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샛길 하나
“누가 먼저 그랬어. 빨리 솔직하게 말해.”
“피.”
피카츄와 이브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서로를 가리켰다. 하아…. 제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선 가디안과 샤미드가 쓰러진 메꾸리를 돌보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달려오는 메꾸리를 막을 수 없다 생각한 제노는 가디안에게 방향을 비틀 것을 지시했다. 가디안의 사이코키네시스로 달리는 궤적이 조금 틀어진 메꾸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커다란 나무였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나무 기둥이 흔들리면서 위에 쌓여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간 충돌한 채로 정지해 있던 메꾸리는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제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무 근처에 있다 봉변을 맞은 샤미드가 푸르르, 몸을 털어 쌓인 눈을 털어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후 나무를 들이받아 부은 메꾸리의 이마에 상처약을 사용한 제노는 쓰러진 메꾸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 옆을 지키며 피카츄와 이브이를 추궁했다. 결국 절대 먼저 자수하지 않은 두 포켓몬은 나란히 혼이 났다.
“피카츄, 은근슬쩍 내릴 생각 하지 말고 손 똑바로 들어.”
피이. 피카츄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불만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스읍, 입으로 아보 소리를 낸 제노가 눈을 세모나게 뜨고 노려보는 사이 그에게로 다가온 샤미드가 제노의 발목 근처를 살살 긁었다. 메꾸리가 눈을 뜬 것 같았다.
천천히 정신을 차린 메꾸리가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약한 시력 대신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는 메꾸리에게로 제노가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어 털이 곤두선 메꾸리의 콧잔등을 살살 쓰다듬는다.
“미안해. 우리 애들이 좀 철이 없거든.”
피카츄와 이브이가 제노의 뒤를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사과하는 것 같았다. 킁, 한번 콧김을 내뿜은 메꾸리가 서서히 뒤돌더니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손 내리라고 한 적 없어.”
그 말에 피카츄가 다시 양팔을 바짝 올렸다.
*
물 냄새를 감지한 샤미드를 따라 한참 걸음을 옮기자 곧 탁 트인 장소가 나타났다. 울창한 나무들이 사라지고 한적해진 자리에 호수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제노가 주먹으로 얼음 위를 톡톡 두드려보았다. 들리는 소리를 보아 몇십 센티는 얼은 듯했다.
“어때?”
제노의 물음에 샤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노가 얼음 위로 발을 딛자마자 이브이가 신이 나 그 위로 달려갔다. 따라가던 피카츄가 발을 헛디디더니 엎어진 그대로 주욱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발바닥 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차이가 큰 것 같았다. 키득거린 제노가 피카츄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아가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투명한 얼음 아래로 짙은 색의 물이 보였다. 호수가 얼마나 깊은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잠시 물 위를 걷는 기분을 만끽한 제노가 물었다.
“저녁은 카레 어때?”
포켓몬들이 제각각 울음소리를 냈다. 어제 저녁을 포켓몬 푸드로 대충 때워서 그런지 제자리에서 만장일치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폴짝폴짝 뛰던 피카츄는 이번엔 뒤로 자빠지며 엉덩이를 부딪히기까지 했다. 이브이가 그 모습을 비웃자 순식간에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누군 추워 죽겠는데, 참 체력도 좋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제노가 가디안의 도움을 받아 얼음 위를 벗어났다.
물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온 거였는데, 이래선 눈을 녹이는 쪽이 더 쉬울 것 같았다. 슬슬 돌아갈까 생각하던 그때, 정적인 호수를 바라보며 하얀 입김을 내뿜던 제노의 얼굴로 갑자기 눈뭉치 하나가 날아들었다.
후두둑, 얼굴에 묻었던 눈덩이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신이 나 키득거리는 피카츄와 이브이였다.
“… 가디안.”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에서 완전히 눈을 털어낸 제노가 손끝으로 두 포켓몬을 가리키며 가디안을 부르자, 사이코 에너지로 공중에 뜬 눈이 순식간에 동그란 형태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피카츄와 이브이가 기겁을 하며 각자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지만, 이미 늦었다.
그날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까지 제노의 포켓몬들은 추위를 한껏 만끽했다.
*
“- 그래서 늦어졌어요. 죄송해요, 난천 씨는 유적 조사로 고생 중이신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카레가 눌어붙지 않게 저으며 제노가 말했다. 두 사람의 포켓몬들은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저녁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제노의 루카리오는 조금 불퉁한 얼굴이었다. 누구는 유적지에 남아 난천을 보조하며 제노가 언제 돌아올지 파동만 살피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만 빼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나도 조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걸. 그리고 네 루카리오가 큰 도움이 됐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난천의 말에 답한 제노가 감자 하나를 건져 후후 입바람을 분 뒤 살짝 베어 문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걸 보니 완전히 익었다. 후하, 후하, 뜨거운 입안을 급하게 식힌 제노가 그릇에 각자의 몫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제노와 난천의 말에 이어 포켓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특히 눈싸움하느라 체력을 잔뜩 낭비한 제노의 포켓몬들이 그릇에 코를 박고 먹는 사이, 우아하게 수저를 움직이던 난천이 말했다.
“참, 그 얼어붙은 호수, 내일은 나도 같이 가볼 수 있을까?”
“네? 아, 네, 저야 상관없는데….”
유적도 아닌 거길 왜요? 제노가 삼킨 뒷말을 읽은 난천이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그랬잖아? 관동에서 야생 포켓몬들을 상대하며 어떤 필드에서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고.”
“그렇죠…?”
불길하다, 불길해. 제노가 먹던 것을 멈추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반짝거리는 난천의 눈과 마주한다.
“자연이 만들어낸 얼음 필드… 이건 절대로 흔한 기회가 아니야. 이참에 선단체육관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확인해 볼까?”
난천의 볼이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선단체육관의 얼음 필드를 떠올린 제노가 속으로 한숨을 쉬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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