭 위로 바람이 일고, 토게키스와 보급품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푹, 푹, 눈 위로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다가간 두 사람이 보급품 상자를 열어보았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뚜껑을 다시 덮자 포켓몬들이 이송을 도왔다. 수고했어, 난천이 그렇게 말하며 토게키스를 쓰다듬자 손에 한껏 머리를 부벼왔다. 토게키스는 실컷 애교를 부리곤 다시 돌아갔다.
크기도 평균보다 크고, 설산을 쉬지 않고 왕복할 만큼 체력도 좋다. 대체 난천 씨는 어디서 저런 포켓몬을 빌려왔을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던 제노가 난천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갔다 올게요.”
“정말 괜찮겠니?”
“네, 포켓몬들도 있고, 여차하면 루카리오가 찾으러 오겠죠.”
어젯밤, 난천이 유적을 조사하는 사이 주변을 탐색하러 가겠다고 말해뒀다. 허리춤에 찬 몬스터볼을 확인한 제노가 바라보자 루카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천의 곁에 두고 가기로 한 루카리오는 파동포켓몬. 제노의 파동을 탐지해 위치를 찾아낼 수 있으니 길을 잃어도 문제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제노가 눈길을 걸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근처에 강이나 호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제노는 두고 온 루카리오를 제외한 포켓몬들을 꺼냈다. 피카츄와 이브이가 튀어나오자마자 눈밭 위를 굴러댔다.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피-!”
울음소리로 답한 두 포켓몬이 경주라도 하듯 앞다투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 말 알아들은 거 맞냐고. 작게 한숨을 내쉰 제노가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시야에 두 마리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들이 혼나기도 전에 제 발로 돌아올 리가 없는데, 뭐지. 제노가 유심히 둘을 살폈다. 뭔가에 쫓기는 듯 절박한 달음박질. 발 아래에서 점점 커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두두두두, 피카츄와 이브이의 뒤에서 이는 커다란 눈먼지 사이로 미친 듯이 달려오는 메꾸리의 모습이 보였다.
…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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